80화
0.01초 소드마스터 80화
정신이 멍하다.
마치 몸이 실에 칭칭 감겨 움직이는 인형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런 답답한 구속도 곧 끝이다.
눈앞에 있는 상대를, 저 아슬란을 죽이기만 한다면······.
푸확-!
“!?”
그런데 분명 방금 전까지 저 앞에 있었던 아슬란이 지금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너 같은 놈은 한 초의 상대도 되지 않는다는 듯,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고 있기까지 했다.
“아-.”
레바노스는 외마디 비명과 같은 기함을 터트리며 몸을 비틀거렸다.
피가 솟구치고 가뜩이나 멍했던 정신이 빙빙 돌기 시작했다.
털썩-.
결국 비틀거리다 제자리에서 주저앉아 버린 그는 피가 솟구치고 있는 목을 손으로 막았다.
다행히 목이 떨어져 나갈 정도의 상처는 아니었다.
레바노스가 태생적으로 갖고 있는 이 빛의 힘으로 치유를 한다면 이 정도쯤은······.
‘왜 치유가 안 되는 거지?’
하지만 지금쯤 치유가 되었어야 할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다.
이 이질적이고 혀에서 시큼한 맛이 나게 하는 무언가가 자신의 치유력을 막고 있는 것이었다.
‘이건······.’
레바노스는 제 손바닥에 묻은 피에 담긴 성스러운 빛의 힘이 갉아 먹히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분명-.
‘어둠의 힘?!’
오직 악마라 불리는 테키나 족속만이 다룰 수 있다는 어둠의 힘.
하지만 그 힘에도 ‘순도’라는 것이 존재한다.
이건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최상급 순도의 어둠이었다.
레바노스는 떨리는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
그곳에는 고고한 자세로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아슬란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볼 수 있었다.
아슬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무시무시한 어둠의 힘을.
자신의 신성력쯤은 간단히 씹어 먹을 수 있는 엄청난 크기의 어둠이었다.
“······.”
그 위압적인 눈동자에 레바노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한계에 치달은 정신은 결국 그 자리에서 끊기고 말았다.
* * *
“대체 저게 무슨······.”
보지도 못했다.
아슬란이 어떤 움직임을 보였는지, 그가 언제 칼을 뽑아 레바노스를 베었는지, 그리고 언제 그 칼을 다시 집어 넣었는지도.
테르카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저 그가 보는 것이라고는 황망하게 쓰러지는 레바노스의 모습뿐.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신성력을 소멸시킬 정도의 강력한 어둠이라-.”
빛이 어둠을 몰아내듯, 신성력 역시 마기를 소멸시킨다.
그것이 천계의 존재라 불리는 사르디엘 족속이 갖는 특별한 힘이었다.
테키나 족속이 유일하게 두려워 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바로 사르디엘일 것이다.
사르디엘의 빛은 테키나 족속의 어둠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눈부신 레바노스의 빛이 아슬란의 어둠에 의해 잡아 먹히고 있었다.
“어떻게 아슬란 저자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악마의 피가 섞이지도 않은 평범한 인간 따위가 신성력을 소멸시킬 정도의 어둠을 다루다니.
“······.”
테르카나는 멍하니 아슬란을 바라보았다.
300년 전 테키나 족속이 끝끝내 대륙을 정복하지 못한 이유는, 모든 종족이 힘을 합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천계의 간섭이었다.
항상 방관만 하던 작자들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전쟁에 난입해 테키나 족속을 몰아내고 그들을 봉인할 수 있는 방법을 대륙의 종족들에게 알려 주었다.
그 압도적인 빛에 의해 어둠이 결국 패배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있다면······.”
아슬란 저자가 어떻게 어둠을 다루는지는 테르카나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저자는 어둠과 빛을 동시에 다룰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아슬란의 어둠은 빛을 능가한다.
이것이 중요한 점이었다.
어쩌면 그의 힘은 저 천계의 빛마저 능가할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가 공격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었군.”
테르카나는 힐끗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 가고 있는 레바노스의 목숨 따위는 이제 안중에도 없었다.
* * *
······죽었나?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있는 레바노스를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이따금씩 꿈틀 거리는 것을 보아 아직 죽진 않은 모양이다.
‘상처가 좀 얕았던 거 같은데.’
찰나의 괴력을 쓰지 않고 오로지 순보로만 레바노스의 목을 베었다.
숙련도 부족인지, 아니면 저 단단한 몸 때문인지 칼이 그리 깊게 들어가진 않았다.
하지만 급소를 베었다는 건 상대에게 치명적이었고, 무엇보다 나는 성 속성에게 데미지 200%를 가할 수 있는 어둠 계열의 능력이 있다.
처음 써보는 능력이었지만, 레바노스에게는 확실히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사기적인 능력 중 하나인 치유 스킬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래도 아직 죽은 건 아니니까.’
확인 사살을 해야겠지.
나는 혹시 놈이 벌떡 일어나서 칼을 휘두를까 두려워 조심조심 하며 천천히 검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다 문득,
‘잠깐만.’
한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얘는 천계 핏줄이잖아?’
내가 알기로 얘 엄마가 사르디엘이고, 아빠가 인간이다.
대체 인간이 어떻게 천사를 꼬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놈 생긴 걸 보면 아빠가 오질나게 잘생겼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방랑자 레바노스라고 하면 음침하게 후드 하나 뒤집어 쓰고 모래 바람을 뒤집어 쓸 거라 생각할 수 있는데, 이놈 별명이 하늘에서 만든 조각인만큼 얼굴 하나는 기가 막히게 모델링이 잘 되어 있다.
‘이놈을 죽이면 이놈 어미가 날 죽이려 하겠지?’
테키나 족속처럼 천계도 대륙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기고 왕래하는 길도 사라졌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천계에서 대륙으로 내려오는 길은 항상 열려 있으나, 그쪽 동네도 지금 워낙 시끄러워서 잘 내려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아예 안 내려오는 것은 아니고 알게 모르게 소수 인원이 가끔 내려오고 있었다.
즉, 레바노스가 죽었다는 얘기를 이놈 엄마 되는 천사가 듣게 되면 날 죽이려고 눈에 불을 켜며 찾아올 수 있다는 것.
‘실제로 인게임 플레이 때도 레바노스 엄마가 나오긴 했었지.’
레바노스의 출생 비밀이 밝혀지면서 그의 엄마가 게임에 등장했던 씬이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계의 천사를 내 적으로 돌릴 순 없지 않은가.
특히 그 여자는 천계에서도 나름 영향력이 높은 사람이라 우습게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럼 이걸 어쩐다?’
레바노스와 첫 만남부터 꼬여 버렸다.
첫 만남에 칼부림이라니.
‘근데 잘못은 이놈이 한 거잖아.’
그러게 누가 칼들고 남의 집 앞마당에 쳐들어 오라고 했냐?
‘죽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안 죽일 수도 없고.’
놈이 언제 살아날지 모른다.
과연 이놈이 일어나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대기사단장님!!”
“아슬란님!”
때마침 아론과 부하들이 내 곁으로 몰려 들었다.
“이자는 대체 누구입니까?”
“엄청난 실력자인 거 같았는데······.”
레바노스와 칼을 섞어 봤으니, 금방 감이 잡혔을 것이다.
상대가 엄청난 실력자라는 것을 말이다.
“레바노스라는 자다.”
“레바노스!?”
“방랑자 레바노스 말입니까?”
“그래.”
그러자 알렉산더가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레바노스의 실력은 가히 엄청 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실제로 방금 붙어 보니 알겠더군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자를 대기사단장님께선 단번에······.”
그것이 트리거가 되어 잠시 고민에 빠져 있느라 사그라 들어 있던 허세가 강렬하게 끓어 올랐다.
거만하게 턱을 올리고,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내게는 그저 하찮은 실력일 뿐이다.”
“······.”
“명성에 걸맞은 실력 발휘를 해주길 바랐는데······ 시시하군.”
그때 아론 허리춤에 있는 수통이 눈에 띄었다.
“그 수통. 물이 남아 있나?”
“아! 항상 아슬란님의 축복을 가지고 싸우고자 많이 준비를 해뒀습니다.”
저 수통 말고도 여분으로 5개나 더 있는 아론이었다.
“······.”
이제 조금 무섭다.
“하나 줘 보거라.”
“예!”
나는 아론에게서 받은 수통 뚜겅을 여러 쓰러져 있는 레바노스에게 부었다.
이놈 엄마 손에 죽나, 아니면 이놈 손에 죽나.
둘 다 개차반 같은 결과라면 한번 도박을 걸어 보는 것이다.
내 쪽으로 유리할 수 있게 말이다.
“읍-!”
혹시나 해서 부어본 건데, 효과가 있다.
놈의 치유력은 빛의 힘과 관련 있지 않은가.
현재 놈을 갉아 먹고 있는 저 어둠을 이 황금물로 밀어낼 수 있다면 금방 회복될 거라 생각했다.
과연 내 예상대로 레바노스는 곧 정신을 차렸다.
“허튼 짓 하지 말고 가만 있어라!”
“그렇지 않으면 베어 버리겠다!”
그러자 아론과 부하들이 그에게 칼을 겨누며 경계했다.
어림도 없는 일이다.
이미 어느 정도 몸을 회복한 레바노스 정도면 이런 위협 따위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나는 맹수의 그것을 닮은 레바노스의 눈빛을 보며-.
‘괜히 살려줬나.’
후회가 막심했다.
하지만 물은 엎질러졌다.
“이제야 정신이 드나?”
“······.”
그는 말 없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것이 더욱 내 허세를 자극했다.
“소드마스터라고 불리는 놈이 고작 악마의 술수에 놀아나다니. 한심하구나.”
뭔가 좋은 말로 시작을 해보려 했지만, 저 멍청한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허세가 치밀어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악마에게 놀아나는 모습이 역겨워 그 목을 베어 버리려 했으나, 손속의 정을 두어 살려줬으니 이만 내 눈앞에서 사라지거라, 방랑자여.”
그 말만을 남기고 나는 레바노스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래. 차라리 이렇게라도 짓밟아 놓고 두 번 다시 내 앞에 안 나타나게만 하면 된다.
여기서 내 말에 따라 사라질지, 아니면 복수를 할 것인지는 놈의 선택이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애써 숨기며 성으로 돌아가고자 발걸음을 옮겼다.
다가닥~
그때 경쾌한 발소리와 함께 입에는 당근을 한 움큼 우물우물 씹고 있던 말 새끼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주인이 어떤 개고생을 했는지도 모른 채 놈은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순간 허세보다 더 강렬한 살의가 단전에서부터 끓어 오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 * *
펄럭~.
레바노스는 붉은 망토를 화려하게 펄럭이며 사라지는 아슬란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사실 그는 정신을 차린지 조금 됐다.
물론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는 건 똑같았지만, 그렇다고 일어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단지, 괜히 잘못 일어났다가는 목이 날아갈까 두려웠다.
그래.
두려웠다.
한번도 눈을 마주하고 싸운 자에게서 두려움을 느낀 적이 없던 그가 난생 처음으로 숨 막힐 정도의 두려움을 느꼈다.
바로 아슬란, 저자에게 말이다.
“칼을 거두시오. 당신들과 더는 싸울 생각이 없소. 내 의지로 한 것도 아니고.”
레바노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뒤에 자신을 아직도 경계하고 있던 아론에게 물었다.
“방금 전 당신의 상관이 내게 뿌린 물이 무엇이오?”
아슬란이 물을 부어 주면서 신기하게 치유력이 갑자기 급상승하고 몸에 힘이 돌아왔다.
“아. 이것 말인가?”
아론은 여분으로 있던 수통 하나를 던져 주었다.
“아슬란님께서 우리를 위해 직접 만들어 주신 성수다.”
“성수?”
그럴 리가.
인간이 어떻게 성수를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어둠의 힘을 다루는 자가!
레바노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수통에 담긴 물을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어떻게 이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물은 성수가 맞다.
아니. 레이어스 교단에서 만든다는 성수보다 몇 배는 더 신성력이 가득 들어 있는 성수였다.
“이걸 정말 아슬란, 그자가 만들었다는 것이오?”
“무엄하다! 감히 그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
레바노스는 이들의 눈동자에 담긴 아슬란을 향한 충성심을 볼 수 있었다.
아슬란이 불에 뛰어들라고 해도 망설이지 않고 뛰어들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충심이라고 해야 할까.
벌컥-.
그는 성수를 한 모금 마셔 보았다.
“!?”
생각 이상으로 효과가 굉장했다.
몸에 생기가 넘치고 사그라 들었던 신성력이 불끈 솟구쳤다.
“믿을 수가 없군.”
대체 아슬란.
그자는 뭐하는 작자이기에 이런 엄청난 걸 만들 수가 있는 거지?
“근데······ 방금 그 성수로 상처가 다 치유된 건가?”
아론이 신기하다는 듯이 물어보았다.
레바노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이 성수의 질이 무척 높아 가능했던 일이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천계에······.”
“과연! 과연 그랬군! 역시 이 성수는 치유에도 탁월한 능력이 있던 거였어!”
“······?”
“어서 병사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라. 상처가 입은 자가 있다면 이 성수를 부으라고.”
“아니. 이건 그러니까 평범한 인간에게는 효과가 그다지······.”
잔뜩 흥분한 아론을 진정시키고자 말을 정정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기사 하나가 다급히 달려왔다.
“저 악마들이 아직도 날뛰고 있습니다! 어서 이들을 소탕하지 않으면 방어선이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한 차례 몬스터 웨이브의 풀이 꺾이긴 했지만, 여전히 저것들의 숫자는 많았다.
레바노스는 자신이 나설 차례임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내가 놈들을 처리하도록 도와 주겠소.”
“그대가?”
“이건 나의 잘못이기도 하니까.”
마침 이 넘치는 신성력을 어딘가에 풀고 싶었다. 그리고 감히 자신을 조종했던 저 악마들을 모조리 쳐죽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파앗-!
그는 번쩍 날아올라 줄에 매달린 대검을 돌렸다.
회오리를 일으키며 나아가는 대검은 몰아쳐 오는 몬스터들을 순식간에 휩쓸어 버리며 그 힘을 과시했다.
내가 바로 이 대륙의 소드마스터 레바노스라는 것을 보여 주듯, 그는 넘치는 힘으로 아낌없이 실력을 뽐내었다.
그렇게 깔끔하고 마무리를 한 레바노스는 멋있게 착지한 뒤 슬쩍 뒤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활약을 감명 깊게 보고 뒤에 있던 기사들이 반응해 주기를 원했지만-.
“모두 성수를 부어라!”
“아슬란님이 만들어 주신 성수는 우리의 모든 부상을 해결해 주신다!”
“과연 힘이 끓어 오르는 것 같습니다!”
“그럼 멈추지 말고 싸워라! 지치면 성수를 마시고 또 싸워라! 아슬란님의 힘을 온몸에 받아 들이는 것이다!”
“예!!”
아론을 필두로, 저들은 완전히 성수에 미쳐 있었다.
“······.”
뭔가 다른 의미로 저들이 악마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