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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초 소드마스터-76화 (76/200)

76화

0.01초 소드마스터 76화

‘이게 뭐, 뭐야.’

황제의 길.

게임의 엔딩으로 달릴 수 있는 또 다른 메인 퀘스트.

이 퀘스트를 받는다면 나는 제국을 건설하여 황제가 되어야만 게임을 끝낼 수가 있다.

‘갑자기 이게 이렇게 뜨는 건 아니지.’

내가 컴퓨터로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였다면 이 퀘스트를 주저하지 않고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난 여기서 죽으면 진짜 죽어야 하는 사람이고, 황제의 길 퀘스트는 모든 메인 퀘스트 중에서 가장 위험한 퀘스트라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현재 이 대륙에 있는 모든 왕국을 굴복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즉,

‘테키나 족속을 막아내 대륙을 구원하는 건 물론, 일라이 왕국을 포함한 8개의 왕국을 전부 점령해야 되는 거잖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업적이었다.

특히 이 아슬란의 몸으로, 극악의 난이도로는 더더욱.

‘이건 절대 받으면 안 되는 퀘스트다.’

무조건 주인공이 테키나 족속을 몰아내고 대륙을 구원해야 게임이 끝나는 루트로 가야 한다. 만약 이 퀘스트를 생각 없이 받아들였다가는 테키나 족속의 씨앗을 말려 버려도 게임은 끝나지 않는다.

“······.”

나는 천천히 술잔을 든 채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방금 전까지 시끄럽게 떠들어 대던 기사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숨을 죽인 채, 그들은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거기서 깨달았다.

엘버스테인이 총대를 메고 내게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엘버스테인.”

“예, 대기사단장님.”

“이건 너의 생각만이 아니로군. 여기 있는 모두가 같은 생각인 것이냐?”

“그렇습니다. 모든 기사단이 대기사단장님의 뜻을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나는 마시고 있던 잔을 탁! 상 위에 내려놓은 뒤, 연회장에 있는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전부 죽고 싶은 것이냐?”

혼돈의 피어를 사방에 퍼뜨렸다.

쿠웅-!!

“크헉!”

“으악!”

기사들은 그 자리에서 비명과 신음을 터트렸다.

그와 동시에 강렬한 허세가 등허리를 타고 솟구쳐 올라왔다.

“나의 기사라는 것들이 감히 내 기사의 긍지를, 그 명예를 더럽히려 하다니.”

기사들 모두 앉은 자리에서 짓누른 채로 고개조차 들지 못하고 있었다.

“엘버스테인.”

“크으읍-”

내 부름에 엘버스테인은 대답 대신 신음을 토해냈다.

“네가 감히 내 신성한 의지를 모욕하는 것이더냐?”

그는 떨리는 몸으로 간신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뚝-

그 짧디 짧은 지속 시간이 끝나면서 혼돈의 피어가 거두어졌다.

“우에엑!”

“크헉!”

“우욱-!”

여기저기서 구역질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내려두었던 잔을 다시 들었다.

“한심하구나. 고작 이런 것도 버티지 못하는 것들이 감히 왕권을 입에 담고 있었다니.”

“······.”

“잔이 비었다, 엘버스테인.”

“아, 예.”

그는 얼른 내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오늘 일은 내 아량을 베풀어 그냥 넘어가겠다. 하지만-”

난 아직도 손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에게 말했다.

“한번만 더 이런 개소리를 했다가는 그땐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알겠느냐?”

“······예!”

나는 잔에 있던 술을 한번에 입에 털어 넣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과하게 망토를 펄럭이며 연회장 입구로 향했다.

“연회를 즐겁게 마무리하고 오도록.”

연회장 밖으로 나온 나는 퀘스트를 확인해 보았다.

[황제의 길]

"······"

메인 퀘스트는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그대로 있었다.

* * *

아슬란이 떠나간 연회장은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갑작스러운 피어에 모두 정신이 혼미해진 듯 보였다.

“엘버스테인.”

아론은 잔을 들고 엘버스테인의 곁으로 다가왔다.

“미안하네. 자네가 우리를 대신해 말을 해줬을 뿐인데, 괜히 꾸지람만 듣게 했군.”

엘버스테인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오랜만에 그분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느낄 수가 있어서 나름 좋았다네. 예나 지금이나, 아니. 오히려 지금이 예전보다 더 강해지신 것 같더군.”

“무서운 분이시지. 조금이라도 닿을 것 같으면 금방 더 멀리 아득하게 경지를 초월하시는 분이니까.”

두 사람은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처음에는 어수선했던 연회장 분위기도 차츰 안정을 되찾아갔다.

물론 아직도 아슬란의 피어에 의해 토악질을 하는 기사들이 있긴 했지만 말이다.

“아론. 오늘은 아슬란 대기사단장님께서 완강히 거부하셨으나, 아무리 그분이라도 큰 흐름을 거부할 순 없을 걸세.”

“흠. 자네의 말에 동감하네. 오늘은 조금 성급했을지도 몰라. 솔직히 아슬란 님께서 지금 당장 왕위를 찬탈한다 하시더라도 누구 하나 불만을 가지지 않을 거야. 하지만 저리도 완강하시다니······.”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아슬란 님이지 않겠나? 허나, 점점 이 대륙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어. 서로 갈라져 있기보다는, 하나로 뭉쳐 있어야 할 때라는 것이지.”

영원히 봉인되어 있을 줄로만 알았던 테키나 족속이 사방에서 나타나고 있고, 그동안 교류가 없던 다른 종족들도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중이다.

이 대륙에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다른 종족들을 보게. 그들은 우리 인간처럼 서로 뿔뿔이 흩어져 있지가 않아. 하나의 지도자 아래에 통치를 받고 있지.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들을 이끄는 지도자가 무척 막강하기 때문이야.”

“하고 싶은 말이 뭐지?”

“난 아슬란 님이 바로 그 막강한 지도자라고 생각하네. 지금은 그분께서 거절하셨지만, 곧 이 세상은 대륙을 구원할 구원자를 원하게 될 것이고, 그건 분명 아슬란 님이 될 걸세. 난 그렇게 믿고 있네.”

엘버스테인의 말을 아론은 가벼이 넘길 수 없었다.

그는 한 나라의 국왕이면서 현명한 사람이다.

그의 말대로 인간 역시 다른 종족들과 마찬가지로 통합을 이뤄내야 할 때가 왔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 중심에는 아슬란이 서게 될 것이라 아론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렇게라도 우리의 뜻을 그분께 밝혀 드렸으면 됐겠지.”

“그래. 그거면 된 거야. 훗날 그분께서도 분명 현명한 선택을 하게 되실 걸세.”

대륙의 구원자, 아슬란.

8개의 왕국을 통일시킨 제국의 황제, 아슬란.

찬란한 그의 모습이 왠지 눈에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 * *

“그런······. 대화가 오갔었단 말이지?”

“예.”

보고를 들은 리베르토 국왕은 상을 강하게 내려쳤다.

“이, 이런 찢어 죽일 놈들.”

자신이 이렇게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데, 다른 왕국의 왕이라는 놈이 그런 소리를 한 것도 모자라 기사들까지 동조했다는 것인가?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버젓이 그 흉계를 드러낼 줄은 몰랐다.

한 가지 의외인 건 아슬란이 그들의 청을 단칼에 거절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두 번 다시 그런 얘기를 꺼내지도 말라며 위압까지 가해 그들을 굴복시키기까지 했다.

참 언제 봐도 대단한 놈이다.

눈만 마주쳐도 무서운 그 기사들을 한번에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이 대륙에 몇이나 될까.

“그러나 아슬란도 인간이기에 종국에는······.”

이 왕좌에 앉으려 할 것이다.

아니. 이미 그는 왕좌에 앉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상 일라이 왕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가 관장하고 있으니.

리베르토는 그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지금은 그가 거절했어도, 결국 기사들이 충성심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자신을 죽이고 아슬란을 이 자리에 앉히려 할 것이 분명하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순 없지······.”

리베르토도 마냥 바보는 아니었다.

라울의 죽음 이후로 그동안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이지, 항상 눈과 귀를 사방에 열어 놓고 있었다.

“그자를 찾아오너라.”

“예?”

“저번에 나를 은밀히 찾아왔던 그 테르카나라는 남자 말이다. 그자를 내 앞에 데려와라!”

물어뜯고 있던 손톱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힘이 필요하다.

자신의 몸을 지킬 수 있는 힘을, 다시 한번 왕권을 되찾을 수는 힘 말이다.

* * *

대낮부터 헛소리를 들었더니, 속이 허했다.

나는 저택으로 돌아와 대충 요기를 하고 곧바로 개인 훈련장에 들어갔다.

그러다 번쩍이는 훈련장 벽을 보고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겨 집사에게 물었다.

“여기 벽을 뭘로 만들었지?”

“레튬이라는 재질로 만들었습니다. 강철보다 단단하고 그 미스릴에 버금가는 내구성을 지녔다고 알려져 있지요. 또한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겉에는 미스릴을 덧붙여 더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

레튬이라는 신소재에 미스릴까지?

이런 미친.

돈을 얼마나 처바른 거야.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샤를렌 가문에서 앞으로도 활발한 교역을 위해 무료로 이 모든 재료를 지원해 주었습니다.”

아니. 이걸 다 공짜로 줬다고?

샤를렌이 확실히 돈이 많긴 하구나.

그럼 레튬이라는 건 버리고 아예 전부 다 미스릴로 만들어 주지.

너무 큰 욕심인가.

“알겠다. 내 나중에 샤를렌 가주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도록 하지.”

“예, 그럼 편안한 훈련 되시길.”

나는 저번에 연습했던 대로 오늘도 순보 훈련을 계속할 예정이었다.

내 몸을 지키는 일이고, 강력한 상대에게 급습을 날려 단숨에 대결을 끝낼 수 있는 무척이나 중요한 기술이기 때문이다.

파앗-!

목표를 향해 비스듬하게 순보를 쓰면서 동시에 칼을 뽑아 그 목을 치는 동작까지.

계속 연습을 반복하다 보니, 처음에는 어림도 없었던 게 지금은 나름 자세가 잡히는 것 같았다.

퍼억-!

그리고 드디어 처음으로 세워 둔 허수아비의 목을 정확하게 베었다.

“돼, 됐다.”

뚝 하고 떨어지는 목을 바라보며 나는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물론 마무리 동작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렇게 어거지로 목을 베어서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취하는 게 아니라, 뭔가 영화나 만화처럼 좀 멋있게 안 되나.

“쓰읍. 지금 포즈를 따질 때가 아니긴 한데.”

하나를 얻으면 또 다른 하나를 얻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했던가.

처음에는 저 허수아비 목을 깔끔하게 베어낼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을 거라고 했던 스스로의 다짐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발검 연습부터 해봐야 하나.”

순보와 발검을 동시에 해낸다면 상대는 내가 칼을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었다는 것을 눈치도 채지 못하고 쓰러질 것이다.

나는 허수아비 앞에 서서 발은 움직이지 않고 손만 움직였다.

파앗-!

순식간에 발검이 된 검이 허수아비의 맨 위쪽 끝을 베어내고 검집에 돌아갔다.

“정확도가 낮아.”

이번에는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 칼을 휘둘러 보았다.

연습 부족인 건지, 그 빠르기가 줄었고 정확도도 더 떨어졌다.

“이건 계속해보는 수밖에 없겠다.”

나는 쿨타임이 돌 때마다 쉬지 않고 순보를 연습했다.

처음에는 걸음걸이에만 신경을 쓰다, 지금은 발검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만약 사정거리만 된다면 굳이 발걸음을 움직일 필요 없이, 간단한 손동작만으로도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이 순보라는 능력은 사기적인 스킬이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검강에도 적용이 되나?”

감히 눈으로 쫓을 수 없는 빠른 발검으로 검강까지 날려 버린다면 그 파괴력은 대단할 것이다.

물론 이걸 쓴다고 사정거리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순보를 통해 앞으로 이동하면서 검강을 날린다면 내가 자체적으로 사거리를 늘리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연습하기에는 좀 그렇겠지.”

집사가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 벽을 레튬과 미스릴로 만들어낸 엄청난 곳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내 검강을 버텨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그 엘티히의 방어막도 뚫어낸 검강이니 말이다.

“검강을 꺼내는 연습은 다른 곳에서 해야겠다.”

그리 아쉬운 마음을 접으며 쿨타임이 전부 돌아 다시 한번 여러 개 세워져 있는 허수아비들을 향해 발검을 하려는 때였다.

우우웅-!

검을 꺼내는 순간, 갑자기 칼이 크게 진동하기 시작하더니-.

샤르륵-!

아주 정확하고 깔끔하게 허수아비들을 베어냈다.

“오-!”

나는 깜짝 놀라 감탄을 터트리다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잠깐. 사정거리가 안 됐는데, 어떻게······.”

그리 중얼거리는 순간.

키이이잉-!!

베어진 허수아비 뒤로 황금빛 검강이 번쩍이며 나아가 저 끝에 있던 벽과 부딪혔다. 아니. 그냥 물살을 가르듯 가볍게 통과해 버렸다.

“······.”

잠시 어색한 정적이 흐르고,

콰직-!

불길한 소리가 귓가에 울려퍼졌다.

“아, 안 돼.”

라는 나의 애절한 목소리가 무색하게,

콰콱-! 콰콱-!!

뒤쪽 벽에서부터 시작된 균열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더니, 곧 벽 전체가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가, 가주님!!”

그 소란을 듣고 집사와 기사들이 우르르 훈련장으로 달려왔다.

집사는 산산조각이 난 벽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저, 저 미, 미스릴 벽이······.”

충격에 빠진 그의 표정이 내 마음과도 같았다.

저게 얼마나 비싼 벽인데······.

하지만 그들이 달려오면서 동시에 치밀어 오르는 허세에 나는 태연하게 몸을 돌렸다.

“벽이 무척 약하더군.”

“······.”

“다음에는 좀 더 강하게 만들어 두도록.”

넋을 놓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집사의 눈동자를 외면하며 나는 밖으로 나갔다.

그러면서 속으로 흐르는 피눈물을 삼키며 허리춤에 있던 검을 꽈악 붙잡았다.

‘너 이 새끼 일부러 그랬지.’

······.

이번에도 검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순간 이 뻔뻔한 놈을 바닥에 패대기쳐서 묻어 버리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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