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0.01초 소드마스터 72화
기사단과 함께 왕궁을 나선 뒤, 얼마 안 있어 우리는 엘버스테인과 마주할 수 있었다. 그는 우리를 발견하고는 먼저 달리던 말을 멈췄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슬란 대기사단장님.”
기사들을 잔뜩 끌고 오긴 했으나, 역시 악의를 품고 온 건 아닌 듯보였다.
그러나 결코 좋은 일로 온 거 같지도 않았다.
긴장 풀지 말자.
“오랜만이오, 국왕 엘버스테인.”
엘버스테인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 딱딱하게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예전처럼 편하게 대해 주십시오.”
“한 왕국의 국왕을 내가 어찌 가볍게 대하겠소.”
“제가 일라이 왕국을 떠나기 전, 당신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비록 신분은 달라져도 저는 당신의 영원한 기사라는 것을 말입니다.”
[의리]라는 특성이 이래서 좋다.
상대방을 배반하지 않고 처음 품었던 마음 그대로 유지하기 때문이다.
엘버스테인은 역시 나의 적이 아니었다.
그 어떤 스토리로 플레이를 해도 엘버스테인은 항상 선의의 역할을 하는 캐릭터였다. 그렇다면 나도 더 이상 그를 경계할 필요가 없어졌다.
“제 고집을 꺾지 않는 건 여전하구나, 엘버스테인.”
예전처럼 내가 말을 편하게 하는 것이 그렇게나 좋은지 엘버스테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저 고지식한 성격이 어디 가겠습니까?”
옆에 있는 아론이 거들자 엘버스테인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아론. 그동안 잘 있었는가?”
“오랜만일세, 엘버스테인. 근데 살이 좀 쪘군. 역시 군왕의 삶은 그런 것인가?”
“후후. 아슬란 대기사단장님 덕분에 내 삶이 조금 편해졌어야지.”
반갑게 회포를 푸는 건 좋으나, 엘버스테인이 굳이 왜 여기까지 기사단을 끌고 왔는지부터 알아야 했다.
“엘버스테인. 아무리 너라도 절차라는 것이 있다. 이렇게 허락도 없이 기사단을 끌고 와 국경을 넘는 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먼저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하지만 사안이 급박하여 어쩔 수 없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지.”
엘버스테인은 그동안 오메르 왕국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마을에 역병이 무섭게 퍼지기 시작하고, 그것이 성안에도 퍼지려는 조짐이 있어 엘버스테인은 총력을 다해 그것을 막아내려고 했었다.
그러다 수상한 몬스터 하나가 마을을 돌아다니며 역병을 뿌려대는 것을 알아냈고, 그것을 쫓다 이곳까지 다다르게 된 것이었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몬스터가 마을에 역병을 뿌린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놈을 추적 중에 하필이면 놈이 여기 국경을 넘는 바람에······.”
그 이야기를 찬찬히 듣고 있던 나는 엘버스테인이 설명한 몬스터의 생김새를 곱씹어 보았다.
두더지처럼 땅 아래로 다니는 거대한 전갈 같은 몬스터라.
거기다 놈이 뿌려대는 검은 연기 같은 것에 닿으면 역병이 돌기 시작한다는 건······.
‘이건 아무리 들어봐도 렉카디잖아?’
그 생김새와 특징을 미뤄 떠오르는 몬스터가 하나밖에 없었다.
렉카디.
전갈 같은 몸뚱아리로, 놈의 특징이라고 하면 바로 역병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이었다. 놈은 근처에 있는 사냥감에 마기를 뿌려 상대를 약하게 만들고, 그들의 정기를 빼앗아 자신의 힘으로 삼는다.
처음에는 렉카디인 줄 모르고 그냥 역병이 도는 것으로 착각해 치료만 하고 있다 나중에 렉카디가 사람들의 정기를 빨아 먹고 강해져 지하가 아닌, 지상으로 치고 올라왔을 땐 이미 다 성장을 한 상태라고 봐야 했다.
‘그땐 군대건 뭐건 눈에 띄면 그냥 냅다 박아 버리는 놈인데.’
나는 엘버스테인에게 물었다.
“놈과 전투를 벌었더냐?”
“아닙니다. 저희가 먼저 놈을 찾아냈고, 그대로 이 근처까지 도망을 쳤습니다.”
그렇다는 건 아직 성장이 덜 되었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완전한 성장을 위하여 일라이 왕국 영토 내에 있는 마을을 노릴 가능성이 무척 크다.
‘우리 엘베스테인이 선물은 안 가져오고 똥을 가져왔구나.’
이놈의 자식이 애써 잘 키워줘서 왕으로 만들어줬더니, 황금 덩이는 가져오지 못할망정 귀찮은 악마를 데려왔다.
‘근데 그놈은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거야?’
숭배자들이 또 의식 같은 걸 펼쳐 소환해낸 건가?
렉카디가 마을에 들어가 역병을 퍼뜨릴 경우 굉장히 일이 귀찮아지기 때문에 놈이 제대로 뿌리를 내리기 전 얼른 가서 잡아와야 한다.
문제는,
‘그놈이 한번 숨어 버리면 찾는 게 쉽지 않다는 거지.’
레이더처럼 마법으로 놈을 탐지해 찾는 것이 된다지만, 그놈이 어떤 방향으로 도망쳤는지 알 수도 없고 설사 안다고 해도 땅 속 깊이 파고 들어가 버리면 마법에 감지조차 되지 않는다.
이래서 플레이어들은 렉카디를 렉혐이라고 부르며 무척 싫어했다.
잠잠히 숨어 있던 놈이 언제 어디서 튀어나와 괴롭힐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겼다.
“엘버스테인.”
“예. 대기사단장님.”
“이런 일이 있으면 그냥 기사단을 보낼 것인지. 왜 국왕인 네가 같이 왔지?”
엘버스테인은 더 이상 기사가 아닌, 한 나라의 왕이다.
그런 자가 기사들을 시키지 않고 직접 여기까지 왔다.
“인재가 부족한 탓이겠지요. 일은 많지만, 정작 그것을 할 사람이 얼마 없어 요즘은 제가 직접 이렇게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주변을 스윽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오랜만에 이곳에 돌아오고 싶었습니다.”
엘버스테인은 국왕이면서 동시에 모험가였다.
스토리라인을 잘 따라가 보면 엘버스테인은 자신도 나가서 싸우고 모험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무척 강해 기회가 생긴다면 언제든 직접 기사단을 끌고 나간다.
옆에서 제발 왕궁에 가만히 좀 있으라는 조언을 해봐도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경우가 많다고 해야 할까.
분명 이번에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추격대는 그게 다인가?”
“예. 놈을 추적하고자 마법 병단도 함께 데려왔습니다.”
“좋다. 그럼 우리 군과 힘을 합쳐 넓게 수색을 해보도록 하지. 기사들과 마법 병단을 주변에 있는 마을에 보내거라. 그 악마는 필시 주민들의 정기를 흡수하고자 다시 나타날 것이다.”
그 말에 엘버스테인이 조금 놀란 눈치를 보였다.
“대기사단장님께서는 그 악마가 무엇인지 잘 알고 계시는군요.”
난 웃으며 치밀어 오르는 허세를 부렸다.
“내가 악마에 대해, 이 대륙에 대해 모르는 것은 없다.”
“역시······.”
잠깐. 근데 틀린 말은 아니잖아?
이 게임의 스토리와 등장인물, 거기에 악마들과 몬스터들까지 줄줄이 꿰고 있는 건 아마 나밖에 없을 것이다.
“모두 서둘러 움직이거라.”
“예!”
군사들이 렉카디를 찾았다는 보고가 들어오기 전까지 이곳에서 멀뚱멀뚱 기다리기만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은 우리 왕궁으로 같이 가겠나?”
그 말에 엘버스테인은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예. 저도 오랜만에 가보고 싶습니다.”
“따라와라. 그래도 손님이니, 박대는 하지 않겠다.”
“예!”
오랜만에 엘버스테인까지 합류를 하니, 왠지 마음이 든든했다.
그냥 엘버스테인을 왕으로 만들지 말고 내 옆에 쭉 있도록 만들 걸 그랬나.
“오오. 저분은?”
“엘버스테인 님 아니야?”
“아니. 오메르 왕국의 국왕이 되셨다고 하지 않았어?”
“다시 돌아오신 건가?”
성안으로 들어오자 백성들이 우리를 반겨 주었다.
엘버스테인은 내 밑에 있으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내 퀘스트를 위해 백성들을 도왔기 때문에 이곳에서 그의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었다.
그는 오랜만에 만나는 백성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다.
“어서 오시오, 국왕 엘버스테인.”
우리 왕국의 왕, 리베르토도 왕궁 전각에서 엘버스테인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는 엘버스테인과 길게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부디 우리 왕국에서 편안한 시간을 보내길 바라오. 중요한 얘기를 나눌 것이 있다면 여기 아슬란 대기사단장과 상의를 하시오. 그의 뜻이 곧 나의 뜻이기도 하니.”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주 잠깐만 얼굴을 비춘 뒤 리베르토는 내게 모두 맡긴다는 눈짓과 함께 전각을 나가 버렸다.
라울 사건 이후로 완전히 국정에 손을 떼버려 이렇게 전각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왕께서는 여전하시군요.”
엘버스테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사람이라면 지금쯤 왕을 몰아내고 왕권을 찬탈해 새로운 왕국을 세웠을 것이다.
솔직히 나도 그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미 전권을 내가 가지고 있고, 나에 대한 백성들의 지지도가 매우 높은 만큼, 지금 왕 자리를 뺏는다고 민심이 나빠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초보나 하는 짓이다.
‘왕이 되면 제약이 너무 많아진다.’
당장 대기사단장이란 자리도 제약이 생기는데, 왕은 어떻겠는가.
아이템이나 마기 포식을 위해 함부로 왕궁을 떠날 수 없다.
모든 것을 아랫 사람에게 시켜야 하며 왕이 자리를 비우는 순간 성의 민심이 빠르게 나빠지기 때문이다.
‘엘버스테인 이놈이 미친놈이지.’
이놈처럼 막무가내로 플레이했다가는 왕국이 망하기 십상이다.
여기까지 잘 빌드업을 해서 만들어 놓았는데, 여기서 무너뜨릴 순 없지 않은가.
그리고 왕이 되면 왕국과 운명을 같이 해야 하기 때문에 혹여 일라이 왕국이 망하는 날에는 꼼짝없이 여기 남아 죽어야 한다.
“엘버스테인.”
“예, 대기사단장님.”
“환영식을 거하게 해주고 싶다만, 언제 그 악마를 발견했다는 보고가 들어올지 모르기에 옛 동료들과 따로 회포를 풀고 있거라.”
엘버스테인은 저 뒤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아론과 기사단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배려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래. 난 네가 싼 똥을 어떻게 치워야 될지 고민을 해야 하니까, 저기서 놀고 있어라.
나는 계속 옆에 찰싹 붙어 다니려 하는 엘버스테인을 떼어낸 뒤 집무실로 돌아갔다.
지도를 펼쳐 놓고 그 악마 놈이 어디쯤 갔을지 경로를 예상해 보려고 했는데-
“음? 이건 뭐야.”
내 집무용 책상 위에 놓인 목걸이가 눈에 띄었다.
누가 여기다 놓고 간 거지?
꽤 비싸 보이는데.
[봉인된 영겁의 목걸이]
-신성한 축복이 깃든 목걸이입니다.
-히든 옵션이 존재합니다.
-오직 빛의 힘을 가진 자만이 목걸이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
이런 아이템이 있었나.
하지만 아쉬운 점은 이 목걸이에 걸린 히든 옵션을 내가 열 수 없다는 것이었다.
빛의 힘을 가지고 있으려면 최소 제사장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건데.
내가 지금 그런 힘을 가질 수 있을 리가······.
철컥-!
바로 그때였다.
목걸이 중앙에 봉인되어 있던 입구가 열리면서 내 손으로 빛이 스며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게 왜 되는 거지?
“설마?”
레길로트의 팔찌 덕분인 건가.
내 모든 속성을 성속성으로 바꿔주는 효과가 빛의 힘으로 인정되는 것이었다.
곧 목걸이에서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이윽고.
[신성한 보호의 목걸이]
-신성한 축복이 깃든 목걸이입니다.
-빛의 주인으로 인정받아 히든 옵션이 해제됩니다.
-신성한 보호: 하루에 한번. 착용자에게 가해지는 즉살급 데미지를 모두 흡수합니다.
“!?”
나는 공개된 히든 옵션을 보고 손이 부르르 떨려왔다.
“미, 미친.”
하루에 한번이지만, 내게 가해지는 즉살급 데미지를 흡수하는 옵션이라니!
이건 S급 능력이지 않은가?
이것으로 나는 목숨이 두 개가 되는 꼴이었다.
“대체 누가 이런 서프라이즈 선물을······.”
나는 주변을 빠르게 획획 돌아보았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산타 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받는 것이 딱 이런 기분인 것일까.
“혹시 다시 돌려 달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얼른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그러자 벌써부터 가슴이 따뜻해지고 기분도 좋아졌다.
이것이 축복이로구나.
그래. 아직 세상은 날 버리지 않았다.
개발자 놈들이 내가 고통받는 것을 보고 안쓰러워 이런 선물을 안겨준 것일지도······.
* * *
“아뢰옵니다!! 동쪽에서도 전갈을 닮은 검은 몬스터가 국경을 넘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아뢰옵니다! 남쪽에서 또 다시 몬스터가 출몰하여······!”
국경을 넘는 악마는 하나가 아니었다.
연달아 들어오는 급보에 하리엘은 당황했으나,
“······.”
아슬란은 침착하게 보고를 듣고 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망토를 펄럭이며 외쳤다.
“모두 출정 준비를 하라. 놈들은 필시 한곳으로 모이려 할 터. 그곳으로 가서 놈들을 소탕하겠다.”
“예!”
아슬란은 상석에서 내려와 하리엘에게 다가왔다.
“하리엘.”
“네. 대기사단장님.”
“내가 악마들의 흔적을 쫓는 동안, 너는 이교도 무리를 찾아내거라.”
“네?”
“이번 일은 숭배자라고 불리는 그들의 짓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니 한번 찾아 보거라.”
“네. 그렇게 할게요.”
아슬란에게 명령을 받은 하리엘은 자리에서 일어나다,
“어?”
아슬란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 줄이 희미하게 보였다.
“왜 그러지?”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제 교단을 떠나 이곳에 정착하겠다는 의지로 그녀는 교단에서 받은 목걸이를 아슬란의 집무실에 놓고 왔다.
그냥 서랍이나 다른 곳에 보관하거나, 아예 없애 버릴 줄 알았는데, 설마 그것을 직접 착용하고 있을 줄이야.
이건 자신이 맡긴 것을 아슬란 그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겠다는 뜻인가.
“······.”
“어디 아프냐? 얼굴이 갑자기 빨개지는 거 같은데.”
“아, 아니에요! 흠흠. 저,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하리엘은 웃는 얼굴을 애써 감추며 빠르게 전각을 나왔다.
왜인지 자꾸 심장이 콩닥콩닥 뛰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