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0.01초 소드마스터 68화
레이어스 교단이 대륙에 끼치는 영향력은 가히 엄청나다 할 수 있다.
보통 다른 왕국의 기사가 무단으로 국경을 넘게 되면 그것이 전쟁의 단초가 될 수도 있지만, 레이어스 교단의 기사라면 그 누구도 문제 삼지 않는다.
오히려,
“레이어스 교단의 대성기사단장, 루미네르 님이십니다. 성문을 열어 주십시오.”
끼이익-!
성문도 활짝 열어 줄 만큼 우호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왕국의 지도자들도 괜히 교단을 적으로 만들었다가는 민심은 물론 대의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 입장에서도 레이어스 교단이 눈엣가시처럼 거슬렸으나, 교단의 힘이 막강하기에 그냥 꼬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지도자들의 말이지, 백성들은 달랐다.
교단의 기사단이 도시를 방문하게 되면 백성들은 라할의 이름을 칭송하며 기사단을 정성스레 받아 들인다.
“교단이 여기는 무슨 일이지?”
“이제서야 얼굴을 나타내는 건가?”
“쯧, 쓸모없는 놈들.”
하지만 여기 오메르 왕국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무려 만민에게 존경을 받는다는 대성기사단장 루미네르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그들을 못마땅하게 쳐다보기까지 했다.
“이곳 백성들은 조금 무례하군요.”
“루미네르 님이 오셨는데 저런 자세라니.”
성기사들이 불쾌한 표정을 드러냈지만, 루미네르는 덤덤한 얼굴로 그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던 중 백성 하나가 목청껏 소리쳤다.
“이 대륙은 아슬란 님께서 구원하신다!! 교단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
그러자 다른 백성들도 하나둘 목소리를 높였다.
“맞아! 이 쓸모없는 교단 놈들!”
“우리가 고통받을 땐 외면하더니!”
“아슬란 님이야 말로 진정한 빛의 기사이시다!”
마치 폭동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열을 내고 있는 군중을 보며 기사들은 위협을 느끼고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그들을 진정시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진정하시오!”
오메르 왕국의 기사단이었다.
그것도 입은 갑옷으로 보아, 황실 직속 기사단 같았다.
“오메르 왕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는 왕실 기사단의 단장, 루케테입니다.”
“환대해 줘서 고맙소.”
“저희 왕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같이 왕궁으로 가시지요.”
루미네르는 루케테 단장을 따라 왕궁으로 향했다.
백성들은 그런 그들을 따가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해해 주십시오. 여기도 한때 교단에 대한 신뢰가 높았지만, 선왕의 폭정과 악마를 섬기는 이교도 무리에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만일 교단에서 우리의 사정을 알고도 외면하지 않았다면 지금과는 분위기가 달라졌겠지만 말입니다.”
말에 가시가 있는 루케테의 말에 성기사들이 미간을 찌푸렸지만, 루미네르는 덤덤한 얼굴로 물었다.
“여긴 교단보다 아슬란 대기사단장에 대한 신뢰가 높아 보이는구려.”
“그야 그럴 수밖에요. 모두가 외면한 곳이었지만, 아슬란님께서는 이곳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군을 전멸시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악마의 꾐에 넘어간 루시안을 처단하여 최소한의 피해로 왕국을 존속시켜 주셨지요.”
아슬란이 엘버스테인과 함께 왕국을 수복했다는 얘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 백성들이 이 정도로 교단을 싫어하고 아슬란을 따를 줄은 몰랐다.
“그 이후에도 오메르 왕국이 재건할 수 있도록 여러 방면으로 도움을 주셨으니, 우리 왕국에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은 큰 은인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타 왕국의 대기사단장을 이 정도로 신뢰하다니.
“어서 오시오. 내가 오메르 왕국의 국왕, 엘버스테인이오.”
루미네르는 얼마 안 있어 엘버스테인을 알현할 수 있었다.
금발 머리에 선한 눈동자.
그 인상만으로도 이 왕이 어떤 성격인지 알 것 같았다.
“대성기사단장 루미네르라고 합니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오?”
하지만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엘버스테인의 성격은 꽤나 급해 보였다.
“관례상 하는 순찰입니다.”
“관례상 하는 순찰을 무려 대성기사단장이나 되는 인물이 한다라. 교단에서 꽤나 진심인 것 같소. 거기다 데려온 기사들과 사제들의 숫자도 3천이 넘던데.”
엘버스테인의 의심 어린 눈초리에 루미네르가 답했다.
“그만큼 교단도 진심이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대륙을 위협하는 악의 세력이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달려가 빛의 이름으로 심판할 겁니다.”
“진작 그리 했다면 우리 오메르 왕국도 많은 도움을 받았을 텐데, 아쉽구려.”
이 왕은 아직도 앙금이 남아 있는 건가.
하지만 교단에서 진행한 조사에 의하면 어떤 악마의 흔적도 이곳에서 찾아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교단에서는 분명 입장을 밝혀 드렸을 텐데요?”
“그대는 그것을 믿소? 난 이 두 눈으로 직접 본 걸 믿을 뿐이오.”
교단이 의도적으로 조사 내용을 조작했다는 건가?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난 그대들이 우리 왕국에 오래 머무르는 걸 보고 싶지 않소. 내가 잘 아는 분께서 그러셨지. 서로 신뢰가 없으면 같이 싸울 수 없다고. 난 교단을 신뢰하지 않소.”
“······교단을 믿지 않는 건 큰 실수이십니다.”
“그 책임은 내가 지지. 그러니 이제 그만 왕국에서 나가 주시오.”
차가운 엘버스테인의 반응에 루미네르와 성기사단은 쫓겨 나듯 왕궁 밖으로 나왔다.
“저런 무례한 자가 이 왕국의 왕이라니!”
“교단을 모욕한 죄를 엄히 다스려야 합니다!”
기사들은 불만이 많았으나, 반대로 루미네르는 생각이 많아졌다.
‘정말 악마를 보았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교단에서는 분명 오메르 왕국에서 악마와 결탁한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혹시 그게 가짜일 수도 있는 것인가.
아니. 아니다.
평생을 교단에 충성하며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단 한번도 교단을 의심한 적도 없으며,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
이들이 혼란에 빠진 건 모두 아슬란 때문이다.
“너희가 이곳에 온 이유를 잊지 말거라. 우린 오메르 왕국과 싸우고자 온 것이 아니다.”
이들의 목표는 하나.
바로 아슬란을 처단하는 것.
무려 라할께서 신탁으로 내리신 명령이다.
그 명령에 따라 당장 일라이 왕국으로 달려가 아슬란의 목을 쳐야겠지만.
‘그의 힘이 카르만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고 한다면 섣불리 공격할 순 없지.’
더군다나 한 가지 더 걸리는 것이 있었다.
‘하리엘······.’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슬란 곁에 남아 있는 하리엘이었다.
“너희는 이곳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거라.”
“예? 바로 일라이 왕국에 가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잠깐······.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알겠습니다.”
이번 일에 하리엘이 휩쓸리도록 가만 놔둘 순 없었다.
그리고 루미네르는 자신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 * *
검은 낙뢰가 떨어진 곳은 바로 여기.
오메르 왕국 국경선과 인접한 래피들의 서식지였다.
래피라고 하면 나무를 타고 다니는 몬스터들인데, 원숭이와 비슷한 생김새를 가졌다. 물론, 그 양아치 같은 동물처럼 사람의 물건을 강탈하거나, 공격성이 짙지도 않았다.
그냥 조금 시끄럽지만, 온순한 놈들이라고 해야 할까.
“이곳에서 최초 보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별 이상은 없어 보이는군요.”
아론의 말대로 겉으로는 아무 이상이 없어 보이는 곳이었다.
하지만,
“너무 조용하지 않느냐?”
“예?”
“래피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울어대는 놈들이다. 그런데 이곳은 무척 고요하군. 마치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그 흔한 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구나.”
“아-”
분명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음을 뜻한다.
나는 기사들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주변을 샅샅이 탐색해 보거라.”
“예!”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들이 무언가를 발견했다.
“대기사단장님. 나무에 이런 것이 적혀 있습니다.”
피로 적힌 붉은 글씨.
이들은 처음 보는 문자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나는 게임에서 하도 많이 봤던 문자였기에 단번에 알아차렸다.
“테키나 족속의 문자로군.”
흑마법 의식에 쓰인 것이 틀림없었다.
“여기도 있습니다!”
“이곳에도 비슷한 글자가 있습니다, 대기사단장님!”
이곳뿐만이 아니라 곳곳에 문자가 적혀 있었다.
그렇다는 건 이 숲 전체를 의식에 사용했다는 것인데, 대체 무얼 하려고 이렇게까지 해놓은 거지?
‘이 자식들 설마······.’
한 가지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가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마치 내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우끼이이-!!”
방금 전까지 들리지 않았던 래피들의 울음 소리가 숲 안을 가득 채웠다.
검게 그을린 것처럼 변해 버린 래피들은 떼거지로 우리 기사단을 향해 사방에서 달려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아론이 소리쳤다.
“기사단!! 전투 준비!”
기사들은 칼을 뽑아 들고 밀려오는 래피들을 경계했다.
‘광폭 마법이었구나.’
아무리 온순한 몬스터라도 날뛰게 만드는 광폭 마법.
테키나 문자들이 숲 곳곳에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직감했었다.
검은 낙뢰는 악마를 소환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몬스터들을 광폭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한번 광폭화 마법에 걸려 버리면 지금 보는 바와 같이 상대를 가리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려 든다.
‘저것들을 일일이 다 잡을 수는 없는데.’
이 마법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근원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보통 이런 광폭 마법에 근원이라고 한다면-
쿵-! 쿠웅-!!
이 무리의 최고라 할 수 있는 보스 몬스터밖에 없었다.
“크오오오-!!”
자이언트 래피.
모험가들이, 플레이어들이 래피의 서식지를 지나도 그냥 건들지 않고 지나가는 이유는 바로 저 자이언트 래피 때문이다.
저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평소에는 무척 온순하고 조용하며, 그냥 한량처럼 먹고 잠만 자는 몬스터이나, 누군가가 래피들을 괴롭히면 벌떡 일어나 응징을 해버리는 아주 무시무시한 놈이었다.
‘저기에 근원이 있구나.’
래피들과 마찬가지로 온몸이 마기에 의해 검게 변한 자이언트 래피의 몸 중앙에 검은 보석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
저기에서 나오는 기운이 래피들을 미치게 만드는 것이었다.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라파엘, 알렉산더. 너희 둘은 몰려오는 래피들을 상대하거라. 그리고 하리엘, 아론. 너희 둘은 저 자이언트 래피를 죽이고 오너라.”
“예!”
“알겠습니다!”
이런 일을 대비해 기사 1,000명을 데리고 왔으나, 지형이 험하고 좁아서 저 많은 래피들을 다 상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내가 가진 네임드들이 잘 활약만 해준다면 큰일은 없겠으나, 어느 정도의 피해는 감수해야 할 것 같았다.
‘절대 나한테는 오지 마라.’
제일 중요한 것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들은 내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쏴라!”
“몬스터들이 접근하도록 허용하지 마라!”
라파엘은 마법의 힘으로 래피들이 다가오는 족족 녹여 버렸고, 알렉산더는 모두 활을 들게 하여 다가오는 몬스터들을 요격했다.
그리고 아론과 하리엘은,
“흐아압-!”
“크오오오!!”
고릴라처럼 가슴을 치며 다가오는 자이언트 래피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역시 쉽지 않네.’
두 실력자가 협공을 펼치고 있었지만, 자이언트 래피는 쉽사리 쓰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단단한 맷집도 맷집이겠지만, 저 가슴에 박혀 있는 근원이 광폭화를 시켜 고통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듯 보였다.
거기다,
“우끼이이-!!”
“마, 막아라!”
벌레떼처럼 몰려오는 래피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 결국 기사들은 백병전을 벌이고 있었다.
우려했던 대로 지형이 험하고 좁아서 저것들이 나무를 타고 내려와 공격을 해버리면 기사들이 무방비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크오오-!!”
하리엘과 아론의 공격에 정신을 못 차리던 자이언트 래피가 갑자기 몸에서 마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엇!”
“윽!”
갑작스러운 마기 공격에 균형을 잃은 두 사람은 저 큼지막한 손에 맞아 저 먼발치까지 날아가 버렸다.
저 정도로 죽지는 않겠지만 문제는,
“크르르르-”
저놈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는 것이다.
“어어? 여, 여기로 온다.”
“마, 막아!”
내게 래피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열심히 칼을 휘두르고 있던 호위 기사들은 쿵쾅 거리며 다가오는 자이언트 래피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저 둘이랑 싸울 것이지. 왜 나한테-!’
속으로 원망하고 있을수록 놈과 나의 거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이윽고,
“크오오-!!”
놀라운 점프력으로 높이 날아오른 자이언트 래피가 괴성을 지르며 내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감히.”
강렬한 허세가 등허리를 타고 치밀어 오르면서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크, 크르-.”
자이언트 래피의 몸이 일직선으로 허공에 붕 뜬 채로 멈춰 있었다.
“미물 따위가 누구의 몸을 만지려 드는 것이냐?”
그뿐만이 아니라,
“크, 크윽······.”
“으으······.”
칼을 들고 래피들을 베어 버리려 하는 기사들,
상대를 물어뜯으려 높이 날아올랐던 래피들 역시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제자리에 얼어 버렸다.
권능의 염력.
긴박한 상황이라 능력을 펼친 것이었는데, 적아를 가리지 않고 반경 300m에 있는 모든 것을 움직이지 못하게 염력으로 붙잡은 것이었다.
“거기다 이 몸을 내려다보다니. 건방지구나.”
나는 머리끝까지 차오른 허세를 느끼며 놈에게 명령했다.
“꿇어라.”
쿠웅-!!
그러자 그 육중한 몸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처박히며 비명을 토해냈다.
“크, 크오오-.”
광폭화에 미쳐 버린 탓에 놈은 몸부림을 치며 어떻게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꿇어라.”
쿠우웅-!!
다시 한번 놈의 몸이 저 바닥 밑까지 처박혀 버렸다.
“너는 감히 나를 내려다볼 수도, 올려다볼 수 없다.”
자이언트 래피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며 바닥을 헤집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