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0.01초 소드마스터 65화
“여긴······.”
크라엘은 기침을 토해내며 눈을 떴다.
“제기랄.”
입에서는 탁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내, 내가 언제부터 정신을······.”
흐릿한 기억이 그의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이름 모를 식물에서 마기가 쏟아져 나오고 그대로 기사단은 그것이 중독되어 전투 불능에 빠졌다.
다행히 크라엘이 잠시나마 마기를 쫓아내긴 했지만-
“그 악마 놈······.”
어디선가 나타난 악마가 엄청난 염동력을 발휘하여 무기를 전부 빼앗고. 그것으로 기사단을 쓸어 버렸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제대로 대응조차 못 했지만, 크라엘은 제 팔에 꽂힌 칼을 뽑아 악마에게 달려들었다.
“그 이후로 기억이 없다.”
열심히 칼을 휘둘렀으나, 다시 한번 몰려든 지독한 마기에 기억을 잃은 듯했다.
아무리 위명 높은 강자라고 해도 마기 앞에서는 그저 나약하기 짝이 없는 평범한 인간이 된다고 했던가.
그 위력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대체 여기는 어디지?”
크라엘은 자신이 어느 높은 나무 위에 거꾸로 매달려 있다는 걸 알아챘다.
마치 거미가 먹잇감을 저장해 놓은 것처럼, 크라엘 뿐만이 아니라 다른 기사들 역시 거꾸로 매달려 있는 상태였다.
“브록, 레니. 정신을 차려 보거라.”
부장들의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제길. 여길 얼른 벗어나야······.”
바로 그때였다.
“넌 내 검으로 죽일 가치조차 없다.”
숲을 울리는 둔중한 목소리.
어디선가 들어본, 아니. 머릿속에 강렬히 박혀 있는 목소리였다.
“설마······아슬란?”
아슬란이 이곳에 어떻게?
거기다 지금 그는 하늘을 날고 있다. 심지어 이 지독한 마기 속에서 아주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푸확-!!
“!?”
그의 가벼운 손짓에 솟아 나오는 검강이 저 악마를 반으로 갈라 버렸다.
문제는 그 검강이 크라엘에게 치달아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이런 제길!”
온몸이 칭칭 감겨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
이대로 죽는 것인가?
키이이잉-!!
그런데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이, 이게 무슨?”
저 악마의 몸을 순식간에 갈라 버린 빛의 검강이 자신의 코앞에서 멈춘 채로 울음을 터트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폭주하는 힘을 무언가가 뒤에서 강하게 붙잡는 것처럼, 검강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며 그대로 소멸되었다.
“일부러 죽이지 않은 것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무지막지한 힘을 자랑하던 검강을 그 찰나의 순간에 통제할 수 있다니.
콰아아-!!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반 토막 난 악마의 몸뚱이에서 마기가 치솟더니, 숲 전체가 뒤흔들렸다.
당장이라도 땅이 꺼지고 마기에 의해 숲 전체가 타 버릴 것만 같았다.
“이건 또 대체······!”
검은 불길이 숲 전체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고, 땅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대로 가면 여기 있는 모두가 불길에 휩쓸려 죽을 것은 자명한 일!
그런데 아슬란 저자는······.
“마지막까지 추잡스럽구나. 악마라는 것들은.”
“!?”
불길이 자신을 삼키려 드는 것을 태연하게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사라져라.”
그 말 한마디와 함께 악마에게서 나오는 검은 마기가, 그 맹렬한 불길이,
콰아아아아-!!
그의 손에 빨려 들어가면서 동시에 찬란한 빛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으헉!”
“으아아!”
휘몰아치는 강한 바람에 기사들은 제자리에 똑바로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했으며, 빛은 순식간에 어둠을 집어삼켜 오염되었던 숲을 정화했다.
“이, 이것이······.”
어둠을 정화하는 빛의 힘.
바로 아슬란의 힘이었다.
* * *
‘뒤, 뒤지는 줄 알았네.’
잠시 잊고 있던 것이 있었다.
악마에 의해, 그것도 네임드급 악마에 의해 오염된 곳은 그 근원이 되는 악마나, 혹은 힘이 사라지면 마기가 폭주하여 그 근방이 검은 불길에 휩싸이고 폭발한다는 것을 말이다.
‘원래는 그닥 큰 피해를 주지 않지만.’
보통의 경우라면 근원이 폭발해도 그럭저럭 참을만하다.
그러나 내 몸이 아슬란이라는 것과 이 세계의 난이도가 극악이라는 것을 잠시 망각했다.
과연 벨로스가 죽자마자 근원은 폭발할 조짐을 보였고, 그 위력은 내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으나,
‘마기 포식자 덕분에 살았어.’
본능적으로 발동시킨 마기 포식자.
그것이 들끓던 마기를 빨아들이고, 벨로스의 몸을 흡수해 버렸다.
그렇게 해서 생긴 나의 새로운 능력은 바로······!
쿠웅!
그때 저 앞에서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명도 함께 들려오는 것을 보아,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이 또 있었다는 건가?
나는 기사들과 같이 소리가 들려왔던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크으윽.”
신음을 흘리고 있는 크라엘이 있었다.
그의 뒤로 ‘만’ 왕국의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들도 여럿 보였다.
‘얘는 또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우리가 오기 전에 먼저 벨로스와 싸웠던 건가.
벨로스의 악취미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이 붙잡은 인간을 매달아 놓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천천히 고문을 하며 정기를 흡수하는 것인데, 이놈들이 딱 그 꼴을 당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아, 아슬란······.”
‘만’ 왕국의 최고 권력자, 크라엘.
비록 다른 두 명의 소드마스터가 있지만, 실질적인 권력 행사는 크라엘이 한다.
그는 왕국에서도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크라엘을 죽이게 된다면 만 왕국의 기사단은 동귀어진을 할 각오로 우리 왕국에 쳐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놈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일라이 왕국과 만 왕국의 험악한 관계를 되돌려 놓을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하나뿐.
최대한 부드럽고 따뜻한 어조로 크라엘을 대하는 것이다.
그가 나를 신뢰할 수 있게!
하지만,
“꼴사나운 모습이로군. 한 왕국의 대기사단장이라는 놈이.”
“······.”
악마를 죽이고, 그 힘을 포식하는 순간부터 머리 끝까지 차올라 있던 허세가 그걸 가만두고 볼 리 없었다.
“언제까지 누워 있을 생각이지?”
“크, 크윽.”
그는 몸을 꿈틀거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 우릴 어쩔 셈이지? 여기서 다 죽일 건가?”
난 마치 너 같은 건 하찮아서 상대하기도 귀찮다는 듯이 대꾸했다.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그냥 거기 누워 있거라. 네가 오랫동안 나오지 않는다면 만 왕국에서 곧 구조대를 보내겠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다르지만, 그래도 이 정도 했으면 되려나?
“자, 잠깐! 우릴 정말로 이대로 보내겠다고? 여기서 날 죽인다면 ‘만’ 왕국은 큰 전력을 잃게 된다.”
나는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저번처럼 또 우리를 그냥 보내 준다는 것이냐?”
그 말이 트리거가 된 것일까.
사그라들기 시작했던 허세가 다시 치밀어 올랐다.
“감히 내 긍지를 더럽히려는 것이냐?”
“······뭐?”
“검도 들지 못하는 상대를 죽이는 건 기사의 수치다. 우리 일라이 왕국의 기사단을, 그리고 나 아슬란을, 너희같이 한심하고 명예를 모르는 놈들과 똑같다 여기지 마라!”
크라엘은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병적인 허세가 절정을 찍으며 폭발했다.
“정 나와 싸우고 싶다면 힘을 회복하고 와라. 그땐 원하는 대로 죽여 줄 테니.”
“!?”
“알아들었으면 돌아가라.”
그 말을 끝으로 나는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펄럭~!
그리고 허세의 끝은 언제나 망토로 마무리가 되었다.
* * *
“어서 달려라! 크라엘이 위험하다!”
“예!!”
크라엘이 오염된 숲에 들어간 뒤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보고를 들은 라이에르는 기사단을 이끌고 진격했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했을 땐.
“분명 오염되었다고 하지 않았나?”
숲은 멀쩡했다.
아니. 오히려 광채가 나고 있었다.
“서둘러 들어간다!”
“예!”
라이에르는 빠르게 기사단과 숲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크라엘!!”
초루한 몰골로 기사들과 바닥에 쓰러져 있는 크라엘이었다.
“주변을 경계하라!”
라이에르는 말에서 내려 크라엘에게 달려갔다.
“크라엘! 괜찮으냐?”
“라이에르······.”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크라엘은 떨리는 눈동자로 자신을 부축하는 라이에르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라이에르. 난······ 언젠가 우리가 힘을 키우면 가능할 줄 알았다.”
“뭐?”
“하지만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어. 우린 영원히 아슬란 그자를······ 뛰어넘을 수 없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크라엘.”
“나는 보았다, 라이에르. 진정한 빛의 기사를. 그는 예언대로 악에 빠진 이 대륙을 구하게 될 거다.”
“······?”
라이에르는 한동안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크라엘을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그의 음성은 숲 전체에 퍼졌고, 기사들은 머리에 강렬하게 박혔다.
아슬란. 그 두렵고 경이로운 이름이.
* * *
“교단은······. 당신을 크게 오해하고 있군요. 그들은 악마의 부활을 부정하고 있지만, 전 오늘 똑똑히 봤어요. 그들이 하나둘 부활하고 있는 것을.”
그걸 이제라도 알았다니 다행이다.
“당신은 여전히 저를 따라 신전으로 갈 생각은 없으신 거겠죠?”
“그래.”
“그렇다면······.”
하리엘은 뭔가 큰 결심을 한 듯 소리쳤다.
“저도 여기 남을게요.”
“······?”
“이곳에서 당신과 함께 교단을 설득하겠어요. 악마의 부활은 진짜이며, 당신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는 것을.”
잠깐. 그렇다는 건.
‘하리엘이 당분간 내 밑에 있다는 건가?’
이거야말로 반가운 이야기였다.
저 하리엘이 내 곁에 있어 준다면 내 군단에 엄청난 힘이 될 것은 자명하다.
절대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인력 자원이라는 것이다.
당연히 좋다고 손을 얼싸 잡고 흔들어도 모자를 판이었지만.
“손님을 오래 붙잡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내 들끓는 허세에 말이 좋게 나갈 리 없었다.
그러나,
“손님이라 생각하지 마세요. 그냥 당신의 수하처럼 부려 먹어도 좋아요.”
“조금이라도 부족하다 생각된다면 가차 없이 쫓아낼 거다, 하리엘.”
“예!”
다행히 좋게 마무리가 된 듯싶었다.
나는 일라이 왕국으로 돌아와 병력을 재정비했다.
그동안 하리엘은 사람을 보내 이곳 상황일 세세하게 알렸다.
과연 하리엘의 설득이 얼마나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교단과의 불필요한 충돌은 줄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았다.
[염동]
-15초 동안 염동을 발휘합니다. (재사용 대기시간 5초)
-반경 30m까지 영향을 끼칩니다.
-염동의 힘은 사용자의 힘에 비례합니다.
마기 포식자를 통해 얻은 벨로스의 능력, 염동이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마기 포식자는 피래미들을 흡수해봤자 아무런 힘도 주지 않는다.
벨로스처럼 네임드여야만 그 진가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럼 앞으로도 마기 포식자를 쓰려면 무조건 네임드를 쓰러뜨려야 된다는 거잖아?”
더럽게 입맛 까다로운 능력이었다.
“그럼 한번······.”
나는 내 옆에 있는 컵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염동을 사용하자,
스르르.
컵이 미끄러지듯 내 손에 다가와 잡혔다.
“하하.”
이게 염동이구나.
나는 그 외의 것들도 하나씩 움직여 보았다.
컵처럼 작은 것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이 힘이 어디까지 작용을 하는지 알아냈다.
“역시 아슬란의 힘에 비례한 거라 자잘한 것밖에 안 되나.”
이번에는 내 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스르릉.
그러자 칼이 아주 천천히 검집에서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아직 조절에 미숙해서인지, 아니면 이게 내 한계치인지 검을 끝까지 빼었다고 컨트롤 하기가 어려웠다.
“이건 그냥 내 숙련도 문제인 거 같기도 하고.”
계속 연습을 한다면 칼 하나 드는 것 정도는 가능할 것처럼 보였다.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검증해야 할 것이 있다.
턱.
나는 미리 가져온 네모난 미스릴을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강철보다 단단하다는 미스릴.
이것을 내 염력으로 찌그러뜨릴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적이라도 원거리에서 머리를 터트릴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힘으로는 어림도 없겠지.”
하지만 다른 능력들처럼 이 염동에 찰나의 괴력을 섞는다면?
우우웅-!!
나는 망설이지 않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그러자 내 몸이 붕 뜰 것만 같은 어마어마한 힘이 밑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난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여 저 미스릴을 향해 힘을 집중시키는 순간.
콰직-!!
저 미스릴이 나약한 철 쪼가리처럼 찌그러지다 못 해 찢어지고 있었다.
“돼, 됐다!”
그런 기쁨도 잠시.
쿠웅-!
“······?”
힘 조절을 잘못했던 것일까.
"어?"
미스릴를 기점으로 그 바닥에 갈라지더니, 곧 균열은 빠르게 일어나 기둥과 천장에까지 번져 나갔다.
그리고 이 건물을 넘어 그 바깥까지,
콰콱! 콰콰콱-!!
큰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온 세상이 비명을 지르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