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0.01초 소드마스터 52화
“여길 건너면 이제 돌이킬 수 없다.”
‘만’ 왕국의 기사단이 자스트라 경계선 앞에 섰다.
라이에르의 말에 키엔은 입꼬리를 씰룩였다.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는 건 말이 안 되지.”
이미 2천의 기사단까지 끌고 온 상태.
여기서 그냥 돌아가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그리고 오랫동안 이어지는 고요한 평화에 온몸이 쑤실 지경이었다.
키엔은 피맛이 그리웠다.
피를 끓게 하는 치열한 전투가 그리웠다.
“겁이 난다면 돌아가도 좋다, 라이에르.”
“그럴 리가 있나. 나는 그저 마지막으로 네 의지를 확인하는 것뿐이다.”
“그럼 잡담은 그만 하고 가지. 지금쯤이면 크라엘 그놈도 우리가 기사단을 끌고 나왔다는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결정이 섰으니, 이제 앞으로 돌진할 일만 남았다.
“가자!”
“예!!”
케인이 앞장을 서면서 그 뒤를 기사단이 따랐다.
그들은 경계선을 넘어 자스트라 숲 안으로 들어갔다.
어떤 것이 튀어 나올지 모르는 곳이었지만, 키엔은 신경 쓰지 않고 빠른 속도로 진격했다.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을까.
“음?”
전방에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기운에 그는 손을 들어 행군을 멈췄다.
“느껴지나, 라이에르.”
“그래. 저 앞에 뭔가가 있군.”
이들의 예리한 감각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캬오오-!”
팔인 거 같기도 하고 다리인 거 같기도 한 것을 여섯 개나 달고 있는 흉측한 몬스터가 수풀 사이로 튀어 나와 두 사람에게 달려 들었다.
스걱-!
하지만 그것이 가까이 다가오기도 전에 라이에르가 쏘아 보낸 검기에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저런 몬스터는 처음 보는데?”
미지의 땅이라 불리는 자스트라이니, 처음 보는 몬스터가 튀어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키엔. 이 몬스터가 흘리는 피를 봐라.”
“음?”
몬스터의 몸에서 흐르는 검은 피.
그것은 곧,
“검은 피를 가진 건 테키나 족속 밖에 없지.”
“뭐?”
곧 키엔이 풉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서, 이놈이 악마라는 거냐?”
“악마가 만들어낸 몬스터라고 하는 것이 맞겠지.”
“말도 안 되는 억측이다. 300년 전에 사라진 놈들이 무슨 수로 다시 나타난다고. 이야기 책을 너무 많이 봤구나, 라이에르.”
그렇게 웃어 넘기려고 할 때였다.
두두두두-!
땅을 울리는 진동이 미세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점점 가까워지더니,
“캬오오오-!!”
방금과 똑같은 몬스터가,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닌 수십, 수백이 넘는 놈들이 수풀을 헤치고 나타났다.
“이놈들이 겁대가리를 상실했나.”
키엔은 본인의 대검을 꺼내 길게 휘둘렀다.
푸확-!!
그곳에서 나간 검강이 몬스터들을 가르며 지나갔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키, 키엔님!!”
“라이에르님!!”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사, 사방에서 몰려옵니다!!”
여기 저기서 기사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 숫자가 몇인지도 알 수 없는 검은 몬스터들이 떼로 몰려오고 있었다.
“대체 이것들은 뭐야?!”
“지금 그걸 따질 때가 아니다. 모두 전투 준비!”
호드와 싸우기 위해 왔건만, 갑자기 나타난 몬스터 웨이브에 기사들은 모두 무기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몰려오는 몬스터들과 부딪혀 싸우기 시작했다.
“이런 더러운 몬스터들이-!”
키엔과 라이에르는 화려한 검술과 강력한 힘으로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빠르게 제거해 나갔다.
기사단 역시 그 둘의 활약에 힘입어 전투를 하고 있던 중.
쿠웅-! 쿠웅-!
“······저건 또 뭐야?”
그들 앞에 새로운 몬스터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 * *
“무기를 들어라!!”
“오늘 이 땅에서 악마들을 전부 몰아낼 것이다!”
“우우-!”
드높은 호드의 사기.
“일라이 왕국의 명예를 더럽히지 마라!”
“우린 자랑스러운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의 기사단이다!”
“악마들을 처단하라!”
드높은 기사단의 긍지.
‘이 정도면 싸울 만 하려나.’
봉인이 잠시 풀렸다는 건 게이트가 열렸다는 것인데, 과연 그 사이에 몬스터들이 얼마나 쏟아져 나왔을지는 모른다.
아직까지 별다른 징조가 없는 것을 보면 네임드 악마는 안 나왔다고 봐야 하는 건가?
“대기사단장님! 전투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정찰조의 보고입니다! 현재 다수의 몬스터들이 이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합니다!”
만반의 준비를 갖췄지만, 얼마나 많은 몬스터가 쳐들어올지 몰라 나는 지금 초긴장 상태였다.
물론, 겉으로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올 테면 와 보라는 듯, 내 표정과 자세는 아주 여유만만이었다.
“놈들의 숫자는?”
“족히 수천은 넘어 보인다고 합니다. 어쩌면 만 단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럼 만 단위로 보는 게 맞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 기사단 전체를 끌고 오는 건데.
그래도 다행인 건 호드가 우리와 같은 편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숫자가 너무 많다.
지금이라도 냅다 튀어야 되나?
“대기사단장님!”
그때 아론이 나를 불렀다.
“저길 보십시오!”
그가 가리킨 곳은 울창한 숲이었다.
그런데 그곳의 나무들이 흔들리면서 그 파동이 점점 우리 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몬스터들이, 그것도 많은 숫자의 몬스터 웨이브가 몰아치고 있는 것이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면,
‘옆으로 빠지는 놈들이 있는 거 같은데.’
우회를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저 옆에 있는 것인지 그 파동이 옆쪽으로도 기울어져 있다는 점이다.
‘지금 저걸 신경 쓸 때가 아니지.’
우선은 눈앞에 있는 적을 상대해야 할 때다.
“악마들이 몰려온다!!”
“전투 대형을 갖춰라!”
기사단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대형을 갖추었다.
지금까지 훈련을 빡세게 시킨 보람이 있었다.
전에는 저놈들을 언제 사람 구실 하게 만드나- 싶었는데, 지금은 아주 늠름한 기사단의 위용을 드러냈다.
“호드는 싸운다! 호드는 두렵지 않다!”
“얼마든지 와라!”
호드들도 그들의 기마 역할을 하는 벨랍토르를 올라타 길게 늘어섰다.
이제 곧 몬스터 웨이브가 몰려오기에, 나는 아론을 불렀다.
“아론.”
“예, 대기사단장님!”
그 어느 때보다 아론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내가 너에게 명령할 것은 하나밖에 없다.”
난 죽어도 몬스터 웨이브에 갇히고 싶지 않다.
그 징그러운 놈들 손에 죽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다.
그러니,
“내가 칼을 뽑는 일이 없도록 해라.”
나를 지켜라.
내가 죽는 일이 없도록.
“예! 기대에 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의미 전달은 잘 된 것 같았다.
이윽고,
“캬오오오-!!”
저 멀리서 몬스터들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검은 몬스터들의 웨이브가 우리가 있는 언덕을 향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크록들이구나.’
테키나 족속이 어둠의 힘으로 만들어낸 잡몬스터 종류다.
하지만 잡몹이라고 무시하면 안 된다.
테키나 족속을 놓고 봤을 때 잡몹인 것이지, 절대 약한 놈들이 아니다.
거기다 놈들은 떼로 몰려다니는 놈들이기에 아차 하는 순간 웨이브에 휩쓸려 버린다.
“대기사단장님. 명령을-!”
“명령을!”
기사단이 일제히 내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심장을 타고 뜨거운 허세가 치밀어 올랐다.
길게 말할 것도 없었다.
“쓸어 버려라.”
이 한 마디면 충분하다.
그에 따라 아론이 칼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기사단! 진격!”
“오오오-!!”
“일라이 왕국의 영광을 위하여!!”
그런 그의 외침에,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을 위하여!!”
기사들이 큰 목소리로 답했다.
그렇게 기사단이 용맹하게 앞으로 돌진했다.
그것에 자극을 받은 것일까.
“호드들이여! 선조들이 남기신 이 땅을 지켜라! 그분들의 명예를 지켜라!”
“우우-!!”
막투르를 선두로 호드의 전사들도 적을 향해 달려갔다.
“캬오오-!!”
“죽여라!!”
콰앙-! 콰콰콱-!!
몬스터 웨이브와 호드, 그리고 기사단의 충돌.
그 피 튀기는 싸움이 이곳 자스트라에서 펼쳐졌다.
나는 뒤에서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팔짱을 낀 채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다.
누가 보면 아주 대단한 지휘관이 납신 것처럼 보이겠지만,
‘제발, 제발 별탈 없이 잘 끝나게 해주세요.’
속으로는 아주 간절히 빌고 있었다.
그런 내 간절한 소원을 들어 준 것일까.
“하아압-!!”
콰직-!!
“전부 섬멸하라!!”
네임드 캐릭터들이 아주 큰 활약을 해주고 있었다.
‘옳지. 잘한다!’
아론은 뛰어난 검술로 몰려드는 몬스터들을 도륙내고 있었고, 알렉산더 역시 자신이 왜 이 게임의 주인공인지 알려주듯 존재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거기에,
“필리엣!”
라파엘이 소환하는 정령 마법도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한 공격을 구사하는 중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키루우우-!”
사파이어 자쿤도 하늘을 비행하며 지원 공격을 해주고 있었다.
‘흐름이 나쁘지 않다.’
각성을 마친 호드들의 전투력은 과연 기대 이상이다.
특히 대족장 막투르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가 도끼를 휘두르면 몬스터들이 죄다 썰려 나가 버린다.
“전부 덤벼라!!”
콰아아앙-!!
강하구나.
역시 네임드 캐릭터.
‘쓰읍-.’
부러움에 배알이 꼴렸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하겠어.’
몬스터 웨이브 숫자가 많긴 했지만, 다행히 압도적이진 않았다.
아무래도 처음 저놈들이 우리에게 달려왔을 때, 그중 일부가 옆으로 빠져나가면서 공백이 생긴 덕분인 것 같았다.
‘대체 그놈들은 어디로 간 거지?’
처음에는 우회를 해서 돌아오나 싶었는데, 감감무소식인 것을 보면 다른 적을 상대하러 갔다는 것인데······.
쿠웅-! 쿠웅-!
“아니?”
“저, 저건 뭐야?!”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전장의 공기를 바꾸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오오오-!!”
크록과 비슷한 생김새와 몸통이었지만, 그 크기는 몇 배에 달하는 대형 몬스터!
“이, 이건······.”
“대형 몬스터다!!”
어림 잡아도 4m는 되어 보이는, 저 거인 막투르보다 두 배는 큰 크록 몬스터.
그것들이 1마리도 아니고 여러 마리나 동시에 등장해 기사단과 호드들을 당황케 했다.
콰콰쾅-!
“으아악!”
그놈들이 마구잡이로 팔을 휘두르며 난동을 피우자 기사들의 피해가 커지기 시작했다.
“내가 막겠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점은 저 대형 크록을 상대할 네임드 캐릭터들이 이곳에 있다는 것이었다.
아론은 번쩍 날아올라 대형 크록의 머리에 칼을 박았고, 그 뒤를 알렉산더가 따르며 엄호했다.
막투르 역시 무지막지한 힘으로 대형 몬스터를 넘어뜨린 뒤, 그 미간에 도끼를 처박는 등, 아주 침착하게 대응을 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라파엘도 마법을 이용해 대형 몬스터들을 괴롭히고 있으니,
‘이 정도면 케어 가능한 수준이다.’
잠깐 흔들렸지만, 다행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솔직히 이 타이밍에 대형 몬스터가 등장하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거긴 한데.’
그래도 잘 해결만 된다면야 만사 오케이였다.
‘그럼 이제 슬슬 마무리인가.’
······라는 말을 하면 안 됐었다.
메인 하이라이트는 지금부터였다.
쿠우웅-!! 쿠우웅-!!
저 대형 크록들이 만들어내는 진동보다 더 강력한 무언가가 숲 전체를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 크기가 얼마나 높은 것인지, 울창한 숲 위로 솟아오른 머리와 몸통이 보일 정도였다.
이윽고 그것은,
콰아아앙-!!
땅을 내리찍으며 그 위협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크워어어-!!”
마치 킹콩처럼 단단한 가슴을 두드리는 몬스터의 정체는 바로,
‘네피림!?’
대형 몬스터의 다음 단계라 볼 수 있는 네피림 등급 몬스터.
거인이라는 뜻에 네피림이란 단어에 걸맞게 그 크기는 엄청 났다.
높이 7m나 되는 그 거대함에 막투르가 마치 벌레처럼 보일 정도다.
‘저게 왜 여기서 나와?’
네피림 등급의 몬스터라니.
그것도 저 몬스터는 나도 여러 번 봤던 몬스터였다.
[데키나콩]
킹콩 같은 생김새에 거대한 크기와 힘으로 적을 압도하는 놈이다.
지금 테키나 족속이 봉인을 깨고 나와 몬스터 웨이브를 일으키는 것도 기가 찰 일인데, 벌써부터 네피림 등급이라니!
“마, 막아라!”
잠시 그 거대함에 할 말을 잃었던 아론이 소리쳤다.
하지만 그 크기에 압도당한 기사들은 섣불리 움직이질 못했다.
그건 호드들도 마찬가지.
그리고 데키나콩 역시 이들에게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놈의 눈이 향하는 곳은 바로,
‘난가?’
아니겠지?
“푸흥-!!”
검은 털, 검은 피부, 거기다 힘차게 내뿜는 콧김까지 검다.
놈은 발바닥에 힘을 꽉 주더니, 곧 높이 날아올랐다.
콰아아앙-!!
놈이 낙하한 곳에 있던 호드들은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 붕 떠버렸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데키나 콩은,
쿠웅-!
또 한 번 날아올라 낙하하더니,
쿠우웅-!!
두 번,
쿠우우웅-!!
세 번.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에 이르러,
“크오오오오-!!”
놈은 바로 내 밑으로 낙하하고 있었다.
‘뭐, 뭐야.’
그와 동시에 놈의 검은 주먹이 뻗어졌다.
‘대체 왜 나한테 그래!?’
아론이, 라파엘이, 알렉산더가 날 부르는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대, 대기사단장님!!”
그리고,
콰아아앙-!!
데키나콩의 거대한 주먹이 내게 떨어졌다.
그것이 일으킨 파동은 넓게 퍼져 나가, 온 숲을 흔들어 놓았다.
하지만-.
“아니!?”
“대기사단장님!”
그 주먹이 내게 닿는 일은 없었다.
마치 주먹이 허공에 멈춘 것처럼 바로 내 코앞에서 멈춰 버렸다.
“······크릉?”
당황한 몬스터의 얼굴이 내 눈에 똑똑히 보였다.
콰콱-!
그리고 내 방어막을 뚫지도 못 하고 흡수조차 되지 않은 데키나콩의 무지막지한 힘이, 파도처럼 일렁이며 놈의 주먹을 타고 몸 전체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크오오-!”
놈은 괴성을 지르며 몸을 휘청거렸다.
온몸에 핏줄이 터져 버리고 팔은 부러진 것인지 축 아래로 늘어졌다.
그런 놈의 모습을 보며 나는,
“감히-.”
스르릉-.
천천히 칼을 빼 들었다.
“더러운 마물 따위가.”
주체할 수 없이 넘쳐나는 허세와 분노에 온몸이 전율을 일으켰다.
“죽어라.”
나는 그대로 칼을 휘둘렀다.
그러자 검을 타고 뻗어 나가는 찬란한 빛의 검강이,
키이이잉-!!
저 거대한 몸뚱이를 빠르게 갈라 버리며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