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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초 소드마스터-47화 (47/200)

47화

0.01초 소드마스터 47화

신전의 아침은 오늘도 라할의 빛처럼 밝았다.

아침 햇살을 받은 외모가 더욱 광이 나는 듯, 하리엘의 뽀얀 얼굴에 신전 안을 거닐던 기사들과 사제들은 한번씩 그녀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날 이후 연락이 한번도 없네.’

하늘을 바라보며 천천히 걷고 있던 하리엘은 괜히 심술이 났다.

‘언제는 누군가의 소원이었느니 뭐니 하면서 다 해줄 것처럼 굴더니.’

그래서인지 양쪽 볼이 툭 튀어 나왔다.

‘괜히 사람 기다리게만 하고 말이야.’

그래도 한번은, 지나가듯이 한번쯤은 연락을 해줄 거라 생각했다.

아무리 하리엘 자신이 교단의 검이고, 어떤 남자와도 진지한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안부 삼아 한번쯤은 연락을 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하리엘 님.”

에길론의 목소리에 하리엘은 정신을 차리며 뾰로통해 있던 표정을 얼른 풀었다.

“흠흠. 그, 그래. 무슨 일이냐?”

요즘 들어 조금 이상한 하리엘의 모습에 에길론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다 대답했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에길론이 건네는 서신을 받아 확인하던 하리엘의 두 눈동자가 커졌다.

“에, 엘티히? 엘티히가 움직였다고?”

“예. 소수의 인원과 함께 움직였다고 합니다.”

엘티히는 대륙에 있는 마법사 중 누구도 상대할 수가 없는 최강의 엘프로 알려져 있다. 당연히 그녀는 경호병력을 많이 데리고 다니지 않는다.

이미 그녀 스스로가 최강이기에 누가 지켜 줄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더욱 가관인 것은,

“아슬란이랑 엘티히가 왜 싸움을······.”

뜬금없이 아슬란과 엘티히가 맞붙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워낙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탓에 정보원들은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했으며, 그들의 싸움에 휘말려 애꿎은 몬스터 떼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충격적인 건 아슬란과 엘티히의 대결은 무승부로 끝났다는 것.

“무승부? 정말 무승부로 끝이 났다고?”

“그렇다고 합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아슬란이 그 엘티히와 비겼다는 건가?

아슬란에 대한 평가가 요즘 많이 바뀌었다고 해도 상대는 무려 엘티히다.

그녀는 신화 속에 나오는 전설 같은 마법사다.

100번을 생각해 봐도 도저히 아슬란이 비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둘이 무승부로 끝이 났다는 건······.

“아슬란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

에길론의 말에 하리엘은 자신도 모르게 납득했다.

둘이 무슨 이유로 싸운 것인지는 알려진 게 없지만, 그토록 터무니없이 강하니 엘티히와 싸워서 비긴 것이겠지.

하지만 그녀가 가장 궁금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괜찮은 걸까, 그 사람.’

그 정도로 치열하게 싸웠다면 몸이 성치는 않을 터.

크게 다치지는 않았는지, 만약 다쳤다면 얼마나 다친 것인지.

‘알려주면 어디 덧나나.’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

그냥 짧게 편지라도 주면 되잖아.

“이런 나쁜 새······.”

“네?”

휴.

짧게 숨을 내쉬며 하리엘은 속으로 말을 삼켰다.

“아무것도 아니야. 계속 정보가 나오는 대로 보고해줘.”

“알겠습니다.”

요즘 따라 자기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혹시 그 사람도 자신과 같은 기분인 걸까?

* * *

왜 귀가 가렵지.

누가 내 욕을 하나.

나는 슬쩍 호레스를 노려보았다.

“······.”

그러자 그는 흠칫거리며 내게 고개를 조아렸다.

“왜 그러시는지······.”

“아무것도 아니다.”

잠시 정체되었던 회의는 넬라의 목소리와 함께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대기사단장님께서 기사단의 해이해진 기강을 다잡기 위해

힘을 발휘하셨다고 말입니다.”

호탕한 그의 웃음소리에 다른 신하들도 따라 웃었다.

어제 의도치 않게 발동되었던 피어가 집무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에게 모조리 영향을 끼쳤다.

이건 명백히 스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남용한 내 잘못이었으나,

“이게 웃을 일인가?”

“······.”

또 사람들 앞이라고 거만하게 튀어나오는 허세가 오히려 기사들을 다그치고 있었다.

“한심하구나. 나의 기사라는 자들이, 최강의 기사단이라 자부하는 자들이 고작 그것 하나 버티지 못해서야.”

그러자 넬라를 비롯해 기사들 모두 고개를 숙였다.

“소, 송구합니다.”

그걸 버티라고 하는 건 양심 없는 말이긴 했다.

무려 찰나의 괴력을 섞은 피어이지 않던가.

심지어 의지의 피어라고 했던 것이 지금은,

[혼돈의 피어]

-찰나의 괴력을 의지의 피어와 동시 사용 시 옵션 효과가 혼돈의 피어로 변경됩니다.

-최고 등급의 피어를 15초 동안 유지합니다.

-150m 안에 있는 대상을 무력화시키고 극강의 공포를 심어 줍니다.

혼돈의 피어로 뒤바뀌었다.

그것도 무려 최고 등급의 피어로!

‘혼돈의 피어라면 혼돈의 드래곤이 쓰는 능력 아니었나?’

15초밖에 쓰지 못한다는 것이 무척 아쉬웠지만, 스킬 자체는 최고였다.

‘컨트롤 연습만 하면 되겠어.’

어차피 사거리를 내 마음대로 늘릴 순 없으니, 적군과 아군을 가려서 쓸 수 있으면 된다.

나는 잠시 길어졌던 침묵을 깨고 기사단에게 말했다.

“한번만 더 그런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가만두지 않겠다.”

“예!”

그렇게 오늘도 1일 1허세를 부려 준 뒤에야 다음 안건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자스트라 경계선에서 요즘 푸른 빛을 띤 비행 몬스터 하나가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합니다. 생김새는 자쿤을 닮았으며, 그 깃털에서 나오는 빛이 심상치 않아 주민들이 종종 불안에 떨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자스트라 경계선 이야기면 충분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도 된다.

그곳 너머에 있는 곳은 인간이 살지 않는, 인간 이외의 종족들이 사는 곳이기 때문이다.

호드, 드워프, 키나브 등등.

엘프같이 인간과 단절하여 자기들만의 영역을 가진 종족.

그중에서 유일하게 조금이나마 인간과 교류를 하고 있는 곳은 드워프들 뿐이다.

또한 자스트라 경계선 너머로는 굉장히 많은 몬스터가 있어서 가끔 이곳에서는 잘 보지 못하는 몬스터가 툭 튀어나오곤 한다.

보통 때라면 그냥 넘어가겠지만,

‘자쿤을 닮은 푸른 빛의 비행 몬스터?’

그거 설마 네잎클로바 아닌가?

플레이어들에게 네잎클로바로 불리는 사파이어 자쿤.

머리 위에 솟아 나와 있는 뿔이 네잎클로바를 닮았기도 하고, 행운을 가져다주는 그 의미처럼 꽤 좋은 아이템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그리 불리는 몬스터였다.

길이 4m 정도 되는 몬스터인데, 전투력은 크게 높지 않지만, 비행을 한다는 까다로움이 있어 검으로 사냥하는 건 힘들다.

그러나 내게는 이제 강력한 마법을 구사할 줄 아는 라파엘이 있지 않던가.

“그 경계선과 마을이 가까운가?”

“다행히 조금 거리가 됩니다만, 문제는 그 몬스터를 쫓아 호드들이 자꾸 국경을 침범하고 있는 터라 보고가 올라온 것입니다.”

호드.

유저들 사이에서는 오크라고도 불리는 족속.

날카롭고 두꺼운 어금니가 입 밖으로 나온 것도 그렇고, 피부가 초록색인 것도 그렇고 흡사 몬스터를 닮았다.

‘뭐 이런 걸 일일이 반응하면 나만 피곤해지지.’

사실 그들이 국경을 넘는 건 흔히 있는 일이었다.

호전적인 그들은 몬스터 사냥 중에 경계선을 넘어야 하는 일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그냥 넘어 버린다.

그러다 다른 왕국 기사단과 싸움이 나면 그걸 또 피하지 않고 싸우는 것으로 유명하다.

겁대가리를 상실한 건지, 아니면 지능이 딸리는 건지, 수적으로 불리해도 일단 냅다 박고 보는 것이 바로 호드다.

그나마 다행인 건 보통 국경을 넘는 놈들은 전투력이 그리 높지 않고 숫자도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숫자가 많다고 해도 어차피 그 안에 네임드가 섞여 있지 않으면 지휘 체계도 엉망인지라 크게 무서워할 필요는 없었다.

‘보통 때라면 그냥 넘어갔겠지만.’

좋은 아이템을 뿌리고 다니는 네잎클로바가 있단 얘기를 들었으니, 이걸 그냥 넘길 순 없었다.

그놈이 아무리 비행 몬스터라고 해도 라파엘의 마법이면 얼마 못 버티고 쓰러질 터. 거기다 호드들이 뒤따라 나온다면 그건 아론과 알렉산더, 그리고 자랑스러운 나의 기사단이 처리할 것이다.

전면전이 나지 않을 정도로만 호드를 위협해 쫓아내면 끝이라는 것.

나는 나설 필요 없이 뒤에 있다가 일이 다 끝나면 아이템 회수만 하면 된다.

문제는,

“감히 미물들 따위가 우리 국경을 넘나들고 있다는 것이냐?”

오늘만큼은 막지 않고 풀어 주었던 병적인 허세가 정수리를 뚫을 듯이 치솟아 올랐다는 것이다.

“건방진 놈들. 우리 왕국을 우습게 보면 어떤 결말을 맞게 되는지 놈들을 통해 모든 왕국과 족속에게 본보기를 보여야겠구나."

그러면서 나는 앉아 있던 상석의 팔걸이를 붙잡았다.

“만약 그들이 정녕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면-.”

한번 날뛰기 시작한 허세는 거칠 것이 없었다.

“죽음으로 그 죄를 갚게 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콰콰콱-!!

손잡이부터 시작된 균열이 곧 의자 전체를 부숴 버렸다.

“!?”

기사들과 문관들은 일제히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

그동안 나는 속으로 탄식을 내질렀다.

‘아끼던 의자였는데.’

디자인도 마음에 들고 착석했을 때의 느낌도 무척 좋은 의자였는데.

이놈의 허세를 순간 참지 못하고-.

‘읏.’

나는 손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촉감에 슬쩍 고개를 내려보았다.

손에서는 파편이 박혀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

만약 회의장에 사람들만 없었다면 아이처럼 비명을 지르며 팔짝팔짝 뛰어다녔을 것이다.

* * *

“모두 그런 줄 알고 준비하도록.”

펄럭~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먼저 전각 밖을 나서는 아슬란.

그런 그가 나가고 나서야 그들은 참았던 숨을 뱉을 수 있었다.

“후아-.”

“휴우-.”

식은땀을 흘릴 정도로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눈빛만으로도 상대를 죽일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오늘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넬라는 미친 듯이 쿵쾅거리던 심장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대기사단장님께서 저리 크게 분노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자 호레스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동안 침묵하셨지만, 이제 강대국으로써의 면모를 보이시는 것 아니겠소? 그동안 오래 참으신 게지. 하지만 대기사단장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모든 왕국과 족속에게 경고할 때가 되었소.”

국왕 카르만도 칼라 왕국의 경계선을 허락도 없이 넘는 자가 있다면 그 신분을 막론하고 엄히 벌한다.

함부로 다른 왕국과 족속이 자신의 왕국을 넘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강대국의 국격이자, 품격이었다.

이제 일라이 왕국도 그런 강대국의 모습을 보이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기사단장님의 분노가 범상치 않은 건 확실하오.”

강철보다 더 단단한 재질로 만들어진 상석이었다.

그런데 아슬란은 저것을 종잇장처럼 찌그러뜨리다 못해 아예 산산조각을 내버렸다.

거기다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저 피.

그것도 무려 아슬란의 피다.

그 어떤 상대와의 싸움에서도 보이지 않았던 피를 이곳에서 보여 주었다.

“일부러 피까지 보이셨다는 건, 그 분노가 얼마나 깊은지 보여 주시는 것이오. 이거 자칫 잘못하면······.”

호레스의 말에 모두 귀를 쫑긋 세웠다.

“호드족이 말살을 당할 수도 있겠구려.”

그만큼 그의 분노가 크다는 뜻이리라.

“호, 호드족과 그럼 전면전인 겁니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호드족의 규모도 모르는 상태이지 않습니까?”

저들의 우려에 호레스는 고개를 저었다.

“다들 듣지 못하였소? 무려 엘프의 여왕, 엘티히와 호각을 이루신 분이오. 엘티히가 누구요? 제아무리 위대한 대마법사와 소드마스터라고 해도 엘티히에게는 모두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지.”

300년 전 대전쟁까지 치른 대륙의 영웅이자 마법사 중에서는 대적할 자가 없다는 엘티히다.

그런 그녀와 호각을 이룬 아슬란이라면······. 그의 강함이 어디까지인지 호레스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분께서 진정으로 호드를 쓸어 버리겠다고 하신다면 반드시 그리될 것이오.”

“······.”

그 말에 모두 마른침을 삼켰다.

호드가 사라질 수도 있다.

그것도 아슬란의 손에!

“우리는 그저 그분을 따르기만 하면 될 뿐.”

그들은 전부 의기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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