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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초 소드마스터-46화 (46/200)

46화

0.01 소드마스터 46화

“예쁜 여왕님. 다음에 또 놀러오세요.”

“그땐 더 맛있는 스튜랑 빵을 준비해 드릴게요.”

주민들의 따뜻한 인사에 엘티히는 미소를 지었다.

“고맙다. 꼭 한번 다시 오지. 그땐 다른 엘프들도 데려오겠다.”

“호호. 기다리고 있을게요.”

비록 반나절 밖에 같이 있지 않았지만, 벌써 주민들과 엘티히 사이에 정이 생긴 듯하다. 못내 아쉬워 하는 그들을 뒤로 하며 엘티히가 내게 다가왔다.

“우린 이제 엘드라비로 돌아가겠다. 그리고······.”

엘티히는 저 뒤에서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저 아이를 부탁한다.”

그 말은 라파엘을 정말 나한테 넘겨 주겠다는 건가?

순간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애 돌보는 취미는 없다.”

이놈의 허세에 떠밀려 나도 모르게 말이 헛나갔다.

그러나 엘티히는 여전히 옅게 웃는 얼굴이었다.

“가르칠 게 많은 아이다. 아직 철도 없고. 세상 물정도 모르겠지. 하지만 네가 말하지 않았나. 저 아이가 가진 재능은 진짜라는 거.”

라파엘의 재능이야 두말하면 입 아프다.

“어쩌면 저 아이의 재능은 먼미래 나를 뛰어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지만 그만큼 넘어야 할 산이 많겠지. 너는 괜찮다고 말할지 모르나, 저 아이의 몸에서 흐르는 피는 결코 무시할 만한 게 아니다.”

이 대사 어디서 많이 들어본 느낌이······.

“내 동생 엘리나는 금지된 사랑을 했고, 저 아이를 낳은 뒤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는 저 아이 때문에, 그 악마 때문에 내 동생이 죽은 거라고 원망했다. 그래서 아직 대륙에 남아 있는 테키나 족속의 마을을 찾아 그곳을 쓸어 버리기도 했지.”

테키나 족속 안에는 다양한 등급이 존재하며, 그 생김새도 다르다.

이렇게 등급도 나뉘고 생김새도 다른데 이들이 테키나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이유가 있다.

그건 바로 ‘마기’.

이들의 몸 전체가 마기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을 힘으로 사용한다.

이것이 테키나 족속의 아이덴티티다.

그중 ‘루인’ 등급이라 불리는 악마는 인간 체형에, 무척 아름답고 매혹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보통 악마의 피가 섞였다고 하면 루인 등급을 뜻한다.

얼마나 그 외모가 뛰어났는지, 무려 여왕의 동생이라는 엘리나도 그 꾀임에 넘어가 버린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짝 쓸모도 없는 일이었다. 저 아이의 아비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찾을 수도 없었지. 그래서 나는 필사적으로 저 아이를 숨기려 했다. 우리 엘프의 명예를 위해, 저 아이의 미래를 위해. 그래서 제일 먼저 가르친 것이 변신술이었지.”

슬슬 느낌이 이상했다.

이건 내 착각이 아니었다.

“그러나 저 가여운 아이를 위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어. 저 아이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저 아이에게만 무거운 짐을 올려놨었다.”

이 장면, 이 대사, 이 구도.

내가 게임에서 몇 번이나 봤던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바로 잡으면 되겠지. 저 아이와 내가 너를 만났으니까, 아슬란.”

방금 저 말로, 날 바라보는 저 눈빛으로 확신했다.

이건 엘티히가 주인공, 알렉산더에게 해야 하는 대사였다.

그런데 그녀는 그것을 지금 나에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저 아이를 부탁한다. 내 딸아이나 다름없는 저 아이를······너에게 맡기겠다.”

그렇다면 설마,

‘그, 그것도 주는 건 아니겠지?’

오직 알렉산더를 골랐을 때만 가능한 이야기.

오직 이 게임의 진주인공을 골랐을 때만 받을 수 있는 보상.

그것까지 바라는 건 아무래도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대사와 이 장면은 알렉산더로 플레이를 했을 때만 나오는 컷씬 같은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너에게 줄 것이 하나 있다.”

엘티히는 목걸이를 풀며 내게 건넸다.

심장이 쿵쾅 소리를 내며 터질 것 같았다.

“이게 뭐지?”

하지만 병적인 허세로 무장하고 있는 나는 덤덤한 얼굴로, 모른 척하며 받았다.

“내가 알고 있는 인간이 하나 있다. 그자가 훗날 반드시 쓸 일이 있을 거라고 내게 맡겨 둔 것이지. 언젠가 쓸 일이 생기면 본능적으로 알게 될 거라면서.”

“······그 인간이라는 건 라일라칸을 말하는 것인가?”

엘티히와 유일하게 친분을 쌓았던 인간이자 대륙 최강 소드마스터로 불렸던 인물.

라일라칸.

그의 이름에 엘티히는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다 대답했다.

“그래. 엘프들이 유일하게 친구로 기억하는 인간이다. 그자가 내게 남긴 것이다. 그땐 왜 이런 귀찮은 걸 맡기나 싶었는데······. 어쩌면 오늘을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군. 받아라.”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엘티히가 건네는 목걸이를 받았다.

[루겔로스의 펜던트]

-악의 힘을 물리치기 위해 만들어진 고대의 유물.

-여섯 개로 나뉜 팬던트들을 하나로 모으면 전설적인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지배의 신, 루겔로스의 가호가 함께 하는 팬던트입니다.

-펜던트 활성화 시 고유 능력이 부여됩니다.

무려 두 번째 펜던트였다.

이걸 정말 준다고?

이제까지 수많은 플레이를 해봤지만, 알렉산더 이외에 이 펜던트를 이런 식으로 받아낸 건 처음이었다.

“어디에 써야 하는 건지, 어떤 힘을 가졌는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라일라칸의 말로는 신들이 만든 펜던트 중 하나라고 하더군. 진짜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그 안에 영험한 힘이 담겨 있다는 건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쭉 가지고 있었던 건가?”

“허튼 말을 할 놈은 아니었다. 바로 너처럼 말이지.”

원래 스토리대로라면 엘티히는 라파엘을 알렉산더에게 맡기면서 이 펜던트를 함께 넘긴다. 내가 너를 믿고 있다는 증표 같은 것이었다.

그것이 이 펜던트를 가장 쉽게 얻을 방법이다.

하지만 알렉산더 말고 다른 캐릭터로 플레이했을 땐 이 펜던트를 무척 어렵게 구해야 했다.

“······일단 갖고는 있겠다.”

진짜 잘 갖고 있겠습니다.

“그래. 너라면 그 펜던트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알아낼······.”

바로 그때였다.

파앗-!

내 손에 들려 있던 펜던트가 갑자기 빛을 번쩍이면서 분해되더니, 순식간에 내 손목으로 빨려 들어갔다.

“!?”

엘티히는 내 손목에 남겨진 펜던트의 표식을 보고 놀란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신이 만든 팬던트라더니. 거짓말은 아니었군.”

펜던트를 활성화하지도 않았는데, 자기가 알아서 흡수된 거라 당황스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거기다, 신들이 선택한 기사······. 그 소문이 사실이었어. 정말 넌 신의 선택을 받은 것이로구나.”

하지만 아슬란의 허세는 여전히 꼿꼿했다.

마치 이 모든 것이 당연하다는 듯,

“난 신들이 무엇을 택했든 상관하지 않는다.”

엘티히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나 아슬란을 움직일 수 있는 건 오직 나의 의지뿐이다.”

“······.”

그런 장렬한 허세에 충격이라도 먹은 것일까.

엘티히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대륙이 망하든 불에 타 없어지든 뒤에서 뒷짐만 지고 있는 신들의 뜻 따위 알게 뭐란 말이냐.”

그러면서 그녀는 라파엘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라파엘. 몸조심하거라. 괜히 사고 치지 말고.”

“네, 여왕님. 잘 지내고 있을게요.”

엘티히가 손을 뻗자 포탈이 생겨났다.

포탈 마법은 무척 힘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엘티히에게는 그냥 모든 마법이 쉬워 보였다.

“아슬란. 언제 한번 엘드라비로 오거라. 손님이니, 박대하진 않겠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기대하지.”

엘티히는 옅은 미소를 보이며 포탈과 함께 사라졌다.

* * *

“아-”

결국 가 버렸구나.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상대는 300년 전 대전쟁을 치르기까지 한 영웅이지 않던가.

심지어 그녀는 엘프들의 여왕이다.

‘그래. 나 같은 놈이 어떻게 감히······.’

알렉산더는 그리 중얼거리며 스스로에게 위안을 삼았다.

그러나 여전히 미련은 남아 있었다.

어머니의 족속, 엘프.

어머니의 고향, 엘드라비.

알렉산더 자신의 몸에 흐르는 절반의 피는 엘프였다.

그렇기에 엘프와 그 족속이 산다는 숲의 낙원 엘드라비를 동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이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족인 엘프와 대화를 할 기회였을 것이다.

아, 라파엘이 이제 아슬란 님의 밑으로 들어왔으니 마지막은 아니려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누군가에게 이 사실을 알릴 순 없었다.

자신이 인간과 엘프에게서 나온 하프라는 사실을.

“왜 그러고 있지?”

잠시 멍하니 엘티히가 떠나간 자리를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옆에서 들리는 아슬란의 목소리에 알렉산더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직도 아슬란의 앞에만 서면 긴장이 된다.

또 무슨 실수를 할지, 또 무엇이 저분의 심기를 건드릴지,

내가 기사단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은 아닌지,

이러다 실망하고 쫓아내시는 건 아닌지······.

매번 걱정만 됐다.

그런데,

“네 마음을 난 잘 알고 있다, 알렉산더.”

아슬란이 알렉산더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토닥이듯 두드렸다.

“언젠가 엘드라비로 갈 일이 생긴다면 그때 널 꼭 데려가도록 하지.”

갑자기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지?

설마······.

“저들도 너의 동족이지 않나?”

순간 알렉산더는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머리가 멍해졌다.

아슬란은 알고 있다.

자신이 엘프와 인간에게서 나온 하프라는 것을.

대체 어떻게?

아니. 그걸 알면서도 왜 날 받아 준 거지?

그런 일련의 생각들이 스쳐 지나갈 때즈음.

“두려운 것이냐?”

묵직한 아슬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것이······.”

“그럴 필요 없다. 너의 핏줄이 어디든, 설령 네가 악마의 핏줄이라고 해도 내게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 말에 또 한번 정신이 멍해지는 것 같았다.

“넌 나의 곁을 지키고, 나의 수족이 되어 주는 기사다. 출신이나 핏줄은 상관없다.”

그의 목소리가 자신의 심부를 후벼 파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직 네가 나의 기사라는 것만 기억하면 된다, 알렉산더.”

그 말을 남기고서 아슬란은 등을 돌렸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펄럭이는 그의 망토가 오늘따라 더욱 위엄 넘치게 보였다.

“······.”

다 알고 계셨구나.

그동안 모두에게 숨겨 왔던 나의 출생의 비밀을.

그걸 알면서도 저분은 나를 당신의 기사로 인정하시는구나.

“읍-”

울컥이는 마음에 알렉산더는 두 손이 떨려왔다.

그동안 자신을 짓누르고 있던 것들이 단번에 사라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는 이제 왕국으로 돌아가고자 말 위에 올라타고 있는 아슬란을 향해 정중한 기사의 예를 차렸다.

그리고 맹세했다.

저분의 말대로, 앞으로도 저분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키고, 수족이 될 수 있는 기사가 되겠노라고.

* * *

일라이 왕국으로 돌아온 이후, 나는 라파엘을 우리 왕국의 수석 마법사로 세웠다.

“예? 마, 마탑이 없다고요?”

“그래. 아직 제대로 된 마법병단도 없다. 마법사는 좀 있다만.”

“헉.”

일라이 왕국 수준이 이 정도로 처참했을 거라고 미처 몰랐는지 라파엘의 얼굴은 충격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나는 이놈이 다른 곳으로 도망치기 전에 어깨를 두드리며 응원하듯 말해 주었다.

“일라이 왕국 최초의 마탑을 네가 세우는 것이다.”

“최초의 마탑······.”

“그래. 네가 모든 규칙을 만들고 틀을 정립하며 대륙 최강의 마법병단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넌 할 수 있다. 난 널 믿고 있다, 라파엘.”

그러자 라파엘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네!”

뜬금없이 왕국에 합류해 수석 마법사가 된 라파엘을 두고 반대의 목소리가 있었다.

왕국 내에 있던 마법사들이 주로 목소리를 높였는데, 그놈들은 라파엘이 시범으로 보여 준 마법을 몇 번 보고는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오히려 엄청난 마법사가 왔다며 기뻐하고 있었다.

“그럼 이제······.”

기다리고 기다리던 일을 할 때가 왔다.

일단 급한 것부터 처리를 하느라, 특히 부하들 앞이라 하지 못했던 일.

바로 이번에 새로 얻은 펜던트에 고유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다.

[루겔로스의 펜던트]

솔직히 이걸 이렇게 쉽게 얻을 줄은 몰랐다.

아니. 까놓고 말해서 쉽게 얻은 건 아니지.

엘티히한테 죽을 뻔한 게 몇 번이었는데.

“아이고. 제발 좋은 거 뜨게 해주세요. 제발 부탁 좀 드립니다.”

이 불쌍한 영혼을 봐서라도, 이 서러운 똥캐가 조금이나마 사람 구실 할 수 있게 좋은 옵션 좀 달라며 빌고 또 빌었다.

그렇게 간절한 기도를 끝낸 뒤,

“간다.”

계속 미뤄 두기만 했던 옵션 부여를 거행했다.

그리고,

[새로운 옵션을 부여합니다.]

팔찌에서 밝은 빛이 아닌, 검고 위압적인 힘이 뿜어져 나오더니 내 눈앞에 정보창 하나가 나타났다.

[의지의 피어]

-15초간 상대를 무력화 상태로 빠뜨립니다. (재사용 대기시간 5초)

-피어의 강도는 시전자의 힘에 비례합니다.

피어 스킬?

“의지의 피어는 어중간한 스킬 아니었나.”

피어라는 스킬은 여러 종류가 있었다.

드래곤 피어, 기사의 피어, 권능의 피어 등등.

하지만 의지의 피어라.

거기다 재사용 대기시간이 5초.

딱 5초밖에 안 되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스킬 자체 효과가 미미해서 거의 무한 즉발로 써도 상관이 없거든.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게 있었다.

“이것도 시전자의 힘에 비례하는 거라면······.”

아슬란의 무력 상태로는 턱도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만약 이것도 수호 방패처럼 찰나의 괴력을 섞을 수 있다면?”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궁금한 게 있으면 바로 행동에 옮기면 된다.

나는 의지의 피어와 찰나의 괴력을 동시에 사용해 보았다.

“······?”

뭐가 된 건가?

좀 둔중한 느낌이 나는 것도 같았는데.

어깨가 살짝 무거워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스킬을 꺼보았다.

그러자,

털썩-!

“우욱-!”

“크헉!”

집무실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

놀란 마음에 밖으로 나가 보니,

“으으-”

“대, 대기사단장님.”

“우욱-”

집무실 근처에 있던 기사들이 전부 창백해진 얼굴로 쓰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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