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0.01초 소드마스터 45화
저놈은 또 제 할 말만 하고 떠나 버렸다.
이런 건방진 인간! 이라고 소리치면서 뒤에다 헬파이어를 날려 주고 싶었지만-.
“······.”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슬란의 저 건방지기 짝이 없는 말이 마치 심판의 창처럼 가슴에 꽂혔기 때문이다.
‘한심하구나. 여왕이라는 자가 자신이 통치하는 엘프에게 그리도 믿음이 없다니.’
그랬던가.
엘프들의 여왕으로 군림하면서 엘티히는 항상 자신의 힘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모든 종족과의 단절이었다.
물론, 그것이 꼭 자신만의 잘못이라 할 수는 없지만, 만약 엘프들의 힘을 믿고 함께 싸워나갔다면 지금과는 다른 결과로 이어졌을까?
“선택이라······.”
엘프가 다시 세상에 나올 수 있는 선택.
한번 더 인간을 믿어 보는 선택.
아니. 어쩌면 인간이 아닌, 저 아슬란이라는 사람을 믿어 보는······ 선택.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모르겠다만.”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더 누군가를 믿어 보고 싶었다.
* * *
쿠쿠쿵-!!
“꺄악!”
“뭐, 뭐야?”
“지진인가?!”
“설마 또 몬스터들이 쳐들어 오는 건······!”
회관이 크게 흔들리자 회관에 모여 있던 주민들은 화들짝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어느새 이곳 주민들과 섞여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며 스튜를 먹고 있던 두 엘프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건······.”
“여왕님?”
라이리와 로나는 여왕의 마력을 느끼고, 그녀가 아슬란과 단둘이 있는 별관으로 뛰어갔다. 그러자 그들의 앞을 아론이 막아 세웠다.
“어딜 가시는 겁니까?”
“비키세요. 이건 분명 여왕님의 목소리였다고요.”
“두 분께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십니다.”
“알아요. 그런데 방금 그쪽도 느꼈을 거 아니에요? 이건 여왕님께서 엄청 화나셨을 때 나오는 마력이라고요. 그쪽 주군이 크게 다쳤을지도 몰라요.”
그러자 아론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오히려 그쪽 여왕님이 크게 다쳤으면 모를까, 우리 대기사단장님이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뭐, 뭐라고요? 당신은 우리 여왕님이 누군지 몰라요?”
“그쪽이야 말로 우리 대기사단장님을 잘 모르시는 것 같군요.”
라이리와 아론이 팽팽하게 기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끼익-.
“어?”
별관에서 문이 열리더니,
펄럭~
오늘도 멋들어지게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아슬란이 나오고 있었다.
어디 하나 그을린 자국도 없이 아주 멀쩡하게 걸어 나오는 아슬란을 보며 라이리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띠었다.
그에 반해 아론은 그거 보라며, 거만한 고갯짓을 보였다.
“방금 안에서 큰 소리가 들렸었는데······.”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아슬란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별일 아니었다.”
별일이 아니었다고?
여왕이 그 정도로 목소리에 마력을 실을 정도라면 필시 단단히 화가 났다는 건데, 이렇게 몸 멀쩡히 걸어 나올 수 있다니.
“라파엘.”
“······네? 아, 예? 저, 저요?”
“라파엘이란 이름이 여기에 너 말고 또 있나?”
“아, 넵! 부, 부르셨어요?”
“들어가 봐라. 아무래도 엘티히가 너와 할 얘기가 있을 거 같던데.”
안 그래도 아까부터 자신의 처우가 어떻게 될까 전전긍긍 하고 있던 라파엘이었다.
그녀는 아슬란의 말을 듣고 여왕이 있는 별관으로 뛰어갔다.
그러자 라이리와 로나가 그 뒤를 따랐다.
* * *
[히든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엘프족과의 외교 개선.
-보상으로 10골드를 얻습니다.
“······.”
대체 어디서, 뭐가 어떻게 외교 개선이 되었다는 거지?
나는 혼자 방 안에서 골똘히 정보창을 바라보았다.
히든 퀘스트 같은 경우는 말 그대로 히든 퀘스트라, 지금처럼 갑작스레 퀘스트 완료 알림창이 뜨기도 한다.
거기다 무려 보상이 10골드라니!
“근데 이거 어떻게 깬 거냐?”
가끔 보면 이 게임의 시스템을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지.
“아무리 봐도 즉사각이었는데.”
엘티히가 그 정도로 인내심 많은 캐릭터라는 걸 오늘 처음 알았다.
그런 말을 듣고도 내 뒤통수에 마법을 갈기지 않다니.
사실 방 밖을 나오면서 얼마나 떨렸는데.
지금도 손발이 후들후들 떨리는 것만 같았다.
“외교가 개선되었다는 건 엘프와 교역을 할 수 있다는 뜻인가?”
그 말은 엘프들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귀중한 자원을 다른 곳에 팔아 큰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건 곧 왕국 경제 발전으로 이어질 것이고, 그럼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세율을 높여 주머니를 빵빵하게 채울 수 있게 된다.
“하-. 돈만 많아지면 곧바로 중갑병부터 만들고, 방어벽도 새로 쌓고, 마탑도······ 잠깐. 그럼 라파엘은 어떻게 되는 거지?”
마탑을 세우려면 라파엘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엘프와의 외교가 개선되었다고 해서 엘티히가 과연 라파엘을 우리 왕국 쪽에 넘겨 주려 할지······.
혹시 몰라 라파엘을 엘티히가 있는 방으로 보내 둘이 대화를 나누도록 했지만,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미지수였다.
“안 주면 어쩔 수 없고.”
엘프들과 교역의 문을 열어 왕국 경제를 크게 키울 수만 있다면 라파엘 정도는 깔끔하게 포기할 수 있었다.
물론, 와주면 더 고맙고!
* * *
다급히 별관 안으로 들어온 라이리가 소리쳤다.
“여왕님!”
“······음?”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내가 다칠 일이 뭐가 있다고 그러느냐.”
그러자 두 엘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다행이다.”
“저희는 여왕님한테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구나.”
그러다 엘티히는 같이 따라 들어온 라파엘을 발견했다.
“마침 잘 왔다. 안 그래도 내 너와 할 얘기가 있었느니라. 둘은 잠시 나가 있거라.”
“아, 네. 무슨 일이 있으시면 꼭 저희를 불러 주십시오.”
“그래.”
두 엘프가 나가고 나서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라파엘. 너는······.”
그리고 엘티히가 천천히 운을 떼는 순간.
“싫어요!”
“?”
라파엘은 자동 반사처럼 연달아 소리쳤다.
“안 가요! 못 가요! 전 여기 있을 거예요!”
“······.”
그런 라파엘의 반응에 엘티히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네년이 드디어 정신이 나갔구나.”
무시무시한 살기를 드러냈다.
“감히 내가 말을 하기도 전에 끊어? 오냐오냐했더니, 진짜 죽고 싶은 것이냐?”
“헙-!”
그에 기겁한 라파엘은 하마터면 숨이 넘어갈 뻔했다.
“죄, 죄송······.”
“후-. 이런 놈이 뭐가 예쁘다고 아슬란 그놈은-.”
그러나 아슬란이라는 말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재빨리 들었다.
“네? 아슬란님이 왜요? 뭐라고 하셨는데요?”
“그래. 벌써 ‘님’이다, 이거냐?”
“그건······. 그래서 그분이 뭐라고 하셨는데요?”
“시끄럽다. 한번만 더 떠들면 그땐 두 번 다시 입을 열지 못 하게 만들어주지.”
라파엘은 한번만 더 말대꾸를 했다가는 진짜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맞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너를 왜 지금까지 밖으로 내보내려 하지 않았는지는······ 너도 잘 알 것이다.”
악마의 피를 이어받은 아이.
엘프 안에서도, 대륙 밖에서도 그 비밀이 새어 나가지 않도록 엘티히는 라파엘을 거의 숨기다시피 했다.
라파엘도 알고 있다.
자신이 왜 그리 살아야 했는지.
“네 어미이자 내 동생인 엘리나가 너를 남기고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맹세했다. 그 아이가 남긴 유언대로 너를 올바르게, 다치지 않게 잘 키우겠다고. 누구도 네 정체를 알지 못하게 하겠다고.”
그러나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제 뜻대로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었던가.
엘티히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에 족쇄가 되어 오히려 너를 더욱 다치게 한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네?”
“그래서 마음을 정했다. 이번 한번만 너를 믿어 보기로.”
“네에!?”
“네가 원하는 만큼 마음껏 뜻을 펼쳐 보라는 것이다.”
“네에에!?”
“쯧. 다시 예전처럼 갇혀 살고 싶으냐?”
라파엘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 그러니까 이게 너무 갑작스러워서······.”
“제 어미를 닮아서 허둥대기는. 단, 조건이 있다.”
그럼 그렇지.
조건이라는 말에 라파엘은 좋았다 말았다는 듯 기대감을 낮췄다.
그런데,
“네가 대륙을 탐험하고 싶다는 뜻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일라이 왕국의 마법사 신분으로 움직이거라. 절대 혼자 다녀서도 안 된다. 항상 나와 아슬란의 감시 하에 움직여야 한다. 다른 왕국의 마법사가 되어서도 안 된다.”
어차피 일라이 왕국 말고는 다른 왕국에 들어갈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그게··· 조건이에요?”
“그래.”
“정말 그것뿐이라고요? 정말?”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믿을 수 없었다.
그토록 강경했던 엘티히가 마음을 바꾸다니.
라파엘은 너무 좋아 여왕에게 달려들어 품에 안겼다.
“······!”
엘티히는 잠시 당황하여 몸이 경직되었다.
“감사해요. 저 정말 잘할게요.”
곧 그녀는 라파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엘프들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항상 예의주시할 것이다.”
라파엘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해 둘 것이 있다.”
“네?”
엘티히는 잠시 고민하다 말을 이었다.
“아슬란 그자는 네가 테키나 족속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걸 알고 있다.”
“!?”
순간 라파엘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굳어 버렸다.
대체 어떻게 아슬란이 그 사실을?
“서, 설마 여왕님이 말씀해 주신 거예요?”
“내가 미쳤다고 그걸 말하겠느냐.”
라파엘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자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널 본 그 순간부터 알았던 거 같더군.”
“그, 그걸 어떻게!?”
변신술도 은신술도 단번에 꿰뚫어 본 남자다.
그런데 설마 자신의 몸에 흐르는 악마의 피까지 알아봤다는 것인가?
“그럼 나는······.”
상식적으로 악마의 피를 이어받은 더러운 잡종을 받아 줄 사람은 이 대륙에 없다.
라파엘은 머리가 하얗게 변해 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엘티히는 그런 라파엘을 진정시키듯 말했다.
“괜찮다. 그 사실을 함부로 떠들고 다닐 사내는 아니다. 거기다 그는-.”
그녀는 입꼬리를 씰룩이며 말을 이었다.
“너를 믿고 있더구나.”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나를?
“저, 저를요?”
“그래. 너의 곧은 심성과 엘프 정신이라면 악마의 힘 따위는 쉽게 이겨낼 수 있다는 듯이 떠들더군. 감히 엘프의 정신을 들먹이는 것이 건방져 보이긴 했다만······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다.
그동안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아서 아예 관심이 없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의 몸에 악마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눈감아줬다.
무려 악마를 처단하는 빛의 기사라 불리는 아슬란, 그 남자가.
“그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진 자는 내뱉는 말에도 무게가 다른 법이지.”
엘티히가 누군가의 강함을 인정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것도 매번 무시하고 경멸하던 한낱 인간 따위를 말이다.
“아슬란, 그자의 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조금 이해가 됐다.
라파엘도 직접 눈으로 목격하지 않았던가.
마법의 신이라고도 불리는 엘티히와 호각을 이루던 아슬란의 강함을.
그땐 자칫 잘못하면 엘티히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오싹한 생각까지 들었다.
“그 사내라면 널 한번 맡겨봐도 괜찮을 것 같더군. 물론 네가 아직 철이 없어서 언제 질려 버릴지 모르겠지만.”
그래서였구나.
그래서 엘티히가 마음을 바꾼 것이구나.
한번 결정을 내리면 절대 번복하는 일이 없던 고고한 엘프의 여왕이 마음을 바꾼 이유가 바로, 아슬란 때문이었구나.
“잘할 수 있겠느냐?”
오늘따라 더욱 부드럽게 느껴지는 엘티히의 손길에 라파엘은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 정말 잘할 거예요. 제가 원래 적응 잘하는 거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이번에도······.”
하지만 휘몰아치는 격한 감정에 그녀는 목에서부터 무언가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 그러니까 이, 이번에도······.”
차마 말을 다 이을 수가 없었다.
주책맞게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내, 내가 미쳤나 봐.”
닦아도, 닦아도 눈물이 지워지지 않았다.
자신이 예전에 엘프들과 다른 이 검은 피부를 지워 내려고 피가 날 정도로 닦아냈던 것처럼 말이다.
“별것도 아닌 거로 나, 나도 참-.”
엘프들과는 다른 검은 피부.
마력에서도 흘러나오는 검은 기운.
자신은 원하지도, 택하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악마의 피를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늘 위축되어 살아왔다.
그래서 항상 다른 이의 모습으로 살아왔다.
라파엘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기 위해.
“흑-.”
하지만 이제 엘티히 뿐만이 아니라 정체를 숨기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생겼다. 심지어 그 남자는 자신을 믿는다는 말까지 했다.
그것만으로도 큰 해방감이 느껴졌다.
“끄으윽-.”
속으로 삼키려는 눈물이 자꾸만 흘러나왔다.
엘티히는 말없이 그런 라파엘을 조용히 안아 주었다.
“······.”
자신도 정말 오랜만에 눈시울이 붉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