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1초만 소드마스터 44화
“자. 여기 따뜻한 스튜 대령했습니다.”
“아······. 그래. 고맙다.”
“호호. 맛있게 드세요.”
엘티히는 눈을 몇 번 껌뻑이며 자신 앞에 놓인 스튜를 내려다보았다.
이런 음식은 처음인 건가.
아니면 이런 상황이 처음이라 그러는 건가.
나는 최대한 그녀의 성질을 건드리지 않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 쳐다보고 먹어라. 식는다.”
물론 말이 따뜻하게 나가진 않았다.
나는 먼저 스푼을 들고 스튜를 떠먹었다.
여기 마을 스튜는 언제 먹어도 맛이 일품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따뜻해지는 포근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달까.
“이곳에 자주 오는 모양이군.”
“여기 마을 회관에서 이곳 사람들과 함께 모여 이 스튜를 먹는 것이 내게는 소중한 시간이지.”
퀘스트를 다 끝내고 국밥 같은 스튜를 한 그릇 먹으면 그날 하루의 피로가 싹 풀린다. 그래서 성과 마을을 돌아다니며 퀘스트를 진행할 때 꼭 이곳을 들렀다 간다.
골드를 얻기 위한 내 피땀 섞인 스튜였다.
“그렇군. 너는 내가 아는 인간들과 조금 많이······다르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꾸만 먹지는 않고 수저를 만지작거리기만 하는 엘티히의 행동이 무척 신경 쓰였다.
처음에는 그냥 인간의 음식을 못 먹어서 그러는 거겠거니 싶어 무시하려 했지만,
“그래서, 대체 언제 먹을 생각이지? 그러다 아까운 스튜가 다 썩어 버리겠군.”
이놈의 허세는 그새를 못 참고 엘티히를 쏘아붙였다.
“쯧-. 재촉하지 마라. 이런 건 먹어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
“정 못 먹겠으면 먹지 않아도 된다. 강요할 생각은 없다.”
“흥. 누가 못 먹겠다고 했느냐?”
자존심이 센 누님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것에도 자존심을 부리는 건가.
엘티히는 천천히 스푼으로 스튜를 뜬 뒤 잠시 고민하며 바라보기만 하다 입에 앙 넣었다.
“······!”
번쩍이는 눈빛만 봐도 알겠다.
후르릅-.
그녀는 곧바로 다시 스튜를 떠먹었다.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던 것인지, 순식간에 한 그릇을 비워 냈다.
“······며칠 굶었느냐?”
“시, 시끄럽다.”
나는 피식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러자 회관 안을 돌아다니며 스튜를 나눠 주고 있던 여인이 달려왔다.
“어머. 벌써 다 드셨군요? 여기 새로운 스튜입니다.”
“아니. 난 이제 됐······.”
“그리고 스튜와 빵을 같이 드시면 두 배는 더 맛있게 드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럼 맛있게 드세요~!”
“······.”
엘티히는 여인이 주고 간 빵을 매만지다 슬쩍 나를 바라보았다.
“설마 빵 먹는 법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난 먼저 빵을 찢어 스튜에 찍어 먹었다.
빵과 스튜는 언제 먹어도 맛있는 조합이다.
“······.”
그녀도 나를 따라 빵을 찢은 뒤 스튜에 푹 찍어 입에 넣었다.
“!?”
생각보다 표정으로 많은 걸 드러내는 사람이었다.
대체 엘프들은 평소에 식사를 어떻게 하길래 고작 이런 빵과 스튜에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일까.
“저희는 괜찮다니깐요?”
“지금은 여왕님을 경호하는 중이라 먹을 수 없어요.”
“어휴. 그러지 마시고 드세요. 이게 얼마나 맛있는데.”
그때 뒤에서 소란 소리가 들려왔다.
인심 좋은 마을 주민들이 스튜를 권하고 있었지만, 엘프들은 한사코 거절하는 중이었다.
그러자 거의 걸신들린 것처럼 빵과 스튜를 먹고 있던 엘티히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흠흠.”
그녀는 자신이 너무 품위 없이 먹기만 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는지 무안한 듯 헛기침을 뱉었다.
“라이리. 로나.”
“네, 여왕님.”
“저들이 대접해 주는 걸 감사히 먹도록. 여기 스튜 맛이 매우 훌륭하다.”
“아······. 예. 여왕님.”
엘프들은 어리둥절하며 스튜를 한 숟갈 먹고는,
“헉!”
“이, 이렇게 맛있을 수가.”
“호호. 맛있죠? 제가 맛있다고 했잖아요.”
엘티히와 마찬가지로 허겁지겁 접시를 비워 내고 있었다.
이 정도면 엘프들의 평소 식사가 문제 있는 거 아닐까.
진짜 얘네들은 이슬만 먹고 사는 건가.
“아슬란.”
그때 엘티히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넌 나와 단둘이 할 얘기가 있을 텐데.”
전 딱히 나눌 얘기가 없긴 한데요······.
“자리를 옮기지.”
“······따라와라.”
영 내키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녀를 데리고 단둘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엘티히랑 단둘이 있어야 한다니.’
아까 몬스터 군단을 단번에 쓸어 버린 그 힘을 직접 보지 않았던가.
엘티히가 손가락을 까닥일 필요도 없다.
그냥 눈 한번 깜빡이는 것으로 마을 하나를 날려 버릴 수 있는 캐릭터였다.
그런 무시무시한 네임드와 단둘이 방 안에 남게 된 것이지만,
펄럭~!
아슬란의 허세로 무장된 지금의 나는 멋들어지게 망토를 펄럭이는 여유까지 보이며 자리에 앉았다.
그것도 상석에.
“······.”
기대도 안 했다는 듯, 엘티히도 착석을 했다.
그러고는 천천히 운을 뗐다.
“난 인간을 믿지 않는다. 아니. 인간을 싫어한다.”
엘프가 인간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너희 인간들은 늘 그래왔지. 우리의 선의를 악의로 갚으며, 배신했다. 한때 나도 인간과 엘프가 서로 평화롭게 교류하는 시대를 꿈꿨으나······ 전부 부질없었다. 결국, 너희들은 우리를 탄압하기만 했지.”
300년 전, 대륙에 있는 거의 모든 종족이 힘을 합쳐 테키나를 물리쳤을 때만 하더라도 인간과 엘프의 사이는 지금처럼 험악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교류하며 서서히 섞여드는가 싶더니, 결국 갈등이 커지고 다툼이 벌어지면서 마침내 큰 전쟁으로까지 번지려는 조짐을 보였다.
만약 그때 대륙의 영웅들이 나서서 중재하지 않았다면 인간과 엘프, 둘 중 하나는 끝을 봤을 것이다.
그날 이후로 엘티히는 인간과의 모든 교류를 끊어 버려 지금까지 이르렀다.
“난 너희들이 변할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런 불신이 남아 있으면 곤란하다.
언제 테키나 족속이 대륙을 장악하려 들지 모르는 상황에서 엘티히가 엘프들과 함께 나서주지 않으면 무척 곤란하다는 것이다.
알렉산더가 나서서 두 종족의 사이를 화해시키는 건 아직 스토리가 한참 덜 진행되고 성장도 덜 해서 안 될 것 같고······.
그렇다면,
“300년 전의 일이다.”
“그래서,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는 것이냐?”
“아니. 다르지 않지. 엘프가 그러하듯, 인간 역시 늘 똑같다. 음모와 배신이 판을 치고 온갖 권모술수가 도사리고 있지. 하지만-”
정말 나 밖에 엘티히를 설득할 사람이 없다면,
“방금 전 너도 만나보지 않았나. 저 순수한 주민들을. 그들이 네가 엘프라고 해서 차별을 하던가? 아니면 박대를 하던가?”
“그건······.”
이 아슬란의 정신병을 이용해서라도, 이 끓어 오르는 병신 같은 허세에 내 몸을 던져서라도 난 이 게임의 스토리가 망가지지 않게 만들고 싶었다.
“저들도 300년 전과 똑같았다. 인간이 가진 순수한 마음은 항상, 늘 같았다. 그저 탐욕에 절어 있는 것들이 권력을 잡으면서 문제가 생겼던 것일 뿐.”
인간과 엘프가 하나 되어 테키나 족속을 물리칠 수 있도록, 그리하여 내가 무사히 집으로, 이 게임 밖으로 벗어날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래서, 너는 그 탐욕스러운 위정자들과 다르다는 것이냐?”
그녀의 서늘한 눈빛을 나는 덤덤하게 마주했다.
“그래. 나는 다르다. 네가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그렇다고 라파엘을 네 밑으로 보내 줄 거라 생각하나? 감히 엘프를 부하로 삼으려 하다니.”
나는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며 거만한 태도로 반박했다.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난 라파엘을 내 부하로 받아들인 적이 없다.”
“뭐? 그럼 그 아이와 왜 동행했던 거지?”
“그건 라파엘이 집요하게 우리를 따라왔을 뿐이다.”
엘티히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놈이 엘프의 자존심을 다 구기고 다닌다며 중얼거렸다.
“그럼 이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겠군. 내가 여기 온 것은 라파엘 때문이니.”
잠깐만.
이렇게 되면 잘 끌고 오던 이야기가 갑자기 끊어지는 거잖아?
엘티히가 라파엘을 끌고 돌아가 버리면 난 아무것도 얻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고민도 잠시.
“어차피 그 아이는 계속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해 엘프의 둥지를 탈출할 것이다.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겠지.”
들끓는 허세가 엘티히를 그냥 보내 주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라. 이번에는 두 번 다시 나오지 못하게 만들면 되니까.”
“자유로워지고 싶은 마음을 억압하면 억압할수록 반발심만 키울 뿐이다.”
“네가 상관할 바는 아닐 텐데.”
이윽고 전기에 자극을 받는 것처럼 등허리에서부터 찌릿한 무언가가 올라오더니, 급해진 내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뭐가 그리 두려운 거지? 엘프라 바깥세상에서 모진 고통을 당할까 봐? 아니면······.”
한번 날뛰기 시작한 허세가 순간 통제를 벗어나 엘티히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그 아이의 몸에 악마의 피가 흐르기 때문인가?”
“!?”
엘티히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너······넌 대체 무엇이냐?”
“무엇이 말인가?”
“대체 그걸······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엘티히의 몸에서 푸른 마력이 솟아 나오고 있었다.
“똑바로 얘기해라. 인간인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는 거지? 그 아이가 그런 얘기를 했을 리는 없을 텐데?”
“얘기한 적 없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 것이냐?!”
마력을 담은 목소리에 방 안이 흔들리고 밖에 있는 마을 회관까지 흔들렸다.
‘미친. 목소리만으로도 사람 죽이겠네.’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날 바라보는 저 시선만으로도 몸이 뚫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내 몸을 장악하고 있는 허세는 놀라울 만치 침착했다.
마치 저런 건 위협 축에도 끼지 못한다는 듯,
“소리 지르지 마라. 품위 없다.”
오히려 엘티히를 비난했다.
“지금 내가 장난을 하는 것 같으냐?”
“그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들으며,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의미심장한 말······이 아니라, 그냥 개소리였다.
그런데 의외로 이 헛소리가,
“흐음-”
엘티히에게 먹히는 것 같았다.
대체 왜지?
“네가 빛의 기사라는 소문은 들었다. 라할의 빛을 쓴다지. 아까 너와 잠깐 부딪혔을 때도 분명 그건 심상치 않은 빛이었다. 너······.”
그녀는 치솟아 오르고 있던 마력을 서서히 가라앉히며 내게 몸을 기울였다.
“라할과는 무슨 관계지?”
이건 또 뭔 소리여.
“······아무 관계도 아니다.”
내 솔직한 대답에 엘티히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거까지는 얘기해 줄 수 없다, 이건가? 이해한다. 그런 걸 함부로 알려 줄 순 없겠지.”
뭔가 대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라파엘을 너한테 맡길 순 없다.”
“아까부터 자꾸 오해를 하는 거 같은데, 나도 맡겨달라 한 적 없다.”
“······.”
“그저 그 아이를 믿어 보라고 조언을 해주는 것이다. 라파엘과 며칠을 같이 있다 보니 알겠더군. 그 아이의 곧고 착한 심성과 그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대단한 재능을. 너도 그 재능을 알기에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냐?”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엘티히에게 말했다.
“난 그 아이의 마음을 믿는다. 그리고 강한 엘프의 정신을 또한 믿는다.”
“엘프의 정신?”
“그래. 고작 악마의 피에 넘어갈 정도였다면 엘프족은 진작 테키나 족속에게 멸망했겠지. 그들의 강인한 정신이 있었기에 지금의 대륙이 있는 것이다.”
“······.”
잘 나가나 싶었는데, 오늘도 열심히 들썩이는 이 병적인 허세는 기어코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렸다.
“그런데 넌 그렇지 않은 것 같군. 한심하구나. 여왕이라는 자가 자신이 통치하는 엘프에게 그리도 믿음이 없다니. 정작 인간인 나조차도 엘프에게 갖는 믿음을 말이다.”
“!?”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나는,
“그렇게 해서는 영원히 엘프에게 발전은 없을 것이다. 테키나 족속이 봉인을 깨고 지상으로 나오는 순간, 이번에는 멸망을 피할 수 없겠지.”
"감히 그따위 소리를······!"
엘티히의 인내심을 한계까지 치닫게 했다.
이런 미친.
오늘 아주 작정을 했구나.
나는 더 미친 소리를 날리기 전에 억지로 몸을 입구 쪽으로 향하게 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아슬란의 허세는,
“선택은 너의 몫이다, 엘티히. 너희 종족에게 믿음을 가질 것이냐, 아니면 이번에도 너의 힘만 믿고 싸울 것이냐.”
화려하게 망토를 펄럭이며 몸을 돌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제 난 뒤졌다.’
그리 생각하며 도망치듯 방 밖을 나서는 순간.
[히든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엘프족과의 외교 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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