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1초만 소드마스터 43화
“······.”
엘티히는 감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내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고작 인간 따위가 이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니.
특히 그녀의 방어막을 모조리 부숴 버릴 정도로 강력한 검강을 멈춰 서게 만들어 버리는 그 힘은 대체······.
“인간. 네 이름이 무엇이냐?”
처음으로 흥미가 생기는 인간이었다.
엘티히의 물음에 그는 거만한 고갯짓을 하며 대답했다.
“일라이 왕국의 대기사단장, 아슬란이다.”
아슬란.
그래. 이자가 요즘 대륙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다는 그 인물인가.
인간들의 소식은 잘 듣지 않고 있지만, 아슬란의 이야기는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빛의 기사, 악마 사냥꾼, 등등.
여러 칭호로 그 이름이 불리고 있었다.
그냥 인간들이 만들어낸 헛소문인 줄 알았는데.
“인간에겐 과분한 힘을 가졌군.”
그러자 그는 더욱 차갑고 오만한 눈빛으로 엘티히를 노려보았다.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 인간의 힘을, 명예로운 기사의 힘을 어찌 엘프 따위가 알 수 있을까.”
“뭐라?”
그 실력에 걸맞게 상대방을 긁는 것도 수준급이었다.
“이런 건방진 놈. 방금 그 한번으로 네가 이 몸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일단 일어나고 말하지. 언제까지 거기 앉아 있을 거냐.”
“아-”
엘티히는 그제서야 자신이 더러운 땅바닥에 앉아만 있었다는 걸 깨닫고는 얼른 일어나 묻은 흙먼지를 털었다.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저 눈동자가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누가 감히 그런 눈으로 날 쳐다보라고 했지?”
“그럼 그렇게 보지 않도록 네가 행동을 똑바로 하면 될 것 아닌가?”
“뭐, 뭐라고?”
“윗물을 보면 아랫물을 알 수 있다고 했지. 모든 엘프가 당신처럼 뻔뻔한가 보지? 여왕의 신분으로 국경을 무단 침범했으면서 뭐가 그리 당당한 것이냐?”
엘티히의 백옥 같은 얼굴에 금이 갔다.
아슬란이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일반 엘프 신분으로도 인간의 땅을 함부로 밟는 것이 위험할 진데, 무려 여왕이라는 자가 땅을 침범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화가 솟구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네놈이 정말로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나. 네가 누구를 상대하는지 알고 있기는 한 것이냐?”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군.”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두 사람의 팽팽한 신경전에 엘프들과 기사들은 절로 뒷걸음질을 치게 됐다.
그러나 과열되는 열기가 터지기 직전, 그들 사이에 펄쩍 끼어드는 사람이 있었다.
“여왕님! 제발 그만 좀 하세요!”
“라파엘?”
라파엘은 양팔을 벌리며 외쳤다.
“아슬란님은 이 일과 아무 상관도 없잖아요. 그리고 제가 싫어서 나온 거라고요. 제발 저 좀 자유롭게 살게 놔두시면 안 돼요?!”
“허튼소리 하지 마라. 네가 엘드라비를 떠나 어디로 간다는 것이냐!”
두 사람이 그렇게 목에 핏대를 세우며 언성을 높였다.
한쪽은 어떻게든 벗어나고자 했고, 한쪽은 어떻게든 상대를 구속하고자 했다.
둘이 나누는 대화만으로도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슬슬 두 사람의 대화가 길게 이어지려고 할 때쯤.
“대기사단장님!”
아론이 저 수풀 너머에서 올라오는 검은 연기를 가리켰다.
“마을에서 보내는 신호입니다!”
“검은 연기는 누군가가 마을을 공격했을 때 올라오는 신호이지 않습니까?”
기사단의 말에 라파엘이 하던 말을 멈췄다.
“마을을 공격하는 신호······?”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몸에서 부드럽게 솟아 나오는 새 한 마리가 빠르게 비행하여 연기가 나는 쪽으로 날아갔다.
라파엘은 곧 눈을 떴다.
“······몬스터들이 대거 마을로 몰려들고 있어요.”
“몬스터들이?”
“네. 여왕님과 대기사단장님이 거하게 싸워 주신 덕분에 몬스터들이 그걸 보고 흥분했나 봐요. 이쪽으로 몰려오는 길에 하필이면 마을이 중간에 끼어 있던 거죠.”
마을이 위험하다는 말을 듣자마자 아슬란은 즉각 기사들에게 말했다.
“모두 마을로 간다.”
“예!”
마치 엘티히는 처음부터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는 홀연히 기사들과 떠나 버렸다.
“······.”
“지, 진짜 가버렸군요. 저 인간.”
엘프들을 멀어지는 아슬란의 뒷모습을 황망하게 바라만 보았다.
엘티히는 입술을 짓씹으며 말했다.
“우리도 간다.”
“예? 마을로 말입니까?”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을 모른 척할 순 없지 않느냐? 거기다······.”
저 인간이 자신을 경멸스럽게 내려다보며 했던 말이 머릿속에 맴도는 것 같다.
‘윗물을 보면 아랫물을 알 수 있다고 했지. 모든 엘프가 당신처럼 뻔뻔한가 보지?’
그 말을 듣고 그냥 돌아갈 순 없었다.
“칫, 건방진 인간 같으니.”
언젠가 이 일을 반드시 갚아 주리라.
“모두 가자.”
* * *
‘······따돌렸나?’
벌렁거리는 심장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고 있었다.
이놈의 미친 허세가 기어코 엘티히의 꼭지를 돌게 만들더니, 하마터면 여기 있는 기사단과 단체로 황천길을 건널 뻔했다.
‘타이밍이 좋았어.’
아무래도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난 모양인데, 엘티히가 한번 더 심판의 창을 날리기 전에 아주 잘, 자연스럽게 빠져나왔다.
‘설마 쫓아오진 않겠지?’
그 더러운 성질머리로 나를 끝까지 따라와 요절을 내버리려 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한번 정도는 뒤를 돌아보고 싶었는데, 아슬란의 허세가 그걸 허락할 리 없었다.
“대기사단장님! 저쪽입니다!”
“!?”
이건 호랑이를 피하다 늑대를 만난 격이라고 해야 할까?
“모, 몬스터들의 숫자가······!”
“몬스터들이 저렇게나 많이!”
기사들이 기함을 터트리며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몬스터들을 바라보았다.
‘미친. 뭐가 저렇게 많아.’
아무리 몬스터 웨이브라고 해도 이 정도로 많은 숫자가 나올 수 있는 건가?
‘설마 난이도 때문에?’
몬스터 웨이브는 종종 일어나는 이벤트다.
일종의 경험치 이벤트라고 해야 할까.
왕국 기사단의 전투 경험치를 쌓고 몬스터들에서 나오는 자원들을 파밍하는 이벤트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이벤트가 아니라, 그냥 마을 하나를 통째로 쓸어 버리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이 마을이 몬스터 웨이브에 당한다면 그다음에는 성벽으로까지 이어져 그 피해가 어디까지 늘어날지 알 수 없었다.
‘이건 아무리 난이도 때문이라고 해도 너무한 수준인데.’
어디 몬스터 게이트라도 열린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숫자가 많을 수 없다.
‘지금 우리 전력으로는 부족해.’
아론과 알렉산더가 있어도 저 많은 몬스터들을 한번에 쓸어 버릴 순 없을 테고.
봉화를 올렸으니, 곧 왕국에서 기사단이 오긴 하겠다만 그들이 당도할 땐 이미 마을은 쑥대밭이 되어 있을 게 뻔했다.
‘찰나의 괴력은 쿨타임이 돌긴 했지만······.’
고작 이거 하나로 저 몬스터 떼를 없애 버리진 못 한다.
쿨타임 초기화를 시켜 한번 더 쓴다고 해도 나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쿠우웅-!!
바로 그때였다.
“엇-”
어디선가 들리는 소리를 따라 고개를 위로 올려 보았다.
그곳에는 기어코 여기까지 나를 쫓아온 엘티히가 있었다.
저저 지독한 년.
“인간. 우리 엘프들은 뻔뻔하지 않다. 너희들 인간처럼 무책임하지도 않다. 그러니 다시는 우리를 폄하하지 말거라.”
마을 위로 펼쳐진 거대한 마법진.
그 위에서 감도는 어마어마한 살기.
저건 필시,
‘엘티히의 광역기!’
수천의 병사들을 한꺼번에 소멸시킬 수 있는 광역기.
원래 이 정도 크기의 광역기는 수백 명의 마법사가 모여서 마법진을 만들어야 하지만, 엘티히 같이 마법의 끝을 깨우친 캐릭터는 혼자서도 광역기를 시전할 수 있었다.
‘설마 저걸로 우릴 다 죽이려는 건가?’
콰아아아-!!
하늘에서 푸른 불꽃이 눈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키에에엑!”
그 불꽃에 닿는 몬스터들은 몸이 녹아내리고 폭발하며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죽어 갔다.
이것이 엘티히의 광역기 스킬, 염화지옥.
모니터 화면으로 봤을 때도 푸르게 타오르는 그녀의 불꽃이 유독 아름다워 보였는데, 그걸 실제로 보게 되니 그 장엄한 광경에 압도되는 것만 같았다.
“캬오오오!!”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몬스터들.
그 위에서 마법의 여왕답게 군림하는 엘티히.
놀라운 건 저 수많은 불꽃 중에서 마을에 떨어지는 건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엘티히의 목적은 우리를 죽이는 것이 아닌, 몬스터 소탕이었던 것이다.
아이고 누님.
이럴 거면 진작 말씀을 하시지.
괜히 오해했네.
하지만 저 위에서 혼자 멋있게 마법을 펼치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부럽다.’
아슬란이 아니라 차라리 엘티히를 선택해 게임을 플레이했다면, 나도 저런 스킬을 쓸 수 있었을 텐데.
스르르-.
광역기 한 방으로 몬스터 군단을 쓸어 버린 엘티히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쿠쿵-!
그런데 바로 그때,
"캬오오오-!!"
바닥에 숨어 있는 웜들이 솟아오르며 방심하고 있는 그녀를 집어삼키기 위해 입을 쩍 벌렸다.
그 모습을 보고 내 안에 식어 가던 허세가 다시 뜨겁게 끓어 올랐다.
그 제어할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나는 반사적으로 칼을 잡은 뒤 허리춤에서 재빨리 뽑아 올렸다.
피이잉-!!
빛 속성으로 뒤바뀐 검강이 번쩍이며 앞으로 뻗어 나갔다.
* * *
콰콰콱-!!
"키에엑!"
하늘 높이 솟아오른 검강이 엘티히의 바로 옆을 가르며 지나갔다.
워낙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물론, 마력 방어막이 항시 펼쳐져 있긴 하지만, 만약 저 검강이 닿았다면-
'죽었겠구나.'
하루 동안 죽음의 공포를 두 번이나 느꼈다.
수많은 전쟁터를 다녀봤지만, 지금처럼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공포는 처음이었다.
'날 죽일 기회였을 텐데.'
방금 전까지 서로 살초를 나누며 싸우던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저자는 어쩌면 자신을 죽일 유일한 기회를 날려 버리고 오히려 뒤에서 공격을 하던 몬스터들을 없애 주었다.
“또 그런 눈으로 쳐다보는군.”
그녀는 천천히 땅으로 내려와 마주했다.
여전히 오만하고 못마땅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슬란을.
“흥. 네 생각은 잘 알고 있다. 내 도움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겠지. 손 몇 번 흔드는 것으로 저 정도 몬스터들 따위는 충분히 혼자서 없애 버렸을 테니.”
그 무지막지한 검강을 대수롭지 않게 만들어내는 자다.
저런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건 준비 운동 축에도 끼지 못할 것이다.
“내게도 책임이 있으니, 그 책임을 지는 것이다. 난 너희 인간들을 무척 싫어하지만, 내가 벌인 일을 누군가에게 떠넘기는 건 더 싫거든.”
혈기왕성한 사내놈들은 자신이 나설 일을 누가 빼앗아 버리면 왜 끼어들었냐고 난리를 친다.
엘티히가 잘 알던 인간 남자 하나도 종종 그랬던 적이 있다.
그래서 또 한바탕 지겨운 말다툼을 해야 하나 싶었는데-.
“그런가······.”
아슬란, 저 남자는 슬몃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맙다.”
“······?”
엘티히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고맙다고 한 건가?
“들어와라. 손님을 박대할 만큼 우리 일라이 왕국은 매정하지 않다.”
“손님?”
“마을을 지켜줬으니, 이제 손님이지.”
“······.”
그녀는 아슬란의 뒷모습을 잠깐 멍하니 쳐다보았다.
확실히 다르다.
지금까지 만났던 인간들과는 말이다.
그들에게는 볼 수 없었던 저 넘치는 여유와 품격.
특히,
펄럭~
저 멋들어지게 펄럭이는 망토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래서일까.
“······.”
엘티히는 잠시 고민하다 부하들에게 말했다.
“들어가 보자.”
“예?”
“여왕님?”
“우리를 손님으로 맞이하겠다고 하지 않느냐.”
“······?”
그녀는 홀린 듯이 아슬란의 뒤를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엘프들은 평소답지 않은 여왕의 행동에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오오. 대기사단장님이시다!”
“뭐?! 지, 진짜잖아!”
“역시, 대기사단장님께서 우리를 구하러 오셨군요!”
“아슬란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마을 안으로 들어오자 진풍경이 펼쳐졌다.
마을 사람들이 전부 나와 아슬란을 맞이하며 그의 이름을 칭송하고 있었다.
엘프들은 그런 그들의 모습이 불편했다.
“몬스터 토벌은 전부 우리 여왕님께서 하셨는데······!”
“이 우매한 인간들! 지금이라도 제가 사실을 알려야겠습니다.”
그들의 아우성에 엘티히는 손을 들어 막았다.
“됐다. 어차피 내가 나서지 않았어도 아슬란, 저자의 손에 해결되었을 일이다.”
“그, 그렇긴 하지만······.”
엘프들은 뭐라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엘티히가 빤히 아슬란과 그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기사단장님. 이것 보세요. 오늘 제가 만든 목검이에요.”
“저희도 나중에 커서 대기사단장님 같은 훌륭한 기사가 될 거예요!”
아슬란은 자신에게 몰려드는 어린아이들을 내치지 않고 말에서 내려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기사의 명예를 안다면 비록 나이가 어릴지라도 너희는 이미 자랑스러운 일라이 왕국의 기사다.”
“우와! 정말요?”
“그럼 나도 이제 일라이 왕국 기사다!”
고작 작은 마을일 뿐인데, 이들과 사이가 두터운 것 같았다.
대기사단장 정도의 직책이라면 이런 마을은 거들떠보지도 않을 텐데?
“대기사단장님. 저번에 도와주신 덕분에 저희 남편의 병이 많이 나아졌습니다.”
“저희도 요즘 살 맛이 납니다. 농사도 아주 잘 되고 있고요!”
“이게 다 대기사단장님 덕분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거의 라할의 강림을 보는 것처럼 아슬란을 대했다.
유독 엘티히의 시선을 사로잡는 건,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든 돕겠다.”
“예. 앞으로도 자주 찾아와 주세요.”
“항상 대기사단장님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백성들을 바라보는 아슬란의 눈빛이었다.
그렇게 차갑고 무덤덤한 눈빛이 지금은 따뜻하게 바뀌어 있지 않은가.
“그런데 대기사단장님. 저분들은······.”
“응? 저 얼굴과 귀는 설마-.”
“에, 엘프?!”
엘프는 인간과 다른 생김새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을이 더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아슬란이 손을 들어 말했다.
“귀중한 손님들이시다. 부족함이 없도록 맞이해 드려라.”
“아, 예.”
“대기사단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어서 오세요! 저희 마을은 처음이시죠?”
왕국의 기사들과 마법사들로부터 환영을 받아 보긴 했어도, 이런 일반 백성들이 환대를 해주는 건 처음이었다.
“대기사단장님의 손님이시라면 우리에게도 귀중한 손님이시지.”
“자자. 이쪽으로 오세요.”
“우리 마을에서 끓이는 스튜가 무척 맛있답니다.”
"엘프는 처음 보는데, 너무 아름다우시네요."
“아. 그, 그래.”
엘티히와 엘프들은 눈을 껌뻑거리며 거의 끌려가다시피 백성들 손에 붙들려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고 아슬란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