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38화
“가주님. 오늘 참석 명단입니다.”
이번 경매의 주선자이자, 샤를렌 가문의 가주인 비올레타는 집사가 건네는 명단을 받아 살펴보았다.
“흠-. 저번이랑 비슷하구나.”
“예. 이번에도 초대장을 받은 고객들이 대다수 참여를 했습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각 왕국의 신분 높은 분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일이 거의 없으니까.”
샤를렌 경매는 사치 부리기 좋아하는 귀족들의 욕구를 발산할 좋은 소비처였다.
그리고 서로 얼굴 보기 힘든 각 왕국의 귀족들이 사교 모임처럼 모이기에 좋은 명분이기도 했다.
이런 기회를 위정자들이 그냥 놓칠 리 없지.
덕분에 샤를렌 경매는 하나의 문화처럼 자리 잡아 선택 받은 소수의 높은 자들만 모일 수 있는 특권이 되었다.
“음?”
그런데 그때 유독 눈에 띄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오늘 참석자 명단에,
“아슬란?”
이제까지 여러 차례 초대장을 보냈지만 한번도 이 모임에 참석한 적이 없는 그 이름, 아슬란.
“이자가 여기에 참석을 하다니.”
요즘 대륙에서 가장 주목 받는 인물을 뽑으라고 하면 열에 아홉은 아슬란의 이름이 가장 먼저 튀어 나올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유한을 죽이고 소드마스터가 된 뒤에도 여러 활약상을 보여 주고 있다. 거기다 지금은,
“악마 사냥꾼이라는 별명도 생겼다지?”
“예. 라할께서 선택한 빛의 기사가 아니냐는 얘기도 정말 많습니다.”
“참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군. 아슬란이 그런 평가를 듣다니.”
대륙 최고의 상단답게 샤를렌 가문에 들어오는 정보량은 어마어마하다.
각 인물에 대한 정보집이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당연히 아슬란에 대한 정보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분명 허세가 심하고 옹졸하기 짝이 없는 놈이라고 했는데.”
물론 최근 정보는 많이 달라졌다.
옹졸함, 치졸함과 같은 이야기는 쏙 빠지고 백성을 위할 줄 알고 일라이 왕국에서는 거의 신처럼 떠받들여질 정도로 그에 대한 지지도가 엄청나다.
또한 그를 향한 기사들의 충성심도 매우 높아 보초를 서는 일개 병사조차도 거금을 준다는 유혹을 뿌리치며 아슬란에게 해가 되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았다.
“정보상인들 물갈이를 한번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손바닥 뒤집 듯이 정보가 바뀌다니.”
“그건 우리 뿐만이 아닐 겁니다. 레이어스 교단에서도 갑작스레 바뀐 아슬란의 행동 때문에 곤혹을 치르고 있다 합니다.”
샤를렌 가문에 버금가는 정보력을 가진 곳이 바로 레이어스 교단이다.
거기서도 당혹스러워할 정도라면 정보 상인들이 문제가 아닐 것이다.
“결국 아슬란, 그자가 문제라는 것이군.”
“예. 도무지 다음 행보가 예상되지 않은 자입니다.”
왠지 흥미가 가는 사내였다.
특히 가장 궁금한 것은,
“그자가 지금까지 침묵하다 갑자기 칼을 뽑아 들기 시작한 것이 악마 때문이라던데?”
“확실하지 않은 정보이긴 하지만, 현재까지의 행보를 본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
비올레타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녀는 문득 재밌는 생각이 떠올랐다.
“레길로트의 팔찌를 경매에 내놓거라.”
“······하지만 그건 팔리지 않는 경매품이지 않습니까?”
“그래. 볼품 없어 보이는 물건이긴 하지. 생긴 거에 비해 가격도 좀 있는 편이고. 소문도 안 좋지.”
이 격식 높은 귀족들은 외관을 중요시하게 여긴다.
경매품으로 올라오는 물건이 얼마나 좋은 효과를 가지고 있는지는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그냥 자기 보기에 좋아 보이고 남들 눈에도 좋아 보이면 망설이지 않고 구매를 한다.
그렇게 입찰 경쟁이 붙으면 끝까지 해당 물픔을 얻고자 돈을 올리고, 마침내 모든 경쟁자를 물리치고 해당 물품을 손아귀에 넣게 되면 잠시나마 성취감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경매가 주는 원초적인 쾌락이었다.
“한번 올려보거라.”
그에 있어서 레길로트의 팔찌는 귀족들의 사치품과 거리가 있었다.
왜냐하면 장비가 오래 돼서 복원을 해 놓아도 외관상 좋지가 못 하고 특히,
“괜찮으시겠습니까? 고객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을 겁니다. 이 팔찌를 사게 되면 저주를 받게 된다는 소문이 돌고 있지 않습니까?”
이 팔찌에 붙은 옵션이 악마와 관련이 있다는 것 때문이었다.
정확히 어떤 옵션인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마법적으로 분석해야 하는데, 저 마탑조차 이 팔찌가 가진 효과가 무엇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그들은 이 팔찌가 악마와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알자마자 바로 실험을 중단해 버렸다.
그게 귀족들 사이에 소문으로 퍼지면서 모두 이 팔찌를 외면하게 된 것이었다.
“아슬란이 가진 돈은 많을 테고.”
베라크 가문이 자금력 하나는 굉장하다는 얘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다.
그래서 매년 초대장을 보낸 것이고.
“오늘 어떤 모습을 보일지 궁금하군.”
다른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탐욕에 절어 그저 사치품에만 돈을 쓸지, 아니면 다른 곳에 관심을 둘지.
얼른 이 호기심을 풀고 싶었다.
* * *
“아슬란 대기사단장님. 이번에 저희 가문에서 진행하는 행사가 하나 있는데······.”
“대기사단장님의 활약상은 매일 즐겁게 듣고 있습니다. 베라크 가문이 저희 가문과 긴밀하게 교류를 한다면-.”
“대기사단장님 같은 분에게 배우자가 없다는 것이 말이나 되겠습니까? 사실 제게 어여쁜 딸 아이 하나가 있습니다만······.”
경매가 시작되기 전까지 귀족들은 각자 잔을 든 채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중간하게 껴서 그냥 뻘쭘하게 서 있을 줄로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내 곁으로 모여 들었다.
꽤나 솔깃한 이야기들도 많았지만, 이놈의 허세 때문에 나는 줄곧 무표정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할 뿐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곧 경매가 시작됩니다. 모두 자리에 앉아 주십시오.”
그리고 경매가 시작되었다.
나는 아무 자리나 찾아 앉았는데, 여러 사람들이 내 곁에 앉으려고 신경전을 벌였다.
“어머. 여긴 자리가 비었네요. 앉아도 될까요?”
하지만 그중 한 여인이 재빨리 엉덩이부터 들이밀어 먼저 앉으려고 했던 사람을 쫓아내고 자기가 앉았다.
“······그러시오. 어차피 정해진 자리도 아니니.”
처음에는 별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 했으나,
[라파엘]
무력: 50
지력: 87
마력: 87
“!?”
그 위에 뜨는 정보에 나는 순간 어깨를 들썩일 뻔했다.
라파엘.
이곳 경매장에 참석한 네임드들이 워낙 많아 그러려니 넘어갈 수도 있지만, 라파엘은 조금 다르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곳에 참석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마 초대장도 못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저 생김새는······.
‘변신술인가.’
내가 아는 라파엘이란 캐릭터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그녀가 자신의 특기를 부려 다른 이의 모습으로 변신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왜 그러세요?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니면 제 미모에 넋이 나가 버리신 건가?”
“······.”
“호호. 농담이에요. 처음 뵈어요. 저는 네르빌 가문의 엘리샤라고 해요.”
들어본 적 없는 가문이다.
아마 귀족 가문 중 하나일 터.
“반갑소.”
나는 대충 인사만 하고 고개를 돌렸다.
라파엘은 주인공의 동료 중 하나로, 그녀는 엘프 출신이다. 그것도 주인공과 비슷한 하프.
물론, 인간과 엘프 사이에서 나온 것이 아닌, 무려 악마라 불리는 테키나 족속과 엘프 사이에서 나온 다크 엘프였다.
‘알렉산더 때문에 온 건가?’
하지만 아직 둘은 이렇다 할 연결점이 없을 텐데.
“2천만! 2천만 리넨까지 나왔습니다!”
혼자 곰곰이 생각을 이어가는 사이, 경매는 한창 뜨겁게 달아오르는 중이었다.
참 돈 많은 새끼들 많구나.
[리오네의 망망대해]
-그림을 감상하는 이로 하여금 깊은 생각에 빠지게 만든다.
별 효과도 없고 그냥 금 좀 처바른 미술품이 2천만 리넨까지 올라갔다.
2천만 리넨이면 대체 얼마야.
하지만 이건 애교 수준이었다.
“5천만 리넨! 다음 분 없으십니까? 그럼 5천만 리넨으로 낙찰입니다!”
별 효과도 없는 아이템에 귀족들은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 붓고 있었다.
근데 확실히 보는 재미는 있는 것 같았다.
저 쓰레기 물품 하나에 얼마나 돈이 올라가는지 보는 재미가 쏠쏠 하다고 해야 하나.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했다.
‘하. 내가 샤를렌 가문 네임드로 플레이를 했다면.’
그럼 여기 있는 돈이 전부 다 나의 것인데!
여기서 소비되는 돈을 10%만 가져와도 왕국 보수를 완벽하게 끝내고 당분간 돈 걱정 없이 살 것이다.
더군다나 왕국 보수와 군비 충당에 돈을 많이 써서 여기에 쓸 수 있는 돈도 한정적이었다.
‘큰일인데.’
샤를렌 경매 클리어 조건은 여기서 경매품 하나를 사는 것이다.
그런데 이 미친놈들이 이렇게 돈을 올려 버리면 과연 물건 하나는 제대로 건질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설사 낼 수 있는 돈이 있다고 해도 쓸모없는 것들에 큰돈을 쓰고 싶지 않았다.
“대기사단장님은 사고 싶은 게 없으신가 봐요?”
라파엘이 내게 슬며시 말을 걸었다.
사고 싶은 거?
아직까지는 없다.
효과라도 좋은 게 있으면 하나 구매해 볼 텐데, 오늘 경매는 영 아니었다.
‘하긴. 원래 이렇게 랜덤이긴 하지.’
게임에서도 자주 겪던 일이었다.
샤를렌 경매에서 얻는 아이템은 랜덤이라 오늘처럼 외관상으로만 보기 예쁜 쓰레기들이 널려 있을 때가 많았다.
‘아. 그럼 진짜 쓰잘데기 없는 걸 하나 사야 하는 건가.’
경매는 계속 이어지고 있고, 곧 있으면 마지막 물품이 나올 차례다.
그때까지 아무것도 사지 않는다면,
‘퀘스트 실패인데.’
지금이라도 하나 사야 하나.
하지만 진짜 살 가치는 없고 가격만 비싼 것들이 계속 나오고 있는데?
“이제 마지막 경매품입니다.”
이런.
어영부영하다 결국 여기까지 와 버렸다.
“마지막 경매품은 항상 화제가 되었던 바로 그 물품입니다.”
항상 화제가 되었던 거?
“바로 레길로트의 팔찌입니다.”
레길로트의 팔찌?!
드디어 쓸 만 한 게 하나 나오는구나.
그런데 경매장 분위기가 무척 싸늘했다.
귀족들은 서로 웅성거리며 대놓고 불쾌하다는 표현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레길로트의 팔찌는 그 효과가 무엇인지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습니다. 단지, 악마와 관련이 있다는 얘기만 있을 뿐입니다.”
사회자도 분위기를 감지하고는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이 팔찌를 착용하게 되면 악마의 저주를 받게 된다는 소문도 있지요. 하지만 그건 확인되지 않은 사실입니다. 이 팔찌는 전설의 대장장이라 불리는 레길로트가 만들어낸 팔찌이니, 분명 팔찌에 있는 효과도 엄청날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의 반응은 여전했다.
아. 그래.
레길로트의 팔찌에 붙어 있는 괴담 때문이구나.
원래 레길로트의 팔찌는 히든 퀘스트로 얻게 된다.
‘그 괴담이 좀 살벌하긴 했지.’
그 퀘스트를 진행하다 보면 레길로트의 팔찌가 악마의 저주를 받았다는 괴담이 퍼져 있어 누구도 착용하려 들지 않는다는 얘기가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악마와 관련된 아이템이라고 하면 고귀한 우리 귀족님들께서 부정한 물건이라며 꺼려 할 것은 자명한 일.
하지만 이 게임을 몇 번 클리어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레길로트의 팔찌가 굉장히 유용한 아이템이라는 것을.
왜냐하면,
[레길로트의 팔찌]
-전설의 대장장이 레길로트가 만든 팔찌입니다.
-모든 공격을 빛 속성으로 전환합니다.
-어둠 계열에 200%의 추가 데미지를 줍니다.
-팔찌 착용시 랜덤으로 옵션이 하나 더 부여됩니다.
모든 공격을 빛 속성으로 바꿀 수 있고 어둠 계열, 그러니까 테키나 족속 같은 악마들에게 추가 데미지 200%나 적용시키는 미친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시작은 100만 리넨으로 하겠습니다.”
문제는 이게 얼마나 올라가냐는 건데-.
“······.”
아무도 입찰을 넣지 않고 있었다.
“아무도 없으십니까?”
정말 아무도 없어?
저 꿀템을 진짜 아무도 안 사?
아무리 괴담 때문이라고 해도 저걸 그냥 넘긴다고?
“아무도 없으시다면 경매품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자가 경매품을 내리려고 할 때, 나는 얼른 손을 들었다.
하지만 이놈의 허세 때문에 빨리 손을 들지도 못했다.
최대한 격조 있고 품위 있는 자세로 천천히 손을 들었다.
“아! 7번 고객님께서 입찰을 하셨습니다. 110만 리넨 없으십니까? 110만 리넨?”
제발 없어라.
3, 2, 1.
이윽고,
“7번 고객님에게 낙찰되었습니다!”
퀘스트 클리어는 물론, 쓸만 한 아이템까지 얻었다.
나는 주먹을 쥐고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하지만 일제히 내게 쏠리는 시선 때문에 그저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경매장에 모인 귀족들은 왜 내가 저런 물건을 산 것인지 의문과 호기심 섞인 눈빛을 보였다.
“신기하네요. 아슬란님은 과연 어떤 물건에 관심이 있을까 궁금했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레길로트의 팔찌를 입찰하시다니.”
그때 옆에서 내게 말을 거는 라파엘이었다.
잠깐 그녀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나는 라파엘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저 팔찌에 무슨 효과가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데. 아슬란님은 혹시 그게 뭔지 알고 계신가요? 아니면 아슬란님에게는 남들이 볼 수 없는 무언가가 보이시는 건가요?”
난 잠시 고민했다.
이 여자와 내가 친해져서 좋은 것이 있을지, 아니면 단점이 더 많을지.
하지만 그걸 따져 보기도 전에,
“글쎄.”
등허리를 타고 흐르는 아슬란의 허세가 먼저 충동적으로 내 감정을 들끓게 만들었다.
“엘프의 눈에는 저것이 다르게 보이나 보지?”
“!?”
그러자 라파엘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네? 에, 엘프요? 갑자기 그게 무슨······.”
나는 그녀가 뭐라 변명을 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런 조잡한 변신술로 내 눈을 속이려 들다니.”
오히려 라파엘을 거만하게 내려다보며 경고했다.
“한번만 더 이런 장난을 친다면 그땐 가만 두지 않겠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인공의 동료 중 하나인 라파엘과의 사이는 이것으로 완전히 틀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