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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37화

“오늘도 정무를 보시느라 바쁘시군요. 대기사단장님께서는.”

밤이 깊었지만, 대기사단장 아슬란이 있는 집무실은 여전히 빛이 환했다.

그런 넬라의 말에 호레스는 끌끌 웃으며 말했다.

“거의 모든 내정을 간섭해서 하고 계시지. 덕분에 이 늙은이의 일이 줄었다오. 얼마나 꼼꼼하시던지. 가끔 나도 놀랄 정도요.”

“기사단도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낙하산이라 불리며 능력도 없이 자리만 차지하고 있던 지휘관들이 대거 물갈이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어느 순간 바뀌어 버린 아슬란의 행동에 넬라와 호레스는 제대로 적응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거들떠보지도 않던 나랏일을 도맡아 하고, 거기다 부정 청탁으로 들어왔던 기사들을 전부 내치는 등, 아슬란은 이 왕국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중이었다.

“가끔은 불안하기도 합니다. 저러다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실까 봐.”

그런 넬라의 우려에 호레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슬란님은 항상 똑같이 아슬란님이셨소. 그저 우리가 모르고 있었을 뿐.”

이제 호레스 안에는 아슬란을 향한 티끌만큼의 의심도 남이 있지 않았다.

“지금도 우리 왕국을 위해 저리 열심히 일하고 계시오. 또한 사비를 들여 부족한 돈을 충당하기까지 하셨소.”

“사비를요? 그 말씀은 베라크 가문의 돈을 가져와 쓰셨다는 겁니까?”

“그렇소. 성벽 보수와 병사들의 장비를 바꾸는 것까지. 전부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일이지. 보통의 위정자라면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짊어지게 했겠지만, 우리 아슬란님은 그 고통을 백성에게 전가하지 않으셨소.”

그러자 넬라는 경외 어린 눈빛으로 아슬란의 집무실 쪽을 바라보았다.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국고가 전보다 풍족해져서 군비를 보충해 준 줄로만 알았는데······.”

“후후. 지금이라도 알았으면 됐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저분이 진심으로 이 왕국을 위한다는 것이오. 이제야 의심을 거둘 수 있겠소?”

“의, 의심이라니요. 전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아까는 불안하다 어떻다 하더니.”

“그, 그건······ 크흠!”

넬라는 헛기침을 뱉으며 호레스의 눈초리를 피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더 이상 아슬란을 의심하지 않는다.

아니. 의심하는 자가 있다면 그놈의 경을 칠 것이다.

그때 그는 보지 않았던가.

입단식에서 보였던 아슬란의 그 엄청난 위용을.

단 말 몇 마디로 수많은 사람의 마음에 뜨거운 불을 일으킬 수 있는 인물은 거의 없다.

그러나 아슬란은 가능하다.

지금 그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정녕 없어 보였다.

‘거기다 왕국을 위해 자신의 재물도 아끼지 않으시다니.’

넬라는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항상 말로는 왕국을 위한다면서 아슬란처럼 모범을 보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다를 것이다.

그 역시 진심으로 왕국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결심했다.

바로 저 아슬란처럼 말이다.

* * *

“아오. 진짜 돈을 얼마나 쏟아 부어야 하는 거야.”

이놈의 왕국은 하여튼 돈, 돈, 돈이다.

그 쓸모없는 국왕 새끼도 그렇고 아슬란도 그렇고 얼마나 왕국의 등골을 뽑아 먹었던 건지, 온통 돈 들어갈 곳만 있었다.

“성벽 보수, 낡은 무기 교체, 갑옷 교체, 군마 교체······ 뭔 축구 게임하나. 교체할 거 밖에 없어.”

내가 강대국의 지도자였거나, 아니면 그냥 왕국과 관련 없는 일반 영웅을 플레이 했다면 이런 걸 신경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난 이 왕국의 대기사단장이고, 이 왕국이 무너지면 나도 위험하다.

이곳은 나의 방어벽이나 다름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내 목숨을 위해서라도 보수할 것이 있으면 꼼꼼하게, 누가 뒤에서 자재 빼돌리지 않게 잘 감시하며 해야 했다.

“흑흑. 뭔놈의 왕국이 창고에 남아 있는 게 없어서 내 개인 재산을 풀어야 되냐.”

억울하다. 억울해.

한번만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자원 많고 스텟 짱짱한 네임드를 골라 플레이 할 것이다.

“에고고. 아까워. 너무 아까워.”

내 피 같은 돈이 아주 쭉쭉 나가는구나.

하지만 내 안전을 위한 일이다, 라고 생각하니 좀 나은 거 같으면서도 종종 손발이 떨릴 정도로 아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경매에서 물건 살 정도의 돈은 남겨 둬야지.”

다행인 건 베라크 가문이 그동안 꽁쳐 둔 재산이 많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 재산을 왕국 보수에 쏟아 붓느라 탕진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지만.

“괜찮아. 난 괜찮아.”

지금이야 왕국을 안정시키는 단계라서 그렇지, 조금만 기다려라.

“그동안 쌓아온 민심도 있고 하니-.”

여태까지 쓴 돈을 야무지게 세금으로 뽑아 먹어 주마.

“그럼 왕국 경제가 잘 활성화가 되어야 돼.”

일라이 왕국이 최약국인 이유는 외교적으로 다른 왕국과의 관계가 안 좋은 것도 있지만, 지형적인 요소도 무시하지 못 한다.

뒤로는 네릴 산맥이라 불리는 험준한 곳이 있는데, 거기로 넘어가게 되면 다른 종족들을 만날 수 있게 된다.

물론, 300년 전 대전쟁 이후로 잠시 동안 인간과 다른 종족들끼리의 교류가 있었지만 어느 순간 끊겨 버려 사실상 그들은 내 적이나 다름없다.

“엘프랑 외교를 트게 되는 것도 딱 좋을 텐데.”

네릴 산맥 너머에 가장 먼저 만날 수 있는 종족이 바로 엘프다.

이 게임을 하면서 엘프와 외교를 하고, 그들과 교역을 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엘프가 파는 마력석이나 신비스러운 식물들이 상당한 값으로 팔려 나가기 때문이다.

문제는,

“거기 여왕이 지랄 맞아서 힘들지.”

엘프들의 여왕, 엘티히.

엘프 중 최고의 마력을 가진 마법사이자 300년 전 대전쟁을 통해 테키나 족속을 막아낸 최후의 영웅 중 하나이다.

인간보다 높은 엘프의 수명 때문에 그녀는 아직도 눈 시퍼렇게 뜨고 엘프 족속을 통치하고 있다.

“원래 스토리대로라면 주인공이 나중에 엘프와 첫 교류를 열게 되지?”

하프는 인간에게도, 엘프에게도 환영 받지 못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그것을 오히려 장점으로 삼아 인간과 엘프의 관계를 회복시킨다.

“흐흠-. 그 말은 내가 알렉산더를 잘 이용해 먹으면 떼돈을 벌 수도 있다는 얘기군.”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앞으로 우리 알렉산더에게 잘해줘야겠다.

물론,

“아슬란 대기사단장님. 알렉산더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라.”

이놈 얼굴만 보면 이놈의 허세가 가만 있지를 못 한다는 게 문제란 말이지.

“무슨 일이지?”

마음 같아서는 따뜻한 눈길과 애뜻한 목소리를 내고 싶지만, 아슬란의 허세가 그런 소름 돋는 짓을 용납할 리 없었다.

오히려 내가 잘해 주려고 하면, 허세는 더욱 강하게 꿈틀거려 알렉산더를 차갑고 딱딱하게 대하도록 만든다.

“그······.”

내가 너무 거만한 눈동자로 빤히 쳐다보고 있어서 그런가.

알렉산더는 주눅이 든 채로 말을 절었다.

그것이 아슬란의 허세를 또 한번 건드렸다.

“말을 해라. 벙어리냐?”

“소, 송구합니다. 명령하신 대로 방금 모든 채비를 마쳤습니다.”

“그런가? 알겠다. 나가서 기다리도록.”

내게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가려는 알렉산더를 이번에도 역시 가만 두지 않았다.

“알렉산더.”

“예? 아, 예.”

“너는 내 호위기사다. 누구 앞에서도 당당해야 하며 주눅조차 들어서는 안 된다. 최강자를 호위하는 기사 역시 최강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알렉산더가 나가면서 내 몸에 가득해 있던 허세가 풍선 바람 빠지듯 슈우우 빠져나갔다.

“이러다 진짜 도망가는 거 아니야?”

무슨 군대 선임이 후임 갈구듯이 애를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인지.

이러다 엘프와의 교역은 물 건너 가고 알렉산더가 나한테서 도망쳐 나중에 복수하러 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 * *

탁-.

문을 닫고 나온 알렉산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보고 같은 친위대 기사인 루미엔이 말했다.

“또 대기사단장님께 꾸중을 들은 거냐?”

알렉산더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쯧쯧. 허구한 날 네가 실수를 해서 그렇지.”

“근데 대기사단장님이 유독 알렉산더한테 엄하신 게 조금 있긴 해.”

기사들이 그렇게 느낄 정도면······.

“정말 날 싫어하시나?”

갑자기 축 어깨가 처지는 것 같았다.

대체 어디가 마음에 안 드시는 걸까.

뭔가 열심히 해보려고 해도 아슬란 앞에서만 서면 숨이 막힌다.

드래곤을 직접 본적은 없지만, 드래곤 앞에 선다면 딱 그런 기분일 것이다.

칼날 같은 눈동자로 심장을 움켜쥐고, 모든 것이 압도당하는 그런 느낌 말이다.

저것이 대륙 최강자가 내뿜을 수 있는 위압감이라는 것이겠지.

“대기사단장님은 널 싫어하는 게 아니다, 알렉산더.”

그때 아론이 저 구석에서 혼자 침울해 하고 있는 알렉산더에게 다가갔다.

“그분께서는 상대방에 대한 기대가 높으면 높을수록 더욱 몰아붙이신다. 그렇게 해서 상대를 더욱 성장시키시지.”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 나도 처음에 그분에게 얼마나 많은 악담을 들었는지 아느냐. 내 미스릴 검을 맨손으로 부수시고, 날 기사의 명예도 모르는 쓸모없는 놈이라고 하셨지.”

저 완벽해 보이는 아론에게?

미스릴 검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왕국 내에서도 유명한 일화였다.

아론이 항상 자랑스럽게 그때 일을 회상하며 떠들어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분은 적국의 수장이었던 날 받아 주셨다. 그리고 내게 많은 걸 가르쳐 주셨지. 그분을 통해 나는 매일 기사의 명예가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칼을 드는 것인지 배우고 있다.”

아론의 눈동자에는 신뢰로 가득해 있었다.

“그건 오롯이 그분께서 나를 믿어 주신 덕분이다. 만약 그분이 정말로 널 싫어하셨다면, 곁에 두지 않으셨을 거다. 보아라. 이번 행렬에도 널 넣지 않으셨느냐?”

듣고 보니 그러했다.

중립 지역에서 열린다는 샤를렌 경매는 딱 5명의 호위기사만 대동할 수 있다.

그곳에 알렉산더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주눅들지 말고 더욱 열심히 하거라. 그분의 기대를 져버리지 말아. 그분께서는 너의 안에 있는 잠재력을 보신 거니까.”

아론의 말에 알렉산더는 축 쳐져 있던 어깨가 퍼졌다.

그리고 목소리에는 그 어떤 때보다 힘이 들어갔다.

“예!”

반드시 그분을 실망시키지 않으리라, 오늘도 다시 한번 다짐하게 되었다.

* * *

“환영합니다, 아슬란 대기사단장님. 이곳은 대륙에서 가장 평화로운 곳, 중립 지역 오크릴입니다.”

샤를렌 경매가 열리는 곳은 오크릴이라 불리는 지역으로, 이 대륙에 몇 안 되는 중립 지역이었다.

신전과 마찬가지로 당연히 이곳에서는 어떠한 무력 충돌도 허락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곳으로 군대의 접근이 불가했고, 소수의 호위기사만 대동해 경매에 참여할 수 있었다.

오크릴의 경계에 다다르면 그곳에 대기하고 있던 샤를렌 가문의 병력들이 경매에 참석하는 손님들을 호위한다.

손님들끼리의 싸움을 사전에 차단하고 구입한 경매품이 누군가에게 도난 당할 일이 없도록 예방하는 것이었다.

‘진짜 돈이 더럽게 많긴 한가 보구나.’

성 안이 온통 황금으로 치장되어 있었다.

샤를렌 가문은 수백 년을 이어온 대륙 최고의 상인 가문이다.

이들이 쌓아온 재력은 상상을 초월하며, 대륙 전체에 영향을 끼칠만큼 그 위세가 대단했다.

그렇기에 이 수많은 왕국이 바글 거리는 곳에서 당당하게 중립 지역을 만들어 놓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게 꼭 돈지랄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 검의 원탁처럼 여러 네임드들이 참석하는 곳이라 서로 친분을 쌓을 수 있고 외교도 할 수 있어서 사실상 이건 경매라는 명분하에 모이는 친목 모임이었다.

‘이왕 온 거 여러 사람을 두루 사귀어서 우리 왕국도 돈 좀 벌어보자.’

가뜩이나 마법 병단을 만들 인력도 없고, 경제 활성화를 위한 교역도 열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행사는 나한테도 중요했다.

거기다 검의 원탁 때와 같이 눈만 마주치면 싸우는 무식한 놈들만 모이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아마 서로 부딪힐 일은 거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아니. 이게 누구신가.”

긴 금발 머리를 찰랑이는 한 남자가 내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카르펠]

무력: 94

지력: 80

마력: 80

소드마스터이자 마검사로 불리는 카르펠이었다.

“아슬란 대기사단장이 이번 경매에 참석을 하다니. 한번도 참석하지 않아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거늘. 반갑구려. 검의 원탁 때 이후로 아마 처음이지?”

하지만 내 시선이 향하는 곳은 카르펠이 아니었다.

카르펠을 마주치자마자 허리를 타고 올라오는 허세가 향하는 곳은 바로,

[요리스]

무력: 83

지력: 60

저번 날 나한테 잘못 걸렸다가 어깨가 박살 났던 요리스였다.

그런데 분명 내 기억으로는 요리스의 무력이 90이었는데, 지금은 83으로 내려가 있었다. 어깨가 아직 다 회복이 안 됐나?

내가 슬쩍 눈짓을 주자,

“헉.”

방금 전까지 카르펠 뒤에서 자신의 큰 키를 자랑하며 걷고 있던 그는 얼른 다리를 수그리고 어깨를 한참이나 아래로 내렸다.

그것을 시작으로 경매장 안에 신기한 풍경이 펼쳐졌다.

요리스처럼 키가 큰 기사들은 물론, 그렇지 않은 놈들까지 내 눈이 닿는 사람마다 최대한 몸을 낮추기 시작했다.

그 기이한 현상을 보고 카르펠이 슬몃 미소를 지었다.

“후후. 감히 아슬란 대기사단장을 내려다보면 뼈도 못 추린다는 소문이 퍼져 다들 저러는 것이오.”

누가 보면 진짜 본 브레이커인 줄 알겠네.

하지만 그것에 깊은 감명을 받은 병적인 허세가 용솟음 치듯 솟아 올랐다.

나는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가, 내 앞에 바짝 몸을 숙이고 있는 요리스를 내려다보며 어깨를 살짝 두드려 주었다.

“좋은 자세다.”

그러자 요리스는 화들짝 놀라며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앞으로도 그 가르침을 잊지 말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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