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33화
“오메르 왕국은 이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겠군요.”
호레스의 말대로 이제 오메르 왕국은 달라질 것이다.
제 아비를 죽이고 왕의 자리에 올랐던 리버테일은 엘버스테인의 군대를 결국 막아내지 못했다.
아니. 막을 시도조차 하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는 반란으로 왕이 된 사람이고, 그가 악마와 결탁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민심도 흉흉했던 탓에 성을 지키던 병사들이 아예 성문을 열고 항복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놈이 내 은혜를 잊으면 안 되는데.’
엘버스테인의 특성, ‘의리’를 믿는 수밖에 없다.
게임 난이도가 어떻든 특성까지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니 말이다.
“교단에서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군요. 조만간 그들이 어떤 행동을 취할지······.”
악마의 출현은 당연히 가볍게 볼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거기다 악마가 나타난 시일이 너무 빠르다.
아직 놈들의 봉인이 전부 다 풀려 버린 것 같진 않다만······.
‘이대로 가면 시간 문제겠지?’
테키나 족속에는 ‘네피림’ 이라고 불리는 등급이 있다.
쉽게 말해서 대악마 축에 끼는, 흔히 말하는 보스 몬스터급이다.
이놈들을 1대1로 잡을 수 있느냐?
스펙업을 무진장해 놓아도 컨트롤이 따라 주지 않으면 불가능할 정도라, 다인 레이드를 통해 사냥을 해야만 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네피림 안에서도 등급이 나뉘어 있어 상대를 하게 되면 정말 머리가 어지러울 수준.
‘레이드를 하려면 영웅들의 도움이 절실한데.’
패턴을 파훼하고 게임 속 영웅들과 협력하여 테키나 족속을 물리치는 것이 이 게임 후반에서 느낄 수 있는 묘미였다.
충분한 스펙업으로 슬슬 게임이 질리려고 할 때 레이드를 통해서 게임의 재미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문제는,
‘이건 너무 빠르잖아. 거기다 아직 주인공도 안 나왔어.’
이 게임의 핵심이 될 주인공.
놈이 어디에 있는지 난 알지 못한다.
내가 정상적인 플레이어였다면, 영웅 반열에 드는 네임드 캐릭터였다면 주인공이 나오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무엇보다도 주인공의 역할이 중요했다.
‘주인공이 얼른 등장해야 성물도 모으고 영웅들도 모아서 그 악마 새끼들을 상대할 수 있으니깐.’
모든 알피지 게임이 그러하듯, 주인공만 나온다고 뭐든 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악마를 상대하기 위한 장비도 모아야 하고 주인공을 뒤에서 지원해 줄 영웅 캐릭터도 모아야 한다.
이런 재료들을 잘 모아 놓지 않으면 결국 게임은 터져 버리게 되고 재시작 버튼을 누르게 된다.
‘근데 난 재시작이 안 되잖아?’
켠왕.
켠 김에 왕까지.
하지만 재시작을 할 수 없는, 그야말로 극악 난이도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었다.
아이고 두야.
“신전에서 우리 왕국을 방문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도 이번 사태에 궁금한 것이 많을 테니까요.”
가급적이면 신전이랑 엮이고 싶지 않은데.
더군다나 그 새끼들은 꼭 사건 다 끝나면 맨 마지막에 우르르 몰려오는 영화 속 경찰마냥 그러더라.
“그건 그놈들이 알아서 하겠지. 내가 더 알아야 할 사안이 있나?”
“아뇨. 특별한 건 없습니다.”
“그럼 나머지는 맡기도록 하지. 난 돌아가겠다.”
“예, 대기사단장님.”
나는 조금이나마 휴식을 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
“오셨습니까, 위대한 분이시여.”
베라크 가문을 오랫동안 섬기고 있는 내 집사 루카스는 시녀들과 함께 내게 정중히 인사를 올렸다.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먹지 않겠다. 그리고 급한 일이 아니거든 찾지 말거라.”
“예.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주인님께 온 서신들은 침실에 올려 두었습니다.”
“알겠다.”
나는 방으로 돌아와 갑옷을 다 벗어 놓은 뒤 벌러덩 침대에 누웠다.
“으어. 뻐근해.”
이놈의 병적인 허세 때문에 하루종일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었더니, 몸이 안 쑤시는 곳이 없었다.
“후. 집에 와도 머리가 아픈 건 똑같구나.”
테키나 족속이 등장하면서 안 그래도 아팠던 머리가 더 아파진 기분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역시-”
스펙업.
기검사 효과로 찰나의 괴력을 원거리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처럼, 지금 나는 새로운 힘에 목말라 있었다.
“음- 보석을 더 구해서 이 검에 이식을 해야 하나.”
루시안을 손가락만으로 쓰러뜨렸을 때의 상황을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때 분명 이 검이 진동했다.
그것도 매우 격렬하게 진동하며 내게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돌아와서 몇 번을 시도해 봐도 그때의 떨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다양한 인재풀도 필요해.”
엘버스테인도 왕이 되겠다고 떠난 지금, 내게 있는 거라고는 호레스, 아론, 그리고 기껏해야 넬라 정도였다.
“쓰읍-. 인재를 어디서 구하느냐도 문제네.”
이 게임이 엔딩까지 달려가는 동안 이 한 몸 지킬 만한 능력과 인재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뭐라도 먹을 걸 그랬나.”
스트레스성 배고픔인가.
갑자기 단 게 땡기고 입이 심심했다.
나는 루카스를 불러 뭐라도 먹을 것을 가져오게 하기 위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탁상 위에 올려져 있는 서신 중 내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이건······.”
다른 봉투에 비해 유독 고급스러운 빛깔의 편지.
나는 그 황금색 편지를 들어 인장을 풀고 열어 보았다.
[샤를렌 경매에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을 초대합니다.]
“아, 역시. 샤를렌 경매였구나.”
샤를렌 경매는 게임에서 이따금 발생하는 이벤트였다.
노예, 유물, 미술품, 보석, 장비 등등.
다양한 것들을 경매에 내놓고 거금을 받아 챙긴다.
“이거 나쁘지 않은 거 같은데.”
잘하면 여기서 좋은 아이템을 구매할 수도 있다.
거기다,
[샤를렌 경매]
-경매에 참석하십시오.
-1개 이상의 경매품을 구입하십시오.
-보상으로 5골드를 얻습니다.
덤으로 퀘스트 골드까지 준다.
“이 퀘스트만 하면 상점을 오픈할 수 있잖아?”
이거야말로 꿩 먹고 알 먹기였다.
“아. 갑자기 배부르네.”
뭔가 먹으려고 일어난 거였지만, 갑자기 폭식한 듯 배가 부르다.
틈만 나면 일희일비를 하는 것이 RPG의 묘미가 아닐까.
지금은 무척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주인님. 루카스입니다.”
급한 일이 아니면 절대 들어오지 말라고 했던 루카스가 문을 두드렸다.
“기다리거라.”
아니. 조금 쉬려고 했더니.
병적인 허세가 다시 치밀어 오르면서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고 구부러진 허리가 똑바로 세워졌다.
“들어와라.”
“예.”
루카스는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와 말했다.
“무슨 일이지?”
“왕국에서 다급한 전갈이 왔습니다. 교단에서 보낸 성기사들이 현재 왕국으로 오는 중이라고 합니다.”
“······?”
교단 그놈들이?
갑자기 또 기분이 안 좋아졌다.
* * *
성기사는 레이어스 교단을 섬기고 그 교단이 섬기는 라할에게 충성을 다 한다.
여러 왕국이 교단에 반기를 들지 않는 이유는 라할 때문도 있지만, 성기사들의 존재도 무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륙 곳곳에서 들어오는 자금으로 교단은 세력을 넓혔고, 당연히 악에 대항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도 조직했다.
그 집단이 바로 성기사단이었다.
신성한 빛으로 악을 처단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목표지만, 게임 내용을 봤을 때 선보다는 해악을 더 많이 끼치는 놈들이라 모든 플레이어가 극혐한다.
그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
그래서 내가 최대한 교단 놈들이랑은 엮이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도움보다는 방해가 더 되는 놈들이기 때문에.
“흐음. 교단에서 이렇게 빨리 행동에 나설 줄은 몰랐습니다.”
“거기다 성기사들이지 않습니까? 그 숫자가 3천에 달합니다.”
“그냥 사제만 보내면 될 것을. 굳이 성기사까지 동원하는 이유가 뭐랍니까?”
갑작스러운 성기사 파견에 신하들도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누구 말대로 할 말이 있으면 사제들만 몇 명 파견하면 될 것을.
이렇게 성기사들까지 몰고 온다는 건 필시 무슨 의도가 있다는 뜻이었다.
‘설마 교단이 벌써 테키나 족속 손에 다 넘어간 건 아닐 테고.’
그렇다면 과시용인가?
하여튼 겉만 번지르르 한 놈들이.
그렇게 악을 처단하고 싶으면 오메르 왕국에서 악마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빛처럼 빠르게 달려갔어야지.
이놈들을 왕국 안으로 들이는 것이 잘하는 행동인지는 모르겠다만, 그렇다고 문전박대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일단 받아들였다.
“위대한 분이시여. 레이어스 교단의 성기사단장, 로엔이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이윽고 올 것이 왔다.
거기다 로엔이라.
심지어 네임드 캐릭터가 오다니.
“안으로 들여라.”
“예.”
전각 입구가 열리면서 로엔과 그의 성기사들이 척척 철갑 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어왔다.
과연 동네방네 자기들이 성기사라는 걸 광고하듯이 갑옷부터가 새하얗게 되어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신성한 레이어스 교단의 성기사단장, 로엔이라고 합니다.”
[로엔]
무력: 90
지력: 75
라할을 섬기고 그의 이름으로 악을 처단하는 성기사답게 스펙도 짱짱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슬란의 허세가 주눅들 일은 없었다.
오히려 나는 상대를 내 아래로 보듯이 말했다.
“우리 왕국에는 무슨 일로 왔지?”
그러자 로엔이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대답했다.
“교단의 뜻을 아슬란 대기사단장님께 전해 드리기 위함입니다.”
로엔은 공손하면서도 조금은 위압적인 어투로 말했다.
“교단에서는 오메르 왕국과 일라이 왕국의 전투 중에 발생한 사태에 대해 깊이 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대기사단장님께서는 교단의 소환에 응해 주실 것을 바랍니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교단 소환?
‘이건 당연히 가면 안 되지.’
나한테 하등 이익도 안 되는 일이다.
오메르 왕국이 테키나 족속과 결탁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성기사를 보내지 않았던 놈들이지 않던가.
즉, 내부에 이미 테키나 족속에 넘어가 버린 놈들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대로 내가 소환에 응하여 성전 문턱을 잘못 밟았다가는,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겠지.’
하지만 여기서 대놓고 소환에 불응한다면?
‘저놈들이 성기사를 3천이나 끌고 온 이유가 있었구나.’
강압적으로라도 나를 데려가 보겠다는 것인가.
성기사들의 숫자가 우리 왕국 수비 병력보다는 적다고 할 수 있으나, 질적으로는 차원이 달랐다.
돈을 쳐발라서 만든 군대인데다가 라할의 신앙심이라는 세뇌 작업으로 두려움까지 없앤 놈들이다.
온갖 마법과 창칼이 날아 들어와도 무서워 하지 않고 돌격을 하는, 광전사들이라는 것이었다.
“만약 거절한다면?”
내 물음에 로엔이 힘을 주며 말했다.
“교단의 뜻은 절대적입니다. 무엇보다 악의 힘을 처단하는 데에 있어서는 말이지요. 그런데도 소환에 불응하겠다는 것입니까?”
바로 그때였다.
단전에서부터 끓어 오르는 허세가 순식간에 머리 끝까지 닿았다.
“절대적이라고 했느냐?”
아슬란의 허세가 ‘교단의 뜻은 절대적’이라는 말에 뜨겁게 반응한 것이었다.
“건방지구나.”
왕처럼 상석에 앉아 상대를 내려다보던 고개는 옆으로 기울어져 턱을 손으로 괴었고, 나의 목소리는 한없이 거만해져 갔다.
“감히 그따위 말을 내게 지껄이다니.”
“······예?”
순간 로엔은 제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들었다.
“악마가 무서워 숨어 있던 놈들이 이제 와서 한다는 말이 고작 그것인가?”
허세에 들끓어 충동적으로 내뱉은 나의 도발에 로엔이 소리쳤다.
“저희는 숨어 있지 않았습니다!”
“아니. 너희는 치졸하게 숨어 있었다. 나는 몇 번이나 기회를 줬지만, 너희는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악의 세력을 처단하겠다고 실컷 떠들더니, 결국엔 침묵했다. 내 말이 틀린가?”
“······.”
“그런 비겁한 겁쟁이들의 말을 내가 왜 따라야 하지?”
급기야 겁쟁이라는 말까지 나오자 로엔을 비롯해 그의 뒤에 있는 성기사들까지 격한 반응을 보였다.
“겁쟁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교단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한번 달아오르기 시작한 병적인 허세에 저런 말이 먹힐 리 없었다.
오히려 나를 더욱 뜨겁게 만들 뿐.
나는 그들을 노려보며 위협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닥쳐라. 감히 누구 앞에서 입을 열라고 했지?”
그와 동시에,
우우웅-!!
내 옆에 놓여 있던 검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저, 저건!”
그 모습을 보고 전각에 모인 기사들이 까무러치게 놀라며 소리쳤다.
“거, 검명! 검명이다!”
“이럴 수가. 검명이라니!”
검의 끝을 본 자만이 검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했던가.
검의 진동은 강하게 울려 퍼져 전각 전체를 흔들었다.
하지만 나는 검이 왜 갑자기 진동하는 것인지, 저것이 왜 반응을 하는 것인지, 일말의 관심조차 없었다.
“나는 겁쟁이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니-”
그저 허세에 심취한 내 눈동자는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고 있는 로엔을 노려볼 뿐이었다.
“내 인내심이 바닥나기 전에 모두 눈앞에서 사라져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적진을 향해 용맹하게 돌진한다는 성기사들의 눈빛이 두려움으로 가득 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