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1초만 소드마스터 32화
쿠웅-!!
저 거구가 뒤로 쓰러지자 지면이 울렸다.
동시에 내 머리도 종이 울리듯 울리는 것만 같았다.
‘이, 이게 무슨······!’
검의 의지가 발동되고 기검사와 찰나의 괴력이 동시에 발현되면서 저번 날 거인병을 쓰러뜨렸던 검강이 이번에는 루시안의 몸을 갈라 버렸다.
‘이거 완전 죽창 스킬 아니야.’
공평하게 너도 한방, 나도 한방.
그것이 마수화가 된 저 괴물이라도, 누구든 닿기만 한다면 한방에 나가 떨어졌다.
하지만,
‘아직··· 아직 끝이 아니다.’
나는 흔들리던 정신을 붙잡았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직 저 앞에는 오메르 왕국의 부관들과 군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은,
‘아슬란의 허세가 필요하다.’
루시안을 쓰러뜨리고 나서 잠시 가라 앉고 있는 허세에 일부러 몸을 던졌다.
그러자 등허리에서부터 찌릿하게 올라오는 허세가 내 심장 박동수를 안정시키고 혈맥의 흐름도 잔잔하게 만들었다.
뚜벅- 뚜벅-
‘그런데 지금 나 어디 가고 있냐.’
가라앉고 있던 허세를 이렇게 내가 자발적으로 끓어 올리는 건 처음인 것 같다.
느낌이 묘했지만, 썩 나쁘지 않았다.
이런 당황스럽고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내 정신을 똑바로 붙잡아 주던 까닭이다.
물론,
콰직-!!
“대륙 소드마스터라는 놈이 더러운 마물로 최후를 맞이하는구나. 어리석은 놈.”
이렇게 선을 넘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나는 들끓는 허세를 따라 반토막이 난 루시안의 머리를 짓밟았다.
마기가 빠져나간 그의 몸뚱이는 진흙처럼 가볍게 뭉그러뜨릴 수가 있었다.
그런 뒤,
“너희들은 목석이더냐?”
저 앞에 있는 기사들을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한번 폭발하기 시작한 아슬란의 허세는 나를 충동질하며 저들을 자극하게 만들었다.
그런 내 일갈에,
“!”
그들은 뒷걸음질을 쳐댔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나는 저들을 향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너희들도 이 마물과 똑같다면 칼을 들어라.”
그리고 당당하게 싸움을 걸었다.
쥐뿔도 없는 힘이지만, 저들을 바라보는 눈빛과 허장성세만큼은 가히 대륙 최강이었다.
“으으-.”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칼을 뽑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겁에 질린 짐승마냥 신음을 흘리며 몸을 떨 뿐이었다.
그러자 병적인 허세는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마치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나 아슬란이 친히 너희들을 상대해 줄 것인즉.”
겁대가리를 상실한 허세를 마구 표출해냈다.
“누구든 덤벼도 좋다. 저 마물처럼 정화시켜 주마.”
“······.”
순간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이대로 누군가가 칼을 뽑아 달려들면 목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하지만,
“우, 우린 마물이 아닙니다!”
그들 중 하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너도나도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쳤다.
“우린 악마가 아닙니다!”
“소문은 들었지만, 설마 루시안 대기사단장님이 저런 흉측한 마물이 될 것이라고는······!”
“거기다 저분은 10년을 넘게 함께 한 부관들을 망설이지 않고 죽였습니다!”
루시안이 악마로 변하는 것을 보고 이들은 큰 충격에 빠진 듯 보였다.
또한 그가 부관들을 무참히 도륙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지 않았던가.
충격이 클 만했다.
“우린······이러려고 여기에 온 것이 아닙니다.”
“오메르 왕국이 정말 악마의 손에 넘어갈 줄은······.”
흐름이 좋았다.
여기서 감언이설로 이들을 설득해 내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면······.
“이런 한심한 놈들.”
그러나 한번 엑셀을 밟기 시작한 병적인 허세가 이대로 멈출 리 없었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심취하며 그들을 경멸 어린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너희들이 스스로를 기사라고 할 수 있느냐? 자신이 섬기는 상관이 어떤 상태인지, 왕국이 누구 손에 놀아나는지도 모른 채 그저 허수아비처럼 서 있기만 하다니.”
“······.”
“너희는 기사의 명예도 모르는 하찮은 놈들이다. 무엇을 위해 칼을 드는지조차 모르고 있지 않은가? 기사라고 부르기에도 아깝구나.”
그런 모욕적인 언사에도 기사들은 그저 고개만 푹 숙일 뿐이었다.
다행히 이들에게는 전투를 할 의지가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나는 꿈틀거리는 허세로 그들에게 말했다.
“아직 늦지 않았다.”
“······?”
“너희들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다. 모든 것을 바로 잡을 기회.”
바닥에 고정되어 있던 그들의 고개가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너희들이 진정으로 악마를 혐오하고, 그 힘을 부정한다면 증명해내거라. 너희들은 다르다는 것을.”
고요한 침묵 속.
방금 전과 다를 바 없는 어색한 정적이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 있다면 바로 저들의 눈빛이리라.
“우리도 정말 달라질 수 있는 겁니까?”
“더럽혀진 우리의 명예를 회복시킬 수 있는 겁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리고 그들 옆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며 눈치만 살피고 있는 페리마라를 노려보았다.
“너희들 곁에 있는 저 악마의 하수인부터 직접 처리를 하는 것이 그 시작이겠지.”
기사들의 눈이 일제히 페리마라에게 집중되었다.
저들의 분노가 그에게 쏟아졌다.
“페리마라.”
“소문은 익히 들었다. 네놈이 흑마법을 부린다지?”
“과연 네가 우리 왕국을 타락시킨 것이로구나!”
그러자 페리마라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이, 이런 멍청한 놈들! 저런 말장난에 속아 넘어가는 것이냐! 너희들의 적은 내가 아니라 바로 저 아슬란이다!”
뭐, 구구절절 너무 옳은 말만 해서 오히려 뜨끔했다.
“감히 말장난이라 했느냐?”
그러나 저런 말은 활활 타오르고 있는 아슬란의 허세에 장작을 던지는 꼴이다.
“이들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더럽힌 놈이 그따위 말을 지껄이다니. 죽고 싶은 게로구나.”
“히, 히익!”
페리마라는 무섭게 치켜뜬 내 눈을 바라보고는 뒷걸음질을 치다 결국 엉덩이를 바닥에 찧었다.
기사들은 칼을 뽑아 들고 페리마라에게 다가갔다.
“페리마라. 저항하지 마라! 너를 붙잡아 직접 우리가 조사할 것이다. 우리 왕국에 숨어든 악의 세력이 누구인지를!”
그는 이를 뿌득 갈았다.
“이래서 꽉 막힌 기사 놈들은 쓸모가 없다는 것이다.”
“뭐라?”
“내가 너희 같은 놈들에게 순순히 잡혀 줄 거 같으냐?”
그러고는 페리마라가 마법을 펼쳐 저번처럼 도망치려 했다.
그러면서 놈은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소리쳤다.
“기다려라. 오늘의 수모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반드시, 반드시 복수하러 오겠다, 아슬란!”
아. 잠깐.
이대로 놓치면 위험할 거 같은데?
페리마라가 이대로 사라져 버리면 언제 어디서 나를 공격할지 모른다.
바로 그때.
“페리마라!!”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허공 위를 깃털처럼 가볍게 날고 있는 엘버스테인.
그가 푸른 예기를 내뿜으며 낙하하자,
푸욱-!
“크아아악!”
그대로 그 칼이 페리마라의 허벅지를 관통해 바닥을 뚫었다.
“에, 엘버스테인! 네, 네놈이··· 네놈이 감히! 으아악!”
“두 번은 놓치지 않는다.”
엘버스테인은 그 칼을 뽑아 이번에는 반대쪽 발등에 꽂아 버렸다.
“으아악!”
“네 죄값을 꼭 치르게 만들 것이다. 페리마라!”
“이, 이 애송이가!”
페리마라는 검은 마력을 끌어 올려 두 손에 모았다.
마법을 발현해 엘버스테인을 죽이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뻐억-!
페리마라의 마법이 발현도 되기 전에 어디선가 달려온 아론의 발이 놈의 얼굴을 강타했다.
“억-!”
페리마라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끌어 올린 마력도 전부 사라졌다.
마지막까지 추한 모습을 아낌없이 보여 주는 페리마라였다.
엘버스테인은 페리마라의 발등에 찍힌 칼을 뽑으며 말했다.
“고맙네, 아론.”
아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빠져 주었다.
오메르 왕국 기사들이 엘버스테인에게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자님······.”
“자네들.”
“저, 저희는······.”
“괜찮네. 자네들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 하지만 지금은 후회하기보다는-”
엘버스테인은 내가 있는 쪽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나?”
나는 엘버스테인의 정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엘버스테인]
무력: 85
지력: 85
분노 특성으로 잠시 90까지 치솟았던 무력 수치가 서서히 내려와 85에서 멈췄다.
이제 엘버스테인은 아론과 동실력의 강자가 되었다.
아니. 특성만 잘 활용한다면 이제 아론은 상대가 안 될지도.
갑자기 우리 아론이 초라해 보이는구나.
돌아가는 상황을 보건데, 슬슬 정리해야 할 시점 같았다.
“모두 뜻은 정했느냐?”
나의 말에 기사들은 무어라 대꾸를 하지 못했다.
“여전히 악의 힘을 따르겠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눈 감고 딱 한번 더 병적인 허세를 부렸다.
“이곳에서 너희와 저 군대를 모조리 죽여 정화하는 수밖에.”
“!?”
말 같지도 않은, 어처구니가 없는 허세였다.
내게는 그럴 힘도 없거니와, 제 아무리 저들이 대기사단장을 잃었어도 우리와 전면전을 벌인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하지만,
“우, 우린 아, 아슬란 대기사단장님과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부, 부디 아량을······.”
이들에게는 아슬란의 병신 같은 허세가 완전히 먹혀들고 있었다.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저들의 몸과 목소리가 그것을 증명한다.
거기다,
“아슬란 대기사단장님.”
엘버스테인 역시 긴장감이 역력해 보였다.
이들은 내가 정말로 저 대군을 몰살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는 것이었다.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난 이미 충분히 베풀었다. 대답을 하지 않은 건 너희들일 뿐.”
그러자 기사들이 하나둘 목청을 높였다.
“아슬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잘못된 것을 저희의 손으로 바로 잡겠습니다!”
“우리 오메르 왕국은 모든 악의 세력을 몰아낼 것입니다!”
다급하게 예를 차리며 소리치는 기사들을 거만한 고갯짓으로 바라보던 나는 엘버스테인에게 말했다.
“그리하겠다는군.”
“예. 저 역시 이들과 뜻을 함께하겠습니다.”
“좋다.”
나는 그들에게서 몸을 돌렸다.
펄럭~
망토를 멋들어지게 펄럭이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그러자 엘버스테인이 나를 붙잡았다.
“같이 가지 않으시는 겁니까?”
내가?
또 이상한 싸움에 휘말릴지도 모르는데?
여기까지 했으면 내 할 일은 다 한 것 같았다.
이걸 더 해 달라는 건 입에 넣은 밥까지 대신 씹어 넘겨 달라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너의 왕국을 되찾거라, 엘버스테인.”
그러니 나는 이제 그만 내 왕국으로 돌아가서,
“기다리고 있겠다.”
네가 내게 주는 두둑한 보상을 말이다.
그와 동시에,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 * *
“······.”
엘버스테인은 멀어지는 아슬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여전히 그는 닿지 못할 곳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감히 넘을 수도, 범접할 수도 없는, 그저 까마득한 높이에서 모두를 굽어보는 사람 같았다.
‘난 영원히 저분처럼 될 수 없겠지.’
하지만 그에게 닿고자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언젠가 그 발끝만큼은 따라갈 수 있지 않을까.
“소드마스터 카르만과 비등한 실력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악마가 된 루시안 대기사단장을 단칼에, 아니. 그것도 맨손으로 죽여버렸으니······.”
“손으로 그런 강력한 검강을 만들어내는 건 난생처음 봤습니다.”
부관들은 아직도 몸에 떨림이 가시지가 않았다.
아슬란이 보여 준 그 놀라운 힘과 상대를 짓누르는 위압감에 모두 압도되어 버린 것이었다.
“만약 우리가 멋모르고 일라이 왕국과 전면전을 벌였다면······.”
저절로 눈이 질끈 감겼다.
평야는 온통 오메르 왕국 병사들의 피로 물들 것이고,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 위에는 아슬란이 서 있을 것이다.
척-!
“······?”
그때 엘버스테인이 아슬란을 향해 예를 갖추며 인사를 올렸다.
왕자의 신분으로서 보이는 것이 아닌, 주군을 향한 충성스러운 부하의 예우였다.
“와, 왕자님!”
부관들이 깜짝 놀라 그를 말려 보았지만, 엘버스테인은 흔들림이 없었다.
“괜찮네. 이미 저분은 나의 주군일세. 주군께 드리는 작별의 인사도 못 하게 막는 것인가?”
“하, 하지만 왕자님은 이제 곧 왕이 되실 분입니다. 이대로 오메르 왕국으로 돌아가 악마와 결탁한 현 왕을 몰아낸다면······.”
그런 그들의 우려에도 엘버스테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 해도 난 기사로서 저분을 내 주군으로 택했네. 자네들과 같이 오메르 왕국을 재건하고 빼앗긴 왕좌를 되찾겠지만, 저분이 내게 가르쳐 주신 기사의 정신을 잊지 않을 걸세. 거기다······.”
엘버스테인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분께서 말씀하지 않으셨나. 기다리겠다고.”
“······.”
“비록 내가 왕의 신분이 된다고 해도 내 마음은 항상 저분을 주군으로 섬길 걸세.”
그러자 기사들도 더는 그를 만류하지 못했다.
그들이 봐도 아슬란은 무언가를 아득히 초월한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무릇 기사라면, 칼을 드는 자라면 아슬란을 직접 보고 그 위용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렇기에 엘버스테인의 마음을 백번 헤아리고도 남았다.
“돌아가지. 저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제 모든 것을 바로잡을 때이지 않나?”
기사들도 큰 목소리로 화답했다.
“예!”
그렇게 엘버스테인은 혼란스러운 군대를 진정시키고 오메르 왕국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