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1초만 소드마스터 29화
‘여기까지인가.’
설마 아슬란이 저런 마검을 가지고 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딱 지 주인을 닮은 듯한 건방지고 오만한 그런 검이었다.
문제는 저 검이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세상이 빙빙 도는 것만 같은 이 느낌.
메스꺼워 토악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
거기다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아슬란까지.
아주 삼박자로 지랄인 날이었다.
“하-. 이렇게 어이 없이 죽을 생각은 없었는데.”
지금이라도 마력을 끌어 올리면 어떻게든 공격 마법 하나쯤은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슬란을 보라.
레베카가 떨어뜨린 검을 태연하게 들고 있다.
저 마검을 들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에게 뭔가를 할 수 있을까?
“길게 끌지 말고 죽일 거면 빨리 죽여.”
그리고 마법을 쓰고 싶어도 어지러움이 극에 달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 마치 드래곤 피어라도 당한 것 같은 정신적 고통이었다.
“어차피 그때 날 죽이려 했던 거잖아? 그때 못 끝낸 일을 네 손으로 직접 끝내야지.”
그래. 죽이지 못 한다면 차라리 욕이라도 시원하게 박자.
“라울 그 새끼를 믿는 게 아니었어. 병신 같은 새끼. 차라리 내가 나섰다면······! 그럼 넌 반드시 죽었을 텐데.”
“······.”
“무슨 말이라도 해봐. 아니. 자기가 짓밟아 버린 천한 가문의 씨앗 따위랑은 말도 섞기 싫다는 거야? 이 좆 같은 새끼야.”
악을 지르듯이 레베카는 온갖 육두문자를 상대에게 다 퍼부었다.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한을 이곳에서 풀어 버렸다.
그래서일까.
속이 후련해졌다.
그리고 여전히 상대는,
“······.”
말없이 자신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씨발. 끝까지······.”
아슬란은 예전 그 모습 그대로 자신을 무심하게 바라보기만 할 뿐, 그는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인가.
그래도 사람이 말 한 마디 정도는 할 수 있는 거잖아?
“나쁜 새끼.”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레베카.”
무겁게 닫혀 있던 그의 입에서 처음으로 목소리가 나왔다.
“내가 널 이곳에 부른 건 널 죽이기 위함이 아니다.”
“······뭐?”
“그저 이 말이 하고 싶었다.”
그는 천천히 쭈그려 앉아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동안 잘 지냈나? 레베카.”
“······?!”
레베카는 입만 쩍 벌려질 뿐, 놀라서 말이 나오지도 않았다.
지금 이 남자가 뭐라는 거야?
“대체 내가 왜 널 죽일 거라 생각한 거지? 그럴 생각이었다면 엘버스테인에게 널 극진히 대우하며 데려오라는 명령은 하지 않았을 거다.”
“나, 나는 널 죽이려고 라울에게 미혼약을······.”
아슬란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고작 그따위 미혼약으로 이 몸을 어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내 약혼녀였지만, 예나 지금이나 나에 대해 아는 건 하나도 없군.”
“······.”
고작 미혼약?
그게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고 그런 소리를!
“그래도 한 방울도 남김 없이 먹었다. 네가 준 선물이니까.”
“미친!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러니 더는 날 죽이려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만약 네가 진정으로 날 죽이고자 했다면 더 지독한 방법을 썼겠지.”
뭐라 반박을 하고 싶은데,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 베라크 가문에 의해 멸망한 네 가문의 복수를 하고 싶었겠지. 충분히 이해한다.”
“가문의 복수?”
레베카는 코웃음을 쳤다.
“어차피 그 빌어먹을 가문은 날 가족으로 대해주지도 않았어. 날 이유 없이 천대하고 무시했다고.”
“······정말 아무 이유도 없었을 거라 생각하나?”
“뭐?”
“괜한 말을 했군. 일어나라. 부축해 주겠다.”
레베카는 자신을 일으키려는 아슬란의 손을 뿌리치며 기어코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났다.
“됐어. 누가 애인 줄 알아?”
“씩씩한 애라는 건 알겠군.”
그 말에 레베카가 눈을 매섭게 치켜떴지만, 아슬란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저렇게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사람이었나.
“이런 만남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다시 보니 좋군.”
“왜? 죽은 줄 알았던 약혼녀가 알고 보니 살아 있어서?”
“네가 죽지 않은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
“그저 멀리서 지켜만 봤을 뿐. 네가 그림자 길드를 만들고 그곳의 길드장이 되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안도했다.”
그동안 날 지켜보고 있었다고?
완전히 잊어 버린 줄 알았는데.
“전에도 그랬듯, 앞으로도 난 널 응원할 것이다, 레베카.”
“!?”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개, 개소리 하고 있어!”
“쓰는 말이 아직 애답구나.”
“애는 무슨! 내 나이가 지금 몇 살인데! 다, 당신이 이상한 소리를 하니까 그렇지!”
당황한 레베카는 얼른 이곳에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튼 우, 우리 사이에 이제 구린 건 없는 거야? 응? 갑자기 또 막 잡으러 오는 거 아니지?”
“네가 또 날 죽이려 한다면 모를까.”
“흥! 이제 그럴 일 없거든.”
그렇게 방 밖을 나서려다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 찝찝한 마음을 풀기 위해서라도, 나름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것만 같았다.
“당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는 게 좋아.”
“무슨 뜻이지?”
“오메르 왕국에서 비밀리에 군대를 준비하고 있어. 조만간 일라이 왕국을 향해 진군하려는 거겠지. 그 선봉에는 루시안이 있을 테고. 나도 최근에 알게 된 정보야.”
“오메르 왕국이?”
“그래. 앞에서는 너한테 평화 협상을 하려고 하겠지만, 뒤에서는 군대를 준비해서 쳐들어 올 거라고. 대비하고 있는 게 좋아. 거기 요즘 심상치가 않거든.”
“걱정해 주는 건가?”
그 말에 또 한번 얼굴이 붉어지는 레베카였다.
“거, 걱정은 무슨 개뿔! 그냥 이걸로 빚을 갚는 거지! 지금 오메르 왕국 놈들이 얼마나 막장인 줄 알아? 그놈들은 지금 악마의 힘까지 빌려서······.”
“그거라면 걱정할 필요 없다.”
“······?”
“나 아슬란이 건재하는 한, 일라이 왕국이 패배할 일은 없으니까.”
저 확신에 찬 목소리와 침장한 모습.
이번에도 개소리를 한다며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 말이 차마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난 분명 말해줬어. 알아서 해.”
레베카는 그 길로 도망치듯 집무실을 나왔다.
얼굴을 만져보니 여전히 열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어? 누님!”
밖에 있던 길드원들은 우르르 그녀에게로 모여 들었다.
“저희는 진짜 무슨 일이라도 있는 줄 알고 걱정했잖아요!”
“누님. 그런데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요?”
“안에서 무슨 얘기를 나눴기에······.”
레베카는 징그럽게 모여드는 길드원들을 쳐내며 소리쳤다.
“몰라! 입냄새 나니까 가까이 오지 마, 새끼들아!”
“엇! 누님! 같이 가요!”
“아니. 저녁 식사는 안 준대요?!”
“에라이 미친 새끼들. 빨리 따라오기나 해, 쪽팔리니깐.”
길드원들을 데리고 나서던 레베카는 아슬란이 있는 집무실을 슬쩍 뒤돌아 보았다.
아슬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가 허세만 가득한 사람이라는 평가는······ 이제 고쳐야 할 것 같았다.
* * *
“······갔나?”
휴우우우-.
긴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미친. 진짜 게임 어메이징 하네.”
레베카와 옛날에 약혼을 했다는 것도 충격적인데, 그 엑스 약혼녀라는 여자가 날 죽이려고 했다니.
“대체 아슬란 이 새끼는 어떤 인생을 살아온 거냐.”
아슬란은 너무 적이 많다.
고인물인 나조차도 모르는 적이 많다.
그래도 적절한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잘 넘긴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레베카는 이 검을 잡고 나서 그런 행동을 보였던 거지?
분명 날 죽이려고 마력을 끌어 올리는 것 같았는데 말이야.
“혹시 검이 무슨 반응을 했나?”
나는 검을 이리 보고 저리 보며 흔들어 보기까지 했다.
“어이, 검. 내 말 들리냐?”
“······.”
무안한 정적이 흘렀다.
몇 번을 반복해도 결과는 같았다.
“그래. 에고 소드는 무슨 에고 소드냐.”
이딴 게 내 말에 답할 리 없지.
“난 그냥 정보랑 아이템을 얻고 싶었을 뿐인데.”
레베카를 성급하게 불러 들이는 게 아니었다.
설마 둘 사이에 그런 악연이 엮여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그래도,
“정보를 얻긴 했네?”
오메르 왕국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라.
하지만 왜?
“엘버스테인 때문에?”
조금만 더 기다리면 보상금을 3배로 줄 테니 엘버스테인을 넘기라는 서신을 놈들이 보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메르 왕국은 서신을 보내지 않고 오히려 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것들은 밀당할 마음도 없는 건가?
“아니. 3배는 솔직히 국룰 아니냐? 그거 하나 못 줘?”
솔직히 5배는 선 넘은 거고, 3배는 줄만 한 수치였다.
그런데 그게 아까워서 안 주고 그냥 전쟁을 하겠다고?
“미친놈들인가. 전쟁이 애들 장난도 아니고.”
차라리 현상금 3배를 주고 전쟁을 하지 않는 게 더 이득일 텐데.
그냥 정보가 잘못된 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레베카의 정보가 절대 틀릴 일 없어.”
레베카의 정보는 값이 비싼만큼 그 값을 톡톡히 한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정보는 이제까지 단 한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그 뜻은 곧,
“오메르 왕국이 곧 쳐들어온다는 거네.”
그 선봉에는 소드마스터 루시안이 있을 테고.
거기다 그 뒤에는 테키나 족속까지 있다.
“그냥 2배에 팔 걸······.”
이래서 욕심 부리지 말고 무릎에서 사서 어깨에 팔라는 조언을 들었어야 하는 건데.
후회하기에는 이미 늦었나.
지금 서신을 다시 보낸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는 것이다.
레베카의 정보는 거의 예언이나 다름없다.
반드시 그 정보대로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이건 개발자들이 레베카라는 캐릭터를 설계하면서부터 정해 놓은 법칙 같은 것이었다.
그녀의 정보는 틀림이 없으며, 반드시 그 정보대로 이뤄지기에 가격도 무진장 비쌌다. 그렇기에 게임을 플레이 하려면 그녀의 정보를 얻는 것도 무척 중요했다.
“이건 대비를 하는 수밖에 없잖아.”
나는 목을 가다듬은 뒤 말했다.
“밖에 누구 없느냐?”
그러자 기사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찾으셨습니까?”
“엘버스테인을 데려와라.”
“예.”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최대한 힘을 끌어 모아야 한다.
우리 왕국의 피해는 최소한으로 줄이고 오메르 왕국에게만 피해가 갈 수 있게 말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원래 게임 퀘스트대로 리카르 성주와 손을 잡은 뒤 루시안을 설득해 왕을 배신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어차피 전쟁은 엘버스테인의 지지 세력이 해 줄 것이다.
그럼 난 병사들을 낭비할 필요가 없어지며, 내가 전쟁에 나설 필요도 없어진다.
어쩌면 운 좋게 어부지리도 할 수 있다.
“그런데 레베카 눈동자가 진짜 신기하게 생기긴 했네.”
엘버스테인을 기다리며 레베카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 게임의 5대 미녀 중 하나로 꼽히는 레베카이지 않은가.
특히 그 보랏빛 눈동자.
지금 사람들은 모르고 있겠지만, 난 그 눈동자가 가진 비밀을 알고 있다.
그 눈동자를 하고 있는 사람은,
“악마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핏줄.”
그것이 바로 레베카의 정체였다.
“말 안 한 게 잘한 거겠지?”
어차피 나중에 가면 게임 스토리에 따라 밝혀질 수도, 아니면 영영 묻혀 버릴 수도 있는 사실이니.
“그러니 나도 그냥 묻자.”
오늘 이후로 다시는 안 만날 사람이다.
하지만 왠지 또 만나게 될 거라는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