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1초만 소드마스터 24화
‘여기까지인가.’
엘버스테인은 그리 생각했다.
오직 왕국과 백성들을 생각하는 어진 왕이 되겠다는 자신의 꿈은 여기서 끝나는 줄로만 알았다.
“더러운 미물 따위가 이 몸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냐?”
저 남자를 만니기 전까진 말이다.
“건방지구나.”
위용 넘치는 풍채와 중후한 매력을 가진 얼굴.
거기다 상대를 압도하는 것만 같은 목소리까지.
저 남자는 저 괴물을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하찮다는 듯, 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는 가볍게 칼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키이이잉-!!
하늘을 뚫을 것처럼 솟아난 검강이 그대로 괴물의 몸을 갈라 버렸다.
기사단과 협공을 펼쳤는데도 몸에 흠집 하나 내지 못했던 저 괴물을 말이다.
‘저, 저게 무슨!’
저렇게 거대한 검강은 생전 처음 본다.
땅을 움푹 갈라 지면을 두 쪽 내 버릴 것만 같은 저 검강을 저리도 가볍게 만들어 낼 수가 있단 말인가?
콰콰콰콱-!!
하지만 놀라고 있을 새가 없었다.
‘이런!’
괴물을 갈라 버리고 치닫는 검강은 그대로 엘버스테인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미 피하기에는 늦었다.
그렇다고 저걸 막을 수도 없다.
기사단 전체가 달려 들어도 저 검강을 멈추게 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아버지.’
그는 눈을 감으며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였다.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임을 깨달으며.
“······.”
그런데,
‘왜 아무 느낌도 나지 않는 거지?’
너무 순식간에 검강이 지나가서 그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던 건가?
라고 생각하며 슬며시 눈을 떠보았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거, 검강이······!”
맹렬한 속도로 다가오던 검강이,
저 하늘마저 가를 것만 같았던 저 검강이,
“와, 왕자님!”
“이럴 수가. 어떻게 검강이 저리······.”
엘버스테인 코앞에 멈춰 서 있었다.
왕자를 지키기 위해 달려오던 기사들도 경악 어린 표정으로 멍하니 검강을 바라보고 있을 정도였다.
키이이잉-!!
그 강렬하고 위협적인 검강의 힘이 비명을 지르는 것만 같았다.
자신을 앞으로 더 보내 달라고.
닿는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게 놓아 달라고.
하지만,
파앗-!
거짓말처럼 검강은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다는 듯이.
“······.”
엘버스테인은 전율이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리고 저 말 위에서 자신을 냉담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이게 가능한 경지인 것인가?’
한번 쏘아 보낸 검기를 시전자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그것을 멈추게 만들며, 거기다 사라지게 만드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방금 전 그것은 그저 그런 검기가 아니었다.
이제까지 단 한번도 본적 없는 위력의 검강.
그것을 저 사내는 대수롭지 않게 다루며 엘버스테인을 그대로 반 토막 내 버릴 뻔한 것을 막아세웠다.
도저히 인간의 경지라고는 믿을 수가 없는 기행이었다.
다그닥-.
상대는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채 천천히 말을 몰아 엘버스테인에게 다가왔다.
그 서슬 퍼런 눈동자에 엘버스테인은 몸이 경직되어 제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눈빛만으로도 충분히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만 같은 무시무시한 위압감이었다.
“엘버스테인.”
그런데 상대는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넌 무단으로 경계선을 침범했다는 걸 알고 있나?”
“그, 그것이······.”
순간 머리가 새하얗게 돼서 무어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을 때였다.
“대체 뭐가 이리 오래 걸리는 것이냐? 그리고 방금 그 높이 솟아 오른 푸른······ 응?”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페리마라는 하던 말을 멈췄다.
놈은 두쪽 난 괴물과 그 밑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는 갈라진 땅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다 말 위에 있는 저 사내와 눈이 마주쳤을 땐,
“으헉!”
못 볼 것을 봤다는 듯 깜짝 놀라며 뒤로 넘어져 엉덩이를 찧기까지 했다.
“다, 당신은 아, 아슬란!?”
아슬란?
설마 그 아슬란을 말하는 건가?
거인 유한을 단칼에 죽이고 원탁 회의에서 카르만과 동등한 힘을 보여줬다는······!?
“죽고 싶은 것이냐? 감히 그 추잡한 입으로 내 이름을 담다니.”
엘버스테인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의기양양했던 저 페리마라가 완전히 겁에 질려 있는 모습을.
“아아······.”
그는 잠시 뒷걸음질을 치다,
“에잇!”
바닥에 검은 연막을 뿌렸다.
“어딜 도망가는 것이냐!”
그러자 아론이 연막을 향해 검기를 날렸다.
퍼억-! 퍼버벅-!
“크악!”
하지만 안타깝게도 페리마라는 이미 도망친지 오래였고, 검기에 맞은 건 그의 부하들이었다.
이 야비한 놈은 부하들을 버리고 혼자만 도망친 것이었다.
“제가 추격하겠습니다.”
“놔두거라. 제 목숨만 챙기는 놈일 뿐이다. 그 말로가 뻔히 보이는구나.”
아슬란은 한 마디의 말을 해도 남들과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저, 저희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눈치 빠른 페리마라의 부하들은 얼른 제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아슬란과 그의 기사들 숫자는 저들보다 적어 보였다.
하지만 상대는 무려 소드마스터다.
소드마스터가 무엇인가.
수백의 기사쯤은 숨 쉬듯 자연스럽게 없애 버릴 수 있는 검의 달인이다.
그걸 알고 있으니, 페리마라도 저리 발 빠르게 도망친 것이리라.
“죽일 가치도 없는 놈들이다. 왕국으로 데려가 전말을 조사할 것이다.”
“예, 대기사단장님!”
그런 뒤 아슬란은 그의 밑에 있는 엘버스테인을 내려다 보았다.
용을 닮은 듯한 그 눈동자에 엘버스테인은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저 사람을 닮고 싶다.
나도 저렇게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이다.
* * *
[페리마라]
무력: 50
지력: 80
마력: 88
페리마라.
오메르 왕국 최고의 마법사다.
대마법사급은 아니지만, 저 수치를 보면 알 수 있듯,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아론이 있어도 과연 상대가 될지 미지수인 강자였다.
하지만 그런 놈이,
‘자기가 알아서 도망쳐줬네?’
이러면 나야 고맙지.
거기다 놈이 버리고 간 수하들도 알아서 항복을 해 준 덕분에 유혈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벌써 테키나 족속 몬스터가 보이는 거지?
아직 저게 나오려면 스토리 전개가 어느 정도 되야 하지 않나?
설마 난이도가 극악이라서 평소 내가 알고 있는 스토리 흐름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건가?
‘뭐가 어찌 되었든.’
일단 내가 잘 살아 남았다는 것이다.
‘황금보석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사용법도 아직 익히지 않은 상태에서, 저 거인병 덕분에 실전으로 감을 익혔다.
그리고 찰나의 괴력을 사용하면 방금 전처럼 그런 무식한 크기의 검강이 나간다는 것도 확인했다.
과연 기검사라는 1티어급 옵션답게 굉장한 효과를 보여 주었다.
하지만 사거리는 역시 조금 아쉽긴 했다.
만약 사거리까지 길었다면,
‘거인병 뒤에 있는 놈도 함께 썰려 나갔겠지.’
오메르 왕국의 막내 왕자, 엘버스테인.
모니터에서 질리게 봤듯이, 정말 왕자님처럼 생긴 외모였다.
하얀 피부에 금발.
전형적인 왕자님 얼굴이었다.
‘고놈 참 돈 잘 받게 생겼네.’
입술이 씰룩이고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오려 했다.
할라즈에게 받지 못했던 아론 몸값을 여기서 복구시키는구나.
뭐, 내가 생각했던 만남은 아니었지만 항상 과정보다 결과가 더 중요하지 않던가.
내가 엘버스테인을 잡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멍하니 날 바라보고 있는 엘버스테인을 내려다 보았다.
놈을 잡았으니, 이제 오메르 왕국에 잘 넘겨 주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아슬란 대기사단장님.”
엘버스테인이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내게 예를 차렸다.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그러자 그의 기사들도 다 같이 뛰어와 내게 무릎을 꿇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뭐라는 거야.
너희들 살려 준 거 아니거든.
난 엘버스테인을 오메르 왕국에 넘겨서 받을 게 아주 많단 말이다.
하지만,
“과연 듣던 대로였습니다.”
“······?”
“여러 강자들을 만나봤지만, 아슬란님만큼 엄청난 검의 경지를 이룩하신 분은 처음이었습니다. 하늘을 가를 것만 같았던 검강을 날리시는 것은 물론, 그걸 의지대로 움직이기까지 하시다니.”
갑자기 얘가 왜 이래?
“그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검의 경지를 보는 것 같아 그 상황 속에서도 감격해 심장이 뛰었습니다.”
이놈이 아부를 하면 내가 좋게 봐줄 거라 생각하는 건가.
어림도 없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고작 그걸 꿈의 경지라고 하는가?”
아슬란의 허세가 그 말에 반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찮은 잡기술일 뿐이다. 경지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운 수준이지. 넌 꿈을 좀 크게 가져야겠군.”
오글 거리니까 그만해 미친놈아.
“과연······.”
또 시작된 아슬란의 허세에 엘버스테인은 두 눈을 반짝였다.
“아슬란님의 위대한 명성은 소문으로 익히 들었습니다. 검술은 가히 대륙 최강이라 일컬어도 부족함이 없으며, 백성을 위하는 모습은 마치 라헬께서 인간의 육신으로 온 듯하다고 말입니다.”
엘버스테인 이놈이 내가 끼어들 틈도 없이 입을 털어댔다.
“그래서 항상 당신의 소식을 들으며 흠모해 왔습니다. 훌륭한 국왕이··· 되기 위해 언젠가 당신에게 가르침을 받을 날을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잠깐.
이놈이 지금 뭐라고 떠들어 대는 거야?
“허락하신다면 제가 일라이 왕국으로 잠시 들어가 있어도 되겠습니까? 그곳에서 당신의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한다며 나는 단칼에 잘라 내려고 했다.
그런데 이놈이 간사하게 입을 털었기 때문일까.
“왕국에서 쫓겨난 왕자가 내게 가르침을 받는다라.”
아직 열기가 다 식지 않은 아슬란의 허세가 다시 펄떡 대고 있는 것을 느꼈다.
“건방지구나. 기사의 자격도 증명하지 못 한 자가 감히 내게 가르침을 받겠다니.”
“······.”
그래. 잘한다.
이대로 차갑게 쳐내는 거다.
“하지만-.”
그러나 갑자기 뒤에 이어지는 말이 불안해졌다.
“한번 지켜는 보겠다.”
뭐?
“그 말씀은······.”
“우리 왕국에서 누구도 널 왕자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잡일을 하는 일꾼일 뿐. 그걸 견딜 수 있다면 내 곁에 있어도 좋다.”
그러자 엘버스테인은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떤 것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그럼 따라도 좋다.”
그리 말한 뒤 나는 망토를 펄럭이며 말머리를 돌렸다.
‘이, 이게 지금 뭐하는 짓거리여, 시방.’
굴러온 호박을 넝쿨째 차 버리겠다는 거야, 뭐야.
아니지. 생각을 달리 해보자.
여기서 또 칼부림 하며 싸우다 변수가 발생하느니, 차라리 왕국으로 데려가 모든 무기를 내려 놓게 만들고 감옥에 쳐 넣으면 되지 않은가?
그게 훨씬 더 안전한 방법이었다.
‘그래. 써먹을 곳이 있으면 조금 써먹다가 오메르 왕국에 언제든 넘기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물론, 방금 전 오메르 왕국의 마법사와 작은 교전이 일어나긴 했지만, 이놈을 넘겨 준다고 하면 그 정도는 부드럽게 넘어가 줄 것이다.
‘후후후. 역시 난 천재야.’
아슬란 네놈의 허세가 날 이겨 먹은 줄 알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내가 보여주······.
[왕좌의 길]
-엘버스테인을 도와 그를 오메르 왕국의 왕으로 세우십시오.
-보상으로 10골드를 얻습니다.
“······.”
아무래도 돈 바꿔 먹기는 틀린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