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1초만 소드마스터 15화
나는 퀘스트창을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럴 줄 알았다.
이런 좋은 떡밥을 게임 시스템이 그냥 놓칠 리 없지.
‘10골드······. 포기할까?’
굳이 빨리 갈 필요 없이 천천히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걸 알기에 일부러 도시 안을 돌아다니며 서브 퀘스트들을 받고 다녔던 것이다.
‘검의 원탁이 아예 안 좋기만 한 건 아니긴 해.’
왕국 운영에 있어서 어디에 줄을 타야 하는지, 또 누구의 눈치를 봐야 하는지, 그리고 요즘 정세가 어떤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검의 원탁만한 곳이 없다.
사실상 각 왕국의 최고 권력자들이 모이는 자리이지 않은가.
하지만,
‘괜히 갔다가 잘못 걸려서 죽으면 다 부질없는 짓이잖아.’
그렇기에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하. 그냥 후딱 다녀오면 10골드를 꽁으로 버는 건데.’
내가 이렇게 골드에 집착하는 건, 그만큼 상점에서 나오는 보상이 좋기 때문이다.
거기에 나오는 아이템들에 붙은 옵션들을 통해 이 똥캐 아슬란을 조금이나마 보정해 줄 수가 있다.
아이템 말고는 사실상 게임 난이도 때문에 특성과 스텟을 올릴 수 없는 내게는 골드 상점 이용이 절실했다.
“일단 알겠다. 생각해 보도록 하지.”
선택은 잠시 뒤로 미뤘다.
뭐, 거의 안 가는 쪽으로 마음을 먹긴 했지만.
“······예?”
하리엘은 제 귀를 의심하며 되물었다.
“그 말씀은 참석을 안 하실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그래.”
그러자 하리엘과 더불어 전각에 모인 기사들과 신하들도 함께 놀라 했다.
그냥 허수아비처럼 앉아만 있는 리베르트 왕도 너털웃음을 지으며 오랜만에 발언권을 행사했다.
“허허. 아슬란 대기사단장. 검의 원탁은 우리 왕국을 위해서라도 무척 도움이 되는······.”
하지만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금방 꼬리를 내렸다.
“흠흠. 뭐, 대기사단장의 뜻이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
라울 사건 이후로 그는 더욱 나를 조심스럽게 대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호레스는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대기사단장님. 검의 원탁은 무척 중요한 자리입니다. 왕국 간의 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고, 새로운 교역로를 열 수도 있습니다.”
“그런 건 굳이 검의 원탁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할 수 있다. 안 그런가?”
“그, 그렇지만······.”
호레스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정말 참석을 하지 않을 예정이십니까?”
“생각을 하겠다고만 했지, 안 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리엘.”
“······알겠습니다. 그럼, 뜻이 정해지시면 그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지.”
하리엘은 가볍게 인사를 한 뒤 밖으로 나갔다.
나도 더 오래 앉아 있다가는 여기 저기서 말이 나올 것 같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다. 그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대기사단장님. 한번 더 진지하게 생각을 해보시는 것이······.”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난 분명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그들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내 명령에 따라 밖으로 나갔다.
나도 전각을 나가 답답한 마음에 잠시 바람을 쐬었다.
‘그래. 역시 안 가는 게 낫겠지?’
10골드가 눈에 아른거렸지만, 괜히 도박을 하느니 안전하게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쪽으로 가는 것이 맞았다.
아론처럼 든든한 호위기사가 한두 명만 더 있었어도 충분히 고려를 해보는 건데······.
역시 안 되겠지?
“무슨 고민거리라도 있으십니까?”
그때였다.
은쟁반 옥구슬 흘러가는 듯, 청명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온 것이.
“하리엘.”
백옥 같은 피부와 눈부신 외모로 멀리서도 눈을 사로잡는 하리엘이었다.
숙소로 돌아가지 않았던 건가?
그녀는 내 곁으로 다가와 나란히 앞을 바라보며 섰다.
‘뭐, 뭐야.’
보통 남정네라면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콩닥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녀의 빛나는 미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양 허리춤에 차고 있는 단검만이 신경 쓰일 뿐.
하리엘이 날 죽이고자 한다면 저 단검을 뽑는 동작도 못 보고 내 목이 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절 아예 기억에서 지워 버릴 줄 알았어요. 아니면 알고도 모른 척을 하든가요.”
입이 갈라질 것처럼 말라갔지만, 다행히 허세로 무장한 아슬란은 겉으로 겁먹은 티를 내지 않았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그러자 하리엘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야 10년 전 그 일 때문에요.”
10년 전 그 일?
대체 둘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러는 거야?
“당신이 저한테 청혼했었잖아요.”
“······?!”
뭐?
누가 뭐를 했다고?
“그래도 그땐 너무 하셨어요. 아카데미에서 생도로 있는 저한테 다짜고짜 청혼이라니.”
아슬란.
정녕 미친 새끼인가?
자기보다 한참 어린, 그것도 자기 목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딸 수 있는 여자한테 청혼을 해?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우리 나이가 15살이나 차이 나는 건 아시죠? 물론, 서로 사랑한다면 나이 차이야 상관없다지만, 친한 사이도 아니면서 갑자기 그렇게 청혼을 하는 건 역시······.”
“하리엘.”
“아, 네.”
“용건은 간단하게 해라.”
더 들었다가는 얼굴이 폭발할 것 같았다.
내가 한 짓이 아닌데도 이 수치심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알겠어요.”
하리엘은 잠시 심호흡을 한 뒤 말을 이었다.
“전 대기사단장님이 꼭 검의 원탁에 참석했으면 좋겠습니다.”
“······왜지?”
“그거야 당연히 이 왕국을 위해서도, 그리고 당신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니까요.”
“그걸 묻는 게 아니다.”
내 몸이 저절로 하리엘에게 기울어졌다.
“왜 그토록 집착을 하냐는 것이다. 내가 참석을 하든, 하지 않든 너와는 상관없을 텐데?”
너무 가까웠던 것일까.
하리엘이 히끅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지, 집착이라니요. 그런 거 아니예요.”
나는, 아니. 아슬란은 그런 그녀의 행동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저와 교단의 체면도 있으니까요. 검의 원탁이 보내는 초청장을 거절한 사람은 이제까지 한 명도 없었어요. 그런데 제가 그 첫 희생자가 되는 건 너무 억울하지 않나요?”
그녀에게서 얼굴을 가까이하던 아슬란의 몸을 나는 억지로 끌어당겼다.
미친놈아.
얼른 떨어져.
“시시한 이유로군.”
“전 중요해요.”
“그런가? 왠지 더 가기가 싫어지는데.”
드디어 이놈이 맛이 갔구나.
원래도 정신 나간 놈이긴 했는데, 오늘은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분명 평소처럼 잔뜩 허세를 부리는 것은 맞는데, 그 안에 다른 무언가가 섞인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럼 뭘 어떻게 하면 가실 건데요?”
“흠-.”
나는 턱을 쓸어내리며 말똥말똥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하리엘을 바라보았다.
컴퓨터 화면으로 봤을 때도 참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니 계속 바라보기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게서 느끼는 이 감정은 흥분감이나 호기심, 혹은 애끓음 같은 것이 아니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긴장감일 뿐.
다른 의미로 심장이 떨렸다.
‘이걸 어떻게 떼어내지?’
내가 계속 안 간다고 하면 진짜 칼부림이라도 할 기세인데.
그렇게 말없이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역시, 다른 사람들이 신경 쓰이십니까?”
그녀가 나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알고 있습니다. 원탁에 모이는 사람 중 당신과 껄끄러운 관계인 사람들도 있겠지요. 그리고 아마 그들이 당신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압박하려 들 겁니다. 어쩌면 큰 위험에 빠질 수도 있을 테고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누가 보면 독심술이라도 쓰는 줄 알겠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제가 대기사단장님 곁을 지켜드릴게요. 만약 다툼이 발생하려고 해도 제가 중재를 한다면 매끄럽게 넘어갈 수 있을 겁니다.”
잠깐.
그 말은 지금 검의 원탁에서 내 호위 기사 노릇을 해주겠다는 건가?
정말로?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리엘이?
이러면 말이 달라지지.
“하리엘.”
이건 엄청난 기회였다.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교단에서 크게 인정을 받고 있는 하리엘이 내 편으로, 그것도 내 호위를 맡아 준다면 이것보다 든든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넌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구나.”
“예?”
아슬란의 허세가 내 마음 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난 네 호위가 필요하지 않다.”
안 돼, 이 미친놈아!
이런 엄청난 제안을 걷어차겠다고?
“난 누구의 호위도 필요하지가 않다. 정녕 그 자리에 모이는 자들이 내 위협이 될 거라 생각하느냐?”
할 줄 아는 거라고는 허세 부리는 것밖에 없는 놈이 잘도 떠들어댔다.
그러나 무서운 점은 아슬란이 진심으로, 단 한 톨의 의심도 없이 믿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바로 이 대륙의 최강이며, 정녕 그 누구도 자신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럼······. 왜 거절을 하시는 거죠?”
“시간 낭비이기 때문이다. 기사의 명예도 모르는, 그저 허울뿐인 명성에 기대어 사는 놈들과 만나 무엇을 나누고, 무엇을 도모하라는 것이냐?”
하리엘은 눈을 껌뻑이며 멍하니 날 바라보기만 했다.
내가 들어도 얼탱이가 없는데, 하리엘은 오죽하겠는가.
“하지만-”
아슬란은 싱긋 웃으며 그녀에게 장난 섞인 따뜻한 시선을 보냈다.
“천하의 하리엘이 호위를 해주는 진귀한 경험을 놓칠 순 없지.”
“에?”
나는 그녀의 멍청한 표정을 보고 나서 몸을 돌렸다.
“내일 바로 출발하겠다, 하리엘.”
“저, 정말요?”
“그래. 그러니 얼른 가서 쉬어라.”
“정말이죠? 정말 내일 가는 거죠? 갑자기 마음 바꾸시면 안 돼요?!”
꽤 집요한 여자였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놔두고 집무실로 돌아왔다.
탁-!
그리고 문을 닫는 순간.
“우읍-”
온몸을 장악하고 있던 허세가 풀리면서 나는 전방에 힘찬 함성을 내질렀다.
“믿고 있었다고 아슬란!!”
그래. 병신 같은 너도 한 건을 하는구나.
뭐, 운 좋게 잘 맞아떨어진 거 같다만, 아주 적절한 밀당으로 하리엘의 호위를 약속받았다.
처음에는 이 정신 나간 놈이 하리엘의 제안을 거절해서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모른다.
“이제 10골드는 내 거야. 내 거라고!”
나는 집무실 의자에 앉아 다리를 쭈욱 뻗었다.
곁에 누구도 없기 때문에 이 같잖은 허세에 짓눌리지 않아도 됐다.
그래서 난 아주 불량한 자세로 거의 눕다시피 의자에 기댔다.
“후후후.”
자꾸 웃음 나오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 * *
“또 혼자 쌩 가버렸네······.”
망토를 화려하게 펄럭이며 사라지는 아슬란의 뒷모습.
언제 봐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사람이었다.
10년 전에도 그렇고, 오늘도 그러했다.
‘기사의 명예도 모르는, 그저 허울뿐인 명성에 기대어 사는 놈들과 만나 무엇을 나누고, 무엇을 도모하라는 것이냐?’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서 맴돌았다.
그리고 그녀는 아슬란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하리엘이 지금까지 봐왔던 검의 원탁은 그의 말대로 무언가 뜻깊은 것을 나누고, 도모하는 자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륙의 소드마스터.
대륙의 위대한 대마법사.
그런 명성이 정말 허울처럼 보일 정도로 그들은 온갖 탐욕과 야망에 잠식당한 사람들이다.
그것을 아슬란이 꼬집어 말한 것이 아닐까.
“그런데도 마음을 바꿨어.”
저 자존심 강한 사람이 대체 왜?
‘천하의 하리엘이 호위를 해주는 진귀한 경험을 놓칠 수 없지.’
나 때문에?
정말?
순간 얼굴이 붉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10년 전처럼 아직도 내게 마음이 있는 건······.
“어휴.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리엘은 혼자 웃으며 숙소로 돌아가고자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면서 자꾸만 아슬란이 있었던 자리를 힐끔 돌아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