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1초만 소드마스터 14화
신성 블레이드 하리엘.
이름에서 나오듯, 그녀는 신성한 임무를 수행하는 교단의 검이다.
모든 판타지 게임이나 소설이 그러하듯, 당연히 이 엘라 비하크에도 거대한 교단 세력이 있다.
태초의 신 ‘라할’을 섬기는 레이어스 교단.
하리엘은 어느 왕국에도 속해 있지 않고 오직 교단에만 충성하는 네임드 캐릭터다.
무력 수치뿐만이 아니라 전투 특성도 하나하나가 강력해서 웬만한 네임드는 상대가 전부 가능할 정도로 전투에 특화된 여자였다.
‘아론이 있어도 저 여자한테는 상대가 안 돼.’
하리엘이 칼을 꺼내 드는 순간, 우린 그냥 끔살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무력 90부터는 일단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괴물 같은 여자한테 지금 나는,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다면······.”
스르릉-!
검을 뽑아 드는 미친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었다.
하리엘이 마음만 먹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사지를 분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허세에 잡아 먹힌 몸은 통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녀는 알아서 로브를 벗었다.
그러자 은신이 풀리면서 그녀의 부하들도 함께 모습이 드러났다.
“어이쿠!”
“뭐, 뭐야!?”
“언제부터 저기 있었던 거지?”
은신이 풀리자 백성들은 깜짝 놀라며 그들에게서 멀어져 내 곁에 몰려들었다.
신성 블레이드라는 말이 무색하게, 그녀는 피 한 방울 묻힐 것 같지 않은 아름다운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녀가 보이는 옅은 미소에 백성들은 벌써 경계심이 풀어질 정도.
하지만 속으면 안 된다.
저 매력적으로 휘날리는 은발 머리조차도 강력한 살인 무기로 바꿀 수 있는 여자다.
“정말 오랜만이군요, 아슬란. 10년 만인가요?”
잠깐. 오랜만이라고? 10년만?
아슬란과 하리엘 사이에 연결점이 있었나?
이건 나도 처음 알았다.
하긴. 어떤 플레이어가 이런 똥캐한테 관심을 갖겠는가.
그러나 얼타고 있을 새가 없었다.
“하리엘.”
“다행히 절 기억하고 계시네요.”
“여기에는 무슨 일이지? 도둑 고양이마냥 백성들 틈 사이로 숨어들다니. 불순한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는군.”
그러자 그녀의 옆에 있던 부하 하나가 치기 어린 목소리로 반박했다.
“불순한 의도라니요! 이분은 레이어스 교단에서 신성한 임무를······.”
하지만 그 꼴을 허세와 군림이 절여 있는 아슬란이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어이.”
나는 상대방의 말을 자르며 눈을 매섭게 치켜떴다.
“죽고 싶나?”
“······!”
“누가 너더러 입을 열라고 했지?”
[에길론]
무력: 80
지능: 55
상대방의 무력은 무려 80에 달했다.
아슬란이 칼을 뽑기도 전에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힘의 차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번만 더 나와 하리엘의 대화에 끼어든다면 그땐 그 건방진 혓바닥을 뽑아 버리겠다.”
나는 에길론을 철저히 무시하며 짓뭉개 버렸다.
마치 너 따위는 내 상대가 될 수 없다는 듯이.
‘미쳐, 내가.’
순간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저러다 갑자기 칼을 뽑아서 달려들면 어떡하지?
“우린 싸움을 벌이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다행히 하리엘이 중재에 나섰다.
“우린 당신을 뵙기 위해 온 거예요.”
“교단에서 보냈나?”
“예.”
“그럼 손님이로군.”
나는 얼른 칼집에 검부터 넣었다.
나도 절대 싸울 생각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지만 이놈의 주둥이는 멈출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손님이라면 손님답게 오거라, 하리엘. 백성들이 불안해하고 있지 않나?”
제발 긁지 좀 마라.
저러다 하리엘이 눈 돌아가서 칼이라도 뽑으면 어쩌려고.
“······미안합니다.”
다행히 천사 하리엘은 되려 내게 사과를 했다.
어찌 보면 이게 당연한 거긴 하지만, 이 세계는 법보다 칼이 앞서고, 이성보다 힘이 먼저다.
아무리 상황이 불합리해도 상대방이 나보다 힘이 세면 입 다물고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일이 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리엘이 내게 사과를 다 하는 날이 오다니.
“시간이 늦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라. 묵을 곳은 있나?”
“아직 없어요.”
“그럼 기사들을 시켜 마련해 두도록 하지.”
나는 이놈의 허세가 또 하리엘의 성질을 긁기 전에 얼른 말머리를 돌리려고 했다.
“잠깐만요.”
그런데 이번에는 하리엘이 나를 붙잡았다.
난 귀찮다는 듯 그녀를 돌아보았다.
“뭐지?”
“제가 왜 여기에 왔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별로 궁금하지 않다.”
“네?”
당황한 하리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가 무슨 이유로 여기에 왔는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지.”
“알고 계신다고요?”
처음에는 갑작스러운 네임드 출현에 긴가민가했지만, 짱구를 돌려보면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레이어스 교단의 검.
그런 그녀가 나를 보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면 그건 분명,
“검의 원탁이 소집돼서 나를 부르러 온 게 아닌가?”
“······맞습니다.”
“그냥 초대장만 보내면 될 것을. 고생을 사서 하는구나, 하리엘. 예나 지금이나 융통성이 없는 건 똑같군.”
“읏-”
하리엘과 아슬란이 무슨 사이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가 FM 대로 일처리를 한다는 건 이 게임을 플레이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사실이다.
뇌물은 당연히 먹히지 않고, 일 처리에 있어서 뭐든 꼼꼼하게 하기 때문에 융통성이 없는, 부하들에게는 참 지옥 같은 상사라고 할 수 있다.
“돌아가겠다. 자세한 얘기는 내일 나누도록 하지.”
이 불편한 대화를 끝내기 위해 나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이럇-!”
그녀가 더는 날 붙잡을 수 없게 말의 배를 찼다.
······.
됐나?
이 정도면 꽤 멀어졌겠지.
뒤를 슬쩍 돌아보고 싶었지만, 아슬란의 몸은 절대 그런 좀생이 같은 행동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면 거리를 길게 벌린 것이나 마찬가지.
‘진짜 뒤질 뻔했네.’
하리엘 같은 네임드 캐릭터를 박박 긁는 것도 모자라 칼까지 뽑았으니, 몇 번이고 고쳐 죽어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하리엘이 아니더라도 그 뒤에 있는 놈들이 덤볐다면 답도 없었을 터.
‘원래 참을성이 많나?’
상대방을 대놓고 무시하는 아슬란의 입담을 듣고도 가만히 있다니.
역시 신성 블레이드 하리엘.
왠지 신앙심이 절로 생겨나는 것 같았다.
* * *
“칫. 잘난 척하기는. 하리엘님께서 말리지 않으셨다면 아슬란의 목을 진작 떨어뜨렸을 겁니다.”
“크크. 목을 떨어뜨리긴. 아슬란이 일갈하니까 겁먹고 그 자리에서 얼어 버린 놈이.”
“내, 내가 언제 그랬다고!”
에길론이 아니라고 완강하게 부정을 했으나,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부하들이 에길론을 놀리고 있던 중, 하리엘은 로브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런데 아슬란은 대체 우리가 은신하고 있었던 걸 어떻게 알았을까? 이건 그저 그런 은신 로브도 아니고 무려 교단에서 성스러운 힘으로 만들어 준 건데······.”
웬만한 마법으로는 절대 은신을 찾아낼 수 없는 로브다. 하지만 아슬란은 너무나도 쉽게 이들의 존재를 간파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혹시 아슬란이 ‘신안’을 가진 건······.”
에길론의 중얼거림에 타샤가 뒤통수를 때리며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아슬란처럼 교만하고 교단에 대한 존경심도 없는 사람이 신안을 어떻게 갖는다고!”
“악! 왜 때리고 그래? 아슬란이 우리가 숨어 있는 걸 금방 찾아낸 건 맞잖아?”
“뭔가 다른 방법이 있었겠지.”
“그 방법이 대체 뭔데?”
“그··· 아무튼! 뭔가 있었을 거야!”
타샤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신안은 오직 선택된 자만이 받을 수 있는 신께서 내리는 특권이자 축복이다.
그런 권능을 아슬란이 가졌을 리 없다.
“그래도 아슬란의 태도가 너무 건방졌습니다. 하리엘 님을 그렇게 대하다니.”
“은신 로브를 써서 몰래 들어온 건 우리 잘못이 맞잖아.”
“그건 그렇지만······.”
“거기다 그 유한을 일격에 죽인 남자야. 그 정도 실력이라면 누구든 아래로 보겠지.”
그들은 대꾸할 말이 없었다.
유한을 직접 대면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하지만 하리엘님도 의심하지 않으셨습니까? 유한이 아슬란 따위에게 패배할 리 없다면서요. 그래서 은신 로브까지 써서 그의 뒤를 밟은 것이 아닙니까?”
하리엘은 아슬란이란 남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자가 유한을 꺾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굳이 나서도 되지 않을 임무를 맡아 은신 로브까지 써서 일부러 도시 안에 잠입해 본 것이었다.
과연 아슬란이 어떤 평가를 듣고 있는지, 그는 여전히 쓸모없는 인간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성안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충격의 연속이었다.
“당신들! 우리 대기단장님을 괴롭히러 온 건 아니지!?”
“아슬란님을 건드는 놈은 우리가 가만 안 둘 줄 알아!”
레이어스 교단에서 나왔다고 하면 모두 고개를 숙이기 바쁘다.
그만큼 교단의 영향력이 컸고, 종교를 믿는 자들이 많은 만큼 교단에 봉사하는 사람들에게 존경심을 품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이 백성들의 반응을 보라.
이들은 무엇보다도 아슬란이 먼저였다.
“원래 이 도시가 이랬었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아슬란을 좋아하다니. 그 인간이 얼마나 몹쓸 놈인데.”
부하들도 이런 백성들의 반응이 의외인 듯했다.
교단은 듣는 귀가 사방에 깔려 있고, 이미 각 왕국에 대한 정보를 전부 가지고 있다.
불과 몇 주 전만 하더라도 도시의 상황은 이렇지 않았다.
하지만 하리엘은 왜 이곳이 바뀔 수밖에 없었는지 알 것 같았다.
“너희들도 봤잖아.”
“네?”
“아슬란이, 무려 왕국 최고의 권력가라는 인물이 직접 이곳까지 찾아와 사람들을 돕는걸. 너흰 그런 광경을 본적이 있어?”
“······.”
“난 귀족 출신이라 알아. 아무리 백성들의 평이 좋은 권세가라도 직접 도시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민생을 살피는 사람은 없어.”
그래서 신선했다.
강자에게는 강하고 약자에게는 한없이 약해질 줄 아는 사람이라니.
저게 정말 내가 아는 그 아슬란이 맞는 것일까?
허세만 많고 옹졸하기 짝이 없는 그 사내가 맞다고?
“그런데 하리엘 님은 아슬란 저자와 아는 사이셨습니까?”
“응. 10년 전에, 우리 둘만 아는 사연이 있지.”
“······?”
그 사연이 무엇인지는 하리엘도 말해 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더더욱 이상했다.
“왕국의 근간은 백성이 된다, 라는 말도 했었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봤어도, 실제로 행동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그 어려운 걸 다른 사람도 아닌, 아슬란이 백성은 곧 왕국의 근간이라는 것을 본인의 실천으로 보여주었다.
‘확실히 예전과 달라.’
하리엘 앞에서 보이던 그 투지도 결코 허장성세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가 유한을 꺾었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 생각이 달라졌다.
아슬란은 확실히 변화했다.
‘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누군가가 이토록 궁금해지기는 참 오랜만이었다.
* * *
“검의 원탁에서는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을 초대하는 바입니다. 부디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 주십시오.”
왕궁에 정식으로 온 하리엘.
그녀의 말을 듣고 드디어 올 것이 온 건가,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검의 원탁이 무엇인가.
그건 바로 대륙에 10명밖에 있지 않은 소드마스터들과 똑같이 10명으로 구성된 대마법사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대행사다.
그러한 행사를 주최하는 곳은 바로 레이어스 교단.
이들이 모이는 목적은 간단하면서 복잡하다.
대외적으로는 왕국끼리의 영토 전쟁을 멈추고 평화를 유지하자는 것이지만, 자세히 파고들면 은근한 기 싸움이었다.
그곳에서 몰래 동맹을 맺어 뒤통수를 치는 놈들도 있고, 서로 정보를 교환하며 이득을 취하는 곳도 있다.
‘일라이 왕국은 한번도 참석을 한 적이 없다는 게 문제지.’
일라이 왕국은 소드마스터를 보유하지 않은 유일한 왕국이었다.
소드마스터가 없으면 대마법사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것조차 없어서 한번도 검의 원탁에 초대를 받은 적이 없다.
하지만 내가 유한을 죽이고 7번째 소드마스터 자리를 획득하면서 그 자격이 생겼다.
즉, 이번이 최초라는 것이다.
“오오. 그런 영광스러운 자리를······!”
“우리 왕국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검의 원탁에 참석한다는 건 그만큼 왕국의 격이 드디어 다른 왕국과 나란히 할 정도로 올라갔음을 뜻한다.
신하들이 이토록 기뻐하는 것도 이해가 됐다.
하지만,
‘난 거기 참석할 생각이 없는데.’
검의 원탁은 괴물들만 득실거리는 곳이다.
이 연약한 아슬란에겐 아주 위험천만한 장소라는 것.
나도 게임을 플레이할 때 검의 원탁을 종종 참석했었다. 그리고 항상 싸움이 일어났다.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놈들이 알아서 칼부림을 하며 싸워댔다.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 하는 사내들이 진득하게 앉아서 대화나 나눌 것 같은가?
‘내가 가만히 있어도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기 마련이지.’
특히나 소드마스터 중에서는 신참이나 다름없는 아슬란한테 여기저기서 시비를 털려고 할 텐데, 까닥 잘못 휘말리면 끽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죽을 게 뻔하다.
그러니 내게 별 이득도 없는 곳에 가지 않는 게-.
* 퀘스트 발생!
[검의 원탁 회의에 참석하십시오.]
-보상으로 10골드를 얻습니다.
-골드는 상점에서 사용이 가능합니다.
“······?”
그런 내 의도를 다 읽고 있다는 듯, 갑작스럽게 나타난 10골드짜리 퀘스트.
이 게임은 날 한 시도 가만두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