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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초 소드마스터-12화 (12/200)

12화

1초만 소드마스터 12화

저벅 저벅-

등 뒤에서 언제 단검이 날아와 꽂힐지 모르기에 가급적이면 빨리 걷고 싶었다.

저벅- 저벅-

하지만 이 정신 나간 아슬란의 몸은 한 명이라도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으면 절대 빨리 걷지 않는다.

급똥이 마려워도,

아파 뒤지겠어도,

격조 있고 품위 있는 자세와 발걸음을 유지한다.

그 한 걸음, 한 걸음에도 본인만의 규칙이 있어서 그걸 지키지 않고서는 절대 마음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이 정신병자 때문에 바싹바싹 입안이 말라 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집무실을 나와 왕국 바깥까지 나왔을 때 그제서야 나는,

‘살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안 찌르네.’

놀랍게도 아론은 날 찌르려는 것도, 탈출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조용한 것을 보면 그는 아직도 내 집무실에 혼자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게 먹혔다고? 진짜?’

말 같지도 않은 허세의 연속이었다.

그 끝없는 망언을 아론은 설마 전부 믿고 있는 것일까?

정말 그런 거라면 아슬란도 아슬란이지만, 아론도 심각한 건데.

‘지금이라도 기사들을 보내 봐야 하나?’

아론이 집무실에 가만히 앉아서 찬찬히 복기를 해보면 내가 얼마나 허세를 부렸는지 눈치챌 가능성이 높다.

놈이 그걸 깨닫고 도망치기 전에 잡아야 하는 건 아닌지, 진지하게 고민이 됐다.

* * *

“······.”

아론은 단검에 비추는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기사의 긍지라.”

그것이 대체 무엇일까.

지금껏 아론도 말로만 기사의 긍지를 떠들어댔지,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고찰해 본 적이 없었다.

자신은 명예로운 기사라고, 긍지 높은 할라즈 왕국의 기사라고 콧대를 높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이 영원히 깨지지 않을 거라 굳게 믿기까지도 했다.

하지만 아슬란을 만나면서부터 그동안 아론을 지탱해 오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마치 거짓된 삶을 살다 진실을 마주했을 때의 충격과 초라함이 동시에 몰아치는 것만 같았다.

“기사의 명예······ 대체 그게 무엇이냐!”

단검을 붙잡은 손이 부르르 떨려왔다.

할라즈 왕국은 자신을 버렸고, 이제 의지할 곳은 없다.

또한 기사로서 명예도, 긍지도 잃었다.

하지만,

“그를 따른다면 나도 달라질 수 있는 걸까?”

그 말에 답하듯,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달라질 수 있네.”

아슬란이 아론을 따로 불렀다는 것을 알고 몰래 둘의 이야기를 엿들은 호레스였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과연 아슬란이 아론을 어떻게 설득하는지 듣고 싶었다. 그리고······ 넬라처럼 자신도 남아 있던 일말의 망설임을 없애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나와서 놀랐나?”

아론은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당신이 얘기를 엿듣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

아론이 눈치를 채고 있었다는 건 역시,

“대기사단장님께서도 알고 계셨다는 거겠지?”

“그럴 겁니다.”

분명 그럴 것이다.

아론보다 훨씬 더 뛰어난 능력을 가진 분이시니.

그렇다는 건,

‘아론뿐만이 아니라 내게도 말씀을 하셨던 건가?’

내 사람을 의심하지 않으며, 그들이 설령 내 등을 찌른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는다라.

여러 번 곱씹어 봐도 이건 아론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었다.

호레스 자신에게 하는 아슬란의 일침이었던 것이다.

네가 내 등을 찔러도, 나는 널 믿는다고 말이다.

“이런.”

호레스는 몸이 떨려올 정도로 벅찬 감정을 느꼈다.

이런 느낌은 생전 처음이라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그는 도대체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이토록 끓게 만드는 것인지.

“자네는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모르겠습니다.”

“그런가?”

호레스는 뒷짐을 지며 집무실 안을 둘러보았다.

“나는 대기사단장님의 마음이 조금 헤아려지더군.”

그의 꼿꼿한 성격답게 집무실 안은 무척 깨끗하고 잘 정돈 되어 있었다.

“그분은 자네의 재능을 안타까워하고 계시네.”

“절 애송이라며 무시하던데요?”

“후후. 당연히 그분 눈에는 자네가 피라미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겠지. 하지만 정말로 자네를 하찮게 여겼다면 그분이 직접 얼굴을 보는 일도 없었을 게야.”

“······.”

“거기다 기사의 긍지와 명예를 가르치기 위해 자네를 곁에 두려고도 하지 않았을 걸세. 자네가 들고 있는 그 단검이 증표이지 않나?”

호레스의 말이 사실이다.

아슬란은 단검을 던지며 언제든 배울 것이 없다고 여길 때 자신의 등을 찌르라고 말했다.

과연 어느 누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아론에게는 크나큰 충격이었다.

솔직히 아직도 그 충격이 가시지 않아 머릿속에 자꾸만 그 목소리가 맴돌고 있을 정도였다.

“자네가 부럽군. 젊은 나이에, 그분의 곁에서 배울 기회가 생겼다는 것이.”

“의외군요.”

“무엇이?”

“당신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습니까?”

“······.”

호레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

아론은 할라즈 왕국에서 중책을 맡았던 기사이니, 당연히 일라이 왕국과 할라즈 왕국 사이에 은밀한 교류가 있었다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부정하진 않겠네. 하지만 이 사실을 이미 대기사단장님께서도 알고 계신 거 같더군.”

“알고 계신다고요?”

“아까 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나? 나는 자신의 사람들을 믿는다고. 그들이 배신을 해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이야.”

“······.”

“그건 자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야. 내가 엿듣고 있다는 걸 알고 말씀을 하신 거지.”

호레스는 그저 웃음이 나왔다.

아슬란은 어디까지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일까.

스스로를 왕국 최고의 두뇌라 생각했던 시절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정말 대단한 분이지 않으신가? 그분은 아군을 속여야 적을 속일 수 있다고 하셨네. 그래서 우리가 작당 모의를 한다는 걸 미리 알아챘음에도 끝까지 모른 척하셨지. 오히려 역으로 그것을 전략으로 이용하셨다네.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나? 유한이 죽었고 할라즈 왕국은 우리 일라이 왕국에 대패를 했네.”

이 모든 것이 아슬란의 작전이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사람이 치밀하면 그런 계책을 세울 수 있단 말인가.

“아군을 속여야 적을 속일 수 있다······.”

몇 번을 되뇌어 봐도 명언이었다.

“그래. 그 어려운 것을 스스로 해내신 거지.”

아슬란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거대한 인물이었다.

대체 왜 그런 자가 지금까지 이름을 날리지 못했는지 의문일 뿐이다.

착-!

아론은 단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의 눈빛에 더 이상의 망설임은 없었다.

“제 선택이 여전히 옳은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분 곁에서 배워 보고 싶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기사의 긍지와 명예라는 것을.”

호레스는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절대 후회하지 않는 선택이 될 걸세.”

아론이 그 손을 붙잡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라이 왕국에 온 것을 환영하네, 아론.”

호레스도 아론과 마찬가지로 아직까지 남아 있던 일말의 망설임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 * *

새벽 이른 시간.

동이 트기 전 시간대가 가장 어둡다고 했던가.

이놈의 몸뚱이는 벌써 늙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이것도 아슬란의 허세 때문인지 자꾸만 새벽 시간에 눈을 번쩍 뜬다.

어제저녁 늦게 잠에 들었어도 꼭 정해진 시간에 눈을 뜨는 것을 보면 아슬란이 스스로 만들어낸 루틴 같았다.

집사도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동이 트기 전 미리 아침 식사를 준비할 정도였다.

“안 피곤하면 내가 말을 안 해요.”

이 시간에 일어나도 몸이 개운하면 괜찮겠는데, 그런 것도 아니다.

하루종일 수면 부족으로 피곤하고, 허세에 짓눌린 정신적 스트레스도 장난 아니었다.

“그래도 다행히 밥은 맛있단 말이지.”

과연 왕국 최고의 권세가답게 식사 퀄리티는 굉장히 높았다.

아침부터 스테이크를 썰어 먹는다는 것이 이런 행복이었구나, 라는 걸 매번 느끼고 있다.

“후-”

배부른 배를 땅땅 때리며 의자에 푹 꺼져버리듯 편하게 기대었다.

지금 많이 해둬야 한다.

이따 또 나가면 부하들 앞이라고 허리를 백날 꼿꼿하게 세우고 다닐 게 뻔하기 때문이다.

[소지금: 20골드]

[상점 이용은 50골드부터 가능합니다.]

“아직 30골드가 더 필요하네.”

게임 머니 외적으로 시스템에서 부여 하는 골드가 있다.

이 골드를 통해 다양한 것을 구매할 수가 있는데, 나오는 물품이 전부 랜덤이라 50골드를 모아 봐야 알 수 있었다.

“성장을 위해서라면 상점은 꼭 필요해.”

이 괴랄한 난이도는 캐릭터 성장을 통한 특성과 스텟 수급을 막아 놓았다.

원래는 퀘스트를 클리어하면 스텟이 성장하거나, 혹은 특별히 특성이 주어지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가능성을 완전히 막아 버린 것이다.

물론,

“모든 게임에는 허점이 있기 마련이지.”

아무리 극악 난이도라고 해서 성장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닐 터.

미친 난이도이지만, 이것도 결국 깨라고 만든 게임이니 캐릭터가 강해질 방법은 분명 존재한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내가 찾아봐야겠지?”

그때까지 살아남는 게 더 중요하겠지만 말이다.

"그보다 아론은 어떻게 된 거지?"

어제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그는 호레스와 함께 집무실을 나갔다고 한다.

"호레스 그 영감은 또 언제 와서 아론을 데리고 간 거야?"

설마 아론을 데리고 뒤에서 또 개수작을 부리려는 건 아닐까?

난이도가 극악인 것도 있고, 호레스는 아슬란을 죽이려고 하는 놈이다 보니, 그의 모든 행동이 의심스러웠다.

“위대한 분이시여. 기사들이 밖에서 대기 중입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나도 참 긍정적인 건지, 아니면 생각이 없는 건지 아침을 먹고 난 후 팔자 좋게 침대에서 늘어져 있었다.

잠은 오지 않았지만, 그냥 뒹굴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언제 이 미친 난이도 때문에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발발 떨면서 손톱을 물고 뜯고 있어도 모자를 판에 말이다.

“알겠다. 곧 나가지. 옷을 준비해 놓거라.”

“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가벼운 잠옷 차림.

중년의 나이라고 해서 배가 불룩 튀어나오진 않았다.

품위 유지 목적으로 아슬란이 그래도 몸매 관리는 빡세게 한 듯싶었다.

나는 괜히 복근에 힘을 주며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과연 대륙 최강자의 몸답구나.”

······.

잠깐 정적이 흘렀다.

“미친.”

지금 내가 뭐라고 지껄인 거야?

짝-! 짝-!

내가 아슬란처럼 혼잣말로 떠들어댔다는 걸 깨닫고는 화들짝 놀라 뺨을 마구 때렸다.

“정신 차려, 이 미친놈아.”

넌 아슬란이 아니야.

그냥 이 게임에 부조리하게 떨어진 플레이어라고.

“설마 이러다 완전히 아슬란한테 먹혀 버리는 건······.”

지금도 끓어 오르는 허세를 감당하지 못하는데, 나중에는 허세에 먹혀 버려 24시간 내내 아슬란으로 살아야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럼 평상시에 늘어져 있지도 못하고,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시간을 떼우지도 못한다.

마치 앞에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으로 24시간 동안 병적인 허세에 고통을 받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데.”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부하들 앞에서 허세를 부리느라 밥도 잘 못 먹고 배가 아파도 화장실을 마음대로 들락날락하지도 못 하는 이 정신병자의 삶.

그걸 24시간 동안 겪으라는 건 그냥 죽으라는 소리였다.

“내가 너한테 먹힐 줄 알고?”

나는 일부러 거울 앞에서 우스꽝스러운 춤을 춰댔다.

“하하. 어떠냐?”

손으로 입을 길게 잡아당기며 웃긴 표정도 지었다.

허세로 내 의지를 억압하는 아슬란이 경련을 일으켰으면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아주 약올라 죽겠지, 이 허세충아!”

그러다 현타가 왔다.

“······쓰읍. 병신인가.”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싶지만. 그래도 내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것도 잠시.

“위대한 분이시여.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집사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

굽어진 허리가 똑바로 세워졌고, 우습게 풀어진 얼굴도 근엄한 아슬란의 얼굴로 돌아갔다.

표정만 바뀐 것이 아니다.

혈맥의 피는 더욱 뜨겁게 흐르기 시작했고, 심장은 사자의 그것처럼 용맹하게 뛰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내가 보인 추태를 비웃듯,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왕국의 대기사단장.

대륙의 소드마스터.

그 위용에 걸맞는 카리스마까지.

거울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은 더 이상 방구석에서 게임만 하던 배불뚝이 방구석 여포가 아니었다.

오늘도 모두가 내 아래라는 것을 표방하듯, 내가 최강이라는 것을 강조하듯 거만하게 올려진 고개와 눈빛을 띠고 있는 아슬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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