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01초 소드마스터-11화 (11/200)

11화

1초만 소드마스터 11화

호레스는 회의장을 나가는 기사들과 신하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모두 흥분감에 사로잡힌 표정이다.

“정말 오랜만에······심장이 뛰더군요.”

“누군가의 목소리에 이토록 가슴이 요동치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이제는 낡아 힘을 거의 잃었다고 여긴 자신의 심장도 이리 쿵쾅대는데, 저들은 오죽하겠는가.

방금 전 그 연설을 듣고 피가 끓지 않는다면 정녕 사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대체 아슬란.

무엇이 너를 이토록 바뀌게 한 것이냐.

“군사님.”

“넬라 단장.”

“저는 이제 마음을 정했습니다.”

“······?”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에 대한 일말의 망설임, 그리고 의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부로 그것들도 마음에서 지울 겁니다. 이제 더는 흔들리지 않겠습니다.”

넬라는 확실하게 마음을 정했다.

아슬란을 따르기로 말이다.

“일라이 왕국에는 아슬란 대기사단장님이 꼭 필요합니다. 어쩌면 그분이야말로 유일한 희망일 겁니다.”

한때 그를 누구보다도 증오했던 넬라라는 것을 알기에 호레스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미 예상했던 일이기도 했다.

“군사님도 이제 마음을 정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겠지.”

아슬란을 죽이는 것이, 그의 뒤에 있는 베라크 가문을 멸문시키는 것이 이 왕국을 위해 최선이라 여겼다.

하지만 호레스는 깨닫게 되었다.

이 왕국이 살아나려면 아슬란이 필요하다.

저들의 눈빛을 보라.

뜨겁게 타오르는 저들의 전의가 온몸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이처럼 저들을 타오르게 만드는 사람이 있었던가.

‘이것이 바로 지도자의 자질인 건가?’

말 한 마디를 하더라도 사람의 마음을 충동시키며 움직일 수 있는 존재.

말뿐이 아니라는 것을 직접 증명할 수 있는 존재.

이 왕국에서 그것을 가능케 하는 건 오직 하나.

아슬란밖에 없었다.

* * *

“읏-”

부하들이 나가자 귀신같이 허세력도 썰물처럼 사라졌다.

뭐랄까.

오글거림, 쪽팔림과 더불어 텅 빈 공허감이 든다고 해야 할까.

방금 전 막 큰 무대의 연극을 끝내고 내려오는 배우들의 심정이 딱 이렇지 않을까 싶었다.

“아론은······. 역시 죽여야 되는 게 맞겠지?”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말이 있다.

그런데 아론은 바위 같은 놈이니 찔러 봤자 소용없었다.

찌르는 내 손만 아플 뿐이다.

아론은 내게 넘어오지 않는다.

“호레스 그 영감 때문에 사람들 기대감만 높아졌어.”

문제는 호레스.

그래. 항상 호레스 그놈이 문제였다.

괜히 말 같지도 않은 쓸데없는 소리를 해가지고 사람들은 내가 아론을 얻으려고 할라즈 왕국에 말도 안 되는 값을 제시한 줄로만 알고 있다.

악의적으로 그런 포장을 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자기도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인지.

무엇이 되었든,

“얼른 호레스도 갈아 치워야 하는데.”

물론 지금 흘러가는 상황을 보건데, 라울처럼 무작정 나를 공격할 것 같진 않았다.

“아니지. 방심하면 안 돼. 난이도가 극악이잖아.”

언제 또 무슨 사건이 벌어질지 모른다.

아론이 군을 우회시켜 수도를 공격하려 한 것도 그렇고, 라울이 갑작스럽게 자객들을 모아 나를 암살하려 했던 것도 그렇고.

이놈의 난이도는 깜빡이 없이 들이박기만 하고 있으니 앞으로의 상황을 쉬이 예상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나 말고 이 게임이 알아서 정해준 난이도라면 실컷 욕이라도 박겠다만, 내가 직접 이 손가락으로 선택한 난이도다.

그러니,

“악으로 깡으로 버텨야지.”

이런 똥캐 가지고 게임을 클리어 하는 건 말이 안 되겠지만, 벽에 똥칠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살아남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길이 열리지 않을까?

“에휴. 아론급 스텟만 가졌어도 이런 고민은 안 하는데.”

배를 벅벅 긁적이며 발을 의자 걸이에 걸은 채 한숨을 푹 쉬고 있을 때였다.

“대기사단장님!”

밖에서 나를 부르는 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흐트러져 있던 자세가 저절로 올곧아지고 버릇처럼 거북이마냥 축 앞으로 흐느적거리던 목도 목각처럼 단단하게 세워졌다.

······얘는 따로 자세 교정을 안 받아도 될 것 같았다.

“무슨 일이냐?”

“죄인 아론을 데리고 왔습니다.”

괜히 기대감만 높아진 부하들 앞에서 쪽을 당하느니, 차라리 부하들이 없을 때 만나는 게 나을 것 같아 아론을 따로 불렀다.

“들어와라.”

아론을 사방에서 감싼 채 기사 다섯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꼴이 말이 아니게 된 아론을 찬찬히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론]

무력: 85

지력: 80

참 속이 쓰리는 능력치였다.

저 아까운 걸 써보지도 못하고 죽여야 하다니.

차라리 저 스텟을 내가 쓸 수만 있다면 좋았을 텐데.

아까워도 어쩔 수 없다.

아론이 내 밑으로 순순히 들어올 리도 없고, 그렇다고 풀어 주자니 후환이 두렵다.

원래는 그냥 얼굴을 볼 필요도 없이 목을 쳐버리려 했으나, 호레스가 이상하게 포장을 해버려서 하는 수 없이 놈을 내 집무실까지 불러들였다.

“······.”

아론은 말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포박이 두껍게 잘 되어 있는 것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복수심에 눈이 멀어 내게 함부로 달려들진 못할 것이다.

그런데,

“흠.”

아슬란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일까.

부하들 앞이라고 또 급유하듯 허세력이 머리끝까지 차올라 내 감정을 부추겼다.

그 감정에 심취한 나는 절대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포박을 풀어주거라.”

아론의 포박을 풀어주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포박을 풀어도 기사들이 뒤에 든든하게 버티고 있어서······.

“너희들도 나가거라.”

안 돼. 나가지 마.

“예.”

이제 믿을 건 기사들밖에 없었는데, 그들마저도 나가 버렸다.

보통은 위험하니 같이 있겠다고 한번쯤은 말하지 않나?

어떻게 된 게 전부 군말 없이 명령을 따랐다.

저들은 아론이 내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굳건히 믿는 것만 같았다.

“포박을 풀다니. 자신감인가?”

포박에서 풀려난 아론이 꿇고 있던 무릎을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한님보다는 못 해도 동귀어진을 각오한다면 충분히 네 목숨을 가져갈 수도 있다.”

그의 몸에서 흉흉한 투기가 흘러나오고 있는 것이 피부로 와닿았다.

‘좆됐다.’

하지만 속마음과는 달리 지금의 나는 아주 태연했다.

저 찌를 듯한 살기에 솜털이 곤두서고, 등허리에 소름이 돋고 있었지만, 이 아슬란의 몸은 결코 놀라지 않는다.

이 세상 그 무엇도 두렵지 않다는 듯 덤덤할 뿐이다.

“자신감이라······.”

허세로 가득 찬 내 입술은 시동을 걸었고,

“이건 자신감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는 아론을 노려보았다.

“당연한 거라고 해야겠지.”

오히려 흔들리는 것은 아론의 눈빛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어디에 검이 있는지를 찾는 것 같았다.

위험하다는 본능적인 신호가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었음에도,

“검이라면 이 옆에 있다.”

나는 검의 위치까지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이것이 병적인 허세와 심취의 무서운 점이었다.

현실 감각을 잃어버릴 만큼 본인의 허세에 취하는 것이다.

아론의 몸이 검 쪽으로 서서히 기울였다.

그리고 그가 발을 떼는 순간,

“검을 잡기 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거라.”

아론은 흠칫거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너의 눈앞에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를.”

그는 선뜻 발을 앞으로 떼지를 못했다.

거기까지 하면 좋겠건만, 한번 뚫린 입은 멈추지 않고 상대방을 긁어댔다.

“재롱을 피우겠다면 말리진 않겠다.”

“······날 너무 얕보는군.”

“유한도 한 합을 버티지 못하고 내 손에 죽었거늘, 너라고 다르겠느냐?”

유한이란 이름에 아론은 눈을 부릅떴다.

당장이라도 내 목을 비틀어 버릴 기세였으나,

“큭-!”

그는 끝끝내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내게 원하는 것이 뭡니까?”

아론은 반쯤 포기한 얼굴이었다.

“딱히. 그저 이 소식을 알려 주고 싶었다. 할라즈 왕국이 널 버렸다고.”

“그게 무슨···?”

“내가 가격을 제시했으나, 그들은 널 돌려받고 싶어 하지 않더군.”

“하-”

아론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제자리에서 비틀거렸다.

기대했던 건가.

하긴. 그는 철석같이 믿고 있었을 것이다.

할라즈 왕국이 반드시 자신을 구해 줄 거라고.

하지만 그들은 아론을 버렸다.

“그래서, 왕국에서 버린 놈이니 저를 등용이라도 하실 생각입니까?”

날이 선 그의 목소리에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자의식 과잉이다. 내가 왜 너 같은 애송이를 곁에 둬야 하지?”

“그, 그건······.”

“저번에도 말했지만, 네 피를 내 칼에 묻힐 생각은 없다.”

“그럼 절 풀어주기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할라즈 왕국으로 돌아가 당신에게 복수를 할지도 모르는데?”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내 안에 가득한 허세심이 맹렬하게 들끓기 시작했다.

그것에 심취한 혓바닥은 거만함으로 가득 찼다.

억제할 수 없는 충동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어디 몇 번이고 덤벼 보거라.”

저질러 버렸다.

“기사의 긍지도 모르는 놈을 내가 두려워할 줄 아느냐?”

그것에 모자라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착각하지 말거라.”

내가 한 발자국 다가가자, 아론은 한 걸음 멀어졌다.

“내가 널 죽이지 않는 건 알량한 자비 따위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마른침이 아론의 목울대로 넘어가는 것이 보였다.

“기사의 명예도 모르고 싸우는 애송이의 피를 검에 묻히는 것이 나에 대한 모욕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내가 코앞까지 다다라 더는 뒤로 갈 수가 없을 때,

“으으-”

쿵-!

아론은 그대로 넘어져 바닥에 엉덩이를 찧었다.

그가 보였던 살기는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그저 맹수 앞에 겁을 먹은 초라한 모습만이 있을 뿐이다.

“넌 이제 자유다, 아론. 네가 복수를 위해 군을 다시 모아오든, 다른 것을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

나는 더 이상 그에게 볼일이 없다는 듯 지나쳐 문 앞에 섰다.

“다만,”

그리고 문을 열기 전 그를 돌아보았다.

“그땐 지금처럼 한심한 모습이 아니라 진짜 긍지가 무엇인지를 아는 기사였으면 좋겠군. 그럼 좀 덜 지루할 테니 말이다.”

“······.”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번뜩 정신을 차렸다.

‘잠깐. 지금 내가 뭐 하는 거야?’

정말 이대로 보내준다고?

‘미친 거 아니야?’

이러다 진짜 아론이 할라즈로 돌아가서 다시 전쟁을 일으키기라도 한다면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마침 내 허리춤에 단검 하나가 있었다.

이 정신 나간 허세가 일을 그르치기 전에 내가······!

“기사의 명예라는 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당신이 말한 그 긍지가 무엇입니까?”

그때였다.

아론의 목소리에 허리춤으로 가던 손이 멈췄다.

간신히 억눌렀던 허세력은 다시 치솟기 시작했다.

“당신이 저번에 말한 그 명예가 무엇인지, 그 긍지가 무엇인지 감옥에서 곰곰이 생각을 해봤습니다. 하지만······ 난 끝내 답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나는 힘 없이 고개를 떨군 아론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목이 훤히 드러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단검을 잡고자 하는 내 의지는 혈관에 펄떡대며 흐르던 허세에 꺾여 버렸다.

대신 그에게 말을 건넸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나?”

그러자 바닥을 바라보고 있던 그의 고개가 위로 올라왔다.

“예. 알고 싶습니다.”

그것을 보고 정수리까지 치솟던 허세력은 마침내,

“그럼 곁에서 배워라. 대륙 최강에게.”

하늘을 뚫으며 승천했다.

“······.”

아론은 잠시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았다.

최강이라는 말에 어이가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이 뻔뻔함에 할 말을 잃은 것일까.

“나 아슬란에게 배운다면 누구에게도 배울 필요가 없을 것이다.”

거기에 이놈이 결정타까지 날렸다.

내가 아론이라면 미친놈이라며 문을 박차고 나갔을 것이다.

“제가 당신 곁에 있어도 되겠습니까?”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이런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난 네가 뭘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고 했다.”

“전 적국의 지휘관이었습니다. 언제 제가 당신을 배신할지 모릅니다. 당신의 등 뒤에 비수를 꽂을 수도 있습니다!”

아슬란은 허리춤에 있던, 내게 남은 마지막 수단이었던 단검을 풀어 아론 앞에 던졌다.

“네가 찾고자 하는 기사의 긍지가 내게 없다고 여겨진다면 언제든 그 칼로 내 등을 찔러라.”

“!?”

아론은 바닥에 떨어져 있는 단검을 붙잡았다.

스르릉-.

천천히 뽑아 드니, 서슬 퍼런 칼날이 번뜩였다.

단검에서 보이는 그의 눈동자에 순간 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이런 미친.’

하지만 아슬란은 피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론에게서 몸을 돌려 당당히 등을 보이기는 허세까지 부렸다.

죽으려고 환장한 게 틀림없다.

“난 내 사람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그들이 설령 내 등에 검을 찌른다고 해도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

“그리고 아론.”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단검을 내려보고 있던 아론은 내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 방금 내 선택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