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엘라 비하크.’
소설 좀 읽어 봤다 하는 놈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고전 명작.
인터넷 발전으로 웹소설 시대가 도래하면서 고전 판타지는 전부 묻혔다고 하지만, 여전히 내게는 이 소설이 1위였다.
그리고 이 소설이 유독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는 이유는 바로,
“게임 때문이지.”
싱글 플레이부터 멀티 플레이까지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엘라 비하크.
소설 속 주인공을 플레이해 모험을 하며 대륙을 횡단하며 여러 왕국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 주된 목표지만, 반드시 그렇게 플레이를 할 필요는 없다.
굉장히 자유도가 높은 게임이라 자신이 원하는 컨셉으로 플레이 스타일을 바꿀 수 있고, 주인공이 아닌 다른 캐릭터를 선택해 전혀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것이 이 게임이 지금까지 수많은 게이머들에게 사랑 받는 이유다.
“이런 갓겜도 이제 슬슬 질리네.”
몇 년 동안 같은 게임만 하면서 여러 등장인물들로 다양한 컨셉질을 하며 플레이를 해왔다.
플레이를 할 때마다 정말 이런 게임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으나,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매일 먹으면 질릴 수밖에 없는 듯, 이 게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새로운 업적 달성!]
내가 아직도 안 깬 업적이 있었나?
그럴 리가 없는데.
수집할 건 다 수집했고, 게임 속 숨겨진 히든 퀘스트도 전부 클리어한 내가 아직도 업적 달성을 못 한 게 있다고?
[신의 장난]
“······?”
처음 들어보는 업적이었다.
내가 여러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면서 이런 업적을 받았다는 사람은 한번도 본적이 없다.
그렇다면 이건 설마······.
“내가 최초?”
벌써부터 커뮤니티로 들어가 비틱질을 할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청춘과 낭만이 가득한 플레이어님을 위한 선물입니다! 글로만 읽던, 그저 눈으로만 봤던 엘라 비하크 대륙을 생생하게 체험해 보십시오!]
축하 메시지와 함께 갑자기 화면이 전환됐다.
그리고 나오는 건 처음 게임을 시작했을 때 나오는 캐릭터 선택창이었다.
[캐릭터를 선택해 주십시오.]
항상 보던 캐릭터 선택창과는 뭔가 달라 보였다.
“으음? 캐릭터가 많아진 거 같은데?”
기분탓이 아니었다.
선택할 수 있는 등장 인물들 숫자가 두 배는, 아니. 최소 세 배 이상은 늘어난 것 같았다.
원래도 다양한 캐릭터들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 이 게임의 장점이었는데, 그보다 더 많은 캐릭터를 선택할 수 있다니.
이놈의 개발자들. 이런 걸 잘도 숨기고 있었다는 거지?
흥분감에 몸이 들썩거리고 아랫도리에 힘이 빡 들어갔다.
“그럼 어디······.”
룰루~ 휘파람을 불며 마우스 휠을 드르륵 내렸다.
“선택 안 되던 네임드들부터 비중 없는 캐릭터들도 꽤 많네.”
내가 이 게임과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각 네임드 캐릭터들마다 매력이 있다는 것이었다. 책을 좋아하는 팬들도 캐릭터의 생생한 입체감을 장점으로 뽑곤 했다.
“주인공은 달리진 게 없나?”
혹시 달라진 게 있을까 싶어 주인공의 능력치부터 확인해 보았다.
무력: 65
지력: 65
무력과 지력 스탯은 그냥저냥 평범한 수준이지만, 이 게임은 스탯만으로 캐릭터를 평가하면 안 된다.
[용기] [불굴] [행운] [전술의 귀재] [터득] [검술의 천재]······
너무 주인공 몰빵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특성이 많았다.
이래야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무래도 주인공 능력치는 그대로인 거 같네.”
그래서 난 새롭게 등장한 네임드들을 살펴보았다.
중요 네임드들은 하나 같이 든든한 국밥 같은 특성들을 가지고 있었다.
한 가지 더 감동 포인트는, 네임드들 말고도 별로 비중이 없는 캐릭터들도 여럿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과 간간히 마주친 술집 웨이터부터 시작해 마구간 주인도 플레이가 가능했다.
“뭐야. 이 미친 캐릭터 선택 자유도는.”
그러다,
“어?”
쭉 내리던 마우스 휠이 멈췄다.
[아슬란]
그 이름에 시선이 고정됐다.
“얘도 있었네?”
이름은 주인공처럼 멋있어 보이고, 뭔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게임을 플레이해 보면 그냥 이름뿐인 놈이라는 걸 금방 알게 된다.
중년들의 대표 미남이라는 이름이 딱 어울리는 얼굴을 가졌지만, 악당이라고 하기에는 능력이 형편없고, 선한 놈이라고 하기에는 악명 높은 놈.
집안 배경으로, 쉽게 말해서 빽으로 높은 자리에 오르고 허세만 가득한 놈.
한 마디로 네임드가 아닌,
“똥캐.”
이런 성스러운 네임드들 사이에 왜 이런 캐릭이 섞여 있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절로 든다.
뭐, 마구간 주인도 있는 마당에 이상할 건 없지.
안 그래도 몇몇 취향 특이한 놈들이 아슬란으로 플레이 해보고 싶다며 커뮤니티에 글을 쓴 걸 본적이 있긴 하다.
“흠. 특성도··· 딱 캐릭터답네.”
어쨌거나 그래도 나름 네임드라고 특성이 꽤 여러 가지 있긴 했다.
[병적인 허세] [행운] [심취] [사기 증진] [자긍심] [군림] [중후한 매력] [치졸함]
“대부분이 가성비 없는 능력이라는 게 문제지.”
특히 저 병적인 허세라는 특성이 참 와닿는다.
소설 속에서, 그리고 게임 속에서 이놈은 정말 병적으로 허세를 부린다.
귀족 가문의 허세, 대기사단장의 허세, 싸움 실력도 쥐뿔 없는 놈이 네임드에게 깝치질 않나.
하여튼, 여러모로 정신병자 같은 놈인데, 특성도 딱 그에 맞춰져 있었다.
“이런 놈을 누가 플레이 한다고.”
아니지.
달리 생각해 보면 좀 재밌을 수도?
“아슬란으로 플레이하면 난이도는 헬 아닌가?”
아슬란이 있는 일라이 왕국은 8개의 왕국 중에서 가장 약하다.
특히 아슬란의 가문인 베라크는 일라이 왕국에서 제일 강성한 가문으로, 그들이 저지른 각종 비리와 착취로 인해 멀쩡했던 왕국이 쓰러져 가다 결국 망하게 된다.
또한 아슬란은 적이 많아서 여기저기 싸움을 걸려는 놈들도 많고, 암살 시도도 많이 일어난다.
그뿐인가?
네임드들 중에서 아슬란을 좋게 보는 사람이 없다. 더군다나 아슬란은 무능력에 가까운 놈이지 않은가.
“한번 해볼까?”
주인공을 하면 그냥 게임이 너무 쉽다.
난이도를 최고로 올려도 쉽다.
주인공의 특성을 봐라.
이건 어떤 난이도를 해도 무조건 깨라고 만들어 놓은 캐릭터다.
원래 게임을 한번 하면 난이도를 항상 어렵게 하는 걸 좋아하는 터라 나는 이상하게 아슬란에게 끌렸다.
병신 같은 놈이긴 하지만, 컨셉 플레이를 하거나 하드하게 게임을 할 땐 이것만 한 캐릭터가 또 있을까.
안 그래도 요즘 컨셉 플레이도 질려서 안 하고 있던 차였는데, 크리스마스 선물을 미리 받은 기분이다.
“너무 어려워서 못 하겠으면 그땐 난이도를 낮추면 돼.”
일라이 왕국은 8개 왕국 중에서 가장 먼저 멸망하는 곳이다.
수천 번 플레이하며 일라이 왕국이 항상 제일 먼저 멸망해 버렸다.
아슬란은 바로 그런 곳의 대기사단장을 맡고 있다.
즉, 반드시 멸망 당할 운명인 왕국과 아슬란이라는 똥캐로 플레이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밌겠는데?”
이런 걸 좋아하면 내가 이상한 걸까?
나는 아슬란 캐릭터를 선택하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난이도를 결정해 주십시오.]
-하수
-중수
-고수
*극악*
“···극악?”
분명 3단계가 끝이었는데, 갑자기 하나가 더 등장했다.
“이것도 새로 생긴 건가?”
망설이지 않고 극악을 택했다.
게임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극악’ 난이도가 맞습니까? 플레이 중간에 바꿀 수 없습니다. 또한 추가 특성을 1개밖에 얻지 못하며, 플레이 중에도 특성 습득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나 제약이 많다는 거지.
딱 좋아.
이런 걸 좋아하는 내가 변태인 건가?
난이도가 어려우면 어려워질수록 사라졌던 도전 의식이 채워지는 기분이다.
괜히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그리고 만약 극악 난이도로 게임을 클리어 하게 될 경우, 사상 최초 극악 난이도 플레이 및 클리어를 한 유저가 될 수 있다.
게이머에게는 이보다 더 명예로운 보상이 없었다.
[특성 한 개를 선택해 주십시오. 특성 선택시 기존에 있는 특성 하나가 랜덤으로 사라집니다.]
-찰나의 괴력
-미인계
-철의 장인
“난이도가 하드해서 그런가.”
추가 특성을 한 개 주는데, 셋 중에 고를 만한 게 없었다.
더군다나 여기서 하나를 선택하면 원래 있던 특성 하나가 사라진다.
어차피 아슬란에게는 딱히 좋다고 여겨지는 특성이 없어서 아깝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찰나의 괴력] (300초)
찰나의 순간, 최강의 괴력을 발휘합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찰나에 불과합니다.
“처음 보는 특성인데?”
최강이라는 단어가 들어갈 정도면 보통 스킬이 아니라는 건데.
쿨타임이 300초?
이걸 좋다고 봐야 하나.
[미인계]
당신의 미인계로 수많은 여성, 혹은 남성의 애간장을 태울 수 있게 됩니다.
“아. 이건 뭔지 알지.”
컨셉 플레이를 하기에는 딱 좋은 특성이다.
[철의 장인]
무기 제작 및 재련 성공 확률이 대폭 증가합니다. 전설의 무기를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이것도 좋은 특성이긴 하지만······.”
아슬란으로 대장장이가 될 건 아니니까.
물론, 전설의 무기가 끌리긴 하지만 철의 장인이 된다고 해서 무조건 전설 무기를 뽑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소수점에 달하는 그 엄청난 확률을 뚫을 수 있어야 한다.
“미인계도 끌리긴 하네.”
수많은 후궁을 만드는 컨셉 플레이가 가능하지만, 아슬란은 전투 스킬이 아예 없고 전투 능력도 제로에 가깝기 때문에 공격 스킬 하나쯤은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했다.
“쿨타임이 300초나 되는 것도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일단 이번에는 찰나의 괴력으로 하고······.”
2회차 플레이 땐 미인계로 간다.
“후후후.”
내 음흉한 웃음소리와 함께 모든 세팅이 완료되었다.
[게임을 시작하시겠습니까? 시작 버튼을 누르면 엔딩까지 종료하실 수 없습니다. 또한 극악 모드 설정으로 인해 사망시에는 복귀가 불가능합니다.]
“일단 해보자. 근데 복귀가 불가능하다는 건 뭔 소리지?”
라고 중얼거리며 버튼을 누른 순간.
----!?
온 세상이 갑자기 새까만 어둠으로 변했다.
* * *
둥-! 둥-! 둥-!
북소리에 맞춰 진군하는 기마대의 말발굽과 보병들의 발소리가 땅을 울렸다.
“와아아-!”
이어지는 함성은 그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음을 알렸다.
“······.”
가장 선두에 서 있던 남성이 손을 들자 모두 침묵했다.
수천 명의 군사, 그리고 그들을 지휘하는 한 사람.
“나 할라즈 왕국 대기사단장 유한이 말한다. 오늘 저 건방진 일라이 왕국을 짓밟아 할라즈 왕국의 무궁한 영광을 도모하리라!!”
“오오오-!!”
어마어마한 함성이었다.
그들은 대기사단장 유한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대륙 10대 소드마스터.
그중 하나가 바로 유한이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상대는-.
“······.”
아까부터 왠지 말 없이 굳은 표정을 보이고 있는 일라이 왕국의 대기사단장 아슬란이었다.
* * *
‘뭐, 뭐야, 이거.’
게임 시작과 동시에 눈앞이 껌껌해졌다.
곧 눈을 떠 보니 다른 세상이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분명 난 책상 앞에 있는 게이밍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지금은 웬 말 위에 올라타 있다.
거기다 한 손에는 묵직한 촉감이 느껴지는 대검을 들고 있었고, 저 앞에는 푸른 깃발을 든 병사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아슬란]
무력: 50
지력: 50
특성: [병적인 허세] [행운] [심취] [사기 증진] [자긍심] [군림] [중후한 매력] [찰나의 괴력] (치졸함 특성이 삭제되고 찰나의 괴력이 대신합니다.)
골드: 0
호칭: 일라이 왕국 대기사단장, 베라크 가문의 수장.
“······?”
정보창.
그래. 정보창이다.
게임에서나 보던 똑같은 UI의 정보창이었다.
그렇다는 건 설마-.
‘거짓말이지?’
내가 아슬란이 된 건가?
“하하···.”
난 실 없이 웃었다.
내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그냥 꿈을 꾸고 있는 거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게······.
“아슬란!! 당장 나와서 나 유한의 칼을 받으라!”
우렁찬 목소리에 나는 정신을 번뜩 차렸다.
“유한?”
유한이라면 대륙 7번째 소드마스터?
* 퀘스트 발생!
[할라즈 왕국 대기사단장 유한과의 대결]
-유한과의 전투에서 무사히 도망치십시오.
-보상으로 골드 10을 얻습니다.
-골드는 상점에서 사용이 가능합니다.
“이건 또 뭔······.”
이번에는 퀘스트까지 튀어 나왔다.
그런데 웃기게도 싸우라는 게 아니라 무사히 도망치는 게 퀘스트였다.
아슬란의 능력치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유한을 이길 수 없다 이건가?
하지만,
(‘극악’ 난이도로 인해 퀘스트 난이도가 조정됩니다.)
뜬금없는 난이도 조정이 들어왔다.
-유한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십시오.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꿈이라면 지금 깨야 한다.
“겁이라도 먹은 것이냐! 당장 나오너라!”
겁을 안 먹는 게 이상한 거지 인마.
[유한]
무력: 93
지력: 35
심지어 나는 유한의 레벨을 볼 수가 있었다.
내 무력이 고작 50인데, 저놈은 93이나 된다.
즉, 싸우면 평타 한 방에 뒤진다는 뜻이었다.
“감히 대기사단장님을 모욕하다니!!”
“저 건방진 놈의 콧대를 꺾어 주십시오!!”
앞에서도 지랄인데, 뒤에서도 지랄이 풍년이다.
뒤를 돌아보니, 모두 일라이 왕국의 병사들이었다.
다들 날 말릴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불구덩이에 얼른 들어가라고 밀어 넣는 수준이었다.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생생해.’
이미 몇 번이나 볼을 꼬집어 보았으나, 여전히 나는 태평하게 푸르르 콧노래를 부르고 있는 듯한 말 위에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살아야 한다.
저기로 가면 100% 죽기 때문이다.
만약 여기서 죽어서 내가 원래 세계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겠지만, 게임 시작 전에 나온 그 불길한 문구가 퍼뜩 떠올랐다.
죽으면 복귀가 불가능하다고 했던가.
즉, 여기서 죽는다면
‘개죽음이라는 거지.’
거기다 난 말도 탈 줄 모른다고 시팔.
나는 말고삐를 잡아 옆으로 틀었다.
지금이라도 말머리를 돌려 도망칠 생각이었다.
그런데,
푸히히힝-!!
이 미친 말이 갑자기 높이 앞발을 드는 것이 아닌가.
“으, 으어어!”
그리고 쏜살같이 앞으로 튀어 나가버렸다.
‘미, 미친! 멈춰!!’
너무 놀라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다가닥-! 다가닥-!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은 고춧가루 탄 물이라도 마신 것마냥 미친 듯이 앞으로 달려가기만 했다.
“와아아아-!!”
“대기사단장께서 나가신다!!”
뒤에 있던 병사들은 잔뜩 흥분한 채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유한은 저 멀리서 힐끗 미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오호. 드디어 오는 것이냐?!”
팔뚝이 무슨 내 몸통만 한 유한은 거구의 사내였다.
그 거대한 몸에 맞게 그가 쓰는 대검 역시 거대했다.
그가 칼을 높이 드니, 검은 그림자가 지면을 메우는 것만 같았다.
‘안 돼. 이렇게 죽을 순 없어!’
나는 필사적으로 고삐를 잡아 올렸다.
그러나 전혀 말을 탈 줄을 몰라서 균형을 잡는 것조차 위태로웠다.
결국 몸이 뒤로 떨어질락 말락 젖혀졌다.
“으아아아!!”
제발 멈춰 이 미친 말새끼야!
“푸르르르-!!”
말은 여전히 무대포로 앞만 바라보며 달려갔고, 내 눈에 보이는 건 직각으로 검을 올려치려 하는 유한의 모습이었다.
저 대검을 피하고 싶어도 말의 속도가 너무 빨라 몸을 좌우로 움직일 수도 없다.
그나마 말고삐를 꽉 잡고 있어 낙마하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나는······.
‘죽는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야 하는 건가?
하필이면 왜 아슬란 같은 놈을 골라서!
주인공을 골랐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 아니야.
이놈은 왜 쓸 만한 전투 스킬이 하나도 없는-
‘잠깐. 전투 스킬?’
그 다급한 와중에도 뇌리에 스치는 한 가지.
내가 게임을 시작하기 전 이 버러지 같은 캐릭터에게 부여했던 단 하나의 특성.
[찰나의 괴력]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거라면······!
[찰나의 괴력을 발휘합니다.]
그 순간 심장에서부터 강한 떨림이 일었다.
그 떨림은 빠르게 퍼지면서 검을 붙잡은 오른손에,
뒤로 젖혀진 허리에,
마침내 몸 전체에,
“으아아아!!”
괴력을 불어 넣었다.
쐐애액-!
그리고 용수철처럼 튕긴 허리와 그 위로 내려치는 검이 유한의 검과 부딪혔다.
콰득-!
“가소롭구··· 엇!?”
그러나 동등한 힘의 충돌이 아니었다.
일방적인 폭력에 가까운 괴력.
“!?”
나는 보았다.
유한의 놀란 두 눈동자와 벌어진 입술이.
저 우람한 몸과 길쭉하게 뻗은 성스러운 검이,
“커헉-!”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갈라져 쪼개지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