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2화
# 상건아파트 괴담 (2)
VBS 방송국과 라미로브 간의 상호 합의는 원만하게 이루어졌다.
VBS 측에서는 현수 방송에 자신들의 프로그램 이름이 노출된다면 상건아파트 소재를 다뤄도 된다는 회신을 주었다.
또한 상건아파트 관리실과 주민들의 협조도 받아놓은 상태니 현장에 가서 촬영만 하면 된다는 부연 설명도 들었다.
단, 아파트 브랜드는 노출이 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이 부분은 현장 방송에서도 늘상 하던 일이기에, 현수는 바로 수락을 했다.
그러면서 촬영 때 들고 갈 장비들을 점검했다.
최근 새로 추가된 장비.
태환의 신칼과 향로, 그리고 오르골.
신칼로 귀신들에게 데미지를 줄 수 있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아직 태환의 손에 익지 않은지 제 몫을 하고 있지는 못했다.
그래서 태환도 나름대로,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신칼 다루는 법을 공부하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향로는 생각했던 것보다 효과가 확실히 좋았다.
귀신들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거리를 벌리게 하는 데에는 효과적이었다.
마지막으로 시메루의 오르골.
이 오르골은 퇴마에 도움이 된다기 보다는 방송에 도움이 되는 듯했다.
한창 무서운 분위기일 때면 자동으로 연주가 되는 것이었다.
어쩌면 EMF 탐지기처럼, 전자기파에 자동으로 작동하는 개념일지도 몰랐다.
어찌 되었든 현수 일행도 야외 촬영을 나가게 되면 기본 촬영 장비 이외의 장비 수가 많아졌다는 건 분명했다.
그 사이 혜련도 오랜만에 캡틴 타워에 방문했다.
그녀도 이번 촬영에는 게스트로 함께하기로 한 것이었다.
혜련도 약간의 영안은 들어와 있는 상태.
촬영에 도움이 되기는 할 것이었다.
그녀는 현수 방송에 출연한 이후 인지도가 올라가 공영방송의 스케줄도 제법 많이 잡히고 있는 상태였다.
특히 영안이 들어온 것 때문에 무당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이나 괴담 프로그램, 미스터리 프로그램 등에 많이 출연하고 있었다.
현수는 그녀와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현 방송계의 상황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현수가 예상했던 대로, 퇴마 현장 방송 중 사람이 다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다 보니 공중파나 종편에서는 더 이상 현수를 찾지 않는다는 것.
물론 세계적으로 워낙 유명한 방송이 되었다 보니 언제든 현수를 캐스팅 하도록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고도 전했다.
이때 혜련은 한 가지를 더 덧붙이기도 했다.
방송 쪽 관계자 중에 모다교 신자가 있어서 현수를 캐스팅 하는 걸 막는다는 것이었다.
이건 확실하지 않은 정보라고 했지만, 현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혜련은 자신의 무기도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 한 후 집으로 돌아갔다.
현수는 바로 신 주임에게 자신의 것과 비슷한 해충 퇴치용 솔트샷건을 몇 개 더 주문할 것을 요청했다.
현수가 사용하는 것처럼 개조된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소금을 이용해 게스트 스스로 호신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 * *
그렇게 바쁘게 한 주가 지나고 또 다시 찾아온 토요일 밤 10시.
상건아파트 주차장에는 현수의 차량이 멈춰 섰다.
오늘 촬영을 한다는 걸 알고 있는 일부 주민들은 벌써부터 창문을 열고 구경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몇몇 주민들은 준비 중인 현수 일행에게 다가와 해코지를 했다.
“이거 방송 나가면 우리 집값 떨어지는 거 아닙니까?”
“야밤에 또 얼마나 시끄럽게 하려고!”
“우리 아파트 이름 나오는 거예요?”
주민들이 번갈아 가며 말했다.
그러자 세정이 연신 90도로 인사를 하며 대답했다.
“아파트 브랜드는 절대 나가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세정의 사정에도 주민들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때, EMF탐지기에 솔트샷건, 힙색, 로프로 카메라까지 장착한 현수가 주민들에게 다가갔다.
“주민 여러분들께서 뭘 걱정하시는지 압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희도 촬영하면서 각별히 신경 쓰겠습니다. 헌데, 이 아파트에 귀신이 나온다는 이야기는 이미 주변 공인중개사에 싹 퍼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현수의 말에 주민들이 주춤했다.
“되레 저희가 퇴마를 해서 귀신이 더 나오지 않으면 여러분들 집값 보호에 더 도움이 되는 것 아닐까요?”
현수가 덧붙였다.
논리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여기에 아파트 브랜드까지 노출되지 않는다면 되레 주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크흠.”
몇몇 주민들은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현수는 화진과 태환, 세정에게 하던 준비를 계속하라고 손짓했다.
그때, 차량 한대가 들어오더니 혜련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 왔어요!”
혜련이 명랑하게 인사를 하며 손을 흔들었다.
현수는 트렁크에서 새 솔트샷건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죠?”
“그럼요.”
혜련이 웃으면서 장전손잡이를 작동시켰다.
“그나저나 지난주에 혜수가 나왔는데 이번에 내가 나와서 시청률 떨어지는 거 아니에요?”
그녀가 농담식으로 툭 던졌다.
“아뇨. 혜련 님이 저희 방송에 더 맞아요.”
현수가 단호하게 말했다.
“왜요? 그래도 아이돌에다가 비주얼도 괜찮았을 텐데.”
“지각에다가 투정이 앞서고. 혼자만 잘난데다가 사고나 치고. 앞으로 아이돌은 안 부를 거예요.”
현수의 말에 태환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래도 말뚝 뽑는 건 도움이 됐잖아요. 전 다시 한번 보고 싶은데.”
태환은 특유의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현수는 말하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준비 다 됐어요. 촬영 시작할까요?”
뒤에서 세정이 거치대의 카메라 앵글을 조절하며 말했다.
현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서자 세정이 바로 촬영시작 버튼을 눌렀다.
“안녕하세요! 캡틴 퇴마입니다.”
언제나처럼 똑같은 인사와 함께 방송이 시작 되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특별한 게스트를 모셨습니다. 바로 혜련 님입니다!”
현수의 소개에 혜련이 웃으면서 앵글 안에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캡틴 방송에 진짜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하하. 잘 지내고 있습니다.”
“TV에서 많이 봤어요!”
혜련과 일행은 예전에 함께 촬영해서인지 티키타카가 남달랐다.
그만큼 현장에 들어가기 전 분위기도 화기애애했다.
이어서 간단한 장비 소개를 하는 동안에도 혜련은 특유의 리액션으로 방송의 흥을 돋웠다.
혜수와 촬영할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 혜련이 확실히 더 재밌게 한다.
- 혜련 짱!!!!!!
- 좋아요 좋아요 좋아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존잼ㅋㅋㅋㅋㅋ
- 리액션 부자임ㅋㅋㅋㅋㅋㅋ
- 혜련은 예전에도 재밌게 했었음.
- 어떻게 보면 캡틴 성장할 때 같이 동고동락했던 멤버임. 본업이 있다 보니까 한동안 안 나온 거지.
- 맞아 그때 한창 재밌었는데.
- 하날하날이랑 방고리도 보고싶다.
- 그거 이 방송에서 금기어임.
- 언급 ㄴㄴㄴㄴㄴ
현수는 방송에서 피해자들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는 것에 대해서 강하게 규제를 한 적은 없었다.
다만 라미로브와 캡틴 타워 쪽에서 피해자를 자꾸 언급하는 시청자는 블라인드를 걸고 있었다.
아무래도 방송 분위기에 좋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혜련이 나와서인지, 오늘따라 유독 언급하는 시청자 수가 많았다.
세정을 비롯해 현수도 이런 채팅을 확인했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고 모른 척 방송을 진행했다.
“오늘은 수원에 있는 모 아파트인데요. 이곳에 귀신이 나타난다는 사연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어떤 사연인지, 오늘의 게스트. 혜련 님이 한 번 읽어주시죠.”
현수가 말하자 혜련이 상건아파트 엘리베이터 괴담을 쭉 읊어주었다.
그녀는 괴담을 읽어주면서 약간의 목소리 연기도 더했다.
그러자 몰입감은 한 층 더 배가 되었다.
- 와 소름.
- 진짜 개무서웠겠다.
- 그 사연자 살아있음????
- 와.... 빨간 원피스.
- 그 뻔한 빨간 원피스 귀신이 이렇게 무서울 수도 있나.
- 그럼 결론적으로 엘리베이터에서도 딱 마주보고 서있던 거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ㅅㅂ 오늘도 엄마랑 자야겠닼ㅋㅋㅋㅋ
시청자들은 혜련의 내레이션이 마음에 드는지 격한 호응을 보내왔다.
‘공중파 괴담방송을 진행하더니 사연 읽는 게 아주 맛깔나졌네.’
현수는 그런 혜련을 보며 내심 뿌듯해했다.
더구나 현재 시청자 수는 무려 50만 명에 다다르고 있었다.
아직 제대로 현장에 투입된 것도 아닌데도 이 정도 시청자를 끌었다는 건, 현수 방송이 또 한 번 업그레이드를 했다는 의미였다.
사실 이 부분은 혜수의 역할이 컸다.
전 세계, 특히 동남아에서 압도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혜수의 출연으로 알고리즘의 축복을 한 번 끌어 모을 수 있었고, 현수 방송에 매력을 느낀 사람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늘어났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혜수가 사람들을 한 번 모아줬다면, 현수의 퇴마와 혜련의 입담이 시청자 팬층을 한 층 더 두텁게 만들어주고 있는 것이었다.
“자. 그럼 이동해볼까요?”
현수가 걸음을 옮기면서 102동을 슥 보았다.
겉에선 귀신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여기 나오는 사연자 A씨가 11시에서 12시 사이에 귀신을 봤다면 우리도 좀 기다려 봐야 하지 않을까요?”
혜련이 다시 한번 사연 종이를 보며 물었다.
“시청자 분들께서 기다리니까 먼저 관리실부터 한 번 가보고 근처 수색을 해보죠.”
현수는 102동 앞에 있는 관리 초소를 가리켰다.
일행은 현수의 지휘 아래 관리실 앞에 도착했다.
현수가 유리창을 노크하자 중년의 경비원이 밖으로 나왔다.
세정은 그의 얼굴이 노출되지 않게 앵글을 내려 하반신만 나오게 촬영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캡틴 퇴마 채널에서 나왔고요. 저는 ‘박현수’라고 합니다.”
“아. 반갑습니다. 온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저희 방송을 보시나요?”
“네. 가끔 봅니다.”
“다름이 아니고 여기 있는 괴담 때문에 촬영을 왔는데요. 혹시 아시는 내용이 있나요?”
“음. 네. 우리 사이에서도 자정시간 대 근무는 조금 기피하는 경향이 있어요.”
“왜요?”
“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자꾸 동네를 돌아다닌다고 하니까요. 몇몇 아저씨들은 실제로 봤다더라고요.”
“사장님도 보셨나요?”
“아뇨. 전 못 봤어요.”
“보통 목격담들은 어떤가요?”
“저 102동 앞에 있는 놀이터. 거기 그네를 타고 있을 때도 있다고 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나온다고 하고. 주차장, 옥상, 할 것 없이 나타난대요.”
경비원이 102동 이곳저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전부 다 102동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인가요?”
현수가 경비원의 손짓을 따라 보며 물었다.
“어- 아. 네. 102동 주차장이나 102동 앞에 있는 놀이터. 뭐 그러네요.”
경비원이 대답했다.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정확히 어떤 건지 기억나시는 대로 좀 정리해주실 수 있을까요?”
현수가 물었다.
“으음. 먼저 102동 쓰레기 수거통에서 손이 튀어나온다는 소문이 있었어요. 그리고- 놀이터 그네랑 주차장. 지하 설비실. 옥상이요. 엘리베이터까지. 보통 그냥 나온다고만 알려져 있어요. 나오는 모습은 각양각색이라.”
경비원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하. 그런데 지하 설비실이요? 지하에 설비실이 있나요?”
“네. 저희 아파트는 반지하가 없거든요. 아파트 현관 들어가면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 있어요. 거기로 내려가면 아파트 상하수 시설, 전기, 쓰레기 수거, 엘리베이터 설비 콘솔들이 있죠.”
“거기서도 귀신이 나온다는 말씀이신 거죠?”
“네.”
경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저희가 가볼 곳들이 정해진 것 같습니다.”
현수가 카메라를 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