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 샹보르 르브레 성 (4)
커다란 식탁이 놓여 있는 식당.
영화 속에서 드레스와 턱시도를 입은 사람들이 연회를 했을 법한 커다란 공간.
그리고 한 쪽 벽에 크게 걸린 흑사병 의사와 붉은 악마들의 그림.
화려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앤틱한 디자인 가운데 한쪽 벽의 그림은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상당히 언밸런스한 그림 인테리어가 아닐 수 없었다.
현수와 방고리, 화진은 손전등으로 다른 쪽 벽과 천장을 비쳐보았다.
다른 곳에는 인물들의 초상화들이 걸려 있었다.
“흑사병 의사요? 그게 뭐예요?”
방고리가 물었다.
“13세기, 14세기에 전 유럽을 초토화 시켰던 흑사병 얘기는 들어보셨죠?”
현수가 손전등으로 그림 속 흑사병 의사를 비추며 물었다.
“네. 들어봤죠. 저 마스크도 게임 속에서 본 적 있어요.”
“당시 흑사병이 유행하면서 사람들이 죽어나가자 의술을 가진 의사들이 저런 옷을 입고 흑사병을 치료하러 다녔다고 해요.”
“으잉. 왜 저런 옷을 입었던 거예요?”
“최대한 피부가 드러나지 않게 롱코트에 장갑, 머리와 귀까지 다 감춘 거죠. 그리고 저 부리 모양 마스크에는 밀랍이나 허브를 채워서 페스트균을 막으려고 했던 거예요.”
“아아.”
“그런데 박테리아가 저런 걸로 막아질 리가 없죠. 흑사병 의사들도 감염돼서 많이 죽었다고 해요.”
“그런데 왜 영화나 게임에선 무서운 캐릭터로 묘사가 되는 거지.”
방고리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저 옷차림을 한 의사가 돌아다니고 있다는 건 그 동네에 흑사병이 돌고 있다는 의미니까요. 죽음을 몰고 다니는 사신처럼 보였겠죠. 당대 사람들한텐 희망이었을지 몰라도 기록 속에서는요.”
“이해가 되네요.”
“흑사병은 당시 악마들이 내린 질병이라는 속설이 돌았어요. 그래서 일부 지역에서는 흑사병에 걸린 사람들을 바로 죽여서 불태우는 의식을 행하기도 했었죠. 마치 마녀사냥처럼요.”
현수가 붉은 악마들을 비추며 말했다.
“그럼 설마- 이곳에서 그 학살이 이뤄졌다는 건가요?”
화진이 물었다.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이 그림으로 봐서는 이곳에 살았던 가문이 흑사병과 관련이 있는 건 맞는 것 같네요.”
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초상화에 저런 짓을 해놨다는 건 이 가문에 원한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의미인데.”
“감옥에서 봤던 것처럼 고문을 하고 사람을 죽였다면 당연히 어딘가에는 척을 졌겠죠.”
현수는 화진과 방고리를 번갈아 본 후 돌아서 홀로 돌아갔다.
모두 찝찝한 기분을 감추지 못한 채 현수를 따라 나왔다.
현수는 다음 층으로 올라가 보았다.
이곳은 1층과 다르게 귀신의 흔적이 역력했다.
첫 반응은 어린아이가 놀던 것으로 보이는 놀이방에서부터였다.
EMF 탐지기가 다섯 개 불빛 모두 반짝이고 있었다.
현수는 솔트샷건을 들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어 보았다.
그러자 이제 세 살쯤 되어 보이는 아기가 나무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이 보였다.
현수는 그 아이와 함께 방에 놓인 장난감들을 유심히 보았다.
나무로 만든 인형과 헝겊으로 대충 묶어 만든 장난감들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사아아아아
아이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문밖의 현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현수는 소름이 끼쳤다.
아이의 얼굴 절반이 검게 변해 있는 것이었다.
‘흑사병!’
병에 감염된 것이었다.
‘병에 걸려서 죽었던 거야!’
확실한 것은 이 르브레 성 주변에 흑사병 재앙이 닥쳤고 거기에 이 성 사람들이 화를 입었다는 사실이었다.
아이 귀신은 현수를 보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마치 피아노 메트로놈처럼 기괴하게 좌우로 고개를 꺾는 것이었다.
현수가 아이에게서 눈을 떼고 있지 못하자 방고리와 화진도 방 앞으로 다가왔다.
“뭘 보고 있어요?”
화진이 물으며 다가왔다가 아이를 발견하고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이 귀신의 모습이 너무도 기괴했기 때문이었다.
화아아아아아아
순간 눈보라 같은 차가운 한기가 휘몰아쳤다.
이내 1층에서 여러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현수 일행은 뭔가에 홀린 듯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아래를 보았다.
식당에서부터 홀에 이르기까지, 흑사병 의사들이 줄지어 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회색 연기를 스멀스멀 피어내고 있었다.
“이, 이-”
“쉿!”
방고리가 무어라 입을 벌리려 하자 현수가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했다.
흑사병 의사 악귀들은 경건한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출구로 슥 이동했다.
그러고는 잠겨 있는 정문을 투과해 나갔다.
그 장면은 심령카메라로 시청자들에게 나갔다.
- 악귀들이 집밖으로 나란히 나가는 거??
-다들 어디 가는 거임????
채팅이 올라오는 사이, 건물 밖에서 비명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놀라서 내는 비명이 아닌 괴로움에 내는 비명.
지하 감옥에서 들었던 바로 그 비명이었다.
쾅!
그 순간이었다.
굳게 잠겨 있는 1층 정문에서 누군가 문 두드렸다.
현수와 화진, 방고리가 서로를 보았다.
쾅 쾅 쾅 쾅
심지어 이 소리는 물리적인 소리로 생방송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 뭐야 누가 온 거임????
- 시청자 중에 누가 간 거 아님??
- 누구야
- 귀신이 두드리는 건가??
- 누가 간 거면 핵민폐임.
- 설마 아니겠지.
시청자들도 소리의 정체를 궁금해 하고 있었다.
“지금 대체 무슨 상황인 거예요?”
화진이 놀라 물었다.
현수는 다시 방 안의 아이 귀신을 보았다.
“여기 있던 귀신이 사라졌어요.”
방 가운데에는 아이 귀신이 가지고 놀던 인형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쾅 쾅 쾅 쾅 쾅
문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격렬해졌다.
“꺅!”
주변을 살피던 화진이 비명을 질렀다.
2층으로 올라오는 계단 끝 중앙에 놓인 성모 마리아 상이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화진은 성모 마리아의 얼굴을 보자마자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괜찮아요?”
현수가 화진을 부축하며 물었다.
그때, 문소리가 멈추더니 나갔던 흑사병 의사들이 다시 줄지어 들어왔다.
그러고는 홀 가운데 우두커니 서서는 현수 일행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다.
“지금 우리 보고 있는 거죠?”
방고리가 물었다.
“아마도요.”
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휘이이이잉
찬바람이 몰아침과 동시에 흑사병 의사 귀신들이 계단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들에게서는 강한 한기가 느껴졌다.
화아아아아아
이어 흑사병 의사 귀신들의 몸 주변에서 회색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이들 역시 순식간에 악귀로 변한 것이었다.
현수와 방고리가 계단 위에 딱 버티고 서더니 솔트샷건과 슬링샷을 마구 쏘기 시작했다.
팡 팡 팡
핑 핑-
소금과 팥알이 흑사병 의사 악귀들에게 날아갔다.
사아아아악
피격된 악귀들이 뒤로 날아가며 회색 연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연기가 뭉쳐지더니 형체를 되찾았다.
화아아아악
사방으로 찬바람이 마구 불었다.
귀신을 보지 못하는 스태프들 눈에는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갑자기 내려가는 온도와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
계단 아래로 장난감 소금 총과 새총을 쏘는 현수와 방고리.
그걸 촬영하고 있는 세정.
하지만 세정이 촬영하고 있는 심령카메라 화면을 보면 대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회색 악귀들이 계단 위로 올라오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팡 팡 팡
현수와 방고리가 계속 밀어냈지만 악귀들과의 거리는 점점 좁혀들고 있었다.
“3층으로 올라가세요!”
현수가 화진과 방고리를 보며 소리쳤다.
그러자 화진이 앞장서서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향해 내달렸다.
현수는 일행과 카메라 스태프들이 달리기 시작하는 것을 확인한 뒤 스프링텐션 수류탄을 꺼내 계단으로 굴려 보냈다.
빠각-
수류탄이 열리면서 팥가루가 사방으로 확 피어났다.
그러자 흑사병 의사 악귀들이 일제히 흩어졌다.
하지만 한기가 강하게 남은 것으로 보아 다시 나타날 기세였다.
현수는 바로 돌아서서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향해 뛰었다.
*
- 이번 촬영은 뭔가 미국 공포 영화 느낌임ㅋㅋㅋ
- 아아아아아 ㅇㅈㅇㅈㅇㅈ
- 뭔 느낌인지 알겄음ㅋㅋㅋ
- 개인적으로는 별로.
- 이번 촬영 재미 없음.
- 지금까지는 재밌기는 한데 지루함. 의리로 보고 있음.
시청자들은 다른 문화의 공간 안에서 다른 느낌의 귀신들과 촬영이 진행되는 것에 대해 위화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럽 고성에 나타나는 귀신에 대해서 짧은 클립 영상 정도나 흥미롭지, 이렇게 몇 시간 동안 계속 비슷한 배경, 낯선 문화 속 귀신 이야기 하고 있다면 지루할 것이었다.
현수는 채팅창을 확인하며 대략적인 여론을 파악해 보았다.
일본과 프랑스, 독일, 폴란드 쪽 시청자들도 상당히 많이 유입이 된 상태였다.
그들에게는 꽤나 재밌는 소재인 모양인지 외국어 채팅이 상당히 많이 보였다.
각자 자기 나라 말로 채팅을 쓰고 있어서 바로 번역이 되지는 않았지만 이모티콘과 느낌표, 물음표가 많은 걸로 봐선 이들도 흥분해 있는 것 같았다.
“지금 대체 무슨 상황이에요?”
방고리가 닫힌 문 앞에 서서 물었다.
3층으로 올라온 일행은 가장 가까이 있던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고, 바로 문을 닫은 뒤 부적을 붙여 두었다.
그러자 악귀들은 3층까지 올라왔다가 문을 뚫지 못하고 모두 사라져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언제고 다시 나타날 수도 있다는 판단 때문에 방 안에 남아 있었다.
“흠.”
현수가 채팅창을 확인하던 폰을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까진 추측인데 이곳에서 흑사병 환자들에 대한 고문과 학살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 집 사람들도 흑사병에 걸리면서 재앙이 들이닥친 거죠.”
“병에 걸린 사람을 왜 고문하고 죽인 거죠?”
“악마의 병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현수가 방고리를 빤히 보며 대답했다.
방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아무튼 계속 여기 갇혀 있을 수는 없죠.”
현수의 말에 화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좋은 방법이 있어요?”
현수는 턱을 매만지며 방은 슥 둘러보았다.
벽돌로 투박하게 만들어진 방에 놓인 오래된 책상과 침대.
이곳은 하인들이 살던 방인 듯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여기 있는 악귀와 귀신들이 우리 퇴마 방법에 굉장히 효과적이라는 거예요.”
현수가 스프링텐션 수류탄의 개수를 확인하며 말했다.
그러자 일행과 스태프 모두 현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지금부터 촬영은 세정님 혼자서만 진행하시고 나머지 스태프 분들은 도망치는 것에 집중해 주세요.”
현수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가 맨 앞에 나섭니다. 그러면 바로 뒤에 방고리님이 제 엄호를 해주세요.”
“오케이. 알겠어요.”
그리고 세정님과 스태프 분들이 방고리님 뒤에 딱 붙어서 떨어지지 마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맨 뒤는 너도캠핑님이 맡아주세요. 뒤에서 쫓아오는 놈이 있으면 막아주세요.”
“알았어요.”
화진이 부적 봉을 꽉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보셨겠지만 창문으로 드나들 수는 없어요. 작고 높은 곳에 위치해 있으니 무용지물이에요.”
“네, 네.”
“1층 정문 옆 쪽문을 통해 나갈 수 있는지 확인해 보고 바로 지하 감옥으로 돌아갑시다. 우리가 들어왔던 그 비밀통로. 거기로 나가는 거예요.”
“그 타르 괴물 같은 악귀가 있던?”
“지금은 대안이 없어요.”
현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준비합시다.”
현수는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솔트샷건에 소금을 채워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