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3화 마왕을 낚는 방법 (9)
원래의 성마대전에서 레오나 에센시아가 에센시아 제국의 황제가 되는 건 전쟁이 반발하고도 한참이나 지난 시점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었다.
에센시아 제국이 더 이상 제국이 아닌.
마왕군에게 패퇴해 대륙을 떠도는 처지가 되었을 때 말이지.
과연 영토를 잃고 명맥만 남은 제국을 제국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때의 레오나 에센시아는.
그저 책임감 하나로만 살아남은 에센시아 제국민을 책임지면서 힘겹게 타란 제국까지 흘러 들어가 저항군에 합류하게 된다.
그 누구도 그녀에게 황족의 책임을 묻지 않았음에도.
그런 미래를 알고 있을 리가 없는 비에른 백작이 레오나 에센시아를 황제의 재목으로 지목했을 때.
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비에른 백작의 생각대로 그녀는 결국 마지막까지 황제의 책임을 다하게 되는 셈이라.
결과적으로 보면 그녀는 그 어떤 황족들보다도 더 에센시아 제국 황제에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다른 황족들은 오히려 에센시아 제국을 버리고 잠적하거나 도망쳤으니.
그래서 가끔 생각해보곤 했다.
만약 레오나 에센시아가 좀 더 빠른 시기에.
에센시아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면 어땠을까.
전쟁에 패해 빈껍데기만 남은 제국이 아니라.
제대로 된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상태의 제국을 손에 넣었다면 과연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그러면 마왕군이 성마대전에서 이기는 게 아니라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허무하게 밀리는 상황이 오지 않았을 수도 있고.
레오나 에센시아가 황제가 되면 어떻겠냐는 내 질문에 비에른 백작이 몸이 움찔했다.
하지만 그는 너무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애써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듯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어 보였다.
“불가능한 일입니다.”
“정말?”
“……무슨 뜻으로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없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녀도 엄연히 황족의 피를 이어받은 전통성이 있지 않나?”
레오나 에센시아가 승계 서열이 낮긴 해도 어쨌든 전통성을 가진 황족이다.
아예 가능성이 제로에 수렴하는 건 아니라는 거지.
그렇지만 비에른 백작은 그 가능성을 너무 낮게 보고 있었다.
“전통성만 보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황제께서는 후계 자리에 5황녀님까지 올려놓진 않았을 겁니다.”
“흐음. 네가 황제는 아닌데 어떻게 알아?”
내 말에 잠깐 당황하는 듯 표정이 흔들렸던 비에른 백작이 곧 표정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5황녀께서는 지금 타란 제국의 황제와 약혼 상태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5황녀께서 황제에 어울리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타란 제국으로 떠날 겁니다. 황제께서 이 점을 모르실 리도 없고요.”
“제국을 떠날 사람에게 줄 황위는 없다 이거지?”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당장 고위 관리직인 비에른 백작이 이렇게 생각한다는 건.
다른 황족들과 직위가 높은 귀족들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할 확률이 높다는 거다.
아니 분명히 다 같은 생각일 터.
그나마 레오나 에센시아가 황제의 재목이라고 여기는 비에른 백작조차도 그런 생각이니.
다른 이들은 안 봐도 뻔하겠지.
모두가 그녀를 황제 계승 후보에서 철저히 배제할 것이다.
비에른 백작이 다시 한 번 현실을 상기시켜주었다.
“그 어떤 황족이나 귀족들도 5황녀님께 승계를 위해 힘을 실어주지 않을 겁니다.”
“어차피 안 될걸. 굳이 나서서 다른 황족들에게 밉보이고 싶지 않을 테니까?”
“아쉽지만. 그게 현실입니다.”
그리고는 비에른 백작이 한숨을 쉬면서 말을 이었다.
“더욱이 지금은 성마대전의 전선에 나갔던 황족들이 전부 돌아온 상태입니다. 그들이 한 명도 제국에 없었다면 모를까. 지금은 어렵죠.”
비에른 백작의 말만 들어보면 레오나 에센시아가 쿠테타라도 일으켜서 한 번에 뒤집을 가능성이 있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그때 재중이 형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불멸> 이 녀석 무서운 녀석이었네.
<주호> 그러게요. 여차하면 정말 그녀를 황제에 올리고도 남을 녀석이에요.
물론 비에른 백작 혼자의 힘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멀쩡히 있는 에센시아 제국 황제를 끌어내리고 레오나 에센시아를 그 자리에 올린다는 건데.
평범한 방법으로는 절대 무리다.
기사단이나 제국군 중 다수가 그녀를 도와줘야 가능할 텐데 말이지.
그 말은 곧 다른 조력자가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려나?
어쩌면 비에른 백작처럼 5황녀를 밀어주려 하는 이들이 제국에 있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걸 비에른 백작이 자기 입으로 말해줄 리는 없지만..
지금 우리가 나누는 대화만 해도.
밖으로 새어나가 황제가 알게 되었을 경우, 충분히 목이 날아가고도 남을 만한 내용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에른 백작이 내게 그 의도를 드러낸 건.
일단은 내가 타란 제국의 대공이기 때문이다.
에센시아 제국의 국내 정치와는 동떨어져 있는.
거기다 차후에 레오나 에센시아는 타란 제국으로 갈 예정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적이라기보다는 한배를 탄 동지에 가깝다고 생각할 것이다.
“왜? 황제를 암살이라도 하려고 했나?”
내 말에 화들짝 놀란 비에른 백작이 고개를 숙이면서 애써 표정을 감췄다.
“다른 곳에 가서 그런 말씀하시면 곤란할 겁니다.”
“아. 그래서 아까 다 물렸잖아.”
여기서 하는 말들이 새어나가지 않게 애초에 죄다 멀리 보내버렸다.
누군가 날아와서 듣지 않는 이상에야.
“아주 생각이 없지 않았다는 건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러더니 비에른 백작이 힘겹게 말을 이었다.
“만약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곧 황족들이 돌아왔을 겁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되는 거고.”
내 말에 다시 비에른 백작의 몸이 움찔했다.
뭐 이 정도 곤란하게 놀렸으면 됐다 싶어서 관련된 질문은 그만두었다.
어차피 이제 와 그런 방법으로 황제를 잡는 건 불가능이라.
그때 비에른 백작을 슬쩍 내려다보던 재중이 형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불멸> 흠. 이전 성마대전에서 황제를 독살한 게 이 녀석은 아니겠지?
<주호> 설마요.
<불멸> 역시 그렇지? 내가 너무 나갔나.
과거 성마대전에서는 1황자가 황위를 잡았었지.
뭐 지금 와서 누가 제국 황제를 독살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결과만 보고 판단하면.
마지막에 제일 이득을 본 건 1황자였다.
그리고 비에른 백작은 그 당시에는 1황자의 수족이었던 지라…….
아주 관련성이 없다고는 말은 못 하겠다.
물론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비에른 백작이 직접 하진 못했을 거다.
그의 직책과 성향상 독살 같은 것과는 꽤 거리가 있으니까.
아무래도 다른 누군가가 더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관련 정보가 전혀 없는 과거 상황을 정확히 유추해보는 건 어려운 일이니 확신을 못하겠지만.
뭐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다.
비에른 백작은.
가능성만 보인다면.
충분히 레오나 에센시아의 힘이 되어줄 수 있다는 점 정도.
잠시 재중이 형을 보고는 말했다.
<주호> 레오나 에센시아에게 붙여주면 쓸 만하겠죠?
<불멸> 나쁘지 않지. 미래의 통곡의 벽이라면. 능력은 차고 넘친다.
제국의 총 방어대장이라는 건.
여차하면 에센시아 제국의 모든 군사를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녀의 힘이 되어줄 이는 비에른 백작 말고도 또 있었다.
미래에 절망의 기사가 되는 라첼 공작.
이쪽은 타란 제국에서 상당히 오래 같이 다녔으니 다른 이들보다 훨씬 가까워졌을 테고.
공수에서 둘을 붙여놓으면 레오나 에센시아가 황위를 차지하는데 상당한 힘이 될 것이다.
바로 비에른 백작을 보면서 말했다.
“5황녀가 황제가 될 만한 가능성을 보여준다면 어떨까?”
“하지만 5황녀께서는 타란 제국으로…….”
“내가 계속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정말 모르겠어? 눈치가 꽤 빠른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러자 비에른 백작이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내 말을 곱씹다가 이내 뭔가의 생각까지 닿았는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설마…… 타란 제국과의 혼인 약정이 사실이 아니라는 겁니까?”
“아주 눈치가 없지는 않네. 내가 굳이 모든 이들을 무른 이유를 알겠어?”
“하지만…… 그 혼인 약정이 거짓이라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원래 황제께서는 타란 제국을 칠 예정…….”
순간 비에른 백작은 말실수를 깨닫고 바로 입을 닫아버렸다.
<불멸> 호오. 이 녀석. 잘 알고 있잖아?
<주호> 정말요.
<불멸> 하긴. 총 방어대장이라면 타란 제국을 치기 위해 병력을 빠졌을 때를 대비해 제국성의 군사를 조율해야 하니까. 당연히 알 수밖에 없겠지.
“흐음. 그건 언제 말할 생각이었을까?”
“죄송합니다. 대외비라…….”
“아냐. 어차피 알고 있었다.”
“네?!”
“여기 에센시아 제국에 오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고.”
내 당연하다는 말에 비에른 백작의 두 눈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아니. 그럼 어째서…… 에센시아 제국에 지원 병력을…… 그보다 그 혼인 약정 자체가…….”
아마 지금 비에른 백작의 머릿속이 뒤죽박죽일 터다.
앞뒤로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 테니까.
자신들은 몰래 타란 제국을 치려고 했는데.
오히려 타란 제국에서 약혼을 발표한데 이어서 아예 병력 지원까지 온 상황이었다.
만약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면 이해가 되겠지만.
지금 내 입으로 직접 말했다.
다 알면서도 에센시아 제국으로 왔다고.
비에른 백작은 아무리 이해해보려고 해도 이해할 수가 없는 내용일 터.
여기서는 힌트를 하나 주기로 할까.
“굳이 다 알고도 우리가 여기까지 온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그것도 레오나 에센시아까지 데리고 돌아온 걸 말이야.”
약혼 발표를 한다고 하더라도.
굳이 레오나 에센시아가 직접 에센시아 제국으로 돌아올 필요까지는 없었다.
어차피 타란 제국에 그대로 머물러도 상관없는 일이라.
거기까지 말해주자 비에른 백작의 눈에 생기가 확 돌았다.
“설마? 그 가능성이라는 게……”
“어, 레오나 에센시아에게 황위 계승에 대한 생각이 아주 없진 않다는 뜻이지.”
“그러면…… 약혼 이야기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설마 파혼입니까?”
비에른 백작의 물음에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답해주었다.
“내가 언제 약혼을 안 한다고 했던가?”
“네?”
“그 약혼이 몇 년 후에 성사될지 누가 알아?”
“하…….”
분명히 약혼 발표를 했지만.
그렇다고 당장 내일 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필요하다면 이걸 몇 년이고 질질 끌고 가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냥 지금은 레오나 에센시아와 타란 제국을 보호할만한 장치가 필요할 뿐.
거기다 한 가지 더.
그녀가 타란 제국의 황제와 약혼 포지션을 잡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했다.
이건 꽤 많은 이점을 가져올 수 있으니까.
특히 지금과 같은 혼란스러운 전쟁 상황에서는 더.
알아들은 듯 하자 바로 비에른 백작에게 말을 꺼냈다.
“황족들 중에. 레오나 에센시아와 대화 자리를 만들고 싶은 녀석들 있지 않아?”
내 물음에 비에른 백작이 잠시 떠올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실. 대부분의 황족들은 관심이 있을 겁니다. 5황녀님을 잡으면 타란 제국을 등에 업는 것과 같을 테니까요.”
“좋아. 그럼. 돌아가면 그들과 자리를 만들어 봐. 누가 과연 쓸모가 있나 한 번 가려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