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4화 마계 장인 (10)
마왕 케만이 베링턴 산맥을 넘어온 이유 중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바로 마왕 헤르게니아의 존재였다.
물론 에센시아 제국 북부가 다시 천사군과 연합군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어느 쪽이 더 큰가를 놓고 보면.
아마 마왕 헤르게니아 쪽이 아닐까.
부족할 것 하나 없는 마왕들에게 있어 마계 최고의 장인이란 타이틀은 가뭄의 단비와 같은 느낌일 것이다.
그런 마왕들 중 하나인 마왕 케만이 마왕 헤르게니아를 보자마자 손을 내민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다만.
마왕 헤르게니아가 마왕 케만이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게 문제겠지.
개소리라는 말이 마왕 헤르게니아의 입에서 나오자 마왕 케만이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는지 표정 변화가 없다가 곧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제야 그녀의 말이 머릿속으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설마 마왕 헤르게니아가 대놓고 개소리라고 할 줄은 까마득히 몰랐던 건가?
지금 마왕 케만의 표정만 보면 당연히 마왕 헤르게니아가 자신의 손을 잡고 마왕군 본진으로 돌아갈 것이라 여긴 듯 했다.
곧 당황한 감정을 애써 감춘 마왕 케만이 힘겹게 표정 관리를 하며 다시 한 번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물어보았다.
“방금 제가 잘못 들은 모양입니다만…… 마왕군 본진에는 당신을 기다리는…….”
그러자 마왕 헤르게니아가 무슨 바보를 보는 것마냥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끊었다.
“하, 이놈. 신기한 놈이네. 귓구멍이 막혔어? 확 뚫어줘?”
처음에야 그럴 수 있다 치지만.
그녀의 두 번째 대답은 마왕 케만도 입을 다물게 만들어버렸다.
마왕 헤르게니아가 이상한 놈 본다는 듯 시선을 돌려 내게 물어보았다.
“쟤는 뭐야? 누군데 보자마자 날 오라 가라야?”
아무래도 마왕 헤르게니아 입장에서는 생전 처음 보는 녀석이 자신을 오라 가라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음…….
그런데 난 맨날 얘를 여기 가라 저기 가라 하는데 말이지.
지금 그녀의 반응만 보면 투정 없이 내 말을 다 들어주는 게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라고 해야 하나?
“음. 일단은 마왕. 너도 알 텐데?”
“풀풀 풍기는 마력이 마왕급이긴 해.”
그러자 마왕 헤르게니아가 누군지 알겠다는 듯 내게 말했다.
“그럼 쟤가 이번에 넘어왔다는 그 마왕 녀석이야?”
“뭐 그런 셈이지.”
“아니. 마왕군에는 인재가 없나? 왜 저런 녀석을 보냈담?”
아주 마왕 케만의 얼굴에 스크래치를 내는 말을 마구 뱉어냈지만.
마왕 헤르게니아는 딱히 그런 것에 신경 쓰지는 않는 듯 했다.
이건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런 건가.
마왕 케만의 표정이 시시각각 붉어지면서도 딱히 그녀에게 달려들지 않는 걸 보면.
아무래도 그 생각이 맞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막 나가더라도 참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으니.
지금 이 자리에서 을은 그녀가 아니라 마왕 케만이다.
재중이 형도 지금의 상황이 재밌다는 듯 말했다.
<불멸> 원래 원하는 게 있는 놈들이 숙이고 가는 거지. 찍소리도 못하잖아.
<주호> 정말 그렇네요. 그런데 혹시라도 마왕 케만이 막 나가면 어떻게 하죠?
<불멸> 절대 못 할걸? 당장 무력으로 누르려고 해도 이후에 마왕 헤르게니아의 신경을 거스른 저놈만 무구를 안 만들어준다고 해 봐. 괜히 나서서 불똥 튈 일을 왜 하겠어.
<주호> 하긴. 자기가 독박 쓰는 짓을 할 정도로 멍청한 녀석은 아니겠죠.
<불멸> 가만히 지켜봐. 다른 녀석이 알아서 나설 거다.
아니나 다를까.
중간에서 불편한 듯 둘을 쳐다보고 있던 마왕 하킨이 결국 나섰다.
먼저 마왕 케만 쪽을 쳐다보면서 경고했다.
“마왕 케만. 이번엔 네가 실수한 거다. 마왕 헤르게니아는 네가 오라 가라 명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냐.”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말하자 마왕 케만의 눈썹이 확 치켜세워졌다.
그렇지만 마왕 하킨의 말이 전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기에 마왕 케만도 두 주먹을 불끈 쥐면서 애써 화를 내리누르는 모습을 보였다.
“……칫.”
그러더니 마왕 헤르게니아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면서 사과했다.
“마왕 헤르게니아. 무례를 용서하시죠. 임무에 대한 마음이 너무 앞섰습니다.”
“흐응? 착한 아이네?”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는 것마냥 마왕 헤르게니아가 말했음에도 마왕 케만은 딱히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뭐 마왕들 사이에 원로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마왕 헤르게니아는 몇백 년 전의 마왕이면서.
그 쓸모가 여타 다른 마왕들과는 아예 달랐다.
마왕 케만이 한 수 접고 들어가고 마왕 헤르게니아가 용서를 하자 겨우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중간에서 끼인 마왕 하킨도 그제야 짧게 안도의 숨을 쉬었다.
만약 이 자리에서 마왕 헤르게니아와 마왕 케만이 충돌이라도 했다면.
마왕 하킨의 입장에서는 대참사일 테니.
어찌 됐든 녀석에게는 마왕 헤르게니아가 꼭 필요할 테니까.
곧 마왕 케만을 빤히 쳐다보던 마왕 헤르게니아가 확실히 자신의 입장을 못 박아 버렸다.
“다시 말하지 않겠어. 난 마왕군으로 돌아가지 않아.”
“네?”
“무슨?”
순간 마왕 하킨과 마왕 케만 모두 당황한 듯한 표정으로 마왕 헤르게니아를 쳐다보았다.
음.
이제껏 그녀가 자신의 입장을 확실히 밝힌 적이 없긴 한데…….
저렇게 격하게 반응이 올지는 몰랐다.
특히 마왕 하킨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는 걸 보면 어지간히 놀란 듯 했다.
하지만 마왕 헤르게니아도 할 말은 있었다.
“아니. 니들도 머리가 있으면 생각을 해 봐. 내가 대천사들한테 쫓겨서 겨우 도망쳤는데 날 도우러 오는 마왕 새끼들이 결국 하나도 없었어.”
“음…… 그건…….”
마왕 하킨도 할 말은 있는 게.
이 마왕 녀석은 그 당시 마왕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이건 마왕 케만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도 마왕이 아닌 건 똑같았다.
결국 지금의 말은 그냥 마왕 헤르게니아의 화풀이다.
그녀가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을 테니.
하지만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은 두 마왕들의 입을 다물게 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그래. 너네는 그 당시 마왕도 아니었으니 그렇다고 쳐. 그래도 이후에는 구출하러 올 수도 있는 것 아니었어? 내가 몇백 년간 대천사들의 봉인지에 혼자 처박혀 있는 그 긴 시간 동안 말이야.”
그러자 마왕 하킨과 마왕 케만, 둘 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어버렸다.
솔직히 저건 변명할 대답조차 없을 것이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마왕 하킨이 애써 말을 돌리려 했다.
“사실 봉인 장소를 찾지 못했습니다. 거기다 마왕들이 올 수 없는 영역이라 수색조차 힘들어…….”
“그래서 지금 잘했다고?”
서슬 퍼런 마왕 헤르게니아의 날카로운 눈빛에 마왕 하킨이 바로 입을 다물었다.
까딱 잘못하다가 마왕 헤르게니아의 분노가 자신에게 올까 싶어서인지 더 조심스러운 모습이었고.
마왕 케만은 할 말이 없는지 짧게 혀를 찰 뿐이었다.
둘 다 괜히 나서서 미운털 박히고 싶진 않은 듯 했다.
“그러니까 내가 어딜 가든 이젠 내 마음이야. 앞으로 날 오라 가라 할 거면 직접 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다른 마왕들에게는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마왕 하킨과 마왕 케만 둘 다 할 수 없다는 듯 두 손을 들었다.
지금 나서서 따져봐야 본전도 못 찾는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 테니.
<불멸> 결국 그녀가 이겼군.
<주호> 그러게요.
왠지 마왕들이 찍소리도 못하는 모습을 보니 조금은 통쾌한 느낌도 들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 봉인되어 있었다는 소리를 들으니 한 편으로는 마음이 불편한 느낌도 들었다.
어떻게 보면 그렇기 때문에 내 말은 잘 따라주는 것일 수도 있으려나?
마왕 헤르게니아가 내 말을 거절한 경우는 이때까지 한 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만 아니라면야…….
아니지.
그 말도 안 되는 일까지도 같이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
잠시 눈치를 보던 마왕 하킨이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마왕군으로 돌아가지 않으신다면 계속 이곳에 머무실 예정입니까?”
마왕 하킨은 그녀가 마왕군에 돌아가지 않는다면 적어도 어디에 있을 건지는 알아야 할 입장이었다.
물론 베스트는 자신의 군단에 계속 머무르는 게 좋겠지만.
“나? 몰라. 그때 봐서.”
그러면서 마왕 헤르게니아가 슬쩍 내게 시선을 돌렸다.
아마 내가 가는 곳에 따라간다는 뜻을 은근히 내비친 것 같았다.
이걸 저 두 마왕이 눈치챌 리는 없겠지만.
그들은 나와 마왕 헤르게니아의 연관성을 찾기는 힘들 것이다.
“흠. 알겠습니다. 머무시는 동안 불편한 점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결국 마왕 하킨이 하고 싶은 말은 자신의 무구를 여기 있는 동안 고쳐달라는 뜻일 터.
마왕 헤르게니아도 그걸 잘 아는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당장은 힘들어도 네 무구는 한 번 손봐줄게. 그렇다고 계속 쓸 수는 없을 거야. 최고 순도의 베르탈륨 광석이 없으면 완전히 고칠 순 없으니까.”
“임시방편이라는 뜻입니까?”
“왜? 싫어?”
“절대 아닙니다. 일단은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베르탈륨 광석은 제가 한 번 구해보겠습니다.”
“낮은 순도는 안 되는 거 알지?”
“잘 알고 있습니다. 마계를 싹 뒤져서라도 찾아보도록 하죠.”
최고 순도의 베르탈륨 광석을 언급하며 마왕 헤르게니아가 다시 나를 쳐다봤다.
마치 장사 잘하라는 듯한 웃음을 보이면서.
그 모습을 본 재중이 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불멸> 쟤. 물건 좀 팔 줄 아네.
<주호> 네. 지금 그만한 순도의 물건을 구할 수 있는 건 우리밖에 없으니까요.
물론 마계에도 찾아보면 있긴 할 거다.
하지만 우리가 원래 있던 시대를 떠올려보면.
이미 베르탈륨 광산 차제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말은 성마대전 시대에 이미 발견된 광산들이 죄다 고갈되었다는 뜻이겠지.
다른 말로.
최상품의 베르탈륨 광석은 부르는 게 값이라는 뜻이다.
마왕들 상대로.
이만한 물건은 또 없을 테니.
흥정하기는 너무 쉬울 터.
그때 마왕 케만이 살짝 기침을 하면서 말했다.
“흠흠. 마왕 헤르게니아. 혹시 가능하다면 제 무구도 한 번 봐주실 수 있겠습니까?”
“엥? 너도?”
의아한 그녀의 눈빛에 마왕 케만이 이미 백기를 든 표정으로 두 손을 들었다.
“아마 다들 말을 하지 않지만. 다른 마왕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제대로 된 무구 장인의 명맥이 끊긴 지 꽤 오래되었으니까요.”
“그래서 날 마왕군으로 데리고 가려고 한 거야?”
“그렇습니다. 하지만 불편하시다면…….”
“응. 불편해.”
단호한 대답에 마왕 케만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불멸> 아쉬운 놈이 하나 더 늘었군.
<주호> 하하…….
솔직히 마왕 케만을 어떻게 구슬리나 고민을 했었는데.
이렇게 되면 마왕 케만의 행동을 제어할 수 있는 확실한 패를 손에 쥔 셈이었다.
뭐 이건 마왕 헤르게니아가 녀석의 무구를 완전히 고쳐주었을 때는 쓸 수 없겠지만.
적어도 그전까지는 유효한 방법이었다.
확실히 분위기가 넘어오자 마왕 헤르게니아가 내게 말했다.
“이제 네 차례야.”
마치 판을 다 깔아주었으니 알아서 해보라는 듯.
당연히 이 상황을 마다할 내가 아니다.
잠시 두 마왕을 쳐다보고 난 뒤에 한 마디를 꺼냈다.
“우린 천사군과 연합군. 둘 다 잡을 겁니다. 특히 이번엔 대천사를 한 번 요리해 보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