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6화. 마계 장인 (2)
이전 시대의 성마대전에서 마왕 헤르게니아는 분명 마왕군에 있었다.
굳이 그녀가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아크 드래곤이 마왕군에서 활약하고 있었으니까 마왕군에 그녀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런데 어떤 시점에 누가 마왕 헤르게니아의 봉인 결계를 풀어준 걸까.
만약 내가 가지고 있던 대천사의 검이 아니었다면.
분명히 그 결계를 힘으로 깨거나 다른 방법을 사용했을 텐데.
그럼 무조건 대천사들에게도 알림이 갔을 것이다.
누군가 이 결계를 건드리면 그때부터는 대천사와 전쟁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는 말은 그만한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마왕 헤르게니아를 대천사의 봉인에서 구해낼 필요가 있었다는 뜻일 터.
손해 이상으로 얻을 이득.
이제까지는 그 이유가 단순히 아크 드래곤인줄 알고 있었는데…….
지금 마왕 하킨의 말을 들어보면 그 생각이 완전히 착각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면 아크 드래곤은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봉인 결계에 갇히고 나서야 만들어 낸 물건이라.
마왕들이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보긴 어려울 테고.
결국 결론은 하나로 모인다.
마왕들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마왕 헤르게니아를 구해내야 했던 이유는.
그녀가 마계 최고의 장인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무구를 고쳐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
그러니까 마왕 하킨은 마왕 헤르게니아를 찾아서 에센시아 제국 북부로 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마도 내 생각이 맞다면.
그에게 에센시아 제국을 치는 일은 둘째 문제일 테고.
마왕 하킨에게 질문을 하고 난 뒤 그를 빤히 쳐다보자 곧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마주 보다가 결국 두 손을 들었다.
“틀린 말은 아니군.”
마왕 하킨의 확답은 그가 에센시아 제국을 치는데 그다지 관심이 없다는 걸 우리에게 알린 것과 다름없었다.
다른 두 마왕의 속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일부러 두 마왕을 다 내보낸 것만 보면.
어쩌면 마왕 하킨은 이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게 아니면 모두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곧 마왕 하킨이 내게 되물었다.
“어떻게 알게 되었지?”
글쎄.
어떻게 알게 되었냐고 물어본다면.
마왕 하킨에게 전대의 성마대전에 대해서 말 해줘야 설명이 된다.
과거 성마대전에서 마왕들이 마왕 헤르게니아를 봉인에서 꺼내준 이력이 있다는 사실을.
아마도 추측하기에 성마대전이 계속되면서 마왕들의 무구에 뭔가의 문제들이 계속 생기기 시작한 게 아니었을까.
처음이야 쫄따구들이 싸우겠지만.
어쨌거나 나중에는 마왕들이 대천사들을 상대로 직접 나섰을 테니.
그러다 보면 마왕들의 무구에 손상이 가거나 또 다른 문제가 누적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걸 제대로 고쳐줄 수 있는 게 마왕 헤르게니아 밖에 없다는 거지.
그래서 마왕들이 위험을 감수하고 에센시아 제국 진영까지 넘어와 그녀를 빼냈을 것이다.
마왕 하킨에게 이걸 전부 설명하는 건 역시 어려운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말을 슬쩍 흘렸다.
“만약 마왕군이 에센시아 제국을 칠 작정이었다면 이 북부에서 눌러앉진 않았을 겁니다.”
“흐음.”
“그리고 적이 방심하고 있을 때 적의 심장부를 치는 건 꽤 효율적이죠. 기껏 그들의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에센시아 북부로 넘어왔는데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하는 건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에센시아 제국 북부를 확실히 암흑 지대로 만들기 위해서 그랬다고 생각했지만.
중간에 마왕 헤르게니아라는 존재를 집어넣고 보면 모든 사실이 다르게 보인다.
그러니까 마왕 하킨은 에센시아 제국을 못 친 게 아니라.
아예 치지 않는 거다.
애초에 자신의 목적과는 다르니까.
그러자 마왕 하킨이 짧게 한숨을 쉬더니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마왕 헤르게니아. 이 친구…… 어디서 구했습니까?”
뜻밖의 질문에 마왕 헤르게니아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투로 흘리듯 대답해주었다.
“오다가다 주웠어.”
“하하. 그러십니까.”
그러더니 다시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두 눈에 욕심이 가득 찬.
그리고 저 눈빛은 이전에도 몇 번 본적이 있다.
딱 재중이 형이 나를 볼 때 했던 그 눈빛.
“이 녀석. 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마왕 하킨과의 친밀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
《 마왕 하킨과의 친밀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
《 마왕 하킨과의 친밀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
.
.
.
아마도 내 질문들이 마왕 하킨의 마음에 쏙 든 모양이었다.
이런 자리에서 인재 포섭까지 할 정도면.
하지만 마왕 헤르게니아는 단번에 그 말을 칼로 잘랐다.
마왕 하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티를 막 내면서.
“응. 안 돼.”
“흠. 아쉽군요.”
마왕 헤르게니아가 워낙 단호하게 안 된다는 걸 말해버린 터라 마왕 하킨도 바로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쉽긴 하군요. 제 밑에 있으면 큰일을 할 것 같은데…….”
“못 줘. 나 그냥 갈까?”
“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옆에 두고 잘 쓰십시오. 쓸모가 많은 친구 같군요.”
“흥. 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하고 있어.”
대놓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하자 마왕 하킨도 욕심을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나란 인재보다는 자신의 무구가 훨씬 소중할 테니.
적어도 마왕의 무구를 복구하기 전까진 마왕 헤르게니아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은 피하고 싶을 것이다.
못 먹는 감 한 번 찔러나 본 건가 싶기도 하고.
데려갈 수 있으면 좋고.
아니면 아쉬운 정도랄까.
뭐 내 입장에서는 마왕 하킨과의 호감도가 조금 올라간 정도로 만족이다.
앞으로 적이 될지 아군이 될지 확실하진 않아도.
마왕과의 호감도는 어떻게든 써먹을 수 있을 테니.
그때 생각나는 게 있어서 마왕 하킨에게 다시 질문을 날렸다.
“혹시 헤르마늄 광산에 보낸 마왕도 마왕 헤르게니아를 찾기 위해서였습니까?”
내 물음에 마왕 하킨이 꽤 놀란 눈빛을 보였다.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당연히 알고 있지.
헤르마늄 광산의 위치를 알려준 게 난데.
모를 리가 있나.
거기다 그 마왕이 헤르마늄 광산을 들쑤시면서 에센시아 기사단을 전멸시키는 것까지 다 보고 왔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 수가 없는 마왕 하킨은 의심스런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다.
여기선 적당히 넘어가 볼까?
“그냥 오다가 봤습니다. 그만한 규모의 마왕군이 지나가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에센시아 제국 본토에서 마왕군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눈에 띕니다.”
“흐음. 나름 조심스럽게 이동하라 했거늘…….”
마왕 하킨의 말을 듣고 속으로 혀를 찼다.
그게 숨긴다고 숨겨지겠나 싶지만.
그런데 더 문제는.
정작 이 사실을 더 빨리 알고 있어야 하는 에센시아 제국군은 오히려 전혀 몰랐다는 거다.
대규모의 마왕군이 헤르마늄 광산에 쳐들어오는 그 순간까지도.
얼마나 군영이 허술하면 그럴까 싶기도 하고.
“그보다. 헤르마늄 광산에 마왕 헤르게니아가 있었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까?”
정작 내가 궁금한 건 바로 이거다.
마왕 하킨이 굳이 다른 마왕을 보내서까지 헤르마늄 광산을 빠르게 강탈하려 했던 이유.
헤르마늄 광산 자체가 마왕군과 마왕들에게 위협적이니까 위치를 알게 되면 바로 폐쇄시키러 가는 게 맞긴 한데.
그 규모가 내가 예상했던 것 이상이라.
굳이 마왕까지 보내야 하나 하는 의문은.
마왕 하킨이 헤르마늄 광산에 마왕 헤르게니아가 봉인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가능한 대처일 것이다.
뭐 이 녀석이 굉장히 조심성이 많아 과한 병력을 투자했다면 그것도 말이 되긴 하겠지만.
내 예감엔 전자가 더 맞을 것 같은 느낌이라.
“음…… 그것까지 알고 있다니. 놀랍다고 해야겠군.”
역시.
마왕 하킨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건.
“혹시 다른 마왕들도 마왕 헤르게니아가 헤르마늄 광산에 봉인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이건 순수하게 추측이다.
전대 성마대전 시대에 마왕들이 나서서 마왕 헤르게니아를 빼냈으니까.
이 사실을 마왕 하킨만 알고 있으리라는 법은 없겠지.
내 추측에 잠시 멈칫했던 마왕 하킨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나 외에도 대부분의 상위 마왕들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은 헤르마늄 광산이 어디에 위치하는지 알 수 없어서 찾아낼 수 없었지.”
마왕 하킨의 말은 우리가 아는 사실과 딱 일치한다.
에센시아 제국 최대의 헤르마늄 광산의 위치는 지금보다 훨씬 뒤의 시점에서야 알려지니까.
마왕들이 다른 제국을 넘어 에센시아 제국을 전부 점령하지 않고서야 대놓고 에센시아 제국 본토를 들쑤시고 다닐 수도 없었을 테니.
헤르마늄 광산의 위치를 알기 전까진 그녀를 찾을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떡 하니 헤르마늄의 위치를 알려주었으니.
마왕 하킨도 바로 반응한 것이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만약 헤르마늄 위치를 알려온 베인이 아니었다면 한참을 헤맸을지도 모르겠군.”
이번 일로 베인 녀석이 마왕 하킨에게 상당히 점수를 땄을 터.
마왕 하킨이 그토록 원하던 정보를 가져왔으니.
“하지만 너무 성급했었다. 설마 헤르마늄 광산 입구가 무너져버릴 줄이야.”
“아. 그렇습니까?”
순간 마왕 헤르게니아와 눈빛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녀가 뭔가 말이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지 겨우 참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여기서 말하면 안 되지.
그 헤르마늄 광산 입구를 날려버린 게 우리라는 말은.
마왕 헤르게니아도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입가에 웃음만 띨 뿐이었다.
그러면서 마왕 하킨이 마왕 헤르게니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마 에센시아 제국군 잔당이 후퇴하며 입구를 날려버린 모양이야. 그래서 사실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그런데 자기 눈앞에 반쯤 포기했던 마왕 헤르게니아가 있다 이건가?
다시 생각해 보니 처음에 대전에 들어왔을 때 마왕 하킨의 옆에 있던 수정 덩어리 마왕이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제일 먼저 했던 질문이 그것이었다.
어떻게 대천사의 결계를 들키지 않고 나왔는지 궁금해 했던가?
원래라면 자신들이 마왕 헤르게니아를 구하러 갈 생각이었을 텐데.
오히려 자신들을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으니.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따지듯 물어보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뭐 나중에 수정 덩어리가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와서 싹싹 빌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갑은.
다름 아닌 그녀니까.
그리고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꺼냈다.
“사실 마왕 헤르게니아는 한참 전에 헤르마늄 광산에서 나왔습니다만.”
“흠. 역시 그랬군.”
헤르마늄 광산의 입구가 무너졌는데 그 이후로 나왔다고 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무엇보다 그런 식으로 말이 진행되게 되면.
마왕 하킨의 명령으로 헤르마늄 광산을 공격해서 어찌어찌 입구가 무너진 덕분에 마왕 헤르게니아가 풀려날 수 있게 되었다라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럼 마왕 헤르게니아가 마왕 하킨에게 빚이 생기게 된다.
과정이야 어찌되든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거라.
하지만 이미 그녀가 헤르마늄 광산을 벗어난 다음이라면 그런 걱정 자체를 할 필요가 없지.
굳이 없어도 될 빚을 올리는 건 사양이다.
그러자 마왕 하킨이 저 멀리 있는 헤르마늄 광산 방향을 쳐다보더니 짧게 한숨을 쉬었다.
“휴. 지금쯤 그 녀석. 광산 입구 판다고 정신없겠군.”
그러자 나 역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헤르마늄 광산에서 열심히 삽질하고 있을 그 마왕이 떠올라서.
“삽질 그만하고 오라고 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