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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1380화 (1,380/1,404)

#1380화 침공 (9)

전에도 계속 느꼈던 거지만.

에센시아 제국 황제는 우리를 전혀 믿지 않는다.

이건 비단 지금만 그런 게 아니라 예전에 아크 드래곤으로부터 에센시아 제국을 구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그냥 모든 이들을 믿지 않을 수도 있으려나.

그게 이 황제의 특성이라면 특성일 것이다.

헤르마늄 광산에 대한 것도 충분히 알릴 수 있었을 텐데 굳이 내게 알리지 않는 것만 해도 그렇고.

뭐 어차피 알리기 싫어도 알 수밖에 없을 텐데.

잠시 속으로 웃음 짓고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 에센시아 제국 황제는 내가 이 자리에 오래 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만약 이런 일이 아니었다면 굳이 날 부르거나 하지도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추후에 뵙겠습니다.”

그리고 에센시아 황제도 물러나는 나를 딱히 붙들지는 않았다.

레오나 에센시아는 아직 할 이야기가 남았는지 나를 따라나서진 않았다.

나가면서 퀘스트 창을 보자 에센시아 제국 황제로부터 받은 정찰 임무가 떠 있었다.

흐음.

임무 실패 시 내게 주어진 패널티가 거의 없다.

굳이 따지자면 에센시아 제국 황제와의 친밀도 정도이려나.

이건 반대로 말하면 에센시아 제국 황제가 이 정찰 임무를 내게 준 이유가 그다지 그에게 중요하진 않다는 뜻이 될 것이다.

만약 정말 중요한 퀘스트였다면.

실패 시 패널티가 엄청나게 달라붙었을 테니까.

밖으로 나오자 재중이 형을 비롯한 우리 팀이 그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황제는 어때?”

“그냥 바람 좀 쐬고 오라고 하던데요?”

농담을 반쯤 섞어서 말하자 재중이 형이 피식 웃어버렸다.

대충 안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간 지 알 것 같아서일까.

곧 우리 팀에게 대전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마왕군 진영으로 정찰을 가는 임무라…….”

그러더니 곧 조소를 담은 얼굴로 말했다.

“우린 이 일에 빠져 있으라 이건가?”

“네. 아마 그런 것 같아요. 헤르마늄 광산 일을 굳이 들키고 싶어 하진 않아 보이네요.”

“흠, 황제가 바보도 아니고. 우리가 그 정도 정보는 바로 입수할 수 있을 거라는 건 잘 알 텐데?”

“형 말대로 알아도 빠지라는 거죠.”

“당장 고양이 손이라도 빌려야 할 판인데…… 황제가 믿는 구석이 있나 보네.”

재중이 형이 말한 믿는 구석.

이건 다름 아닌 천사군과 다른 제국, 주변 동맹국들의 참전일 것이다.

그들이 에센시아 제국에 도움을 주면 지금의 상황을 타개하는 데는 크게 어려움이 없을 테니까.

당장 마왕군이 쳐들어왔는데 그들이 곧 지원할 것이라 여기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처럼 보이긴 했다.

“황제가 감이 많이 죽었군.”

“그보다는 외부에서 우리가 작업해둔 걸 전혀 모르니까요.”

곧 우리가 뿌려둔 씨앗들이 땅을 뚫고 올라가 확연히 피어오르기 시작할 것이다.

그때쯤 가면 에센시아 제국 황제도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걸 느끼게 될 테고.

다른 방법으로 일을 처리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뭐 거기까지 진행되면 이미 손을 쓸 수도 없겠지만.

“지금은 그냥 저대로 오해하게 놔두죠.”

“그래. 굳이 바로 잡아줄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제국성을 나서려고 할 때 사장님에게 연락이 들어왔다.

<카이저> 헤르마늄 광석들은 전량 안전하게 비공정으로 이동했다.

<주호> 감사합니다. 특별히 다른 신경 쓸 일은 있었나요?

<카이저> 가끔 마왕군 정찰병들이 돌아다니긴 하는데 거리가 있다 보니 굳이 여기까지 오진 않더구나.

<주호> 네. 그럼 당분간 들킬 염려는 없겠네요.

<카이저> 흠. 넌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주호> 아, 전 황제가 마왕군 정찰을 하고 오라고 해서요. 당분간 그쪽에 있을 생각이에요.

<카이저> 쯧. 그놈의 황제는 쓸데없는 데 힘 빼고 있군. 안 간다고 하지 그랬냐?

<주호> 하하. 그냥 간다고 했으니 별일 없을 겁니다.

<카이저> 흠. 네가 그렇다면야. 가면 조심하고. 네가 정찰을 하다가 당할 리는 없겠지만. 이번에 온 마왕군들 레벨이 높아.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

<주호> 네. 조심할게요. 그럼 진행되는 대로 다시 알려주세요.

그렇게 사장님과의 연락을 끊고 에센시아 북부 지역으로 가는 비공정에 올라탔다.

전사 형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말했다.

“오자마자 바로 나가라고 하네.”

“황제가 그렇게 절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요.”

똑같이 제국을 구해주었지만.

카샤스 황제와는 다르다.

에센시아 제국 황제에게 있어서 난 그냥 타 제국 대공 혹은 왕국의 왕자인 외부인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래서 더 에센시아 제국 황제에게는 잘할 필요가 없었다.

딱히 친해지고 싶은 생각도 없고.

쫓기듯이 비공정을 타고 나가는 동안 우리 주변으로 수많은 전투 비공정들이 떠오르는 모습이 보였다.

원래라면 에센시아 제국의 수도를 지켜야 하는 비공정들이 기사단을 잔뜩 싣고 날아오른다면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챠밍이 비공정들이 향하는 방향을 보면서 말했다.

“전부 헤르마늄 광산 방향이네요.”

“응. 황제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런데 생각보다 병력이 너무 많아요. 수도 방어는 어쩌려고…….”

챠밍이 생각하기에도 지금 나가는 병력들이 많아 보이는 듯 했다.

솔직히 이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옆에서 같이 보고 있던 재중이 형이 말을 꺼냈다.

“아무래도 외부에는 헤르마늄 광산의 위치를 보여주고 싶지 않을 테니까.”

그런 재중이 형의 말에 나와 챠밍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천사군에게는 더 그렇겠죠.”

“어. 걔들은 헤르마늄에 환장하잖아. 아마 천사군 쪽에서 헤르마늄 광산의 위치를 알게 되면 황제도 골치 아프게 될걸?”

그러자 챠밍이 한 가지 날카로운 말을 했다.

“혹시 천사군이 에센시아 제국을 칠 수도 있어요?”

“아아. 그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겠네. 굳이 에센시아 제국에서 헤르마늄을 받아먹을 바에는 그냥 자신들이 헤르마늄 광산을 차지하는 편이 훨씬 이득일 테니까.”

“그럼 이번 전쟁이 난장판이 되겠네요.”

원래라면 천사군은 에센시아 제국을 지원하는 형태로 참전해야 했다.

그게 에센시아 제국이 원하는 그림이기도 할 테고.

이전에도 에센시아 제국은 타란 제국과 달리 천사군과 기술 협력 같은 방법으로 동맹을 맺고 있었다.

일단은 우군이라고 봐도 좋다.

하지만 여기서 헤르마늄 광산의 존재가 중간에 끼게 되면 상황이 묘하게 돌아 간다.

과연 천사군이 에센시아 제국과 대륙 최대의 헤르마늄 광산 중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저울에 올려놓는지가 관건이겠지.

만약 헤르마늄 광산 쪽이 훨씬 이득이라고 생각한다면…….

충분히 에센시아 제국과 척을 치고도 남을 것이다.

그게 동맹인 에센시아 제국을 공격하는 방향이 된다고 하더라도.

전사 형도 끼어들었다.

“큭. 그럼 에센시아 제국은 마왕군에게 터지고 천사군에게 뺨 맞겠는데?”

그런 전사 형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적절한 묘사 같네요.”

최대 우군인 천사군이 돌아서게 되면 에센시아 제국도 답이 없다.

그러니까 지금 저 헤르마늄 광산에 대한 건 자력으로 해결할 생각일 테고.

에센시아 제국 수도의 방어까지 일부 포기하면서.

만약 지금 당장 마왕군이 남하해 버리면…….

“괜히 마왕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지네요.”

내 말에 우리 팀들 모두 웃음 지었다.

정말 내 말대로 마왕군에게 에센시아 제국 수도의 방어가 약해졌다는 걸 알려준다면 당장이라고 달려올 테니까.

그러면 에센시아 제국 수도는 지도상에 지워지게 된다.

저 황제는 과연 알까?

자신의 목줄을 방금 내가 한 번 틀어쥐었다가 다시 놓았다는 사실을.

챠밍 역시 웃으면서 말했다.

“어차피 알려줄 생각은 없잖아요.”

“응. 아직은 에센시아 제국이 무너지면 안 되니까.”

“여기서 전쟁이 끝나면 안 되니까요?”

“맞아. 우린 부지런히 돈 벌어야지.”

어차피 이곳의 전쟁이 아니라고 해도.

성마대전 자체가 그대로 진행 중이라 팔아먹을 곳은 있겠지만.

이왕이면 가까운 동네가 좋지 않겠는가.

그것도 다급하면 다급할수록 물건의 값어치가 더 올라가니까.

남의 전쟁으로 큰돈을 버는 건 결국.

그들에게 무기를 공급하는 자들이다.

몸소 싸우는 자들이 아니라.

그때 전사 형이 내게 말했다.

“황제는 수도 방어를 외부 지원 세력에게 맡길 생각이려나?”

“네. 아마도 그럴 거예요.”

“흠.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릴 내보낸 건 좀…….”

“그렇게 남겨둬도 문제니까 내보낸 거겠죠. 일단 명분은 좋잖아요. 마왕군 정찰이라는 게.”

덕분에 지금 팔자에도 없는 정찰 임무를 하러 나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위험하지 않겠나? 아무리 우리라고 해도 마왕군이 개떼처럼 몰려들면 위험해.”

정찰 임무라는 게 말이 정찰이지.

마왕군을 코앞에서 지켜보는 일이라.

그만큼 위험하다는 건 누가 말해도 입 아프다.

그런 전사 형을 보면서 말했다.

“아. 말을 안 했었나요? 우리 중간에 간판 바꿔 달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야?”

갑자기 엉뚱한 말을 하자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러자 손가락으로 비공정에 타고 있는 마왕 헤르게니아를 가리켰다.

“다들 알다시피 우리도 그들에게 내세울 떳떳한 마왕이 있잖아요.”

“예?”

“앗…….”

“뭐?”

“네?”

챠밍, 이쁜소녀, 나르샤 누나, 막내별 모두 놀란 눈으로 나와 마왕 헤르게니아를 번갈아 바라봤다.

곧 내 뜻을 눈치챈 재중이 형이 피식 웃으면서 말을 꺼냈다.

“우리도 마왕군인 척하자는 거냐?”

“네. 바로 그겁니다.”

만약 내가 마왕 행세를 하게 된다면.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신의 파편도 있는 데다가 마왕의 플레이트도 있으니까.

챠밍의 마왕의 스태프도 있긴 하지만 이쪽은 알려지면 문제가 있으니 패스.

뭐 그렇게 마왕인 척 활동하면 어지간한 녀석들을 속이는 건 무리가 없겠지만.

같은 마왕을 만났을 때는 아마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왕 헤르게니아는 다르다.

이쪽은 아예 진짜 마왕이니까.

다른 마왕이 그녀를 본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심지어 그녀만 있다면 나까지도 다른 마왕 행세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마왕이 마왕이라고 보증서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을 테니.

이래서 인맥이라는 게 무서운 거다.

그리고 난 무려 마왕이라는 인맥이 있고.

다들 내 말에 어이없어 하면서도 이게 말이 된다는 사실을 아는 데는 그렇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말이 되네요……?”

“우리 이제 마왕군 되는 거야?”

“마왕군이라…… 재밌겠어.”

“이게 정말 가능하다는 게 신기하네요.”

가능성이 아예 없었을 때는 생각하지도 않았겠지만.

지금은 그 가능성이 있다.

계속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마왕 헤르게니아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건 뭐…….

“아, 미리 말 안한 건 미안. 그런데 해줄 거지?”

마왕에게 마왕 노릇해달라는 걸 부탁한다는 게 좀 웃기긴 한데.

어쨌든 마왕 헤르게니아가 허락을 해줘야 시작할 수 있는 일이니까.

“내가 마왕인 건 맞는데. 어휴. 알았어. 그럭저럭 재미는 있겠네.”

썩 내키는 표정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안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짧게 한숨을 쉰 마왕 헤르게니아가 졌다는 듯 말을 꺼냈다.

“그래서. 이제 뭐부터 하면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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