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4화 침공 (3)
마왕군이 에센시아 제국 협곡으로 넘어왔다는 소식이 퍼지자 대륙 전체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이 일은 단순히 에센시아 제국에 국한된 일이 아니니까.
원래라면 베르마 제국의 국경을 따라 펼쳐진 전선만 신경 쓰면 됐겠지만.
이제부터는 그 전선에 에센시아 제국까지 추가되게 되었다.
당연히 그동안 성마대전에서 쭉 유지해왔던 병력 체계가 흔들리는 것은 피할 수가 없었다.
눈앞에 있는 카샤스 황제가 뭔가의 서류를 쳐다보며 의자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면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곧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것도 입가에 쓴웃음을 지으면서.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이 서류. 뭔지 알겠어?”
“나야 모르지.”
타란 제국 황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까지는 알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런데 굳이 나까지 불러다 말할 정도면.
아무래도 에센시아 제국과 연관이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 굳이 대공인 나까지 불러들인 걸 보면 말이지.
“에센시아 제국에서 우리 제국에 병력 파견을 요청했는데?”
“그건 꽤 의외네.”
카샤스 대공의 요청으로 잠시 타란 제국 수도에 왔다가 저런 어이없는 소리를 들으니 나 역시 웃음이 나왔다.
“걔들 타란 제국 치려던 놈들 아니었나?”
에센시아 제국 황제 녀석.
이 정도면 얼굴에 철판을 깐 정도가 아니라 그냥 타란 제국을 무시하는 수준이 아닐까 싶다.
그들은 몰랐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우린 이미 타란 제국을 치려고 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말이지. 너무 황당해서 말도 안 나오는군.”
카샤스 황제도 어이가 없는 건 마찬가지인 듯 했다.
침공하려던 상대에서 병력 파견 요청이라.
상식적으로는 하기 힘든 행동이다.
뭐 다른 쪽으로 생각해보면.
이번 마왕군의 침공이.
에센시아 제국을 얼마나 당황하게 만들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랄까.
“뻔뻔한 걸로만 치면 이미 대륙 통일을 했겠는데?”
내 말에 카샤스 황제도 동감하는지 그저 웃기만 했다.
“그런데 어차피 에센시아 제국에서 파견 요청을 한다고 해도. 거절하면 그만 아냐? 그리고 걔들도 정말 병력을 보내줄 거라고 생각하진 않을 거잖아.”
원래도 타란 제국과 에센시아 제국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은 관계였다.
굳이 분류하자면 거의 적대 국가에 가까우려나…….
호시탐탐 영토를 늘리려는 에센시아 제국과 인접한 거대한 또 다른 제국인 타란 제국이 사이가 좋을 리는 없으니까.
거기다 그간 영토 분쟁으로 수차례 부딪혔다고 알고 있었다.
이번도 마찬가지.
타란 제국이 좀 많이 흔들리다 싶으니까 냅다 병력부터 끌어모으는 것 봐라.
대륙의 안위야 어찌 되든 성마대전에 나갔던 영웅 병력까지 욕먹어가면서까지 굳이 복귀시켜서는 타란 제국을 먹어보려 했던 국가다.
그런데 그런 국가에서 병력 요청을 한다?
이건 경우가 없어도 많이 없는 거다.
당연히 카샤스 황제는 이 파견 요청 건을 덮어버릴 것이다.
아마도 원래라면 말이지.
곧 카샤스 황제가 골치가 아픈지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싸면서 한숨을 쉬었다.
“휴. 너도 알다시피 이번에 레오나 황녀와 약혼 발표를 했지.”
그 말을 듣자마자 왜 카샤스 황제가 저런 표정인지 잘 알게 되었다.
“설마 그 약혼을 빌미로 타란 제국에 병력 지원을 해달라는 건가?”
“그러니까 웃긴 일이지.”
“정말 어이없군.”
“나 역시.”
사실 그 약혼 사실 하나만 놓고 보면.
타란 제국이 에센시아 제국을 돕는 그림은 그다지 이상하지 않다.
장차 두 제국이 손을 잡는 대륙을 흔들만한 일이니까.
한쪽에서 전쟁이 나면 동맹이 될지 모르는 다른 제국에서 병력 파견을 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아마 이번 같은 경우가 아니었다면.
반대의 상황이 일어났을 수도 있고.
문제는 우리가 굳이 병력 파견을 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는 점이었다.
사실 그럴 여력이 없는 것도 어느 정도는 맞겠지만.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고민 중이지.”
외부에서 보면 이미 타란 제국과 에센시아 제국은 동맹이나 마찬가지다.
비록 그게 우리가 시간을 벌기 위해 발표한 약혼이라고 하더라도 말이지.
무엇보다 이젠 굳이 그 약혼을 유지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시간은 다 벌었어. 약혼은 없던 걸로 해도 상관없잖아?”
마왕군이 에센시아 제국의 협곡을 넘어오는 시간만 벌면 이 약혼의 효용은 끝난 셈이었다.
에센시아 제국이 타란 제국을 치지 못하게끔 하는 용도로 말이지.
그러니 이젠 더 이상 그 약혼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보아하니 카샤스 황제 역시 불필요한 병력 파견은 하지 않을 모양새였다.
“그렇긴 하지. 그래서 조만간 약혼 파기를 발표하려고 한다.”
어차피 에센시아 제국에 지킬만한 의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앞으로 우리가 쳐야 하는 적이지.
그때 잠시 머릿속에 뭔가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 약혼의 효용이라…….
만약 지금 약혼을 파기시키면.
앞으로 에센시아 제국과의 관계가 더없이 나빠지게 될 것이다.
뭐 딱히 그간 좋았던 것도 없으니 나빠진다고 해도 상관은 없는 일이지만…….
“잠깐.”
“음?”
“그 약혼 파기. 조금 뒤로 미룰 수 없을까?”
“그게 무슨 뜻이지?”
갑작스런 내 반대에 카샤스 황제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약혼 파기를 늦출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을 테니까.
그런데 내가 약혼 파기를 늦추자고 하니 의아해할 수밖에.
“그놈의 병력 요청. 한 번 들어주자고.”
“뭐?”
카샤스 황제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날 쳐다보자 마주 보면서 웃어주었다.
그러자 카샤스 황제의 표정이 꽤 미묘하게 틀어졌다.
궁금증이 가득한 딱 그런 표정으로.
“너. 다른 생각이 있는 모양이군.”
“어. 갑자기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거든.”
원래라면 다른 방식으로 하려 했으나.
지금 생각해보니 이건 이것대로 나쁘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센시아 제국의 경계를 사지 않고 그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아주 절호의 기회 아닌가.
물론 어차피 내 로가슈 왕자 신분이면.
에센시아 제국에 무난하게 입성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타란 제국의 대공을 달고 있는 것도 무시 못하니까.
만약 적대 관계로 돌아가게 되면 에센시아 제국에 손을 쓰는 게 꽤 귀찮아 질 것이다.
반대로 지금과 같은 관계라면.
당장 에센시아 제국에 들어가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오히려 정식으로 병력 파견을 요청받아서 가는 거니.
마음대로 활개 치고 다닐 수도 있겠지.
“병력 파견 요청. 들어줘.”
“음. 하지만 우리 쪽에서 파견할 수 있는 여력이 없는 건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리고 혹시라도 천사군 쪽에서 들이닥칠 수도 있다. 충분히 병력을 남겨놔야 해.”
“뭐 그건 나도 알고 있어.”
그러니까 굳이 타란 제국의 병력을 끌고 갈 생각은 없었다.
없는 살림 빼다 써 봐야 나중에 더 고생이지.
“어차피 대공령에 있는 병력들만 가지고 할 거다.”
“음…….”
카샤스 황제 입장에서는 자신이 키워놨던 대공령의 병력을 빼가는 것도 그다지 탐탁지 않은 듯 했다.
어차피 타란 제국의 전체 병력 중에 일부를 빼가는 것과 다름없을 테니.
혹시라도 에센시아 제국의 방어전에 소모품으로 갈려 나가면 그것만큼 뼈아픈 일도 없을 것이다.
“걱정마. 이번에 데리고 갈 병력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대로 돌려줄 테니까.”
“그게 가능한가?”
“어. 애초에 가서 전투를 할 생각 자체가 없거든.”
오히려 내가 데리고 가는 병력은.
위장이다.
무언가를 숨기기 위한.
그것도 대놓고 에센시아 제국에 집어넣으려면.
꽤 큰 규모의 병력이 필요했다.
“흐음. 무슨 생각인지…….”
“그냥 필요해서 그래. 나 손해 안 보는 스타일인 거 잘 알잖아.”
“……흠. 그건 그렇군.”
“그러니까 넌 그냥 병력 파견에 허가만 해줘.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하. 이걸 들어주는 내가 이상한 건지…….”
곧 카샤스 황제가 가지고 있던 서류에 사인을 하자 내게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 타란 제국 카샤스 황제가 에센시아 제국 파견 원정군에 대한 모든 권한을 주호 대공에게 위임합니다. 》
이건 아예 대놓고 밀어준다는 거지?
“아, 그리고 타란 제국에 있는 드워프들 좀 데리고 가고 싶은데?”
“드워프들을?”
“물론 바그날 대장로도 포함해서.”
일을 최대한 빨리 처리하려면.
아예 드워프 대장로까지 대동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괜히 중간에 미적거리다가 타이밍을 놓치면 앞으로 귀찮아질 테니까.
“흠. 그건 말해놓도록 하지. 다만 바그날 대장로가 협조하지 않는다면 내가 강요할 수는 없어. 드워프 대장로가 이곳에 머무는 것도 자의에 의한 것이니까.”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바그날 대장로도 이번 일에 걸린 게 많다.
절대 내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터.
얼마 뒤 카샤스 황제가 바그날 대장로를 불러들였고.
설명을 듣고는 흔쾌히 동행을 허락했다.
“내 제자 녀석을 설득해달라는 거군.”
“네. 전에 말했던 것과 같습니다.”
“알겠네.”
바그날 대장로의 제자인 맥크라이 장로가 이번 일의 핵심이다.
그리고 내가 맥크라이 장로를 직접 만나야 하는 다른 중요한 이유도 있었다.
이전에 그가 약속했던 일이 있으니까.
***
정식으로 파견 원정군을 조직해서 곧 타란 제국을 벗어났다.
타란 제국의 인장이 찍힌 비공정과 대공령의 용기사단.
그리고 우리 팀과 마왕 헤르게니아가 이번에 동참했다.
레오나 에센시아와 그녀를 호위하려고 남아 있던 에센시아 기사단들도 마찬가지로 같이 비공정에 올랐다.
바그날 대장로를 비롯한 다수의 드워프들까지.
에센시아 기사단 중 눈에 띄는 라첼에게 가서 물었다.
“몸은 좀 괜찮냐?”
그러자 라첼이 괜찮다는 듯이 팔을 들어 올렸는데 바로 인상을 구기면서 아파했다.
“큭. 됐어. 좀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흐음.
아무래도 급하게 힘을 쓰면서 생긴 부작용이라나.
원래 이 시점의 라첼이 그만한 힘을 쓴 기록이 없으니까.
역시 신경이 쓰이네.
전사 형에게 물어봐야 하려나.
분명히 몸이 나아지게 하는 방법이 있을 텐데.
아쉽게도 지금 상태에서는 라첼이 힘을 쓸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기 힘들었다.
레오나 에센시아에게도 미리 말을 해두었다.
“에센시아 제국으로 가면 무조건 시간을 끌어주시면 됩니다.”
“전장에 투입되지 않도록 말이죠?”
“네. 우리가 마왕군하고 싸울 필요는 전혀 없으니까요.”
안 그래도 에센시아 제국의 전력을 깎아내려고 노력 중인데 굳이 우리가 힘을 보탤 이유는 없다.
레오나 에센시아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바그날 대장로와 함께 맥크라이 장로를 설득해주시면 되고요.”
“네. 그건 어렵지 않을 거예요.”
어떻게 보면 이것도 시간 싸움이지.
우리는 최대한 빼먹을 수 있는 것만 빼먹고 돌아가야 한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넘어가자 어느새 에센시아 제국 수도까지 도달했다.
검문에서는 레오나 에센시아를 확인하자마자 바로 수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전쟁 중이라 그런지 삼중 사중으로 경계를 하는 중이니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꽤 곤란했을지도.
수도에 오자마자 바로 연락을 취해 베인 녀석을 불러들였다.
“먼 길 오신다고 수고하셨습니다.”
나와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바로 허리를 숙여 보이더니 그간 있었던 일들을 보고하기 시작했다.
현재 에센시아 제국 북부에 자리 잡은 마왕들의 신상 명세라던가.
마왕군의 전력이라던가 하는 것들을 말이지.
전력을 상세히 알고 있는 걸 보면 중간에서 일을 참 잘해줬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생했다.”
“아닙니다. 마왕님 덕분에 제 입지가 한층 올라갔습니다. 에센시아 제국 협곡의 비밀 통로에 이어. 베르탈륨까지 추가로 입수했으니까요.”
만족스럽다는 얼굴이라 나 역시 웃어 보였다.
베인 녀석을 중간에 굴리길 잘한 듯 싶네.
“마왕을 넷이라 끌고 오다니. 충분히 잘해줬다.”
이건 솔직히 예상 이상이라.
베인의 수완이 좋아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욕심 넘치는 마왕 분들이 많아서 가능했습니다.”
“그렇군.”
몇 가지 소식을 더 듣고는 곧 베인에게 한 가지 명령을 내렸다.
“내가 신호하면 바로 헤르마늄 광산으로 마왕군을 투입해.”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
지은이 : 란델
발행인 : 손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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