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0화 밀수 (13)
만약 우리만 이 자리에 왔을 경우 이렇게까지 수월하게 협상이 진행되진 않았을 것이다.
보통 마왕이라는 존재는 유저를 상대조차 해주지 않으니.
아니 오히려 보자마자 죽이려고 하지 않으면 다행이랄까.
비록 과거의 서열이긴 하지만.
그 서열에서 훨씬 앞서는 마왕 헤르게니아 덕분에 협상이 깔끔하게 마무리되자 밀수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화련> 협상 잘 됐나 봐?
<주호> 네. 이쪽은 무리 없이 진행됐어요.
<화련> 흐응? 그쪽 마왕이 생각보다 까다롭지 않았나 보네?
으음.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성마대전에서 적대 세력인 마왕이 정작 르바탄 공국 한복판에서 대저택에 자리 잡고 산다고 말해 주면 과연 화련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좀 궁금하긴 했다.
그리고 까다롭다기보다는 그냥 인간들의 상인들을 상대하는 딱 그런 느낌이랄까.
물론 이건 옆에서 마왕 헤르게니아가 딱 자리를 잡고 있으니 가능한 일이긴 했지만.
마왕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마왕 리센츠가 다른 마왕보다는 아직 마왕 티가 좀 덜 난다고 느껴지긴 했다.
이전에 만났던 마왕들은 다 어딘가 상대하기 힘든 그런 느낌들을 다 가지고 있었으니까.
<주호> 뭐 나쁘진 않았어요. 그다지 위협적이지도 않고요.
<화련> 마왕을 위협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걸 다른 유저들이 들으면 다 뒤로 넘어가겠네.
<주호> 으음. 그런가요.
<화련> 됐고. 베르탈륨 광석들은 페이퍼 국가들을 통해서 여러 번 돌렸다가 르바탄 공국으로 들어갈 거야. 지금부터 작업해도 시간이 좀 걸려.
<주호> 시간이 걸리는 건 괜찮아요. 어차피 마왕군이 에센시아 제국으로 들어오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할 테니까요. 우리는 그전까지만 준비해놓으면 돼요.
마왕군이 에센시아 제국의 협곡을 넘어오게 되면.
그들과 전투를 벌인다고 상당히 많은 물자를 소모하게 될 것이다.
특히 각종 무구와 마법에 소모되는 베르탈륨은 없어서는 안 되니까.
몰래 찔러주기만 하면 그게 다 돈이다.
<화련> 그럼 난 작업하러 가볼게. 창고에 잔뜩 쌓여 있는 베르탈륨 싹 정리해야지.
<주호> 네. 고생해주세요. 자금은 들어오는 대로 보내줄게요.
화련과의 대화를 마치자 재중이 형이 내게 물었다.
“잘 끝났나?”
“네. 베르탈륨 운송은 특별히 문제없을 것 같아요.”
“그래. 화련이 어련히 알아서 잘할까. 걔 돈 귀신이잖아.”
“하하…….”
재중이 형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모양이었다.
화련은 돈이 걸린 일은 절대 실수하지 않을 거라는 걸.
슬쩍 옆을 보니 마왕 헤르게니아와 마왕 리센츠가 뭔가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마왕들끼리 주고받을 그런 종류의 이야기인가 본데.
나와 시선이 마주친 마왕 헤르게니아가 내게 손짓했다.
마왕 리센츠가 그런 마왕 헤르게니아를 약간 못마땅한 듯 쳐다봤지만.
“얘는 어차피 다 들어야 하는 이야기야.”
“그렇습니까. 그 정도로 신임하시는 건가 보군요.”
“내 일을 도맡아 해주니까.”
“흠. 알겠습니다.”
“하던 이야기마저 마저 해 봐.”
그러자 마왕 리센츠가 근래 있었던 성마대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다.
우리는 전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사실 성마대전에서 마왕군이 조금씩 밀리고 있습니다.”
응?
무슨 말이지?
방금 들은 내용이 우리가 알고 있던 역사의 내용과 맞지 않아서 마왕 리센츠를 빤히 쳐다봤다.
분명히 성마대전의 결과는 마왕군의 압승으로 끝이 난다.
하지만 지금 들은 건 그와는 전혀 반대되는 이야기였다.
마왕군이 밀리고 있다고.
뭐 직접 가서 보기 전까지는 확신할 순 없지만.
다른 이도 아닌 마왕 중에 하나가 직접 그렇게 이야기할 정도라면.
진짜 성마대전에서 마왕군이 밀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정말 밀리고 있습니까? 아직 마왕들과 대천사들의 제대로 된 전쟁은 시작도 하지 않았을 텐데요.”
“흠. 우리가 직접 나서긴 아직은 양쪽 다 조심스럽다. 한 번 나섰다가 밀리게 되면 걷잡을 수 없을 테니까.”
“그럼?”
“성마대전에 그어놨던 라인들이 전부 다 밀리고 있어.”
그러자 마왕 리센츠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제 이해가 되었다.
고개를 돌려 재중이 형을 보자 역시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유저들이군.”
“네. 원래라면 성마대전은 마왕군과 천사군의 싸움이지만…….”
“천사군 쪽에 유저들이 끼어들면 숫자 차이가 벌어져.”
“그것도 그냥 숫자만 차이 나는 게 아니겠죠.”
“그래. 유저들은 성마대전의 역사를 아니까.”
재중이 형의 말이 맞다.
유저들.
그들은 성마대전의 역사를 아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걸 이용해 대륙 곳곳에서 일어나야 했던 역사를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바꿔가고 있는 중이었다.
뭐 그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도 딱히 할 말이 없긴 하지만.
이미 에센시아 제국과 타란 제국의 역사를 뒤집어 놨으니.
결과적으로 보면 같은 내용이긴 한데.
그 역사가 일어나는 시점이 한참이나 앞당겨져 버렸다.
우리도 이런데.
다른 유저들도 다를까.
그들 역시 각 왕국과 대륙 곳곳이 히든 피스를 찾아내 급격하게 성장하면서 이미 왕국까지 접수한 녀석들도 나왔다.
그리고 그 유저들의 시선은 이제.
성마대전으로 향할 것이다.
당연히 팽팽했던 전선에 수많은 유저들이 개입하게 되면 한쪽으로 추가 기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유저들의 시작지점에 마왕군도 포함이라면 이야기가 꽤 달랐겠지만.”
“전부 왕국에서 스타트죠.”
애초에 시작부터가 인간군과 천사군 진영이다 보니 이건 어쩔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마왕군의 침략에 무너져 가는 성마대전을 유저들이 뒤집어보라고 운영자들이 준 미션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게 아니라면 처음부터 마왕군도 유저들이 선택할 수 있어야 했으니까.
만약 여기서 누군가 끼어들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점점 마왕군이 밀리게 될 것이다.
기존의 역사와는 달리.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마왕 리센츠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지금 전선에서 활약하는 이들이 모험가죠?”
“흠. 이미 알고 있었나?”
“대충 그럴 것 같아서요.”
“흠. 자네 말대로 모험가들이 갑자기 전선에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마왕군의 세력을 점점 갉아먹고 있는 중이다.”
마왕 리센츠가 아는 것과 우리가 추측한 것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이건 본격적으로 유저들도 성마대전에 뛰어들기 시작한 거다.
물론 모든 왕국들에 소속된 유저들이 나선 건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마대전의 라인이 밀리고 있다는 건.
앞으로 더 밀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대책은 있습니까? 마왕군 수뇌부에서도 뭔가 대책을 내어놓고 있을 텐데요.”
내 질문에 마왕 리센츠가 짧게 한숨을 쉬며 답했다.
“흠. 마왕군 내부도 어수선해서 영 의견이 모이지 않더군.”
어수선하다?
“무슨 뜻이죠?”
“마왕들이 서로 협조할 줄 알면. 그게 마왕이냐?”
그 말에 잠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마왕들의 특성을 너무 쉽게 봤다.
당연히 성마대전에서 밀리고 있으면 마왕들이 힘을 모아서 무언가 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애초에 마왕들의 협력이라는 전제가 잘못되었어.
“다른 마왕이 무너지면 거기에 자기 세력의 마왕을 꽂아 넣기 바쁜 녀석들이야.”
“으음. 딱히 부정할 수 없네요.”
이건 이전에 봤던 마왕들도 그랬다.
전에는 아예 날 마왕 후보에까지 올리기도 했었으니까.
확실히 자신들에게 이득이 된다고 생각되지 않으면.
마왕들은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개별적으로 각자 마왕성을 가진 군주들이라…….
그들을 한데 묶는 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지 싶었다.
“내 마왕 자리도 그래. 원래라면 나지 않았어야 하는 자리지만…….”
“아. 전대 마왕이 죽었다고 했죠.”
“맞아. 밀리는 게 분명한데. 같이 전장에 나갔던 마왕들이 대천사들에게 포위된 마왕을 버렸다고 하더군.”
“그거 참…….”
“덕분에 내가 마왕이 됐으니 할 말이 없긴 한데. 마왕들이 원래 좀 그렇지.”
음.
그렇게 마왕 리센츠의 말을 듣다 보니 좀 이상한 점이 있었다.
분명 마왕의 자리가 비면 자신들의 세력을 끼워 넣는다고 했는데…….
아무리 봐도 마왕 리센츠는 그런 세력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오죽하면 밀수에까지 손을 댈까 싶기도 하고.
자신이 포함된 마왕 무리에서 지원이 제대로 된다면.
이런 식으로 무리를 하진 않을 테니까.
“좀 조심스러운 질문이긴 한데. 우리가 밀수를 하는 걸 다른 마왕도 알고 있습니까?”
이전에 베인이 마왕 리센츠를 후보로 보여주었을 때는 그런 내용이 없었다.
다른 말로 마왕 리센츠는 같은 마왕 세력이 없다고 봐야 한다.
만약 그랬다면 애초에 베인 녀석이 우리에게 소개해주었을 리도 없고.
내 질문에 마왕 리센츠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다.”
“그럼?”
“하아. 그런 지원이 있었으면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을까. 처음부터 머릿수나 채우려고 임시로 맡은 거다. 아마 내가 아니었어도 다른 마왕이 이 자리에 있었을 거야.”
어떻게 보면 임시직이라는 건가?
“혹시 다른 마왕이 채워지면?”
“난 밀리는 거지. 그게 아니라고 해도 마왕성을 뺏기면 그냥 개털이야.”
“…… 그거 참.”
왜 이렇게 마왕 리센츠에게서 마왕 냄새가 나지 않았는지 이제 잘 알 것 같았다.
마왕이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임시직에다가.
그 허름한 마왕성도 뺏기면 마왕 자리에서 쫓겨나는.
그야말로 바닥 중에 바닥.
당장 상위 마왕 중에 하나가 손을 쓰면 눈앞에 마왕 리센츠는 그대로 다시 최상급 마족으로 내려갈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른 마왕 후보에게 죽던가.
그리고 마왕 리센츠를 죽이기 가장 편한 방법은…….
혹시나 싶어서 물어보았다.
“본체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이건 중요한 일이다.
막상 협상을 다 해놓고 마왕 리센츠가 죽어버리면.
다시 처음부터 작업을 해야 할 테니까.
시간상 이건 꽤 불리하다.
뭐 다른 마왕 후보들도 있긴 한데.
눈앞의 마왕 리센츠만큼 우리가 휘두르기 좋은 조건을 가진 마왕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이러니 베인 녀석이 우리에게 이 녀석을 붙여주었을 텐데.
그러자 마왕 리센츠가 다시 한숨을 쉬면서 우리에게 말했다.
“현재 전선에 나와 있다.”
“역시 그런가요.”
마왕 임시직.
그렇다는 건.
언제든지 다시 이 자리가 바뀔 수 있다는 뜻이었다.
거기다 지금 성마대전은 마왕군이 밀리는 형국이라…….
무리한 상황이 언제 생겨도 이상하지 않다.
“잘못하면 총알받이로 나가겠군요.”
뭐 마왕이 욕심에 눈이 멀어 삽질만 하지 않는다면 어지간해서야 군대가 먼저 나서고 마왕이 나가겠지만.
천사군 쪽에서 대천사 같은 녀석들이 나서게 되면.
혹은 인간들 중에 강한 영웅이 나서면.
어쩔 수 없이 싸워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그럼 제일 먼저 소모되는 게.
바로 눈앞의 이 임시직 마왕이다.
“후. 안 그래도 압박이 점점 심해져서 말이지.”
“뭐라도 공을 쌓아야 할 판이네요.”
가만히 두면 마왕 리센츠 이 녀석.
분명히 성마대전에서 갈려 나간다.
그렇게 소모품으로 갈려 나가지 않으려면.
보다 상위의 마왕으로 올라가는 방법밖에는 없다.
이건 무력을 단숨에 올리거나…….
아니면 다른 방법을 써야 하는데.
지금 마왕 리센츠에게 가능한 방법은 적어도 무력 쪽은 아니지.
하지만 그런 마왕 리센츠에게 꽤 암울할 수 있는 말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조만간 마왕들과 대천사가 제대로 한 판 붙을 겁니다.”
신의 성배.
이걸 차지하기 위해 마왕과 대천사가 꽤 갈려 나갈 예정이라…….
그럼 눈앞에 있는 이 녀석은.
매우 높은 확률로 죽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 전에. 최대한 세력을 쌓아야 합니다. 마왕군에서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
지은이 : 란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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