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2화 밀수 (5)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던 이야기를 듣게 되면 보통은 당황하게 된다.
지금 눈앞의 세 사람이 딱 그랬다.
레오나 에센시아뿐만 아니라 카샤스 황제, 아이샤 타란까지 모두 얼굴에서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표정을 수습한 레오나 에센시아가 재차 확인을 위해 내게 물었다.
자신이 들은 말이 진짜인지 믿기지 않을 테니까.
“정말 헤르마늄 광산을 무너뜨려 달라는 건가요?”
“네. 정확하게 들으셨네요.”
확실하게 못을 박자 이번엔 셋 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다 아이샤 타란이 내게 물어보았다.
“반드시 필요한 일인가요?”
“앞에서 말했듯이. 헤르마늄 광산에서 나오는 풍부한 채굴량은 에센시아 제국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줄 겁니다. 그것도 마왕군을 상대로는 더 그렇고요.”
헤르마늄으로 만든 무기가 마왕군에 역상성이라는 건 지나가는 애들도 아는 사실이었다.
슬쩍 시선을 돌려 레오나 에센시아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
“이번에 헤르마늄 광산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황녀가 에센시아 제국의 황제가 될 확률은 아예 없어요.”
내 확언에 레오나 에센시아의 표정이 확 굳어버렸다.
아마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지금의 에센시아 제국에 균열이 나지 않는 이상.
자신의 자리는 없을 거라고.
그리고 이건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실제로 성마대전에서 에센시아 제국은 최후까지 가지 못하고 무너지니까.
지금은 우리 덕분에 헤르마늄 광산을 너무 일찍 발견해서 오히려 오래 버틸 수도 있겠지만.
그쪽은 더 문제가 된다.
앞으로 레오나 에센시아가 차기 황제가 될 확률이 제로가 된다는 뜻이니까.
그러니까 지금.
이 시점에서 에센시아 제국 황제가 헤르마늄 광산을 마음대로 굴리게 두면 안 된다.
옆에서 카샤스 황제가 이마에 손을 짚고는 바로 한숨을 쉬었다.
“하아. 미친 것 아냐? 에센시아 황제가 이번에 발견한 헤르마늄 광산에 얼마나 공을 들이는지 잘 알 텐데?”
카샤스 황제의 말도 맞다.
대륙 최대 규모의 헤르마늄 광산은 그야말로 자원의 보고나 마찬가지다.
그것도 에센시아 제국을 부강하게 만들어줄.
최고의 무기지.
당연하겠지만 에센시아 제국 황제는 이 헤르마늄 광산의 채굴에 지대한 공을 들이고 있다.
시작부터 쉬운 미션이 아니라는 거다.
헤르마늄 광산을 지키고 있는 수많은 기사단부터 해서 작업하고 있는 인력들까지 모두 제거하거나 시선을 돌려야 한다.
최악의 경우 시작도 전에 발견 당하거나 또 다른 문제가 생겨 계획을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카샤스 황제가 걱정하는 건.
아마도 레오나 에센시아가 이번 일로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것이려나?
카샤스 황제가 방법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가 정면에 나서야 한다는 걸 알았으니 꺼려질 것이다.
“일이 잘못됐을 경우 황녀에게 튈 불똥을 걱정하는 거냐?”
빤히 카샤스 황제를 쳐다보면서 물어보자 그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차기 제국 황제가 되면 물론 좋겠지만. 황녀에게 가는 위험부담이 너무 커.”
그런 카샤스 황제에게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담담히 말했다.
“우리 일에 위험하지 않은 일이 있긴 하나?”
“…… 음.”
“더군다나 에센시아 제국의 황제가 되기 위한 발판을 쌓는 일이야.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황제를 억지로 끌어내리려면. 어느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 하지 않겠어?”
내 말에 카샤스 황제가 곧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았더라도 잘 알 것이다.
자신이 타란 제국 황제가 되기 위해 얼마나 위험을 감수했는지.
다른 이도 아닌 본인이 제일 잘 안다.
그렇다고 여기서 카샤스 황제의 반발을 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당장 이 녀석이 훼방이라도 놓기 시작하면 될 일도 안 되니까.
여기서는 적당히 구슬리는 걸로.
“네가 걱정하는 레오나 황녀가 직접 앞에 나서는 일은 없을 거야.”
“흠. 그렇다면 어떻게?”
시선을 돌려 레오나 에센시아를 보면서 물어보았다.
“황녀는 알고 있는 드워프들이 많죠?”
내 물음에 잠시 멈칫했던 황녀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맥크라이 드워프 장로.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그건…….”
에센시아 제국의 드워프들은 맥크라이 드워프 장로의 휘하에 있다.
레오나 에센시아는 그와는 각별한 사이고.
“그래도 쉽진 않을 거예요.”
“그런가요?”
“네. 에센시아 제국에서 드워프들의 연구에 지원하는 자금이 있으니까요.”
전에 분명히 들었다.
지하에 연구 시설이 있다고.
그리고 그때 맥크라이 장로와 하나의 약속을 하기도 했다.
아직도 기억할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이번 일에는 그 약속을 쓰지 못한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레오나 에센시아의 인맥이 필요하다.
“자금이라…….”
돈 이야기가 나오자 시선을 돌려 카샤스 황제 쪽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카샤스 황제의 어깨가 살짝 들썩였다.
마치 먹이를 보는 것 같은 내 눈빛이 걸렸으리라.
“타란 제국 황제면 돈이 많겠네.”
“없다. 수도 복구 자금만 해도 빡빡해.”
“정말?”
“……하. 갈수록 미치겠군. 지금 에센시아 제국의 드워프들을 타란 제국으로 빼돌리자고 말하는 거잖아.”
“역시 똑똑하니 좋은데?”
넉살 좋게 말하자 카샤스 황제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대체 일을 어디까지 키울 생각이냐.”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써야지. 에센시아 제국을 약하게 만들려면.”
에센시아 제국을 약화시킨다는 내 말에 결국 카샤스 황제가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누님. 당장 가용할 수 있는 자금이 있습니까?”
카샤스 황제의 태도가 바뀌자 아이샤 타란이 뭔가의 서류를 잔뜩 들고 와서 앞에 펼쳐 보였다.
뭔가의 숫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는 수많은 서류들.
그 서류들을 잠시 살펴보던 아이샤 타란이 몇 장의 서류를 빼내면서 대답해주었다.
“수도 복구를 늦추면 어떻게든 자금을 돌릴 수 있긴 하지만…… 현재 에센시아 제국에서 드워프들에게 얼마나 많은 지원을 하는지 우린 전혀 몰라.”
괜히 비밀 연구 시설이 아니다.
타란 제국에서도 정보를 알아낼 수 없을 정도였다.
레오나 에센시아를 쳐다보니 그녀 역시도 확실한 정보를 알 수 없는지 고개를 저어 보였다.
“만약 자금 지원을 한다고 하더라도…… 맥크라이 장로가 움직일지는 모르겠어요.”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재중이 형이 슬쩍 내게 말해주었다.
“타란 제국에 맥크라이 장로의 스승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 바그날.”
드워프 대장로 바그날.
그가 현재 타란 제국에 머물고 있었다.
곧장 아이샤 타란을 쳐다보자 그녀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데리고 올게요.”
“네. 좀 부탁드립니다.”
드워프 대장로인 그가 설득을 하고 레오나 에센시아가 도와준다면 그를 움직이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아이샤 타란이 바깥으로 나가자 카샤스 황제가 내게 물었다.
“만약 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위험부담이 크다. 이건 어떻게 할 거지? 드워프들을 추궁한다면 우리가 뒤에 있다는 게 나올 거다.”
“아. 그쪽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실제로 헤르마늄 광산을 무너뜨리는 건 드워프들이 하겠지만…… 에센시아 제국이 보기에는 전혀 다른 녀석들이 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그게 무슨 뜻이지?”
카샤스 황제와 레오나 에센시아가 궁금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자 곧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생각해 봐. 에센시아 제국의 헤르마늄 광산이 무너지면 당장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녀석들이 누가 있지?”
역으로 물어보자 이번엔 레오나 에센시아 쪽에서 답이 나왔다.
“설마 마왕군…… 인가요?”
“네. 그렇죠.”
그리곤 씨익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마왕군이 에센시아 제국을 공격하는데 가장 거슬리는 곳이 바로 헤르마늄 광산이야. 자신들의 목을 치게 될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재료가 나오는 곳이니까.”
다른 말로.
전쟁이 나면 마왕군 쪽에서 가장 먼저 부셔야 하는 기관 시설이기도 했다.
헤르마늄 광산이 무너지면 가장 이득을 보는 존재들.
거기다 마왕군의 흔적까지도 잔뜩 남길 생각이었다.
누가 봐도 마왕군이 한 것처럼.
“헤르마늄 광산을 공격하는 건 마왕군일거다. 물론 겉으로 말이지. 아무리 흔적을 쫓아봐야 마지막에 나오는 건 마왕군일 테고. 우리는 전혀 관련 없는 일이야.”
조금의 의심은 흔적이 발견되는 순간 곧 확신으로 바뀐다.
마왕군이 헤르마늄 광산 근처에 얼쩡거리다 걸리는 정도로도 충분히.
거기다 몇 가지 흔적을 더 추가해준다면.
더없이 좋은 상황이 만들어질 것이다.
오해는 하는 녀석들의 몫이니까.
내 설명을 다 듣고 나자 어처구니없다는 듯 카샤스 황제가 크게 웃어버렸다.
“하하…… 넌 이미 계획이 다 서 있었군.”
“설마 아무 생각 없이 이런 일을 벌이겠어?”
“무서운 놈. 마왕군까지 써먹을 생각을 하다니.”
“칭찬 고마워.”
그러자 카샤스 황제가 이번엔 현실적인 면을 들고 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자금은 부족해. 수도 복구를 늦출 수는 없다.”
“으음. 역시 그런가?”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려나.
혹시 카샤스 황제가 숨겨둔 비자금이라도 있을까 했지만.
지금은 그 정도 여유도 되지 않는 듯 했다.
그만큼 수도가 엉망이 됐으니.
당장 돈 들어갈 곳이 너무 많은 것이다.
이건 할 수 없나.
“드워프 연구 자금. 내 쪽에서 댄다면 어때?”
“뭐?”
“아. 물론 공짜는 아니고.”
당연하겠지만 이건 타란 제국 황실에 내어주는 빚이 된다.
“흠. 대공령에 세금 면제까지 해주었는데…….”
“그건 그거고. 내가 한 만큼 받아간 거였잖아.”
내 말에 딱히 할 말이 없는지 카샤스 황제가 먼 산을 보는 척 했다.
“일단 드워프들 설득만 해 줘. 그리고 그들의 정착지는 내 대공령으로. 그럼 베르탈륨 광석을 팔아서 나오는 자금 중에 일부를 그들에게 할당할 테니까.”
“대공령으로?”
“안 될까?”
“흠. 안 될 건 없겠지. 어차피 그들이 어디에 있든 타란 제국 내니까.”
에센시아 제국의 드워프들의 연구 시설을 아예 대공령으로 끌고 오는 건.
내게도 절대 나쁘지 않다.
연구 시설을 짓는 비용까지 나중에 타란 제국 앞으로 다 청구해도 되니.
나랏돈으로 내 연구 시설을 짓는 셈이라.
“갈수록 빚이 늘어나는 기분이군.”
“기분이 아니라 진짜 빚이지.”
“한 마디도 안 지는군.”
에센시아 제국에서 쓰는 천사들의 마법과 드워프들의 기술력.
거기다 타란 제국의 특수 용 생산.
이 모든 것들이 대공령에 전부 들어오면.
대공령의 값어치는 이전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게 될 것이다.
특히 내가 노리는 건 따로 있다.
무려 이 연구 시설을.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죄다 던져줄 생각이니까.
그녀가 눈치 보지 않고 대놓고 연구를 하면.
과연 어떤 물건이 나올지…….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다.
무엇보다.
이번에 내가 에센시아 제국에서 빼돌릴 건.
단순히 헤르마늄과 드워프뿐만이 아니었다.
한 가지 더.
없어지는 순간 에센시아 제국이 휘청거릴 물건.
이건 마왕 헤르게니아를 더욱 흡족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더불어 에센시아 제국을 개털로 만들 수도 있을 테지.
“어디 차, 포 다 떼고도 버틸 수 있나 한 번 두고 보자고.”
70억분의 1의 이레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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