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9화 키메라 (5)
아마 이전의 성마대전이었으면.
고대 마룡 카브레시아의 저 브레스를 포함한 광역 공격이 천사군이나 마왕군 할 것 없이 죄다 녹여버렸을 터였다.
실제로 성마대전 역사가 그걸 잘 증명하고 있으니까.
위력 면에서는 지금 시점에서의 그 어떤 스킬들보다도 강할 테고.
그래서 사실 고대 마룡에게 기대한 측면도 없잖아 있었다.
현재 우리가 가진 가장 강력한 패이기에.
이걸로 키메라를 잡을 수 있다면 베스트.
하지만.
상황은 우리 생각만큼 그렇게 녹록하게 흘러가진 않았다.
“하. 저걸 맞고도 안 죽었다고?”
“네. 심지어 크게 타격도 주지 못한 모양이에요.”
내 한숨 가득한 말에 전사 형이 깜짝 놀라서 되물었다.
“이만큼이나 들이부었는데?”
“그러니까요.”
시선을 돌려 재중이 형을 보자 재중이 형 역시도 키메라가 건재한 걸 확인한 듯 어이없단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고대 마룡의 창을 든 손목을 빙빙 돌리면서 말했다.
“꽤 손맛이 괜찮았는데 말이야. 안 먹혔다 이거지?”
우리가 생각하던 것과는 달리.
재중이 형의 드래곤 버스터가 역상성까지 먹여가면서 직격했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큰 피해를 못 주었다는 건.
꽤 충격을 줄 만한 일이었다.
거기에 고대 마룡 카브레시아의 광역 스킬까지 무방비로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다니.
아니.
분명 피해는 받았다.
하지만 그 피해가 우리가 예상한 수준까지 먹히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
적어도 지금쯤 빈사상태로 쓰러져 있어야 정상인데.
지금 저 키메라 녀석이 두 발로 멀쩡히 서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 쪽에서 준비한 패가 모두 통하지 않았다는 뜻일 테니까.
그리고 아마 지금 가장 당황한 건.
우리보다 오히려 저 하늘에 떠서 아래를 지켜보고 있는 고대 마룡일 것이다.
날아다닌다고 표정을 보지 못 해서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마왕 헤르게니아가 잔뜩 굳은 표정을 하고는 내 옆으로 붙더니 말을 꺼냈다.
“오벨리스크의 마력이 생각 이상으로 견고해.”
“역시…… 그런 건가?”
“응. 방금 고대 마룡의 브레스와 광역기를 거의 대부분 오벨리스크의 힘으로 막아냈어.”
“비축해둔 힘이 아직도 많다 이거지?”
내 물음에 마왕 헤르게니아가 역시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이.”
확실히 저 오벨리스크는 무려 타란 제국 수도에 들어 왔던 병력들을 통째로 흡수한 상태였다.
수없이 많은 생명력을 마력으로 바꾼.
끝이 보이지 않는 마력을 지닌 결정체.
그러니 고대 마룡의 저 강력한 스킬조차 먹히지 않았겠지.
“정말 난감하네.”
솔직히 우리와 고대 마룡의 힘을 합치면 어느 정도 타격을 줄 수 있다고 여겼다.
아니.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이는 것도 가능하다고 판단했는데.
고대 마룡의 광역기로 녹아내리고 활활 타오르는 대지 한가운데서 후폭풍이 걷히기 시작하자 그 안에서 키메라 녀석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모두가 예상했듯.
두 발로 멀쩡히 서 있는 키메라가 이쪽을 넌지시 주시하고 있었다.
저건 마치 이것이 끝이냐고 물어보는 것 같은 오만함이랄까.
바로 반격을 할 수 있음에도.
아주 천천히 여유를 두고 저벅저벅 한 걸음씩 걸어 나왔다.
곧 녀석의 저 여유가 어디서 왔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오벨리스크.”
키메라의 몸에 붙어 있었던 오벨리스크의 파편들이 마치 하나의 방패라도 된 것 마냥.
조각들이 한 데 모여 거대한 붉은 방패를 만들어낸 상태였다.
전사 형이 그걸 보고는 잘 알겠다는 듯 말했다.
“오벨리스크를 방패처럼 뭉쳐서 피해를 최소화했어.”
“그런가요.”
바로 고개를 끄덕인 전사 형이 말을 이었다.
“저렇게 한곳으로 모을 수만 있다면 굳이 다른 곳을 방어할 필요가 없어지니까. 중첩만 가능하다면. 얼마든지 가능할 거야.”
전사 형의 설명을 듣자 확실히 눈에 들어왔다.
키메라 녀석이 오벨리스크 파편을 겹치는 것도 모자라 그걸 아예 몇 겹으로 더 쌓아서 견고한 방패를 만들었다는 걸.
한 마디로.
챠밍의 데몬 글래시어나 재중이 형의 드래곤 버스터가 아예 통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때는 고작 한 겹에 불과한 오벨리스크 파편이 몸 전체를 두르고 있어서 스킬들이 통했던 거고.
이번의 고대 마룡의 광역기는.
저렇게 오벨리스크 파편들을 중첩해서 막아냈기에 버텨낼 수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 증거로.
중첩한 오벨리스크의 방패로 막아낸 곳이 아닌.
다른 신체 부위들은 피해가 제법 있는지 아직도 복구가 덜 된 상태로 녹아내리는 중이었다.
그만큼의 손해를 남아도는 마력으로 다시 회복을 하는 듯 했고.
“그래도 아주 넘사벽의 괴물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요.”
우리의 풀 차징한 스킬들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면.
솔직히 여기서 두 손, 두 발 들고 바로 튀어야 한다.
그 어떤 짓을 해서도 키메라 녀석을 잡을 수 없다는 뜻이 될 테니까.
하지만 스킬이 통하는 걸 본 이상.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재중이 형이 내 어깨를 잡더니 매서운 눈빛을 하고는 한 곳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정확하게는 키메라가 앞을 막고 있는 정면이 아니라.
그 뒤쪽을 바라보는 것 같은 시선으로.
“너도 알겠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면서 답했다.
“네. 지금 저 녀석. 정면의 오벨리스크 방패를 빼고는 죄다 비었어요.”
“잘 봤다. 우리가 노려야 할 건. 바로 그 점이다.”
임시방편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의도된 방법인지는 모르겠다만.
키메라 녀석이 온 몸을 감싸고 있던 오벨리스크를 한데 모아서 오벨리스크 방패를 만든 것까지는 일단 훌륭하다고 할 수 있었다.
녀석 입장에선 최선의 결과를 냈으니까.
반대로.
저 방법에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했다.
바로 저 오벨리스크 방패를 제외하면.
나머지 다른 신체 부위들은.
지금 엄청나게 방어가 내려갔다는 뜻이 된다.
평소에 오벨리스크 파편으로 보호해주던 보호막이 사라진 셈이라.
뭐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용족의 신체와 천사의 마력으로 감싸고 있어서 방어가 견고하긴 하지만.
이전만큼 공격이 안 통하진 않을 터.
“결국 정석으로 가야 하네요.”
“그렇지.”
우리 둘의 대화를 들은 전사 형이 마왕의 무기인 발뭉과 타이탄 라지 쉴드를 들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정면은 제가 막겠습니다.”
그러자 재중이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시선만 끌어. 어차피 네 기동력으로는 절대 따라갈 수 없으니까. 완전히 샌드백이 됐다고 생각하고. 계속 두들겨 맞기만 해.”
“하하…… 그거 제 전문입니다.”
확실히 전사 형이 아무리 뛰어다녀도 키메라의 기동력을 따라잡을 순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아무것도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중심을 잡고 계속 귀찮게만 해줘도.
이번엔 충분하지.
그리고 키메라에게 어지간히 두들겨 맞더라도.
전사 형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방어만 한다면 말이지.
방어 하나만은 현 서버 내에서 최강이라.
“마왕의 스킬을 최대한 유지해. 그걸로 녀석을 붙잖아 놓으라고.”
“네. 알겠습니다.”
재중이 형은 이쁜소녀에게도 지시했다.
“넌 챠밍과 막내별을 지키는 역할이다. 저 녀석 지능이 꽤 되니까. 분명히 둘을 치러 올 거야.”
그러자 이쁜소녀가 아쉬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잘 해볼게요.”
나름 키메라와 싸워보고 싶었는데도.
지금은 챠밍과 막내별을 지킬 사람이 그녀밖에 없었다.
나르샤 누나에게도 전달했고.
“빛의 활로는 상성이 좋지 않아 크게 대미지를 못 주겠지만. 꽤 귀찮게는 할 수 있을 거야. 은신 상태로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키메라 녀석의 집중력을 흩트리는 데 최대한 집중해. 할 수 있지?”
그 말에 나르샤 누나도 알겠다는 표시를 했다.
나르샤 누나가 모습을 숨기고 돌아다니다가 보이지 않는 화살로 공격하기 시작하면 키메라 녀석도 꽤 난감할 것이다.
그리고 나르샤 누나 역시 기동력은 상당하니까.
뒤를 잡힌다고 하더라도 바로 잡히지는 않을 터.
쫓아갈 시간만 주어지면.
우리가 얼마든지 커버가 가능하다.
“챠밍은 키메라의 발목을 묶는 데만 신경 쓰고. 크게 한 방 먹이지 않아도 되니까.”
“알겠어요. 빙계 스킬들로 최대한 묶어 볼게요.”
어차피 광역기 같은 큰 스킬들은 키메라가 오벨리스크 방패로 막아버릴 테니 의미가 없었다.
발을 묶는 게 오히려 나은 선택이었다.
“막내별은 마력 보조 부탁해. 키메라 녀석과 계속 붙으면 마력이 상당히 부족할 테니.”
“네. 적절히 분배할게요.”
막내별의 무기는 일정 범위 안의 상대의 마력을 뺏어 와서 우리 팀에게 넘겨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상대가 마력이 철철 넘치는 키메라라면.
적어도 싸우는 동안 마력이 부족해서 죽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각자 역할 분배가 끝나자 재중이 형이 내게 말했다.
“너하고 난 직접 키메라를 친다.”
이어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물어보았다.
“직접 싸울 거냐? 아님, 마법 지원?”
그러자 마왕 헤르게니아가 살짝 발을 뒤로 빼면서 말했다.
“지원할게. 아쉽게도 저 녀석. 나하고 너무 상성이 안 좋아서.”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한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직접 싸울 녀석은 따로 있잖아.”
마왕 헤르게니아의 시선을 따라가자 그곳엔 꽤 부상을 입은 듯한 카샤스 대공이 두 최상급 천사들을 양팔에 끌고 걸어오고 있었다.
확실히.
근접 전투로만 한정하면.
카샤스 대공이 더 좋은 패였다.
다만.
지금 카샤스 대공이 제대로 싸울 수 있는가의 문제가 남아있긴 해도.
다가온 카샤스 대공이 슬쩍 키메라 쪽을 쳐다보고는 말했다.
“저건 정말 괴물이군. 그걸 맞고도 살아있다니.”
“뭐 부정하진 않을게. 자세히 설명하자면 너무 길어질 것 같고. 지금 바로 싸울 수 있겠어?”
내 말에 카샤스 대공이 대답하기 전.
막내별에게서 날아온 회복 스킬의 빛이 카샤스 대공을 화려하게 감쌌다.
그러자 곧 카샤스 대공의 신체가 빠르게 복구되면서 외상이 거의 다 사라져버렸다.
완전히 회복된 카샤스 대공을 보면서 만족스럽다는 듯 막내별이 미소 지었다.
“당장 쓰러질 것 같아도 싸워야겠죠?”
“흠. 고맙다.”
저건 죽어가는 이도 살릴 기세라.
나 역시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다네. 너 죽어도 싸워야 해.”
“바라던 바이긴 한데. 손에 쥔 것이 없군.”
그 순간 왜 그렇게 카샤스 대공이 허전해 보였는지 이제야 눈치챘다.
계속 들고 다니던 거대한 전용 대검이 사라져 있었으니까.
“어쩐지 허전하다 했는데. 무기가 없네.”
그리고는 곧장 시선이 키메라의 뒤편으로 돌아갔다.
카샤스 대공 역시도 마찬가지.
손이 비어 아쉽다는 듯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꽤 좋은 무기였는데. 녹아버렸군.”
대공쯤 되는 녀석이 들고 다닐만한 무기니까 좋은 무기였음에는 틀림없었다.
카샤스 대공의 혼신을 다한 필살기를 받아줄 만큼이나.
다만.
이번에는 너무 상태가 좋지 않았다.
키메라의 가슴에 박아 넣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이후에 쏟아진 광역기들과 고대 마룡의 공격 때문인지 손상이 너무 된 모습이었다.
거기다 키메라가 대검을 억지로 뽑아내는 과정에서 약해졌던 검신이 부러져버린 듯 했고.
그 순간.
키메라와 카샤스 대공을 번갈아 바라봤다.
머리에 스치는 생각들이 복잡하게 얽혔지만.
할 수 없다는 판단에 인벤을 열었다.
결국은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건가 싶기도 하고.
곧 내게서 나온 물건을 본 카샤스 대공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커졌다.
“그건……?”
지금 내 품에서 나온 물건은.
다름 아닌.
용신검 아스카론이었다.
“빌려주는 거다. 이번엔 부러뜨려 먹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