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5화 키메라 (1)
아마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절대 고대 마룡 카브레시아에게 말을 걸어본다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괴수형 네임드에게 말을 거는 것 자체가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당장 앞에 서기만 해도 죽이지 못해 난리를 치는 네임드에게 대화를 건다?
이건 미친 짓이지.
당연히 그런 시도를 했다는 유저가 있다는 전례조차도 들어보지 못했다.
대부분의 유저들은 칼부림하기 바쁘니까.
그런데 지금 난 그런 네임드의 정면에 있다.
그것도 성마대전에 등장하는 네임드 중에서도 흉폭하기로 손에 꼽는 고대 마룡 앞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추며 막상 말을 걸긴 했는데…….
고대 마룡 카브레시아가 두 눈을 확 부라리면서 나를 매섭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마치 무슨 미친놈을 보는 시선 마냥.
으음.
이건 당연한 거려나.
지금까지 고대 마룡을 용신의 파편으로 유인해서 도망치는 걸 반복하다보니 이 녀석도 내가 꽤 눈에 익었을 것이다.
평소 같으면 달아나는 게 정상인데.
지금은 오히려 자신 앞에 이렇게 날고 있으니.
고대 마룡 역시 어이없기는 마찬가지일 터.
바로 전사 형에게 연락이 왔다.
<방패전사> 야야. 너 지금 뭐 해. 거긴 왜 날아간 거야.
당황함이 가득한 딱 그런 말이려나.
아마 전사 형뿐만 아니라 저 아래에 있는 우리 팀과 마왕 헤르게니아, 카샤스 대공, 천사들 모두 같은 생각일 것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고대 마룡 주둥아리 앞에 몸을 들이미는 일을 하진 않을 테니까.
<주호> 으음. 대화요.
<방패전사> 뭐? 방금 대화라고 했냐?
<주호> 네. 정확하게 들었어요.
<방패전사> 하. 미친놈아. 그게 돼?
<주호> 모르죠. 그래도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아서요.
<방패전사> 끙. 알았다. 여차하면 튀어. 우리도 알아서 피할 테니.
전사 형도 어이없어 하면서도 내가 한다고 하니 그냥 두는 듯 했다.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니 다들 위쪽을 빤히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이게 과연 가능할까 궁금해하는 딱 그런 모습이려나.
다시 시선을 돌려 아직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날고만 있는 고대 마룡을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알아들은 것 같은데? 뭐라고 대답 좀 해보지?”
솔직히 내가 말해놓고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만히 있는 것과 말을 이해하는 것에는 너무 큰 차이가 존재했다.
이건 괴수형 네임드가 말을 알아들을 것이라 착각했을 수도 있는 일이다.
“…….”
그렇게 얼마나 대치를 했을까.
갑자기 내 주변의 대기가 울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뭔가의 목소리가 동시에 귓가를 울려댔다.
웅장한 것 같으면서도 그렇게까지 거슬리는 느낌은 없는.
오히려 잔잔하다는 느낌에 가까운 목소리가 어떤 파장을 통해 전달됐다.
[ 내게 말을 걸어오는 녀석은 처음이군. ]
이건.
확실하다.
의사 전달이 된다.
막상 내가 말을 걸어놓고도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대답할 줄은 솔직히 반신반의했는데.
고대 마룡의 검붉은 두 눈빛이 내게 집중되자 잔잔하게 몸이 떨렸다. 하지만 이내 회복되어 다시 말을 이을 수 있었다.
“왜. 아까 우리를 공격하지 않은 거지?”
솔직히 전부터 고대 마룡이 우리까지 치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칠 수 있는 환경이었다.
키메라를 상대한다고 온 신경이 그쪽에 쏠려 있었으니까.
만약 고대 마룡이 그 와중에 우리를 공격했다면 분명히 여기 있던 누구 하나는 키메라에게 죽어 나갔을 것이다.
아니.
꽤 다수가 죽었을지도.
그런데 오히려 내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고 고대 마룡의 두 눈이 저 멀리 있는 어느 방향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다시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 너. 골치 아픈 녀석을 데리고 나왔군. ]
으음?
지금 말을 들어보면 아마 고대 마룡은 저 키메라를 내가 데리고 나온 것이라 여기고 있는 것 같기도 한데.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타란 제국성을 들어간 순간과.
키메라가 튀어나온 시점이 거의 일치했다.
이건 생각하기에 따라 충분히 할 수 있는 오해지.
그리고 지금의 말을 유추해봤을 때.
확실히 고대 마룡은 우리보다 키메라 녀석을 훨씬 더 신경 쓰는 중이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걸 다 제쳐두고 키메라에 대해 먼저 물어볼 리가 없다.
“그렇다고 같은 편은 아니지. 좀 전에 보지 않았나? 내가 키메라 녀석을 날려버리는걸.”
고대 마룡 역시 이 말에는 따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녀석도 아까 키메라를 그랜드 크로스로 날려버리는 걸 잘 봤으니까.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더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을 수도.
적의 적은.
아군이라고도 볼 수 있으려나?
그러니까 지금.
확실하게 선을 그어준 셈이었다.
우리와 키메라는 아군이 아닌.
적이라고.
다른 말로.
우리와 키메라는 아군이 될 확률이 제로에 수렴한다는 뜻이 된다.
적어도 우리가 키메라와 손을 잡고 고대 마룡을 칠 확률 자체도 제로가 된다는 뜻이었고.
그런데 여기서 과연 고대 마룡이 키메라와 손을 잡을 수 있나 하면…….
이건 또 절대 불가능이지.
애초에 키메라는.
고대 마룡을 자신이 흡수해야 하는 먹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그럼 남은 선택지는 딱 하나뿐이다.
우리와 고대 마룡이 서로 따로 놀다가 키메라에게 각개격파 당하던지.
아니면.
서로 손을 잡아서 키메라부터 잡아 죽이던지.
곧 고대 마룡 카브레시아를 빤히 쳐다보면서 말을 꺼냈다.
“일단 키메라부터 먼저 정리했으면 하는데. 카브레시아. 네 의견은 어때?”
과연 고대 마룡에게는 이 제안이 얼마나 매력적으로 들릴지는 나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고대 마룡이 키메라를 부담스럽게 느낀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그리고 당장 고대 마룡을 어떻게 하지 못하더라도.
여기서 키메라는 정리하는 게 맞다.
저 키메라가 살아있는 이상.
타란 제국은 아무것도 남지 않을 테니까.
내 제안에 잠시 고민을 하는 것 같던 고대 마룡이 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 조건이 있다. ]
“조건?”
[ 네가 가진 용신의 파편. 그걸 내어주면 네 제안을 고려해보지. ]
아니.
이 새끼가 미쳤나.
녀석이 용신의 파편을 가지는 순간.
더 이상 키메라는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 다음은 어마어마하게 강해진 고대 마룡을 상대해야 한다.
이건 미치지 않고서야…….
바로 재중이 형에게 연락했다.
<주호> 형. 문제가 생겼어요.
<불멸> 대화가 되긴 하는가 보네.
<주호> 네. 그렇게 됐어요. 그런데 이 녀석이 용신의 파편을 내어달라는데요?
<불멸> 머리에 총 맞았냐? 그걸 내어주게. 여우 한 마리 쫓아내자고 호랑이를 들일 수는 없잖아.
<주호> 그렇죠.
<불멸> 다른 걸 제안하라고 해.
<주호> 될까요?
<불멸> 당장 키메라를 저대로 놔두면 고대 마룡도 불편하긴 매한가지야. 과연 그 불편이 어느 정도이냐가 문제겠지.
<주호> 배짱을 튕겨보라는 건가요?
<불멸> 그렇지. 만약 녀석이 급하다고 판단했다면. 알아서 숙이고 들어올 거다.
재중이 형 말대로 고대 마룡의 목숨이 오락가락할 정도의 불편이라면…….
지금은 우리가 아니라 오히려 고대 마룡이 우리에게 빌어야 하는 상황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용신의 파편을 내어주는 건.
완전히 고대 마룡의 뜻대로 흘러가는 셈이라.
여기서 그런 호구 짓은 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다시 고대 마룡을 빤히 쳐다보고는 그대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다른 조건으로 해. 용신의 파편을 줄 순 없어.”
애초에 고대 마룡이 용신의 파편을 손에 넣는 순간.
우리와 손잡을 이유 같은 건 전혀 없다.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해버릴 테니까.
필요가 없다면.
당연히 남은 건 죽음밖에 없고.
[ 용신의 파편 말고는 원하는 게 없다. ]
하지만 고대 마룡의 태도는 확고했다.
“그럼 협상 결렬이군.”
그러자 고대 마룡의 눈빛이 붉은 색으로 진하게 물들었다.
[ 당장 너희들을 공격한다고 해도? ]
“여기서 우리한테 힘 뺄 여유가 있으면 해보시던가.”
네임드를 많이 상대해봐서 잘 안다.
지금 고대 마룡의 상태가 마지막 페이즈에 들어가 있다는 걸.
당연히 공격력 자체는 극강이겠지만.
녀석의 체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무엇보다.
지금 이 제물의 결계 내에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고대 마룡의 체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여기서 급한 건.
우리가 아니라.
저 고대 마룡이다.
“아.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다 죽으면. 너도 무조건 죽어.”
다른 건 몰라도 이건 확실하다.
키메라에게 우리가 죽는 순간.
아니지.
고대 마룡에게 죽어도 마찬가지다.
확신을 담아 고대 마룡에게 말했다.
“이 제물의 결계에서 죽어 나가면 전부 키메라에게 힘이 전달된다는 건 너도 잘 알 테니까. 과연 그 상태에서 혼자 남은 네가 얼마나 키메라를 상대로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제물의 결계 안에서의 키메라는.
무적이나 마찬가지다.
오벨리스크로 죽음을 자신의 힘으로 만드니까.
어쩌면.
고대 마룡이 굳이 내게 대답을 해 준 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수도 있었다.
당장 내 손을 잡지 않으면.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판단.
그걸 최대한 파고들어야 한다.
한 마디로.
지금부터는.
누가 더 배짱이 있나의 문제가 된다.
내 주저 없는 말들에 고대 마룡이 화가 난 듯 나를 노려보았다.
순간 혹시라도 고대 마룡 녀석이 공격해올까 싶어 검들에 손을 가져다 댔지만.
우려하는 그런 일을 일어나지 않았다.
[ 그럼. 내게 무엇을 해줄 수 있지? ]
확실하네.
현재 고대 마룡의 상태가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좋지 않았다.
만약 체력이 충분하다고 판단했다면 고대 마룡이 이런 식으로 나올 리가 없다.
다른 말로.
녀석도 키메라와의 일전을 장담하지 못하니까 한 발 물러난 셈이었다.
일단 살아있어야 후에 용신의 파편을 노리든 뭘 하든 할 테니까.
“네 녀석의 목숨을 여기서 살려주는 거라고 하면 어떨까.”
최악의 경우.
키메라가 작정하고 도망만 다니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 그 사이 고대 마룡은 체력이 더 많이 깎일 테고.
그만큼 키메라가 강해지게 된다.
거기다 남은 타란 제국군과 카샤스 대공군을 사냥하면서 더 체력을 올리면.
고대 마룡 입장에서는 정말 답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해도 죽는다.
아마 그 전에 우리도 죽겠지만.
“만약 키메라가 도망만 다니면 우린 다 죽어.”
내 말을 듣고 그 상황을 상상했는지 고대 마룡의 표정이 바로 굳어버렸다.
어떻게 머리를 굴려 봐도 죽는다는 선택지밖에 없을 것이다.
한참을 생각하던 고대 마룡이 결국 두 손을 들었다.
[ 흠. 그래서 어쩌자는 거냐. ]
“뭐. 간단해. 우리가 함정을 팔 거야. 아직 널 직접 노리기에는 키메라가 충분히 강하지 않거든.”
중간 대천사가 죽어버려 미완성 단계의 키메라.
아직도 부족하다고 느끼니 최상급 천사인 쉬에르를 먹어치웠을 테고.
그건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랜드 크로스로 신체 절반이 날아간 상황이라 더욱 더 힘을 갈구할 것이다.
때문에 타란 제국군과 카샤스 대공군을 잡고 있지 않나.
여기서 녀석에게 반드시 물 수밖에 없는 먹이를 던져주면…….
“넌 아는지 모르겠는데. 저 키메라 녀석. 대천사가 만든 거다.”
[ 대천사? ]
“그래. 그래서 저 키메라는 천사와 용족이 합쳐진 결과물이야. 당연히 그들을 흡수해서 힘을 키울 수 있고.”
잠시 기다렸다가 고대 마룡을 빤히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키메라 녀석의 최종 목표는 바로 널 먹어치우는 거다. 카브레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