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8화 내전의 끝 (6)
타란 제국 수도를 제물 삼아 만들어진 오벨리스크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지하로 내려가는 순간.
지하에서부터 밀려오는 음습한 한기가 몸을 얼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거기다 이런 기분을 느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재중이 형 역시도 무언가가 꺼림칙한 듯 살짝 인상을 쓰는 모습이 보였다.
느낌이 이상해 재중이 형에게 한 마디 하려는 그 때.
마왕 헤르게니아가 손을 뻗어 나와 재중이 형의 팔을 동시에 잡아끌었다.
그것도 우리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듯 꽉 쥐었는지 팔이 아프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왜?”
고개를 돌려 쳐다본 마왕 헤르게니아의 표정은.
그간 보던 여유 있는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아래쪽을 계속 주시하는 것까지도 그런 분위기를 잘 보여주었다.
그리고는 경고하듯 우리에게 말했다.
“너네 둘 다.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무장해.”
“……아래에 위험한 게 있는 거야?”
내 물음에 마왕 헤르게니아가 부정하지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지금껏 한 번도 표현하지 않았던 단어를 내뱉었다.
“엄청. 많이 위험.”
“그 정도냐.”
마왕 헤르게니아의 입에서 위험이라는 단어가 나올 정도면.
최소 저 지하 계단 아래에 있을 녀석이 마왕이나 대천사 등급쯤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기에 지하에 있을 녀석은 최상급 천사 둘밖에 없을 텐데…….
고작 그런 천사들 때문에 마왕 헤르게니아가 경고를 하진 않았을 터.
“천사들 말고 뭔가 다른 게 있어?”
“그래.”
그 순간 바로 집중해 감각을 끌어올리자 내 주변으로부터 모든 흐름들이 하나둘씩 정보가 되어 뇌리에 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하에서부터 밀려 올라오는 바람의 흐름과 계단을 타고 올라오는 진동으로 저 지하 아래의 세세한 움직임들까지 모두 파악되었다.
뭔가…….
이질적인 게 있어?
그간 봐왔던 천사들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의.
어떤 다른 존재가 지하에 존재했다.
움직임에서 느껴지는 진동과 무게감이라던지.
바람의 흐름으로 느껴지는 형체까지도.
이건 천사라기보다는…….
“대체 이건 뭐지? 사족 보행……?”
희안할 정도로 움직임이 사족 보행에 가까운 느낌이 들었다.
마치 일부러 보폭을 맞추지 않는 이상에야…….
내 중얼거림에 재중이 형이 의아한 눈빛으로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물었다.
“천사들 중에 네 발로 움직이는 녀석이 있나?”
그런 재중이 형의 물음에 마왕 헤르게니아가 살짝 미소 지으면서 답했다.
“그 녀석들이 바닥에 기어 다니는 거라면…… 보기는 좋겠네.”
재중이 형도 말이 안 된다는 걸 아는지 본인이 물어놓고도 그냥 웃어버렸다.
“설마.”
그리고는 바로 내게 물었다.
“그럼 아래에 있는 건 뭐지?”
“저도 모르겠어요. 일단은…… 직접 확인해보지 않는 이상에야.”
“역시 내려가 볼 수밖에 없나.”
마왕 헤르게니아가 경고할 정도면.
보통의 녀석은 아닐 것이다.
위험도도 상상을 초월할지도 모르고.
하지만 지금 이대로 지하로 내려가지 않는다면.
최상급 천사 에멘스에게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줄 뿐이었다.
“가죠.”
“어쩔 수 없지.”
그러자 마왕 헤르게니아가 나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하아. 굳이 여기서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어. 저 녀석들을 잡지 않는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잖아.”
“뭐 그렇긴 해.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먼저 침 발라놓은 상황에서 다른 녀석들이 끼어들어서 훼방을 놓는 건 못 참는 성격이라.”
내 말에 재중이 형이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무슨 짓을 하는지 확인 정도는 해봐야겠지.”
둘 다 지하로 내려가려고 하니 마왕 헤르게니아가 결국 두 손을 들었다.
“하아. 여차하면 튀어. 너희까지 보호하면서 싸울 자신은 없거든.”
마왕 헤르게니아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밑에 있는 녀석이 정말 괴물이라는 뜻이었다.
그것도 정체불명의.
곧 마왕의 플레이트와 대천사의 검. 르아 카르테까지 모두 꺼내서 착용했다.
정체고 뭐고 지금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패를 꺼내야 할 판이라.
죽고 나면 그런 게 다 의미 없는 일이라.
재중이 형도 고대 마룡의 창과 아크 드래곤 플레이트까지 다 착용하고는 말했다.
“가자.”
“네.”
긴장된 발길로 조금씩 지하를 내려가자 숨 막히는 음습한 기운들이 점점 몸을 죄어오는 것 같았다.
마왕 헤르게니아는 기분 나쁘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고.
“성력? 아니…… 몇 가지가 더 섞여 있어.”
아쉽게도 우린 그런 기운까지 분류해서 느낄 정도는 아니라서.
마왕 헤르게니아가 주는 정보가 더 믿을 만 했다.
“여러 기운을 쓴다는 거야?”
“너처럼 여러 기운을 바꿔 쓴다는 말이지?”
“아니.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달라.”
다르다라…….
대체 아래에서 뭘 하고 있길래…….
그렇게 모든 계단을 내려갔을 때.
사방이 확 트이면서 시야에 넓은 공간이 들어왔다.
그리고 우리가 지하 공동으로 내려온 순간.
최상급 천사 쉬에르가 정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곧 꽤 놀란 눈빛으로 우릴 바라보면서 말했다.
“더미들이 벌써 다 당한 건가?”
“더미라…… 고작 그런 시체들로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냐?”
내 말에 슬쩍 우리 뒤편을 바라보았다.
“카샤스 대공이 없군. 어디 있지?”
“네가 그걸 알아서 뭐하게?”
아마 쉬에르 녀석의 생각은 카샤스 대공이 그 더미들을 전부 없앴다고 판단한 듯 했다.
그러니 바로 카샤스 대공부터 찾는 거겠지.
지금 우리 팀 중에서는 녀석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카샤스 대공이기도 했고.
“흠. 더미들과 싸우다 부상이라도 당한 건가. 남은 건 인간 둘에…… 정체 모를 천사 녀석 하나라.”
마왕 헤르게니아는 지금 천사의 상태로 위장하고 있으니 아마 자신과 동급 수준의 천사로 보일 것이다.
재중이 형이야 그냥 인간으로 보일 테고.
그때 쉬에르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내게 와서 닿았다.
그리고는 화들짝 놀란 시선으로 내가 들고 있는 무기를 쳐다보았다.
믿지 못하겠다는 듯 두 눈이 크게 흔들리면서.
“어……? 이게 무슨…….”
그런 쉬에르 녀석을 보면서 여유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왜? 이게 뭔지 몰라?”
“대천사의 검……! 그걸 네가 어떻게?”
아무래도 이 마왕의 플레이트는 한눈에 못 알아보는 모양이네.
그냥 내 생각이지만.
어쩌면…….
이 성마대전 시대에는 마왕 올펠이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이 들었다.
아님.
저 녀석의 눈썰미가 딱 그 정도라던가.
르아 카르테야 이 시대에는 그렇게 알려지지 않았을 테니.
모르는 게 당연했고.
반면.
대천사의 검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아무리 막눈이라고 해도 대천사의 검을 못 알아본다는 건 천사의 정체성을 의심해봐야겠지.
“왜? 대천사가 대천사의 검을 들고 있는 게 그렇게 이상한가?”
여기선 최대한 당당한 자세로.
아마 내가 대천사라면 이 정도 당당함은 기본으로 탑재했을 테니.
그것도 자신보다 아래급인 최상급 천사를 상대로는 더 그럴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우리가 파악한 대천사들의 동선은 이곳과 겹치지 않아.”
저 말을 들은 재중이 형이 바로 내게 말했다.
<불멸> 이것들 봐라? 아예 대천사의 동선까지 다 파악하고 있다는 거잖아.
<주호> 대천사가 없다는 걸 믿고 대놓고 작업했다는 거겠죠?
<불멸> 그렇지. 그리고 대천사들의 동선을 알 정도면…… 녀석들보다 훨씬 윗선이 개입됐다고 봐야겠지. 이를테면…… 또 다른 대천사라던가.
확실히 재중이 형 말대로 대천사들의 동선을 알아내려면 그만한 위치에 있는 녀석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정보로 대천사가 없다고 확신하는 걸 테고.
하지만 여기서 녀석이 생각하지 못한 게 딱 하나 있었다.
절대 이곳에 있을 리가 없지만.
있을 수도 있는.
그 동선과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존재.
바로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차면서 말했다.
“하. 대체 어디까지 정보가 새고 있는 건지…… 돌아가면 중앙 천사군을 전부 뒤집어야 하나?”
내 말 속에 중앙이라는 단어를 특히 강조해서 언급하는 순간.
쉬에르 녀석의 두 눈이 더 어떻게 할 수 없을 만큼 커지는 게 보였다.
그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설마…… 중앙 천사군…… 감찰원……?”
당연하겠지만.
슬쩍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 했다.
이대로 녀석이 내 정체를 착각해주는 게.
여기서는 베스트일 테니까.
“하지만 어떻게 감찰원이…… 정보가 새지 않도록 그렇게 주의했는데…….”
곧 쉬에르 녀석이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내게 외쳤다.
“어디서 감히 가짜 대천사의 검을 들고 와서 나를 속이려 들어?”
아무래도 쉬에르 녀석은 내가 들고 있는 대천사의 검이 가짜라고 판단한 듯 했다.
자신의 정보로는 이곳에 대천사가.
그것도 감찰원 소속 대천사가 온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일 테니까.
슬쩍 재중이 형을 보자 재중이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써도 된다는 거겠지.
대천사는 아니지만.
대천사로 보일 수는 있는.
곧장 대천사의 검에 있는 스킬을 발동시켰다.
【 대천사의 가호! 】
그러자 내 등 뒤로 환한 빛의 날개들이 활짝 펼쳐지면서 어둑한 광장 전체를 눈부시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아주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쉬에르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내게 가짜라 했나?”
순간 쉬에르의 낯빛이 새까맣게 변하는 게 보였다.
거기다 두 손 역시 덜덜 떨리고 있었다.
저건 당황과 두려움이 섞인 딱 그런 표정이랄까.
“대…… 천사……!”
지금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난 것조차 모를 정도로 당황한 모양이었다.
“고작 너 따위에게 감찰원 소속인 내가 정체를 밝혀야 하는 건가?”
“으윽……!”
마왕 헤르게니아의 말에 따르면 감찰원 자체가 천사군 내에서는 최강의 권위를 자랑하는 기관이라고 했다.
그렇다는 말은.
내 정체를 알게 되는 순간.
보통의 때라면 저 쉬에르 녀석의 인생은 끝났다고 봐야 하겠지.
감찰원이 아무나 쑤시고 다니진 않을 테니까.
쉬에르도 자신이 해놓은 짓들을 잘 알기에 그 두려움은 배가 될 것이다.
제물의 결계부터 시작해 지금의 상황에 오기까지.
아니.
그 이전의 왕국에서부터 같은 일을 했을 테니.
곧 정신이 나간 듯한 표정의 쉬에르가 이를 악물면서 누군가를 욕했다.
“마엘리타 이년이……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어.”
지금 쉬에르가 마엘리타를 욕하는 이유는.
자신 이전에 마엘리타가 지상에서 나와 접촉한 걸 봤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분명히 내가 대천사라는 사실을 알았을 텐데 자신들에게는 말하지 않았으니까.
이것만 봐도 확실히 마엘리타가 저 녀석들과는 뜻이 다르다는 걸 잘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찔러 볼까?
슬쩍 마왕 헤르게니아를 보면서 말했다.
“부관. 이럴 때는 어떻게 하는 게 맞나?”
그러자 마왕 헤르게니아가 알겠다는 듯 손발을 맞춰주었다.
“보통은 즉결 처분이지만. 한 번 기회를 주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기회라…….”
우리 둘의 대화를 들은 쉬에르가 이를 악물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런 쉬에르에게 먼저 말을 꺼냈다.
“안내해라. 안에 뭐가 있는지. 확인해야겠다.”
“그걸 어떻게…….”
마치 들키면 안 되는 걸 들켰다는 당황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자 마왕 헤르게니아가 앞으로 나섰다.
“봐주는 건 여기까지다. 그 목이 앞으로 계속 붙어 있으려면 안내해.”
“큭.”
그러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쉬에르가 우리를 데리고 공동 안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점점 기분 나쁜 기운들이 우리를 감싸는 기분이 들었다.
마왕 헤르게니아가 말한 게 아마도…….
얼마나 이동했을까.
가장 구석진 제단 같은 장소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시뻘건 빛을 띈 거대한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었다.
그 주변으로 수많은 마법진들로 감싸져 있었고.
정말 크네.
전에 챙겼던 오벨리스크는 지금의 것과 비교하면 오벨리스크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도착했…….”
녀석이 돌아보는 그 순간.
갑자기 뭔가가 허공에서 튀어나오더니 순식간에 쉬에르의 몸을 물어뜯었다.
우드득!!
“크아악!”
콰드득!!
뼈째 갈리는 소리와 함께 쉬에르가 거친 비명을 질렀고.
곧 쉬에르를 통째로 물어뜯는 거대한 것의 정체를 마왕 헤르게니아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키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