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7화 제물의 결계 (16)
처음에 마왕 헤르게니아를 카샤스 대공군에 남겨두려 했던 이유가 바로.
타 왕국군들 사이로 천사들이 섞여서 들어왔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마왕 헤르게니아의 말에 따르면.
천사들이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고 활동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타란 제국은 천사들과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으니까.
천사 녀석들이 타란 제국에서 노리는 게 있다면 충분히 시도할만한 일일 것이다.
그런 천사들을 찾아 죽일까 물어보는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바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니. 아직은 죽이면 안 돼.”
“아직은?”
“그래.”
내 대답에 묘한 늬앙스가 있다는 걸 눈치챈 마왕 헤르게니아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럼 나중에는 죽여도 된다는 거네?”
“뭐…… 생각대로 일이 잘 진행된다면.”
“아니면?”
솔직히 마왕 헤르게니아가 천사를 죽이는 것에 대해서 내게 허락을 구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마왕 정도라면 내키는 대로 천사들을 없애버려도 되는 일이라.
이 정도까지 물어봤다면.
나 역시도 원하는 대답은 해주어야겠지.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미소 지으면서 대답해주었다.
“그땐 다 죽여 버려도 돼.”
“약속했다?”
바로 고개를 끄덕이자 마왕 헤르게니아가 흥겨운 콧노래를 부르면서 좋아하는 모습을 보였다.
애초에 마왕 헤르게니아를 묶어두었던 조건 중에 하나도.
천사들을 죽이는 데 있었으니.
이 정도는 들어주어야 한다.
그렇다고 아무 때나 막 나서게 할 순 없는 노릇이라.
“지금은 이쪽 일부터 먼저 처리하자.”
“제물의 결계 말이지?”
“어. 당장 급한 건 이쪽이니까.”
왕국에 섞여 들어온 천사들이 있다고는 해도.
저들이 바로 뭔가 문제를 일으킬 확률은 적어 보였다.
생각해보면 이곳에 저들을 끌어들인 건.
오히려 우리라고 보면 되니까.
만약 카샤스 대공군을 타란 제국 수도로 불러들이지 않았다면.
지금 저들이 이곳에 있을 이유도 없었다.
다르게 생각하면 저들이 원해서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는 거다.
또 다른 천사인 최상급 천사 마엘리타처럼 목적을 가지고 대놓고 움직였다면 벌써 다른 일을 벌이고 있었을 테니까.
바로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물어보았다.
“천사들이 이 제물의 결계를 바로 알아볼까?”
그러면서 타란 제국 수도 전체에 걸려 있는 제물의 결계를 가리켰다.
“아마 조금만 등급이 높으면 알아 볼 걸?”
“금지된 결계인데?”
“쟤들이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렇게 헤르마늄의 기운이 넘치는데 모를 수 없어.”
천사들 사이에서도 다들 쉬쉬하는 결계라면 실제로 이 결계를 알아볼 천사가 많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내 생각과는 다른 모양이었다.
“그렇다 이거지…… 그럼 곧장 윗선에 보고하러 가겠네.”
“아마도?”
금지된 제물의 결계가.
타란 제국에.
그것도 이렇게 대규모로 펼쳐져 있다는 걸 알고도 보고하지 않는다면.
무조건 마엘리타와 같은 편이라고 봐야 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굳이 보고할 이유가 없으니까.
거의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그와 반대라면?
마엘리타와 다른 진영의 천사들이 이걸 봤을 경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반드시 보고 해야 하는 일이 될 테니.
곧장 카샤스 대공을 불렀다.
“무슨 일이 또 있나?”
“용기사들 좀 풀어서 이 지역을 급하게 이탈하는 녀석들이 있는지 확인 좀 가능할까? 그것도 최고 속도로 빠져나가는 녀석들 말이야.”
만약 정말 다른 상위 천사들에게 보고를 하러 가는 거라면.
절대 설렁설렁 걸어서 가진 않을 것이다.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빨리 날아가겠지.
“음. 알겠다. 공중으로 용기사들을 보내놓으면 확인 가능하겠군.”
“지금 바로.”
내 말에 카샤스 대공이 그대로 명령을 내려 용기사들을 사방으로 보냈다.
천사들이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하늘을 날아다니는 용기사만은 못 하다.
그리고 시야 역시 이쪽이 월등하기도 하고.
더군다나 급하게 진영을 이탈하다보면 분명히 눈에 띄게 된다.
유저들이나 왕국군들은 그렇게 급하게 빠져나갈 이유가 없기도 하고.
그럼 타란 제국 수도서 급하게 외곽으로 빠지는 건.
무조건 천사 중에 하나라고 봐야 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뭔가 연락을 받았는지 카샤스 대공이 내게 다가와서 말해주었다.
“네 말대로 북쪽을 향해 전속력으로 빠져나가는 무리가 있었다고 하는군.”
그리고는 카샤스 대공이 눈치챘다는 듯 내게 물었다.
“그 녀석들이 천사들인가?”
내게 미리 들어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대략적으로 알고 있던 카샤스 대공 역시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아마 높은 확률로.”
“흐음. 쥐새끼들이 꽤 많이 들어온 모양이군.”
카샤스 대공 입장에서는 충분히 쥐새끼라고 할 수 있었다.
어찌 되었건 카샤스 대공군에 몰래 들어온 건 맞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천사군 쪽에서 정식으로 접촉해 올지도 몰라.”
“제물의 결계 때문이겠군.”
그동안은 비공식적으로 천사들이 뒤에서 움직였지만.
제물의 결계가 발견된 이상.
천사군들 역시 개입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 제물의 결계 자체가 그들에게는 금기이기도 하고.
“딱 끼어들기 좋은 조건이잖아.”
내전 상태의 타란 제국.
거기에 금지된 제물의 결계.
천사들이 대놓고 범인을 찾아보겠다고 나서면.
무작정 막을 수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이 조사하지 못하게 막으면…….”
“그걸 빌미로 타란 제국을 압박할 걸? 이를테면…….”
“오히려 우리가 제물의 결계를 썼다고 몰아붙일 수도 있겠군.”
“잘 아네.”
천사들이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건 카샤스 대공이 타란 제국을 접수했다는 가정하에 일어날 만한 일이었다.
만약 그와 반대로.
제물의 결계와 오벨리스크가 타란 제국 황제의 의도대로 완성된다면…….
“어차피 타란 제국 황제가 고대 마룡의 힘을 전부 흡수해버리면 다 의미 없는 일일거야.”
그때는 카샤스 대공이 굳이 천사들을 상대할 필요가 없어진다.
천사군들의 목표는 지금의 타란 제국 황제가 될 테니까.
그것도 마신 급에 도달한.
진정한 괴물이 되어 있는 황제를 상대로 말이지.
“천사들의 제 1 목표가 되겠군.”
“어쩌면 손을 잡을 수도 있겠지.”
마왕들 사이에서 마신 급이라고 한다면.
반대로 해석하면 천사들 쪽에서는 신급이라고 봐야 한다.
과연 천사들이 그런 타란 제국 황제와 반목하려고 할까?
고개를 돌려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물어보았다.
“어때? 네 생각은? 천사들이 정말 그렇게 할까?”
“충분히 가능성 있어. 천사들은 목적을 위해서는 물불을 안 가리니까. 마왕군을 상대하려면 타란 제국 황제의 막강한 힘을 반드시 이용하고자 할 거야.”
“금지된 제물의 결계까지 썼음에도 서로 싸울 일이 없을 수도 있다는 거네?”
“맞아. 천사 새끼들은 그 정도는 바로 눈 감아 버릴 거야.”
천사들은 필요하면 제물의 결계를 빌미로 개입하지만.
그와 반대로 힘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제물의 결계를 썼던 사실을 묻을 수도 있단 뜻이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카샤스 대공에게 말했다.
“들었어? 이렇게 될 거라는데?”
“흠. 그렇다면 우린 무조건 이겨야 하겠군.”
여기서 밀리는 순간.
마신급의 힘을 얻은 타란 제국 황제는 반드시 카샤스 대공을 죽이려고 들 것이다.
그 녀석에게 있어서 가장 두렵고 걸리는 존재가 카샤스 대공이니까.
그리고 그런 타란 제국 황제와 천사군이 손을 잡는다면.
“그래. 거기다 지는 순간 천사군에게까지 쫒길 수도 있어.”
한 배를 탄 타란 제국 황제와 천사군에게 동시에 쫒기는 상황이 올 수도 있었다.
정말 천사군이 협력하기로 하면 말이지.
“개판이군.”
“뭐 그렇지.”
카샤스 대공 입장에서는 절대로 질 수 없는 싸움이 된 셈이었다.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면…….
슬쩍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말했다.
“나중에 자리 하나 더 만들어줄 수 있어?”
“헤에…… 정말 가려고?”
“우리도 보험은 들어놔야지. 그리고 몇 명만 추가로 더 데리고 가자.”
성마대전 역대 최강의 영웅 중에 하나인 카샤스 대공이.
마왕군에 들어간다?
이건 뭐.
어느 쪽이 이득인지 손해인지는 그때 가봐야 알 일이긴 한데…….
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때는 정말 천사들 날개가 다 찢겨져 날아가는 날이 될 거라고.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재중이 형이 이 상황이 즐겁다는 듯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되면 정말 재밌긴 하겠네.”
“역시 그렇죠?”
“아아. 성마대전이 개판이 되긴 할 텐데…… 정말 재밌을 거야. 유저들은 상상도 못한 일이 일어날 테니.”
이건 성마대전 역사의 가장 큰 틀 자체를 바꿔 버리는 일이라.
흑화가 된 카샤스 대공을 보는 것도 나름 재미가 있을 지도.
물론 거기서 끝나지도 않을 거다.
그리고 마왕군에는 고대 마룡 카브레시아를 대신할만한.
그런 존재도 있으니까.
조합으로만 따지면.
이쪽도 절대 나쁘지 않았다.
나름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카샤스 대공에게 말했다.
“플랜 B는 정 안 되면 그때 가서 해보고. 일단 앞에 일에 집중해볼까?”
당장은 제물의 결계를 늦추거나 없애는 게 최우선이었다.
그리고 그러려면…….
슬쩍 고개를 돌려서 카샤스 대공군에 남은 타 왕국군들을 쳐다보다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럼 우리도 한 번 던져 봐야지.”
“응? 그게 무슨 소리지?”
“쟤들. 그 마엘리타와 같은 편인지 아닌지 정도는 알아야 할 거 아냐.”
그러자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카샤스 대공 역시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천사들끼리 붙여볼 작정인가?”
“그래. 뭐 같은 편이면. 서로 붙어먹을 테고. 그게 아니면 꽤 재밌는 일이 일어나겠지.”
남은 이 왕국들이 원래의 천사들의 진영인지.
마엘리타에 붙은 진영인지 확실히 구분하는 것도 중요했다.
막상 들어갔을 때.
뒤통수치면 곤란하니까.
내 말에 카샤스 대공이 알겠다는 듯 말했다.
“왕국군을 먼저 밀어 넣으면 되는 건가?”
“역시 말이 잘 통해서 좋아.”
적어도 피아식별은 되어 있어야.
녀석들의 뒤를 노릴 수 있었다.
“바로 진행하지.”
그리고는 카샤스 대공이 휘하의 부하들에게 전달해서 왕국군을 제물의 결계에 먼저 진입하게 만들었다.
과연 여기서 카샤스 대공의 명령을 따를 것인지.
아님 빠질 건지.
그것도 궁금해지네.
그러자 곧 왕국군들 사이에서 반발이 일어났다.
“아니. 왜 우리가 먼저 들어가야 합니까!”
“당연히 타란 제국군이 앞장 서야 하는 것 아닌가?”
“이것 봐. 우리는 도와주러 온 거지. 방패막이 하러 온 게 아니라고.”
“책임자 어딨어? 나오라고 해!”
어쩌면 저게 당연한 반응이려나.
멀쩡한 타란 제국군을 놔두고 자신들을 먼저 제물의 결계로 들여보내려고 하니 반발이 일어날 수밖에.
그런데 이건 제물의 결계가 어떤 건지 확실히 알고 있지 않다면.
이렇게까지 강하게 거부할 수는 없었다.
곧장 앞으로 나서서 왕국군의 대표들에게 다가갔다.
확실히 유저들은 아니네.
“여기 남은 건. 그대들의 결정 아니었나? 우리가 남아달라고 애원한 건 아닐 텐데?”
“누구…….”
“난 로가슈 왕국의 대표이자 지금은 카샤스 대공군의 부지휘관이다.”
“흠…… 그렇다고 해도 이런 결정은…….”
어차피 부지휘관 직위는 카샤스 대공이 둘러대면 그만이라.
그때 옆에 따라 서 있던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물어보았다.
“어때? 알겠어?”
그러자 마왕 헤르게니아의 입가가 슬쩍 올라가면서 미소 지었다.
“맞아. 전부.”
“그것참. 재밌게 돌아가네.”
이것들 봐라.
지금 왕국 대표로 나온 녀석들이 전부 다 천사다 이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