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4화 제물의 결계 (13)
지금 타란 제국 수도에는 수도 전체를 감싸는 거대한 결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 규모는 우리가 예전에 베르가 공작가에서 봤었던 그 결계와는 아예 차원이 달랐다.
단순히 공작가 하나를 감싸는 것과.
수도를 전부 감싸는 건 비교조차 할 수 없으니까.
당연하겠지만.
그 결계의 범위 역시 전자가 압도적으로 넓었다.
그렇다는 말은.
결계 안에 들어가 있을 사람들의 숫자도 압도적으로 많다는 뜻도 된다.
비록 그 베르가 공작가와 달리 이쪽은 시민 하나하나가 기사단보다 너무 약하다는 점이 있지만.
그 시민들의 숫자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아마도 최종적으로 얻을 수 있는 마력의 총량에서 비교도 되지 않을 테니.
텔레포트를 타고 타란 제국 수도 외곽으로 날아온 우리 팀과 마왕 헤르게니아의 시선이 모두 제물의 결계로 향했다.
처음에는 반투명한 결계 외부가.
지금은 그 형태가 아예 붉은 빛으로 물든 것처럼 보였다.
나르샤 누나가 전체가 붉은색으로 일렁거리는 그 제물의 결계를 보더니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사람들을 얼마나 흡수하고 있으면 결계가 저렇게 빨갛게 변할 수 있는 거야?”
그런 나르샤 누나의 질문에 다들 입을 닫고 답은 하지 않았지만.
답은 너무 확실했다.
타란 제국 수도에 있는 시민들 전체.
지금 그들 전부가 제물의 결계에 흡수되고 있는 것이다.
제물의 결계 안에서 날뛰고 있는.
고대 마룡 카브레시아에게 죽어서 말이지.
비전투인 인 시민들은.
절대 고대 마룡에게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검은 용암이 지상을 한 번 훑고 지나갈 때마다.
그만큼의 시민들이 녹아 아예 증발되거나 신체 일부가 타들어 가면서 고통스럽게 울부짖었다.
이 외곽까지도 그 울부짖음이 들릴 만큼.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람들이 죽어가며.
지옥도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쁜소녀가 눈을 질끈 감으면서 슬픈 듯이 말을 흘렸다.
“너무해…….”
막내별 역시 마찬가지 표정으로 결계 너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무리 NPC라지만. 저건 심하잖아요.”
아마 그녀들도 이런 광경을 보는 건 처음일 것이다.
NPC들이 네임드에게 죽는 일이야.
이 세계에서는 흔한 일이지만.
아예 그들이 뭔가의 목적에 의해 제물로 바쳐지고 있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니까.
그것도 이런 대량 학살은 더 찾아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전사 형도 사람들이 죽어 나가 흡수되는 제물을 결계를 직접 지켜보더니 짧게 한마디 했다.
“진짜 어질어질하네. 천사라는 것들이 다 저런 건가?”
이 제물의 결계를 만들어낸 게.
천사라는 건 이미 들어서 다들 잘 알고 있었다.
그러자 마왕 헤르게니아가 전사 형의 말을 옹호하면서 말했다.
“맞아. 아주 질 나쁜 새끼들이지.”
음.
마왕에게 질 나쁘다고 욕먹는 천사라…….
이 정도면 할 말이 없을 정도다.
마왕 헤르게니아가 이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다시 말을 이었다.
“천사들이 겉으로는 사람들을 위하는 척 하지만. 사실 마왕들보다 더한 놈들이야. 틈만 나면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이용해먹고 은폐해버리거든.”
확실히 지금 저 제물의 결계 한정해서는.
마왕 헤르게니아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고 생각했다.
강한 힘을 얻는 방법에 착한 방법, 나쁜 방법을 따지는 건 좀 무리가 있지만.
적어도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타란 제국 황제라는 자리는.
자신들의 제국민들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는데.
지금 그 의무를 완전히 저버린 셈이었다.
적들에게서 그들을 지켜줘도 모자랄 판에.
오히려 그들을 제물로 바쳐서 힘을 얻는다라…….
그것도 천사들의 손을 빌려서 말이지.
재중이 형 역시 제물의 결계를 빤히 쳐다보면서 흘리듯 말했다.
<불멸> 왜 카샤스 대공이 이전 성마대전에서 저 황제 녀석을 미리 죽여 버렸는지 알 것 같은 대목이네.
<주호> 네. 만약 카샤스 대공이 황제를 죽이지 않았다면 똑같은 방법으로 힘을 얻으려 했을 수도 있어요.
성마대전에서 카샤스 대공은 본인의 힘으로 끝까지 타란 제국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지금의 타란 제국 황제는 전혀 아니었다.
자신들의 제국민들을 전부 죽여 제물로 만들더라도.
본인만 강해지면 그만인.
딱 그 정도의 녀석인 것이다.
자신들을 지키라고 칼을 쥐어 준 녀석이.
도리어 본인들의 목을 갈라버리고 있으니.
얼마나 어이가 없을까 싶기도 하고.
“이래서 자질이 안 되는 녀석들에게 중요한 자리를 맡기면 안 되는 거야.”
“그러게요. 카샤스 대공과는 그릇이 차이가 너무 다르네요.”
“아아…… 이쪽은 다 깨진 그릇이지.”
그때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내게 말을 걸었다.
“뭔가 할 생각이라면. 너무 늦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무슨 말이지?”
그러자 마왕 헤르게니아가 살짝 눈을 찌푸리면서 말을 이었다.
“이미 저기 모인 마력이 네가 전에 얻은 오벨리스크의 마력을 한참이나 넘어섰어.”
“그 정도로 많아?”
“내가 처음에 오자마자 뭐라고 했어?”
그런 마왕 헤르게니아의 물음에 생각을 떠올리자 떠오르는 말이 하나 있었다.
“어디 마왕이라도 떨어졌다고 했던가?”
“맞아. 그리고 지금 모여드는 마력의 양도 엄청나고. 이대로라면 정말 마왕을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거야.”
“흐음…… 티끌 모아 태산인가…….”
그래도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거라 생각했는데.
솔직히 타란 제국 수도의 인구가 많긴 해도.
이렇게나 빠르게 그만큼의 강한 마력이 모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마왕 헤르게니아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보다 훨씬 빠르게 마력이 모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괜히 고대 마룡을 저기다가 집어넣은 게 아니려나. 제국민들을 빠르게 죽이기 위해서는…….”
대규모로 학살을 하려면.
고대 마룡 카브레시아만한 녀석이 또 없었다.
검은 용암을 들이부으면 어지간한 곳은 초토화되니까.
그것도 그 범위가 엄청 넓기도 하고.
그런데 마왕 헤르게니아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무리 먼지를 잔뜩 모은다고 해도. 그것만으로 강해질 수 있으면 이미 다 마왕이고 대천사게?”
“그래?”
그러고 보니 이전에도 마왕 헤르게니아가 말해준 적이 있었다.
무작정 모으기만 한다고 강해질 수 없다고 했던가.
“양이 저 정도로 많으면 다르지 않나?”
“맞아. 일정 수준까지는 강해질 수 있어. 다만 그것만으로 끝은 아니야.”
그러더니 마왕 헤르게니아가 곧장 앞으로 튀어 나가 타란 제국 수도를 감싸고 있는 제물의 결계의 경계 부근까지 다가갔다.
곧 그녀가 한 손을 뻗어서 제물의 결계에 가져다 대자 이전에 그랬듯 뭔가의 파장이 결계를 통해 쭉 뻗어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재중이 형을 보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기다려봐. 뭔가 알아낼 수 있나.”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마왕 헤르게니아가 제물의 결계에서 손을 떼더니 알겠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건 마치 남들을 풀지 못하는 어려운 수학 문제를 풀어내서 혼자 정답을 맞췄을 때의 딱 그런 표정이려나.
“어때?”
“음. 반은 예상대로. 다른 반은 예상 밖이네.”
의아한 말을 하더니 곧 마왕 헤르게니아가 설명을 풀어내었다.
“일단은 이 제물의 결계가 전에 베르가 공작가에서 봤던 결계와 같은 방식을 쓰고 있어.”
“같은 녀석이 만들었다는 거지?”
“맞아.”
그러더니 품에서 물건을 하나 꺼내 보였다.
“그건…… 상징 아냐?”
“이걸 여기서도 쓸 수 있어.”
마왕 헤르게니아의 말을 바로 이해하고는 곧장 내가 가지고 있던 상징들을 우리 팀에게 나눠주었다.
전사 형이 의아한 듯 물어보았다.
“이게 뭔데?”
“이 제물의 결계에서 나갈 수 있게 해주는 상징이에요.”
“호오. 그래?”
아무래도 같은 천사 녀석이 만들어서 그런지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도 같은 듯 했고.
곧 마왕 헤르게니아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 결계는 다른 기능도 추가되어 있어.”
“어떤 건데?”
아마도 아까 예상 밖이라고 했던 거려나?
“수도에 걸려 있는 결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힘을 빼앗겨.”
“뭐?”
“강제 약탈의 주문. 그게 제물의 결계 전체에 걸려 있거든.”
그 말을 듣는 순간 모두의 시선이 저 멀리 결계 안에서 날뛰고 있는 고대 마룡 카브레시아에게 향했다.
그리고 경악한 눈빛으로 마왕 헤르게니아를 돌아보았다.
“설마…….”
“맞아. 지금 저 고대 마룡도 힘을 조금씩 뺏기고 있을 거야. 오벨리스크의 힘을 매개로 해서 펼쳐진 이 결계 때문에.”
처음에는 고대 마룡을 제국민들을 빠르게 죽이기 위해 제물의 결계로 끌어들였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마왕 헤르게니아가 하는 말은 전혀 달랐다.
그러니까 이 제물의 결계는.
처음부터 고대 마룡 카브레시아의 힘을 빼앗기 위해 준비된.
그런 결계였다.
“그렇다는 말은…… 타란 제국민의 죽음은 페이크인가?”
“그래. 그들은 오벨리스크를 작동시키기 위해 쓰일 원동력일 뿐. 고대 마룡 정도의 존재를 한 곳에 묶어두려면 그만한 대가가 필요하니까.”
“휴. 제국민들을 그런 것에 쓰려고…….”
“아까 말했지? 티끌을 많이 모아 봐야 상위 단계로 올라서기 힘들다고. 하지만 발판이 되는 힘으로는 쓸 수 있어. 일단 마력이 넘치니까.”
“흐음. 그래서 타란 제국 황제가 선택한 게…….”
“고대 마룡의 더 강한 힘이라는 거야. 제대로 뺏어올 수만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상위의 존재가 될 가능성이 있거든.”
잠시 뭔가 생각하던 마왕 헤르게니아가 빤히 나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그리고 원래 타란 제국 황제도 제법 강하지 않았어? 제국의 황제면. 너네 영웅들 중에서는 최상위일 텐데?”
“아마도. 꽤 강하겠지.”
무려 제국의 황제였다.
최강의 영웅인 카샤스 대공과 비교해서 약하다는 것뿐이지.
황제라는 존재 자체가 마왕과도 일전을 걸어볼 만한 전력이긴 했다.
“그럼. 고대 마룡의 힘을 얻으면…… 잘하면 마신 급으로도 올라설 수도 있겠네.”
“설마…….”
마왕 헤르게니아의 말에 따르면.
단순히 타란 제국의 제국민들의 힘을 흡수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이걸 과연 타란 제국 황제가 몰랐을까?
아니다.
분명히 알고 있었을 터.
마왕 헤르게니아가 알고 있는 걸 직접 결계를 펼친 그 최상급 천사들이 모를 리도 없을 테고.
결계로 얻을 수 있는 힘의 한계가 명확하다는 걸 알자마자.
고대 마룡을 끌어들이는 쪽으로 계획을 바꿨을 것이다.
“베르가 공작가에서 쓴 오벨리스크는?”
“아마 실험이었을 거야. 지금의 이 결계를 쓰기 위한 예행연습쯤 되려나.”
그리고는 마왕 헤르게니아가 시선을 돌려 타란 제국성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저 제국성에 네가 가진 오벨리스크보다 몇 배는 큰 녀석이 있어.”
“그걸로 고대 마룡의 힘을 얻어내겠다 이거네.”
그때 날뛰던 고대 마룡 카브레시아도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 쪽으로 검은 용암을 쏘아대는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이미 붉어질 대로 붉어진 제물의 결계가 그 검은 용암을 그대로 상쇄시키며 중간에 소멸시켜버렸다.
“하…… 정말 티끌 모아 태산인가.”
설마 저 검은 용암을 막아낼 줄은 몰랐는데.
그만큼 지금 결계에 모인 마력이 엄청난 수준이라는 뜻이었다.
그 모습을 쭉 지켜본 마왕 헤르게니아가 결정적인 말을 해주었다.
“이미 꽤 약해졌네. 만약 저대로 고대 마룡이 약해진다면. 황제가 직접 잡을 수도 있을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