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3화 제물의 결계 (12)
애초에 타란 제국 수도로 고대 마룡을 유인한다는 일 자체가 엄청난 피해를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타란 제국군 기사단이 일반적으로 쓰는 용의 기동력으로는 고대 마룡을 떨쳐내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니까.
그래서 그들이 선택한 건.
중간에 다수의 용들이 추격당해 죽더라도 개의치 않고 계속 새로운 용을 먹이로 던져주는 일이었다.
부족한 기동력을 숫자로 때우는 셈이라 해야 하나?
그 때문에 고대 마룡 카브레시아가 타란 제국 수도로 유인되는 동안 수도 없이 많은 용들이 추락하거나 죽어 나갔다.
처음에는 솔직히 이해가 안 됐다.
고대 마룡을 타란 제국 수도에서 멀리 떨어뜨리기 위해 유인하는 일이라면 그나마 이해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정확히 그와 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있었으니까.
이건.
타란 제국군에서 뭔가 노리는 게 있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캬아아악!!
타란 제국 수도 상공에 도달한 고대 마룡 카브레시아가 뭔가가 이상한 듯 계속 괴성을 지르며 지상으로 내려앉지 않고 공중을 계속 맴돌고 있었다.
단번에 타란 제국 수도를 엎어버릴 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습을 지켜본 재중이 형이 대략 알겠다는 듯 말했다.
“그동안 자기를 막아오던 수도의 방어막이 없으니까 오히려 망설이는 거려나?”
재중이 형 말대로.
지금 타란 제국 수도에는 항상 고대 마룡을 막아오던 그 방어 시스템이 전혀 작동하지 않고 있었다.
만약 방어막의 원동력인 베르탈륨 광석이 부족하다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장면이지만.
사실 우리가 팔아먹은 베르탈륨 광석의 양을 고려해볼 때.
이미 쓰고도 남을 충분한 양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방어막을 전혀 쓰지 않는다?
이건 그동안 굳게 잠겨 있던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고대 마룡을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까지 들게 만들었다.
정말 수도를 지킬 생각이었다면.
이런 식으로는 절대 하지 않는다.
“찝찝하다 이거네요.”
“아마도? 그게 아니라면 벌써 공격했을 텐데 말이지.”
거기다 그동안 자신을 접근하지 못하게 벌떼처럼 달려들던 용기사들조차 일정 거리를 벌리고 절대 달려들지 않는 중이다.
마치 더 안쪽으로 들어오라는 것 마냥.
친절하게 안내하는 중이라고 해야 하나?
“고대 마룡이 막상 밥상을 차려주니 못 먹네요.”
“그 밥상에 독약이 있는지 어떻게 알고 삼키겠냐.”
독약이라…….
확실히 그렇게 볼 수도 있었다.
특히 저 고대 마룡에게는 말이지.
타란 제국 수도 상공을 돌며 한참 간을 보던 고대 마룡 카브레시아가 일단은 접근하진 않고 원거리에서 검은 용암을 몇 번 수도로 뿜어내자 수도의 시가지가 바로 박살 나버렸다.
콰아아앙!!
콰아앙!!
“꺄아악!!”
“도망쳐!!”
“고대 마룡이 내려 왔어!”
“수도 방어막은 어떻게 된 거야?!”
“대체 용기사들은 어디에 있어?!”
“살려줘!”
검은 용암에 휩쓸린 시가지의 건물이 녹아내리고 폭발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문제는 시가지에 타란 제국의 시민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당연히 수도 방어 시스템과 용기사들이 고대 마룡을 막아줄 것이라 여겨서 피난을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고대 마룡이 지상으로 내려앉자 타란 제국의 시민들이 모두 패닉 상태에 빠져들었다.
건물과 함께 녹거나 터져버린 시민들의 잔해가 곳곳에서 발견되었고.
비명을 지르며 어떻게든 멀리 떨어지기 위해 도망가는 행렬로 시가지가 꽉 차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기사들은 주변에 대기할 뿐.
일체 고대 마룡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으음.
저건 너무 노골적인데…….
과연 고대 마룡 카브레시아가 저 장단에 놀아나 줄지는 의문이지만.
굳이 저대로 가만히 놔둘 이유도 없었다.
“방해 좀 해볼까요?”
상대가 하고자 하는 일을 못 하게 막는 건 전쟁의 기본이라.
그리고 타란 제국의 시민들까지 버려가면서 하고자 하는 일이라면.
반드시 문제가 되는 일이다.
그런데 재중이 형은 살짝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아니. 어떻게 돌아가나 한 번 지켜보자.”
“그냥 둬도 괜찮을까요?”
그러자 재중이 형이 타란 제국성 쪽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저 안에 박혀 있는 녀석들.”
“황제요?”
“어. 그리고 마엘리타였나? 걔네들 다 끌어내려면…….”
“일단 지켜보자 이거네요.”
“저 손해를 보면서 하는 짓들이 무슨 꿍꿍이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고대 마룡을 다시 타란 제국 수도에서 끌고 나오는 건 내게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냥 저 멀리 외곽으로 나가서 용신의 파편을 꺼내 들면 되니까.
하지만 그렇게 하면 타란 제국 황제가 노리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지켜보길 얼마나 지났을까.
고대 마룡 카브레시아가 결국 검은 용암을 줄기차게 뿜어내면서 타란 제국 수도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기다리는 건 여기까지라는 듯.
그리고는 더 이상 자신에게 위협이 없다는 걸 알게 되자.
지상으로 떨어져 내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수도 전체를 짓밟고 다녔다.
그만큼 타란 제국 시민들 역시 수도 없이 죽어 나가면서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휘유. 저거 돈 꽤나 깨지겠는데?”
아마 정확한 모르긴 해도 저렇게 망가진 수도를 재건하려면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갈 것이다.
돈도 돈이지만.
저 시민들이 죽어 나간다는 건.
그만큼 타란 제국의 국력이 깎여나가는 셈이라.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타란 제국 황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여기까지 고대 마룡을 끌고 오는데 죽어 나간 수많은 용기사와 용들.
그리고 이번엔 타란 제국 수도와 시민들이라…….
이건 타란 제국 황제의 핵심이나 마찬가지인데.
그걸 그냥 버린다고?
“황제가 어지간히 미치지 않고서야…….”
“그놈 원래 좀 미친놈이잖아.”
“음. 딱히 부정하진 않을게요.”
그때 챠밍에게서 연락이 들어왔다.
<챠밍> 오빠. 어디에요?
<주호> 아. 지금 여기가…… 타란 제국 수도.
<챠밍> 네?
원래라면 지금쯤 챠밍과 합류해서 지상에 추락했던 비공정을 터는 일을 하고 있어야 했지만.
막상 챠밍이 와보니 우리가 없어 당황한 듯 했다.
<주호> 그게. 고대 마룡이 타란 제국 수도로 와서 말이야.
<챠밍> 후퇴한 타란 제국군을 따라 간 건가요?
<주호> 아니. 그 반대야. 타란 제국군이 고대 마룡을 유인했어. 타란 제국 수도로 말이야.
<챠밍> ……말이 안 되는데.
<주호> 역시 그렇지?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고대 마룡을 타란 제국 수도에서 최대한 떨어지게 하는 게 맞다.
그러니까 누가 봐도 지금 이 상황은 이상했다.
잠시 생각해보다가 이내 챠밍에게 다시 말을 꺼냈다.
<주호> 거기 일 끝나는 대로 헤르게니아 좀 데리고 올 수 있어?
<챠밍> 타란 제국 수도로요?
<주호> 응. 아무래도 여기 상황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닌 것 같아서.
우리는 잘 모르지만.
마왕 헤르게니아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타란 제국 황제와 최상급 천사 마엘리타가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챠밍> 네, 오빠. 최대한 빨리 처리하고 날아갈게요.
<주호> 그럼 부탁해.
혹시나 해서 마왕 헤르게니아를 카샤스 대공군에 남겨두었는데.
이건 천사들이 카샤스 대공군에 섞여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는 이쪽 일이 더 급했다.
그쪽 일은 카샤스 대공이 어떻게든 알아서 하겠지…….
그렇게 타란 제국 수도에서 고대 마룡이 날뛰는 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는데.
갑자기 수도 외곽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왜 그동안 타란 제국군에서 반응하지 않았는지.
왜 타란 제국군에서 그렇게 애를 써가면서 고대 마룡을 타란 제국 수도로 끌고 왔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우우우웅!!!
“저거 완전 미친 짓 아닌가요?”
내 감탄 아닌 감탄에 재중이 형 역시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타란 제국 수도 외곽을 쳐다보았다.
정확하게는.
타란 제국 수도 전체를 감싸기 시작한 무언가를 보며.
처음 보는 문자열로 배치된 반원형의 투명한 결계가.
지금 저 커다란 타란 제국을 뒤덮고 있었다.
“그러게. 황제가 진짜 또라이던가……. 욕심 많은 야심가던가 둘 중에 하나겠네.”
또라이.
욕심 많은 야심가.
둘 다 정상적인 범주에 속하는 건 아니었다.
그만큼 저 타란 제국 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비상식적이었다.
“전에 헤르게니아가 말했죠. 수도 방어 시스템하고 제물의 결계를 같이 쓸 수 없다고요.”
“확실히 그랬었지.”
그리고는 수도 전체를 감싸기 시작한 무언가를 보면서 말했다.
“저래서 수도 방어 시스템을 쓰지 않았네요.”
베르탈륨 광석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시스템을 쓰려면.
절대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바로 타란 제국 전체에 걸린 저 제물의 결계 때문에.
“그리고 굳이 쓸 필요도 없었겠지.”
“안으로 유인하려면요?”
“그래. 괜히 수도 방어막만 치다가 고대 마룡이 그대로 돌아가 버리기라도 하면 완전 삽질한 셈이니까. 여기까지 유인하는데 죽어간 용기사와 용들까지 다 날리는 거고.”
타란 제국 수도가 박살 나는 걸 묵인하면서까지 버텼던 건.
제물의 결계에 고대 마룡을 잡아두기 위해서였다.
“생각보다 제물의 결계를 시전하는데 오래 걸리나 보네요.”
“아아. 그러니까 그동안 시간을 끈 거야. 고대 마룡이 떠나지 않도록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면서.”
만약 고대 마룡이 타란 제국 수도에 내려앉기 전에 제물의 결계를 시전했으면 분명히 눈치챘을 것이다.
처음에는 고대 마룡이 상공에서 날아다니기만 했으니.
위에서는 수도 전체가 보이지만.
막상 지상에 내려앉으면 시야가 한정되어 버리니까.
그리고 제물의 결계가 시전되자 그동안 타란 제국 수도에서 죽어 나간 시민들의 시체에서 붉은 혈액이 줄줄이 뽑혀 나오더니 어디론가 타고 흘러가기 시작했다.
정확하게는.
타란 제국 황제가 있는.
제국성의 중심으로.
저 넓은 타란 제국의 곳곳에서 붉은 기운이 뽑혀 나와 밀물처럼 밀려 들어가는 광경이라니…….
그 모습을 본 재중이 형이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하…… 미친 새끼. 저 많은 시민들을 전부 제물로 쓸 생각이었나?”
“설마 시민들을 대피시키지 않은 게…….”
“맞아. 단순히 고대 마룡을 유인하려는 게 아니라. 저 제물의 결계에 제물로 쓰려는 거다.”
그 증거로 지금.
고대 마룡이 타란 제국 수도에서 날뛰는 만큼.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들에게로 누적되었고.
또 그만큼 죽어 나간 시민들의 피가 흘러내려 뭉치더니 하나의 강이 되어 제국성으로 그대로 빨려 들어갔다.
이건.
미쳐도 정도껏 미쳐야지.
설마하니 자신의 제국의 시민들을 전부 제물로 쓸 생각을 하다니…….
“카샤스 대공이 이걸 보면 뭐라고 할지…….”
과거 성마대전에서 이 타란 제국을 지켜내기 위해 끝까지 분투했던 카샤스 대공의 입장에서 보면…….
“아마도 악마쯤 되어 보이지 않겠냐.”
“천사들이 이 결계를 금지 시킨 이유를 알겠네요.”
이 결계는 쓰기에 따라.
정말로 미친 짓을 벌일 수도 있었다.
그 순간.
우리 옆으로 무언가가 이동해오는 걸 느꼈다.
그리고 텔레포트로 챠밍과 우리 팀.
마왕 헤르게니아까지 동시에 이동해왔다.
“오빠. 좀 늦었어요.”
“마력은 안 부족했어? 왕복으로 오려면 상당히 부족했을 텐데.”
“아. 헤르게니아가 도와줬어요.”
그러자 마왕 헤르게니아가 별 것 아니라는 듯 날 빤히 쳐다봤다가 갑자기 화들짝 놀라면서 타란 제국 수도 쪽으로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와씨. 뭐야? 저 터질 것 같은 미친 마력은? 어디 마왕이라도 떨어졌어?”
“아마…… 알고 싶지 않을걸?”
곧 짧게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
“마왕보다 더한 짓을 하고 있는 중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