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0화 제물의 결계 (9)
카샤스 대공의 군대는 지금 보다시피 타란 제국 황제에 대한 제약이 전혀 없었다.
만약 그런 제약이 있었다면.
반란은커녕 타란 제국 황제의 명에 무조건 따라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로회는?
단지 장로회 소속이라는 것 하나 때문에 그런 제약이 생기는 거라면…….
굳이 계속 유지하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그리고 이건 카샤스 대공의 반응에서 확신을 가졌다.
타란 제국 내 존재하는 시스템의 허점을 이용해 먹을 수 있다고.
뭐 장로회에 소속됨으로 얻을 수 있는 이점들이 있긴 하겠지만.
그게 당장 목숨까지 살려주진 못할 테니.
타누스 후작에게 제안하면 거절하진 않을 터다.
“지금 타누스 후작이 어디에 있지?”
카샤스 대공이 타누스 후작의 거처에 대해서 묻자 바로 대답해주었다.
“일단 타란 제국 수도를 벗어나 카샤스 대공령 방향으로 튀라고는 했는데. 얼마나 살아 나왔을진 모르겠는데.”
그리고 한 마디를 더 했다.
“늦으면 늦을수록 구할 수 있는 병력이 줄어들 거야.”
내 말에 카샤스 대공이 표정을 굳혔다.
“여기서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소리군.”
하지만 그런 카샤스 대공에게도 고민은 있었다.
산맥을 따라 길게 줄 지어진 대군의 행렬을 바라보던 카샤스 대공이 짧게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이 많은 군대의 행군 속도를 단번에 끌어올릴 순 없다.”
이건 나도 충분히 이해하는 바였다.
현재 카샤스 대공은 거의 전부라고 할 수준의 병력을 이끌고 나왔으니까.
거기다 유저들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걸 고려해보면.
진군 속도를 올리면 그 간격이 쭉 갈라져 버릴 것이다.
그때 옆에 있던 재중이 형이 조언해주었다.
“당장 빨리 움직일 수 있는 병력들만 추려서 움직이면 돼. 그럼 진형을 유지할 수 있다.”
“확실히 그렇겠네요.”
재중이 형의 말을 들은 뒤 카샤스 대공을 쳐다보니 알겠다는 듯 자신의 부관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는 바로 명령을 내렸다.
“세 개의 용기사단을 빼서 따로 운용한다. 제일 빠른 녀석들로 준비하도록.”
“알겠습니다!”
카샤스 대공이 곧 날 쳐다보면서 물었다.
“너도 갈 생각인가?”
그러자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벌려 놓은 일은 마무리해야겠지.”
언제가 되었든 타누스 후작은 손에 넣었어야 했다.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좋은 기회였고.
카샤스 대공이 아쉽다는 듯 내게 말했다.
“난 지휘해야 해서 나갈 수 없겠군.”
“거기까지 바란 건 아니고.”
당장 카샤스 대공이 빠지게 되면 카샤스 대공 군 전체가 흔들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 당장 눈에 불을 켜고 우리를 쳐다보는 부관들의 눈빛도 있고.
이번 작전에 나갔다가 혹여 카샤스 대공이 부상이라도 입게 되면 그들에게는 큰 손실이라.
“그럼 용기사단의 지휘는 네게 맡기도록 하지.”
“그래도 되겠어?”
용기사단은 오직 카샤스 대공의 지휘를 받을 뿐인데.
그걸 지금 넘겨주겠다는 말이었다.
“일일이 내가 할 순 없으니까.”
“뭐 그렇다면야.”
곧 카샤스 대공이 준비해준 용기사단들이 자신들의 용들을 이끌고 우리 앞에 도열했다.
“현재 쓸 수 있는 가장 빠른 녀석들이다.”
“최대한 살려와야겠지?”
내 말에 카샤스 대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급 적이면. 살려오면 좋겠군.”
지금 내어준 용기사단 역시 카샤스 대공군에서 큰 축이라 할 수 있었다.
쉽게 쓰고 버릴 패는 아니라는 거지.
만약 이들이 다 죽어버리면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앞으로 있을 공성전에서도 화력이 부족해질 테고.
“일단 시간만 끌 테니까. 빨리 따라와.”
“알겠다.”
상대는 타란 제국군이었다.
단지 용기사단 세 개 정도로 전황을 뒤집을 수 있을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바로 우리 팀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일단 형만 같이 가요.”
그러자 챠밍, 이쁜소녀, 전사 형, 나르샤 누나, 막내별이 의아하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최대한 빠르게 치고 빠질 생각이라 다른 분들은 후발대로 오세요.”
상대 용기사단들과 공중에서 얽히게 되면 일일이 뒤를 신경 쓸 수 없게 될 것이다.
아마 수도 없이 실피드가 뒤집히기도 할 테고.
그런 상황에서 뒤를 확실히 맡길 수 있는 건 재중이 형이니까.
물론 챠밍을 데려가면 광역기라던가 이점도 있긴 하지만.
그보다는 기동성에 좀 더 중점을 두었다.
전사 형이 아쉬워하면서도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따라갈게. 무리하지 마라.”
“네.”
곧 내 뒤로 재중이 형이 실피드에 올라타자 마왕 헤르게니아가 내게 물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 좀 부탁해. 문제가 생겨도 안 죽게끔.”
“흐응…… 뭐 알겠어.”
마왕 헤르게니아의 무력도 필요하긴 한데.
아직은 아니다.
무엇보다 상대 쪽에서 천사들이 몰려 나올 경우 귀찮은 일이 생길 수 있으니까.
목적은 확실히 하는 게 나았다.
“그럼 다녀올게요.”
챠밍이 걱정된다는 듯 말했다.
“조심해요. 위험하면 타누스 후작은 그냥 버리고요.”
이건 죽을 정도로 무리해서까지 살릴 필요는 없다는 거겠지.
타누스 후작을 살리고 내가 죽어버리면 그야말로 삽질이다.
실피드가 하늘로 날아오르자 용기사단들도 일제히 우리를 따라 날아올랐다.
“가자.”
타란 제국 수도 방향으로 속도를 올려 빠르게 날아가자 재중이 형이 내게 물었다.
“아직 말 안 한 거 있지 않아?”
“역시 눈치챘어요?”
아까 말하지 못했던 제물의 결계와 오벨리스크, 그것들을 만든 천사들에 대해서 말해주자 재중이 형이 묘한 웃음을 지었다.
“지금쯤 황제가 꽤 빡쳐 있겠는데?”
“아마도요?”
제물의 결계로 실컷 모아둔 오벨리스크의 힘을 싹 쓸어왔으니.
그 수혜자가 될 예정이었던 타란 제국 황제 입장에서는 뒤통수 맞은 기분이겠지.
“어쩌면 천사들 멱살을 잡고 있을 지도.”
“그럼 재밌겠네요.”
누가 실수를 한 건지는 너무 명확한 상황이라.
“그리고 마엘리타라고 했었나?”
“네.”
“안 그래도 네가 대천사에 대해서 물어봤다길래 좀 의아하긴 했었어.”
“정확하게는 대천사가 될 예비 천사죠.”
“그래. 아직은 아니다 이거지.”
그 말을 하는 재중이 형의 입가에 미소가 흘렀다.
“그래서 한 번 건드려 보겠다?”
“좋은 기회잖아요. 그리고 타란 제국 황제가 정말 마엘리타의 멱살을 잡았을 수도 있으니까. 이번 기회에 둘 사이가 틀어졌다면 더 좋겠죠.”
타란 제국 황제는 작전의 실패의 책임을 누군가에게는 물어야 할 테고.
그건 그 최상급 천사 마엘리타가 될 확률이 높았다.
물론 대놓고 밀어붙이지는 않겠지만.
아직은 타란 제국 황제에게 그 천사들이 필요할 테니.
적어도 둘의 동맹 사이에 틈이 생기는 건.
우리에게는 꽤 유효한 기회가 될 것이다.
“어느 쪽이 갑인지가 문제겠지. 만약 천사 쪽이 주도하고 있다면 이 정도로는 끌려가진 않을 거다. 아쉬운 게 황제라면 말이야.”
“그 반대라면요?”
“마엘리타 입장에서는 엿 된 거지. 타란 제국 황제에게 자신들의 실력을 보여줘야 했는데 망한 셈일 테니까.”
“동등한 입장이라면?”
“그럼 서로 물어뜯고 있겠지.”
곧 궁금한 게 생겼는지 재중이 형이 물어보았다.
“그래서 그 오벨리스크로 뭘 할 수 있는 건데?”
“아. 그건 아직 못 물어봤어요. 마왕 헤르게니아가 그 오벨리스크가 있으면 꽤 강한 힘을 얻을 수 있다던데.”
“흐음. 우리도 포함되는 건가? 아니면 마왕 본인에게?”
“그건 모르죠. 돌아가면 물어봐야겠어요. 오벨리스크를 챠밍이 가지고 있거든요.”
어느 쪽이 되었든.
적의 전력은 마이너스가 됐고.
우리에게는 플러스가 된 셈이었다.
그때 재중이 형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사뭇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잘하면 카샤스 대공군에도 천사들이 있겠는데?”
“그래요?”
“걔네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타란 제국 한쪽에만 숨어 들어갔을 리가 없잖아.”
확실히 재중이 형의 말을 듣고 보니 일리가 있었다.
이왕 숨어들어 갈 것이라면.
카샤스 대공군 쪽에도 손을 뻗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바로 전사 형에게 연락을 넣었다.
<주호> 전사 형.
<방패전사> 어? 벌써 도착했어?
<주호> 아. 그건 아니고요. 그러니까 카샤스 대공군에 천사들이 있는지 확인해 봐야 해요.
<방패전사> 천사가…… 그렇네. 이쪽에도 있겠는데? 그럼 왕국을 통해서 들어온 거려나?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음에도 전사 형이 바로 알아차렸다.
<방패전사> 그 녀석들. 위험한가?
<주호> 어느 쪽이냐에 따라서는요.
만약 그 천사들이 지금 타란 제국 수도에 있는 마엘리타와 연관이 있다면.
반드시 문제가 된다.
가만히 죽치고 있으라고 카샤스 대공군에 넣어둔 건 아닐 테니까.
그런데 만약 반대라면?
<방패전사> 일단 천사들로 의심되는 녀석들을 분류해봐야겠네.
<주호> 네. 부탁해요. 여차하면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부탁하세요.
이미 카샤스 대공군이 대규모로 진격 중이라 그 사이에서 뭔가를 알아내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일일이 멈춰 세워놓고 검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더군다나 지금은 진격 속도를 더 올렸으니.
<방패전사> 하긴 마왕이면 천사들 분류하는 건 일도 아니겠다.
<주호> 마왕의 눈을 피하긴 어렵겠죠.
<방패전사> 오케이. 네가 시켰다고 하면 되냐?
<주호> 네. 절 팔아먹으세요. 그 정도는 해야 도와줄 거예요.
<방패전사> 알아보고 연락 줄게. 그럼 조심해라.
<주호> 형도요. 녀석들이 수틀리면 그대로 달려들지 모르니까.
<방패전사> 조심하지.
곧 전사 형과 연락이 끊어졌고 재중이 형이 내게 말했다.
“마엘리타 쪽이면 골치 아프겠는데. 적들이 안에서 칼을 겨누고 있는 거니까.”
“네. 일단 기다려보죠.”
솔직히 이대로 돌아가야 하나 생각했는데.
그쪽은 카샤스 대공과 마왕 헤르게니아가 있으니 대천사 급만 아니라면 어떻게든 해결이 될 터.
전에 그 중급 천사가 말하기로 아직 타란 제국으로 대천사가 오진 않았다고 했으니.
그 말이 사실이기만 바랄 뿐이다.
재중이 형도 마찬가지인지 듯 말했다.
“대천사만 아니라면 돼.”
“네. 그리고 대천사라면 마왕 헤르게니아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어요.”
예전에 마왕 헤르게니아가 말해준 적이 있었다.
천사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는데 익숙하지 않다고 했던가.
그게 대천사라면 더 할 거라고.
아마 자신의 기운을 풀풀 풍기고 다닐 터라.
모를 리가 없을 터.
그렇게 얼마나 날아갔을까.
저 멀리서 수많은 용들이 한 곳에 모여 공중전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형. 저기!”
“흐음. 장로회가 이미 뒤를 잡힌 건가.”
“그런가 보네요.”
제물의 결계가 풀리자마자 빨리 빠져나가라고 했는데.
생각보다 쉽게 빠지진 못한 듯 했다.
그때 재중이 형이 뭔가를 발견하고는 알겠다는 듯 말했다.
“저 비공정들을 보호한다고 뒤를 잡혔군.”
비공정들을 바라보니 누군가 빽빽하게 탑승해있는 광경이 보였다.
그 비공정을 용들이 보호하며 주변으로 치열하게 전투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만약 저 비공정이 없었다면 모르겠지만.
이대로라면 포위당해서 무조건 죽겠지.
타란 제국군의 용기사들이 월등하게 많으니까.
재중이 형도 그걸 보고는 난감한 듯 말했다.
“이거 참. 적당히 치고 빠지는 건 안 되겠는데?”
상대가 많은 데다가.
이쪽은 보호해야 할 비공정까지 있었다.
우리가 데리고 온 용기사단 세 개 병력을 합치더라도 당장은 열세였다.
여기서 추가 병력이 더 붙는다면 더 가망이 없고.
잠시 고민하다 할 수 없다 싶어 품에서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그걸 보더니 재중이 형이 알겠다는 듯 물었다.
“여기로 카브레시아를 불러오려고?”
“네. 이대로는 승산이 없으니까 최대한 혼잡하게 만들어놓고 빼 내보죠.”
얼마나 지났을까.
캬아아악!!
고대 마룡 카브레시아가 날아들자 바로 실피드를 비행해 적진 사이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그러자 저 멀리서 하늘서 뻗어 나온 검은 용암들이 타란 제국군의 용들을 쓸어버렸다.
그렇게 적들의 시선이 팔린 사이.
타누스 후작의 용을 찾아내 옆으로 날아간 뒤 외쳤다.
“타누스 후작!”
“자네……!”
갑자기 나타난 카브레시아와 우리의 등장에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자 다시 한 번 크게 말했다.
“빠져나갈 기회는 지금뿐이에요. 당장 비공정들 피신시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