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9화 제물의 결계 (8)
만약 이 오벨리스크가 처음부터 베르가 공작가에 존재했던.
그러니까 완전한 구조물로서 존재했다면.
이런 시도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오벨리스크는 그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마왕 헤르게니아의 말에 따르면
제물의 결계를 유지하기 위한.
그리고 그 결계에서 뽑은 에너지를 모아주는 일종의 이동이 가능한 물건이었다.
원래라면 이 오벨리스크의 혜택을 받을 타란 제국 황제에게 전달해주기 위해서 말이지.
만약 그게 아니라면 타란 제국 황제가 직접 여기에 있어야 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곳에는 그 녀석이 없었다.
챠밍에게 붉게 물든 오벨리스크를 통째로 쓸어 담으라고 하자 마왕 헤르게니아가 재밌다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너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어?”
그런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웃음으로 대답했다.
“그러라고 내게 말한 것 아니었어?”
“뭘?”
“오벨리스크를 누가 가지든 상관없다고 하지 않았었나?”
“맞아.”
곧 챠밍과 오벨리스크를 쳐다보던 마왕 헤르게니아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설마 이걸 통째로 옮길 거라고는 생각 못 했지만.”
“방법이 중요하지 않지.”
“맞아.”
챠밍이 날 바라보더니 바로 아이셔스 스태프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한 차례 아공간을 이용해 오벨리스크를 넣어보려 했지만 안 되는지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오빠. 안 돼요.”
“응? 안 돼?”
“네. 결계가 작동 중이라 불가능하다고 떠요.”
그 순간 마왕 헤르게니아가 한 손을 쑥 뻗어 오벨리스크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는 뭔가를 하는지 눈을 감고는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마왕 헤르게니아의 손을 따라 검은 기운이 뻗어 나가 오벨리스크로 옮겨가더니 곧 오벨리스크를 감싸고 있던 붉은 기운들이 전부 해제되듯이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휴. 힘드네.”
“방금 뭐한 거야?”
“제물의 결계와 오벨리스크를 잇고 있던 마법적인 연동을 끊어냈어.”
그런 마왕 헤르게니아의 말대로 오벨리스크로 흡수되어 빨려 들어가던 붉은 기운이 허공에서 흩어져 사라졌다.
동시에 이곳 베르가 공작가를 덮고 있던 제물의 결계 역시도 힘을 잃고 붕괴되는 모습이 보였다.
정확하게는 작동이 멈춰버렸다고 하는 게 맞으려나.
《 베르가 공작가에 펼쳐져 있던 제물의 결계가 임시 해제됩니다. 》
“임시 해제?”
“응. 지금 마력으로는 이 정도가 한계야. 그리고 이것도 아주 잠깐밖에 유지 못 해.”
전에 마왕 헤르게니아가 이런 결계를 부수려면 그에 상응하는 마력이 필요하다고 했었던가?
그런데 당장 그만한 마력을 마왕 헤르게니아가 쓰는 건 힘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일시적으로 이 결계를 멈추는 건 가능한 모양이었고.
“잠시가 어디야.”
그리고는 챠밍을 쳐다보자 바로 아이셔스 스태프를 앞으로 내밀어 오벨리스크에 가져다 대었다.
곧 오벨리스크가 흔적도 없이 아이셔스 스태프로 빨려 들어가더니 그 자리가 횡 하니 비어버렸다.
“오빠. 됐어요!”
정확히 위치를 모르긴 해도.
이곳 부근에서 떨어져 지켜보던 천사 녀석들이 있을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결계와 오벨리스크에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라 여겨 지켜봤겠지만.
곧장 챠밍과 마왕 헤르게니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여기서 조금만 시간을 끌면.
포위되어서 빠져나갈 수 없게 된다.
“챠밍. 튀자!”
“네!”
그리고는 챠밍이 텔레포트를 쓰는 순간.
저 멀리 유저들 사이에 숨어 있던 녀석들이 등 뒤로 하얀 날개를 펼친 채 사색이 되어 날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거기다 뭔가의 마법을 시전하면서 우리에게 쏘아내는 것까지도.
그런 천사들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이미 늦었어.
곧 텔레포트가 시전되어 우리의 시야가 반전되더니 베르가 공작가가 아닌.
전혀 다른 장소로 이동되었다.
“여긴?”
“혹시 몰라서 타란 제국 수도에서 멀리 빠졌어요.”
아무래도 근처에 있다가 다시 천사들이 추격해오면 곤란하다고 여겼는지 아예 멀리 떨어진 어딘가의 산맥으로 옮긴 듯 했다.
“잘했어.”
그런데 아주 상관없는 장소로 빠진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산맥 아래쪽에서 대규모의 병력이 이동할 때나 날 법한 강한 진동이 전해졌다.
“이거 혹시?”
내 물음에 챠밍이 미소 짓더니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마 지금쯤이면 이 지점 부근을 지날 거라고 예상했어요.”
그리고 그런 챠밍의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지금 이 산맥 부근을 지나고 있는 건.
카샤스 대공의 군대였으니까.
“멀리 안 돌아가도 되고 좋네.”
곧 실피드를 불러내 챠밍, 마왕 헤르게니아와 함께 카샤스 대공군이 있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리고 산맥 전체에 길게 뻗어 있는 카샤스 대공군의 병력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아예 작정하고 다 끌고 나온 거려나?
정확하게 병력 숫자는 모르지만.
이 정도의 병력이라면 카샤스 대공의 군대와 유저들의 왕국을 총동원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
유독 화려한 진형을 유지하고 있는 부대가 보였다.
“저기로 가자.”
갑자기 산맥의 공중에 우리가 나타나자 처음에는 경계하는 듯 했지만.
그게 실피드라는 걸 알자 곧 카샤스 대공의 부대들이 무기를 내려놓고는 우리가 내릴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그렇게 내려서자 카샤스 대공이 재중이 형과 함께 우리에게 달려왔다.
“넌 지금 수도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카샤스 대공의 물음에 어쩔 수 없었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하다 보니 그렇게 됐어.”
카샤스 대공도 내가 여기에 와 있는 상황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바로 물어보았다.
“지금 수도 전황은?”
“뭐 일단 장로회가 베르가 공작가를 치긴 했어.”
“그런데 일이 잘못됐다는 건가?”
아마 카샤스 대공은 장로회의 일이 실패했다고 여기는 듯 했다.
처음 카샤스 대공에게 말해둔 작전은.
우리가 타란 제국 수도 안에서 타누스 후작의 장로회를 이용해 타란 제국군을 흔드는 일이었는데.
어떻게 보면 절반의 성공만 거둔 셈이었다.
타누스 후작을 움직여 베르가 공작을 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와중에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일어났으니까.
그리고 카샤스 대공과 옆에 있는 재중이 형에게 대략적인 일을 추려 이야기해줬다.
천사들의 개입이라든지.
제물의 결계라던가 하는.
그 중 오벨리스크에 대한 이야기는 일단 카샤스 대공에게 알리진 않았다.
이쪽은 나중에 문제가 될 수도 있는 물건이라.
“흠. 황제가 그렇게까지 하다니…….”
카샤스 대공도 설마 타란 제국 황제가 천사군까지 끌어들여서 일을 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 했다.
“다행히 아직 천사군의 상부에서는 이 일을 모르는 것 같아.”
“그런가?”
“만약 그랬다면 지금쯤 대천사들이 나타나서 뒤집어 놨겠지.”
“대천사……!”
그 말을 하면서 슬쩍 카샤스 대공을 쳐다보았다.
성마대전 미래 최강의 영웅.
그때의 카샤스 대공이라면 아마 대천사들과 싸운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지지 않을 것이다.
대천사와 맞먹는 마왕들과의 일전도 가능한 녀석인데.
그게 대천사라고 해도 다를 리가.
하지만 지금의 카샤스 대공이 대천사와 싸움이 가능할지는 의문의 조금 생기긴 했다.
그리고 그렇게 치면 역시 성마대전 영웅들의 꼭대기에 있는 레오나 에센시아의 존재도 마찬가지였다.
라첼도 어떻게 보면 같은 부류고.
성마대전에서 마왕들이 학을 떼고 피해 다녔다고 서술되어 있는 걸 보면.
이쪽도 충분히 잠재력이 있다 봐야 하겠지.
휴.
언제 날 잡아서 이 녀석들을 전부 키워놔야 할 텐데…….
본격적으로 대천사나 마왕들이 개입하게 되면.
그들을 직접 상대할 수 있는 전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까지는 부딪히지 않아 어떻게든 넘겼지만.
앞으로는 그런 식으로는 위기를 넘길 수 없을 테니까.
대천사란 말이 나오자 카샤스 대공의 표정이 바로 굳어졌다.
“대천사라면 상대하기 어렵겠군.”
“너라도?”
내 물음에 카샤스 대공이 살짝 인상을 구기면서 답했다.
“하나라면 어떻게든 상대할 수 있겠지만…….”
“둘 이상은 어렵다는 건가?”
사실 대천사를 하나만 상대할 수 있다 하더라도 미친 전력이긴 한데.
우리가 익히 아는 카샤스 대공은 그 이상을 해주어야 한다.
그러자 카샤스 대공이 날 빤히 쳐다보면서 말했다.
“둘 이상이라면 하나는 네가 잡아야 한다.”
아주 대놓고 말하는 걸 보면.
카샤스 대공은 내가 그 정도 능력이 된다고 여기는 듯했다.
“꽤 부담스러운 발언인데? 아크 드래곤을 잡을 때야 에센시아 제국의 재력을 왕창 들어부었으니까 가능했던 거고.”
내 말에 카샤스 대공이 잠시 생각을 하더니 곧 답을 내주었다.
“그렇다면 내가 황제가 됐을 때. 그 재력을 네게 밀어주도록 하지.”
“뭐?”
“대천사 급을 상대하는 데 필요하다면. 나쁘지 않은 투자겠지.”
하.
이 녀석.
대체 어디까지 날 밀어줄 작정인 건지 모르겠네.
그러더니 카샤스 대공이 멀리 북쪽을 쳐다보면서 말을 꺼냈다.
“곧 마왕들과도 싸워야 할 거다.”
“그러니까 마왕을 상대할 정도로 더 강해지라고?”
“가능하다면.”
물론 가능하긴 했다.
시간과 돈을 들이면.
내겐 그들과 싸울만한 장비는 이미 갖추고 있으니까.
“부담스럽게.”
“알아 들은 걸로 하지.”
그때 챠밍이 옆으로 다가오더니 내게 말을 건넸다.
“오빠. 타누스 후작을 살려야 해요.”
“아. 맞다.”
그런 챠밍의 말에 카샤스 대공이 의아한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무슨 말이지?”
“타누스 후작. 지금쯤 타란 제국군에게 쫓기고 있을 거야. 타란 제국 황제가 장로회를 지우기로 아주 작정을 했거든.”
“결국 그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그런 카샤스 대공에게 대놓고 말했다.
“장로회. 네가 받아들여.”
지금까지는 장로회가 중립을 지켰기에.
그리고 그 황제를 배신하지 못한다는 이상한 제약이 있기에 불가능했지만.
타란 제국 황제 쪽에서 전부 제물로 만들어 죽이기로 마음먹은 상황에 계속 입장을 고수할 순 없었다.
내 말에 카샤스 대공이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들은 제약이 있기 때문에 황제를 배신할 수 없다.”
“만약 그 제약을 깰 방법이 있다면?”
“무슨…….”
장로회에 걸린 제약은.
타란 제국 황제를 배신하면 용혈이 그 힘을 잃게 되는 그런 제약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죽거나 하는 그런 제약은 아니라는 거지.
만약 그랬다면 타누스 후작도 미리 말해주었을 것이다.
이건 자신들의 목숨줄을 걸고 하는 일이 될 테니.
그리고 한참을 생각해보았다.
강력한 용혈에 충성을 다해야 힘을 쓸 수 있는 다른 용혈이라…….
그렇다는 건.
꼭 그 강한 용혈이 타란 제국 황제일 필요는 없지 않나?
혹시나 싶어서 카샤스 대공에게 물어보았다.
“너. 지금 어떻게 보면 타란 제국에 대한 반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힘을 그대로 쓸 수 있지?”
내 말에 카샤스 대공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 역시 타란 제국 황제에게 충성하기 때문에 그런 제약이 있지 않아?”
“아니. 황족은 예외다. 애초에 황위를 이어받도록 준비된 존재니까.”
그 말에 장로회가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허점을 카샤스 대공에게 알려주었다.
“그렇다면 널 따르는 다른 용족들은? 네 말대로라면 그들도 힘을 잃어야 하는 게 맞지 않나?”
“그들은 원래부터 날 따르는…….”
방금 언급한 말을 듣자마자 카샤스 대공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졌다.
꼭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표정이네.
아마 이건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설마…… 장로회를 해체하라는 건가?”
“이제 좀 이해돼?”
장로회가 문제라면…….
그 존재 자체를 없애버리면 된다.
조각조각 내서 말이지.
“그럼. 타누스 후작부터 구하러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