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8화 제물의 결계 (7)
오벨리스크가 있는 위치는.
베르가 공작가 부지의 한 가운데.
그러니까 공작가의 높은 저택이 있는 바로 뒤편에 위치한 넓은 뻗은 정원이었다.
마치 정원을 감싸듯이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는 걸 봐서는.
처음부터 이곳에 오벨리스크를 설치하려 준비한 것처럼 느껴졌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저택이 지어진지 훨씬 오래 되었다는 걸 고려해본다면.
정원에 설치가 용이해서 저 곳을 골랐다는 사실이 더 맞을 것이다.
덕분에 정원에 설치된 오벨리스크를 살펴보는 데는 그렇게 어려움이 없었다.
정원을 둘러싼 건물에 숨어서 보면 되니까.
은신한 상태로 쭉 지켜본 오벨리스크는 이미 상당한 양의 피를 흡수해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이미 이 제물의 결계 안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났다는 뜻이 된다.
그게 베르가 공작가 세력의 피인지.
타누스 후작이 있는 장로회의 피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 되었든.
다수가 죽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 누군가가 죽어 나가는 중이었다.
“전부 죽여!”
“밀고 들어가!”
“어떻게든 막아!”
정말 치열하다는 말도 부족할 정도로 양측의 병력과 유저들이 서로의 시체를 밟고 올라 계속해서 전투를 지속하고 있었다.
콰앙!!
콰아앙!!
쒜애액!!
곳곳에 마법과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다니고 있는 데다가 그 사이로 수많은 병장기들이 서로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부딪쳐 갔다.
“죽어! 새끼들아!”
“한 놈도 보내지 마라!”
“좌측을 뚫어!”
“가운데 비었다! 밀어붙여!!”
마치 이건 베르가 공작의 대저택을 방패삼아 공원의 오벨리스크를 사수하는 모양새가 그려졌다.
밀어붙이고 있는 타누스 후작의 군대가 그걸 인지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베르가 공작의 병력들은 공작의 대저택을 지키는 일은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만약 처음부터 베르가 공작의 대저택을 지킬 요령이었다면 방어선을 훨씬 앞으로 짰을 테니.
그렇다는 건.
적어도 베르가 공작의 군대는 이 방어전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인지하고 있단 뜻이 된다.
반대로 타누스 후작이 포함된 장로회는 멋도 모르고 주야장청 공격만 하는 셈이었다.
이걸 알려줘야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하지만 문제는 타누스 후작이 저 전장 중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렇다고 타누스 후작을 찾으러 저 개싸움에 끼어들어서 같이 싸우는 건 미친 짓이지.
물론 감각을 써서 찾으려고 치면 어떻게든 찾긴 하겠지만.
그 전에 내 쪽이 리타이어다.
이렇게 많은 병력이 싸우는데 그 사이에서 누군가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내게 남은 여력의 감각을 모조리 때려 박아야 할 테니까.
이건 차라리 눈으로 찾는 편이 훨씬 나을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베르가 공작의 대저택 옆에 달려 있는 건물 중 한 곳의 꼭대기 층에 올라와 있는 중이었다.
애초에 누군가를 공격할 생각 자체가 없었으니.
은신한 상태로 공격만 잘 피해 다니면.
이곳까지 오는 건 크게 무리가 없었다.
대저택이야 차지하면 이점이 있으니 어떻게든 표적이 되겠지만.
여기는 그런 이점이라고는 찾아 볼래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아래로 저격을 하려는 궁수 유저들과 광역기를 넓게 깔아야 하는 마법사 유저들이 간간이 건물에 올라왔다가 상대 병력의 칼을 맞고 죽는 경우만 있을 뿐.
이쯤 되면 차라리 용을 타고 날아다니면서 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실제로 대저택의 하늘 위에서도 수많은 용들이 공중에서 겹치며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그런데 날아다니는 타누스 후작의 병력 녀석들도 오벨리스크를 봤을 텐데…….
이상하다고 생각한 놈이 하나도 없나?
아마 나 같으면 제일 먼저 오벨리스크부터 부수고 봤을 것이다.
저게 제일 수상하니까.
“쟤들은 눈이 없나?”
솔직한 감상을 말하자 옆에서 챠밍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알겠다는 듯 말했다.
“오빠. 유저들의 퀘스트 목표가 오벨리스크가 아닐 거예요.”
그 말에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 그렇지. 쟤들. 퀘스트 아니면 굳이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겠네.”
분명 오벨리스크가 수상하긴 할 터다.
누가 봐도 이상한 물건이라.
공원 한가운데 시뻘건 피를 머금은 물건이 있는데 이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으면 유저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건.
퀘스트 목표에 저 오벨리스크가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타누스 후작 측에서 오벨리스크를 공격하라고 새로운 퀘스트가 내려오기 전까지는.
적어도 유저들의 관심에서는 멀어져 있었다.
당연히 오벨리스크를 공격하려는 공격조도 없었고.
챠밍이 곧 주변을 둘러보더니 말을 이었다.
“시체들에게서 이상 현상이 나왔다는 걸 지금쯤 모두 알았을 거예요. 그럼 타누스 후작에게도 보고가 들어갔을 걸요?”
“그러면 뭔가 움직임이 바뀌겠네.”
고개를 돌려 마왕 헤르게니아를 보면서 물었다.
“주위에 천사가 있어?”
내 물음에 마왕 헤르게니아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하나도 없어. 신기할 정도로.”
“그래?”
분명 보다 상위의 천사들이 제물의 결계와 오벨리스크를 지키고 있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그런 예상을 보란 듯이 깨버리고.
여기에는 천사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게 없으니 더 찜찜한 것 같은데.
어째서 천사들이 없는 걸까.
“설마 아까 우리에게 온 녀석들이 전부였나?”
내 추측에 마왕 헤르게니아가 어림도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럴 리가. 이 결계를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둔다고?”
마왕 헤르게니아조차 이상하게 여길 정도라…….
분명 뭔가 있는데.
그때 챠밍이 다른 의견을 내었다.
“오빠. 혹시 여기서 천사들이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되는 것 아닐까요?”
“아직 표면으로 올라오면 안 된다 이건가?”
확실히 챠밍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지금 천사들이 쓰는 결계는 다른 천사들이 발견하면 문제가 심각해지는 결계였다.
금지된 마법진이라.
들키는 순간 추적당할 테니.
“그럼 어디선가 멀리서 지켜보고 있겠네.”
“아니면 저 병력들 사이에 숨어서 보고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러자 자연스럽게 시선이 베르가 공작가와 타누스 후작가의 병력들로 향했다.
챠밍 말대로 가장 수월하게 천사들이 모습을 숨길 수 있는.
문제가 생길 경우 바로 대처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최적의 장소가 바로 저곳이었다.
천사들이 유저들에게 맞아 죽을 확률은 극히 희박하니 부담도 없을 터.
그러면 전에 그 천사들 역시도 저들 사이에 끼어 있다가 빠져나왔을 확률이 높았다.
어차피 상징은 그들이 다 가지고 있으니.
결계를 들어오고 나오는 건 너무 쉬운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들어올 수 있는데 왜 저 결계에 마엘리타가 없으면 접근할 수 없다고 했지?”
그러자 마왕 헤르게니아가 대신 대답해주었다.
“우리를 결계에 들여보내고 싶지 않았겠지. 적어도 마엘리타가 와서 우릴 상대하기 전까진.”
“시간 벌기였단 말이네.”
대천사인 나와 부관인 마왕 헤르게니아가 이 결계에 들어오는 순간.
자신들의 계획이 바로 드러나 버릴 테니.
어떻게 해서든 외부에서 시간을 끌어야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마왕 헤르게니아의 손에 목이 다 날아갔지만.
“대천사의 능력이라면. 이런 결계 정도는 바로 부셔 버린다고 생각했을걸?”
이미 판은 벌어졌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대천사가 뚝 하니 떨어져서 자신들이 한 일을 보겠다고 하니 겁을 먹을 수밖에.
그렇다고 다시 돌아와 이 결계를 거둘 수도 없었을 테고.
“확실한 건 지금은 누구나 오벨리스크에 접근할 수 있다는 거지.”
“맞아.”
그렇게 생각하자 선택지가 갈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조금 더 시간을 끄는가.
아니면 뭔가의 행동을 취하는가.
그리고는 시선을 돌려 두 세력이 맞붙고 있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최대한 많은 병력이 여기 제물의 결계에서 죽어야 하니까 베르가 공작가의 군대가 철수할 수가 없겠네.”
만약 단순히 제물의 결계에 들어오자마자 죽는 형태였다면.
저기서 저렇게 무식하게 들이받으며 싸우고 있진 않을 것이다.
그냥 제물의 결계에 타누스 후작의 병력들을 버려두고 자신들은 상징을 가진 채 빠져나가면 되니까.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한 가지 가정으로 이어졌다.
상징이 있어서 언제든 나갈 수 있는데.
빠져나가지 않는 이유라…….
장로회의 병력들은 반드시 이곳에서 죽어야 하고.
외부와 단절되어 나갈 순 없는데.
들어올 수는 있다…….
그렇다는 건.
“하. 이거 여유 부릴 게 아니었네.”
“무슨 말이야?”
“생각을 잘못했어. 마엘리타가 타란 제국 황제를 보러 간 이유를.”
처음에는 수도를 덮는 결계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그게 아니었다.
바로 병력 지원.
“곧 타란 제국 황제가 병력을 몰고 올 거다.”
내 말에 챠밍이 놀란 눈빛을 했다가 곧 이해했는지 말을 꺼냈다.
“그러니까 저기서 베르가 공작가가 버티는 이유가…….”
“지원이 올 걸 아니까. 굳이 상징을 들고 빠지지 않는 거지.”
어차피 타란 제국 황제는 계약서 따위는 이제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다.
단절된 제물의 결계 안에서 다 쓸어버리면 그만이라.
여긴 그걸 따질 귀족이나 기사단도 없다.
하나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장로회를 전부 다 죽여 버리면.
아무 일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시간이 얼마나 있을까요?”
“아마도 저 오벨리스크가 차오를 때겠지. 타란 제국 황제는 저걸로 뭔가를 하고 싶어할 테니.”
그러자 챠밍이 오벨리스크를 한 번 쳐다보고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거의 새빨개졌어요.”
“응. 그러니까 시간이 없네.”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잠시만.”
이젠 시간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바로 감각을 최대한으로 확장해서 주변으로 뿌렸다.
그리고 내가 아는 타누스 후작에 최대한 맞는 인형을 감각으로 훑었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 들었지만.
어떻게든 타누스 후작을 찾는 데는 성공했다.
“저기로 이동 가능해?”
그리고 쓰러지듯 챠밍을 잡으면서 물어보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바로 할게요.”
곧장 셋이 워프를 해 지휘를 하고 있던 타누스 후작 옆으로 이동했다.
“타누스 후작.”
갑자기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란 타누스 후작이 적인 줄 알고 크게 외치려다가 내 목소리임을 알고는 외침을 멈췄다.
“자네…… 여길 어떻게?”
“길게 이야기할 시간이 없습니다. 곧 황제가 병력을 이끌고 올 겁니다.”
“이곳에 말인가?”
“네. 그리고 여기 모인 장로회를 전부 다 죽일 겁니다.”
“설마.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러자 바로 설명해주었다.
정원에 있는 오벨리스크의 용도와 제물의 결계.
타란 제국 황제가 왜 장로회를 다 죽이려고 하는 건지까지도.
“하! 정말 우리를 제물로 쓰려고 했단 말인가!”
“이미 전적이 있잖아요. 황제는.”
그땐 용족이 아니라 진짜 용을 제물로 썼지만.
그 결은 크게 다르지 않다.
장로회에서 그때도 크게 반발했다고 했었지 아마.
“하아. 기어코…… 황제가 미쳐버렸구나.”
그러더니 한숨을 쉬고는 내게 물었다.
“상징이 없으면 빠져나갈 수 없다하지 않았나?”
“결계는 제가 걷어낼 겁니다. 그럼 최대한 남은 병력들을 추슬러서 타란 제국 수도를 빠져나가십시오. 남아 있으면 전부 죽습니다.”
“후. 쉽지 않은 길이 되겠군.”
“이미 출발한 카샤스 대공의 병력이 곧 수도에 도달할 겁니다. 조금만 버티면서 도망가면 합류하실 수 있어요.”
“알겠네. 자네는 어떻게 할…… 아니. 내가 걱정할 필요가 없겠군.”
“그럼 알아들었다고 생각하고 갑니다.”
바로 챠밍에게 말했다.
“오벨리스크 옆으로 가자.”
“네. 오빠.”
그리고는 마왕 헤르게니아와 함께 오벨리스크 옆으로 이동했다.
“오벨리스크. 조작 가능할 것 같아?”
잠시 오벨리스크를 살펴보던 마왕 헤르게니아가 살짝 인상을 구기면서 말했다.
“되긴 하는데 시간이 좀 걸려.”
“그럼 됐어.”
“응? 왜?”
어차피 처음부터 조작이 되는가 안 되는가만 확인하면 됐다.
만약 마왕 헤르게니아가 이용할 수 없다면 쓸모가 없으니까.
그리고는 바로 챠밍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챠밍. 이 오벨리스크. 통째로 쓸어 담아.”
시간이 걸리면 그냥 통으로 가져갈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