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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1282화 (1,282/1,404)

#1282화 제물의 결계 (1)

마왕 헤르게니아의 말을 듣자마자 시선을 돌려 방송 화면들을 쳐다봤다.

그러자 처음에는 이상함이 느껴지지 않았던 장면들에서 조금씩 뭔가의 위화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재중이 형을 보면서 물었다.

“형, 역시 이상하죠?”

내 말에 재중이 형 역시 뭔가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이 녀석들. 일부러 간을 보면서 빠지고 있잖아?”

바로 이것이다.

나와 재중이 형이 느낀 위화감.

베르가 공작가의 병력이 타누스 후작의 병력보다 열세라 전선을 빼는 게 아니라…….

마치 유인이라도 하듯 천천히 전선을 뒤로 물리는 모습이 곳곳에서 눈에 들어왔다.

만약 한 곳이 완전히 뚫려서 전선이 무너졌다면 절대 저런 식으로는 후퇴하지 못한다.

우왕좌왕하면서 어떻게든 주변의 병력을 끌어와 틀어막거나 혹은 전선이 갈라지며 쭉 찢어져 버리지.

하지만 우리가 보고 있는 장면은 그게 아니었다.

일사분란하게 간격을 지켜가면서 뒤로 물러나는 모습.

다르게 생각해보면 베르가 공작가의 병력이 그만큼 훈련과 연습이 잘 되어 있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재중이 형도 허점을 잘 아는지 내게 말했다.

“타 왕국의 유저들까지 급하게 연합한 상태에서 저런 간격을 유지하는 건 말도 안 되지.”

“네. 어지간히 여유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죠.”

퇴각 자체에 여유가 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그만큼 여력을 두고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 된다.

마치 이길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부러 져주는 듯한 인상까지 들었다.

무언가를 위해 말이지.

그와 반대로.

타누스 후작이 있는 장로회의 병력들은.

통솔 자체가 불가능했다.

원래의 장로회의 용기사들과 병력들이야 정해진 규칙대로 움직이겠지만.

유저들은 그게 절대 안 되니까.

십수 개의 왕국들이 제각각의 병력을 끌고 나와 자신들의 판단대로 치고 빠지는데 제대로 된 전선 관리가 될 리가 있나.

물론 큰 틀에서는 타누스 후작에게 발을 맞추긴 하겠지만.

사공이 많아진 만큼이나 전선 관리가 힘든 건 어딜 가나 마찬가지였다.

손발도 맞지 않는 데다가.

여유까지 없어 보였다.

당장은 타누스 후작의 세력이 이기는 것처럼 압도적으로 밀고 들어가지만.

그건 겉으로 보이는 결과일 뿐.

실제로는 베르가 공작가의 병력들이 퇴각하면 그만큼 빨려 들어가는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베르가 공작가에서 완급 조절을 하고 있네.”

“타누스 후작 쪽은 그냥 무작정 밀고 들어가고 있고요.”

그 증거로.

베르가 공작가 쪽은 유저들의 피해가 거의 없어 보였다.

정작 지금까지 죽어 나간 건 타누스 후작의 유저들이었고.

당장은 흥분한 유저들이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 흥분이 가라앉으면 눈에 들어올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안으로 도망가는 베르가 공작가를 추격한다고 시야가 더 좁아졌을 확률이 높았다.

무턱대고 따라갈 뿐.

컨트롤 타워가 되어줄 타누스 후작 쪽 병력마저도 저 흐름에 빨려 들어가듯이 따라가고 있으니 말 다 했지.

“유인당한 거려나.”

“역시 그렇겠죠?”

마왕 헤르게니아를 쳐다보자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결계는 일단 한 장소에 설치하면 이동할 순 없어.”

“그 말은 결계로 무조건 끌어들여야 한다는 소리지?”

“응. 맞아.”

아까 전, 마왕 헤르게니아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렸다.

천사들의 개입.

결계.

그리고 죽음이라…….

“장로회와 유저들을 몰아놓고 결계 안에서 다 죽일 생각이네.”

여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부러 져주면서 유인한다.

그건 원하는 장소까지 장로회와 유저들을 끌어들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의 사실을 유추해볼 수 있었다.

“결계가 그렇게까지 넓진 않구나?”

“잘 아네?”

“역시.”

만약 결계를 크게 만들 수 있었다면.

애초에 베르가 공작가를 전부 감쌀 수준으로 범위를 넓혀놨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안 되니까.

져주는 연극까지 해가며 안으로 끌어들이는 중이었다.

원하는 장소로 들어오게.

“결계의 범위를 넓히려면 어마어마한 마력이 추가로 들어가거든.”

“배보다 배꼽이 커진다? 뭐 그런 건가?

“맞아. 당장 헤르마늄 광석을 왕창 소진해도 부족할걸?”

“헤르마늄?”

아.

그러고 보니 이 결계는 마족들의 것이 아니라.

천사들이 펼쳐놓은 결계였다.

당연히 원동력으로 헤르마늄을 쓸 테지.

반대로 말하면.

“타란 제국에는 헤르마늄 광석이 거의 없을 텐데?”

내 말에 마왕 헤르게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없지. 직접 가지고 오지 않으면.”

“부족하다 이거네.”

천사들이 만들었던지.

아니면 그들의 힘을 빌렸던지.

일단 결계를 만들긴 했는데.

헤르마늄 광석이 부족해 이곳에서는 결계의 크기를 더 키울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저런 방법을 써서 유인 중이고.

잠시 생각을 하다가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물어보았다.

“그 결계 안에서 죽은 이들의 힘을 한 개체에게 몰아준다고 했던가……?”

“정확하게는 그들의 피를.”

그 말을 들은 재중이 형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그건 마족들이나 할 법한 방법 아냐?”

재중이 형의 말에 마왕 헤르게니아가 동감한다는 듯 대답했다.

“내 말이. 쟤네들 하는 걸 보면 누가 마족인지 모르겠다니까?”

그런 마왕 헤르게니아의 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 지었다.

지금 마왕이 천사들에게 마족 같다고 하는 말이라.

그리고 실제.

천사들이 쓴 저 결계는.

그만큼 악랄한 면이 있긴 했다.

죽은 이들의 피를 이용한다라…….

아무리 봐도 마족에게 딱 어울리는 방법이다.

바로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물어보았다.

“피를 모아준다는 건…… 그만큼 힘을 얻는다는 뜻이야?”

“응. 저 결계의 수혜자는 아마…….”

“그건 말 안 해도 알겠네. 타란 제국 황제를 말하는 거지?”

“정확해.”

“저만한 규모의 피해를 감수하면서 힘을 얻을만한 존재는 타란 제국 황제밖에 없을 테니까.”

베르가 공작가가 천사들의 힘을 빌렸다는 말은.

곧 타란 제국 황제가 그걸 묵인했다는 뜻일 테고.

그런 베르가 공작가가 만든 결계로 이득을 볼 사람은.

누가 봐도 타란 제국 황제였다.

그것도 한 사람에게 힘을 몰아준다라.

용신검을 완성하기 위해 타란 제국 황성에서 칩거 중인 황제의 상황과 딱 들어맞기도 했고.

“황제의 필요에 의해 천사군과 손을 잡은 셈이네.”

“그래?”

“능력이 안 되는 소유자가 용신검을 완성하려면 제물이 엄청나게 필요하거든.”

이전에도 그런 일이 있긴 했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용들을 제물로 바친 일.

황제가 그 일 때문에 장로회와 마찰을 빚은 전력도 있고.

그러니까 이번 일은.

그 방법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이번엔 그 제물이.

용이 아닌.

장로회와 유저들이라는 게 다를 뿐이지.

자신에게 불만을 가지는 정적을 정리하며.

본인의 힘을 늘린다.

이건 충분히 타란 제국 황제가 생각할 법한 일이기도 했다.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하는 게 바로 그 황제니까.

그런데 그 용신검이 일반 유저들의 피로 성장할 수 있는가는 의문이긴 하다.

옆에서 재중이 형도 같은 생각인지 말을 꺼냈다.

“단순히 용신검만 키우려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좀 이상하긴 하죠?”

“그래. 용신검은 용족의 피만 제물로 받으니까.”

재중이 형 역시 이상한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결론을 찾았는지 말을 이었다.

“용신검이 아니라. 황제 본인이 강해진다면 어떨까?”

“소유자가 강해진다 이거죠?”

“그렇지. 그럼 용신검의 제한을 벗어날 수 있어. 소유자가 자격이 되니까.”

확실히 관점을 바꿔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타란 제국 황제가 카샤스 대공에 비해 부족한 건.

본인의 능력이니까.

그걸 강제로 끌어올릴 수 있다면.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되기는 한다.

그런데 옆에서 마왕 헤르게니아가 어림도 없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 쉽게 강해질 수 있으면. 너도나도 다 마왕이나 대천사가 되게?”

“바칠 제물이 많다고 해도?”

곧 마왕 헤르게니아가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뭔가 다른 의미가 잔뜩 담긴.

“천사 쟤네들이 아무 의도 없이 도와줄 리가 없잖아.”

“뭔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뜻이야?”

마왕 헤르게니아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대가가?”

“그건 나도 몰라.”

마왕도 모른다라.

알면서 말해주지 않는 건 아닌 듯하고.

마왕 헤르게니아가 화면을 주시하면서 내게 말했다.

“그걸 알고 싶으면 그냥 놔두던가. 재밌겠는데.”

마왕 헤르게니아는 장로회와 유저들이 전부 제물로 바뀌어도 아무 상관없다는 투였다.

그런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잊고 있는 사실을 상기시켜줬다.

“천사들 뜻대로 흘러가도 괜찮아? 저 결계 성공하면 천사들이 하고 싶은 대로 되는 건데?”

그러자 마왕 헤르게니아의 표정이 바로 굳어졌다.

“그건 안 돼.”

누구보다 천사들을 싫어하는 게 마왕 헤르게니아였다.

쟤들 원하는 대로 되는 걸 좋아할 리가 있나.

“그럼 깽판 좀 치러 가자. 천사들이 뭔 짓을 꾸미는지 몰라도 일단 막아야 하지 않겠어.”

딱히 천사들에게 나쁜 감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우리가 하려는 일을 방해하는 건 사양이라.

그리고 타란 제국 황제가 여기서 어떻게든 더 강해지는 것 역시도 마찬가지다.

바로 마왕 헤르게니아를 보면서 물었다.

“저 천사들 결계. 막을 수 있겠어?”

“결계를 부셔달라는 뜻이야?”

“가능하다면.”

그러자 잠시 생각을 하던 마왕 헤르게니아가 대답했다.

“완전히 발동된 상태의 결계는 나도 무리야. 이미 결계의 힘이 견고할 테니까 부수려면 그만큼의 힘이 필요하거든.”

그건 아마도 수많은 제물들의 힘과 맞먹는 힘을 뜻할 것이다.

아무리 마왕 헤르게니아라도 그걸 막는 건 어려운 듯 했고.

“그 전이라면?”

“가능하긴 해. 다만…….”

“다만?”

“내 정체가 드러날 수도 있어.”

“흐음. 그건 곤란한데.”

안 그래도 타란 제국 수도에 천사들이 상당수 들어와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곳에서 마왕 헤르게니아의 정체가 드러나게 되면.

그 뒤는 정말 피곤해진다.

천사들이 마왕을 발견하고도 가만히 있을 리가 없으니까.

아마도 대천사쯤 되는 녀석들이 우르르 몰려오겠지.

그럼 이곳 타란 제국에서 제 2의 성마대전이 열리는 셈이다.

이쪽은 곤란하고.

다른 방법이…….

그러다 혹시나 싶어서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물어보았다.

“그 천사의 결계라는 거. 혹시 조금만 변형시킬 수는 없을까?”

“어떻게?”

“그러니까…….”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몇 가지 이야기를 하자 곧 그녀가 박장대소하며 즐거워했다.

“재밌겠네.”

“가능해?”

“결계의 핵에 직접 다가갈 수만 있다면. 그런데 거긴 천사들이 지키고 있어서 안 될 텐데?”

“그건 내가 알아서 하고.”

고개를 돌려 재중이 형을 보면서 말했다.

“형. 카샤스 대공에게 진격 준비해달라고 말해주세요.”

“본격적으로 하게?”

“네. 천사들이 더 끼어들기 전에 정리해야죠.”

“알았다.”

그리고는 재중이 형에게도 아까의 일을 말해주자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되면 재밌겠네.”

“그럼 먼저 갈게요.”

곧 챠밍과 마왕 헤르게니아를 데리고 타란 제국 수도까지 이동했다.

수도 안이 내전 중이라 그런지 일대에 피바람이 부는 것 같았다.

이미 시간이 흘러 상당수의 병력이 죽어 나갔을 테고.

“어느 쪽이야?”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묻자 바로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에. 천사들이 몰려 있어.”

“흐음. 그렇다는 거지.”

곧 인벤에서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대천사의 검 라페르나.

그리고 바로 스킬을 시전했다.

【 대천사의 가호! 】

그러자 내 등 뒤로 대천사임을 알려주는 빛의 날개가 쭉 뻗어 나왔다.

“자. 그럼 우리 말단 천사들을 구경하러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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