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2화 분열 (4)
보유한 영토의 크기는 곧 소유자의 직위이자 힘이었다.
뭐 이건 다른 제국이나 왕국도 크게 다르진 않겠지만.
타란 제국 같이 폐쇄적인 국가에서는 외부인에게 영토를 할당한다는 일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일인데.
그냥 영토도 아닌.
무려 대영토를 넘겨준다고 하는 건.
황제파에서 이번 베르탈륨 광석의 물량을 확보하는 일을 얼마나 중요시하는지 잘 알 수 있게 해주었다.
타란 제국에서 대영토는.
공작 급 이상만이 소유할 수 있는.
그야말로 최상의 조건을 가진 영토를 뜻하니까.
일단 그 크기만 해도 다른 영지의 몇 배에 달하는 광활한 영토인데다가.
매장된 자원.
넓은 평야.
풍부한 인구에서 나오는 세수.
위치와 입지.
수도로 이어지는 교통 등.
모든 면에서 다른 영지들을 압도하는 최상의 영지였다.
실상 단순히 그 크기만 놓고 보면.
제국 내에서도 카사스 대공령 다음 가는 영지라고 보면 된다.
그러니까 공작 급으로 올라서지 않는 한.
사실상 이런 영지는 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타란 제국의 대영토들은.
황제가 직접 하사하는 영토이기도 하니까.
다른 말로.
이번 일은 타란 제국 황제에게 미리 허가를 받은 사항일 것이다.
사실 베르가 공작이 이곳에서 단독으로 결정하기에는 너무 사이즈가 크기도 하고.
황제가 뒤에서 허가를 하지 않았다면.
애초에 이야기조차 꺼낼 수 없는 일이다.
베르가 공작의 입에서 대영토가 언급되자 화련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화련이 그간 그렇게 돈을 들이붓고도 구매가 불가능한 게 바로 저런 대영토였다.
물론 화련은 베르탈륨 광산 때문에 타란 제국의 오지에 위치하는 영지를 구하긴 했지만.
구할 수만 있었다면 충분히 욕심냈을 것이다.
대영토를 가진다는 건.
타란 제국 내에서 공작 급의 위세를 가진다는 뜻과 다름없기 때문에.
지금은 화련이 백작이지만.
대영토를 가지는 순간.
바로 공작의 위치까지 올라서게 된다.
뭐 직위가 곧장 올라가고 그런 건 아니겠지만.
타란 제국 내 평판 자체가 달라지는 셈이다.
그리고 타란 제국에서 영토가 가지는 의미는.
다른 국가와는 좀 다른 점이 존재하긴 했다.
전사 형이 전에 이야기 해 주었던.
용을 키우는 환경.
영토가 넓을수록 거느릴 수 있는 용이 늘어난다고 했던가?
정확하게는 키울 수 있는 용의 종류가 달라진다고.
그러니까 대영토가 아니면.
절대 가질 수 없는.
용들을 소유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 숫자 역시 무시할 수 없었고.
타란 제국에서는.
영토가 곧 용의 힘이자.
권력이었다.
슬쩍 화련을 보면서 물었다.
<주호> 탐나요?
<화련> 솔직히 말해? 돌려서 말해?
<주호> 화련답게 말해주면 좋죠.
이건 뭐 대답을 안 들어도 알겠네.
화련 역시도 딱히 대답할 필요는 없지만 확실히 못을 박아주었다.
<화련> 구할 수 있으면. 무조건. 절대 쉽게 나오는 매물이 아니야.
<주호> 알았어요.
화련의 영지는 넓긴 해도.
사실상 베르탈륨 광산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봐야 했다.
뭐 그 베르탈륨 광산 자체가 대륙에서 최상위의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어서.
다른 단점을 다 상쇄하고도 넘치지만.
그럼에도 대영토는 필요했다.
솔직히 나중에 카샤스 대공이 타란 제국 내전을 이기고 나면 달라고 해도 되는 일이긴 한데.
지금 얻을 수 있다면.
받는 것도 절대 나쁘지 않았다.
우리 입장에서는 거저 얻어내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그리고 후에 대영토 대신 다른 보상을 노릴 수도 있다.
지금 베르가 공작에게서 대영토를 받는다면 말이지.
나와 의견을 나눈 뒤 화련이 베르가 공작에게 물어보았다.
“이건 황제 폐하의 뜻인가요?”
지금 화련이 물어보는 건.
타란 제국 황제가 인가를 한 사안인지 확인하는 중이었다.
만약 베르가 공작 단독으로 약속하는 거라면.
어차피 의미가 없으니까.
나중에 황제가 없던 일로 해버리면 그냥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된다.
그러자 베르가 공작이 화련에게 답을 주었다.
“황제 폐하께서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베르탈륨 광석을 구해오라고 하시더군.”
“그 뜻 잘 알겠습니다.”
베르가 공작은 확답을 주었다.
황제가 허락한 일이라고.
고개를 끄덕인 화련이 베르가 공작에게 말했다.
“독점 계약이라고 해도. 베르탈륨 광석을 바로 구해 올 수 없다는 사실은 잘 알고 계시겠죠?”
“물론. 하지만 언제 고대 마룡 카브레시아가 공격해올지 모르니. 조건을 걸겠다.”
“납기일을 조건으로 건다는 말인가요?”
“그렇다. 그리고 납기 물량 역시도.”
베르가 공작도 그냥 대영토를 넘겨줄 생각은 없는 듯 했다.
사실 대영토의 값어치를 고려해본다면.
베르탈륨 광석 따위야 별 의미도 없긴 한데.
지금 타란 제국 수도의 사정을 고려해보면.
그만큼 값어치가 올라갔다고 봐야겠지.
당장 방어 시스템이 발동되지 않으면 그만큼 수도에 피해가 가중된다.
베르가 공작은 그걸 최대한 막고 싶은 거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 해도 대영토는 과하긴 했다.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화련을 보면서 말했다.
<주호> 혹시 장로회 때문인가 물어봐 줄 수 있어요
<화련> 그거면 돼?
<주호> 네. 언급만 해주면 돼요.
화련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베르가 공작에게 물었다.
“혹시 장로회가 문제인가요?”
그런 화련의 질문에 베르가 공작의 표정이 확 일그러지더니 짜증난다는 듯 대답했다.
“그래. 그 늙은이들에게 대영토를 넘겨주느니 확실한 보급처를 만드는 편이 낫다.”
그 말에 화련과 눈이 마주쳤다.
<주호> 음. 아마 장로회에서는 이번에 사간 베르탈륨 광석을 넘겨주는 대가로 대영토를 노리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화련> 그렇게 보이네.
장로회라면 충분히 해볼 법한 도박이기는 했다.
당분간 베르탈륨 광석이 보급되지 않는다는 걸 장로회에서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번 경매에 무리를 한 것이었다.
황제파가 손을 들 정도로 무리한 투자는.
그만큼 보상으로 돌아올 테니.
곧 베르가 공작이 화가 난 듯 말을 이었다.
“감히 타란 제국 수도의 안전을 볼모로 잡고 이런 짓을 하다니….”
아무래도 베르가 공작은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진 않을 듯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베르가 공작이 벌써 칼을 들고 장로회를 썰러 갔을 테니까.
이곳에서 분을 삭히는 게 아니라.
그러자 화련이 베르가 공작에게 물어보았다.
“그럼 장로회를 이대로 그냥 두는 건가요?”
화련의 질문에 베르가 공작이 이를 꽉 깨물고는 답했다.
“지금 장로회와 붙으면 제국 수도가 무너진다. 녀석들도 용기사단을 다수 보유하고 있으니까.”
흐음.
역시 그런 거였나.
장로회가 겁도 없이 황제에게 갔어야 할 베르탈륨 광석을 쓸어갈 때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만약 황제가 자신들을 칠 수 있다면 거기까지 도박을 걸진 않았을 테니.
어쩌면 전에 자신들의 후계들을 베르탈륨 광산에 들이민 보복일 수도 있고.
사실 그때부터 장로회와는 선을 넘은 셈이라.
아니.
어쩌면 그 이전부터 쭉 묵혀졌던 일들이.
지금에서야 터진 셈이었다.
무엇보다.
두 거대 세력이 맞붙는 순간.
고대 마룡 방어는 물 건너가게 된다.
황제파 입장에서는 지금 장로회가 배 째라고 나와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때 뭔가 눈치챈 듯 화련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베르가 공작에게 물었다.
“황제는 장로회의 물건을 절대 사지 않을 생각이군요.”
“당연하지 않은가.”
베르가 공작의 확실한 대답에 화련이 내 쪽을 바라보았다.
<화련> 장로회는 허공에 돈을 날리겠는데?
<주호> 뭐 그렇겠네요.
화련 말대로.
지금처럼 베르가 공작이 우리와 독점 공급 계약을 맺게 되면.
장로회가 사간 베르탈륨 광석은 아무 데도 쓸 데가 없어진다.
돈을 싹 날린 셈이랄까.
실제 베르탈륨 광석의 가치는 경매가보다 훨씬 못하다.
거래로 쓸 수 없으면.
그냥 창고에 자리만 차지하는 물건일 뿐.
순간 다른 생각이 들었다.
혹시 베르가 공작 이 녀석….
우리가 먼저 제안을 해올 것을 알고 있었나?
어찌됐든 녀석은 베르탈륨 광석을 구해가야 하는 입장이니까.
일단 경매에서 이기면 그걸로 좋다.
그냥 베르탈륨 광석을 바로 방어 시스템에 쓰면 되는 일이라.
다소 비싸긴 해도.
대영토에 비하면 싸게 먹힌다.
반대로 경매에서 졌을 경우.
장로회에서 대영토를 요구해올 것이라 예상했을 테니.
이때는 우리에게 접근해서 베르탈륨 광석 독점 계약을 맺는 거다.
대영토를 보상으로 말이지.
순서의 차이는 있겠지만.
베르탈륨 광석만 보급 받으면 베르가 공작의 임무는 성공이니까.
<주호> 이 녀석. 처음부터 우리가 제안을 하길 기다린 모양이에요.
<화련> 응. 나도 지금 그 생각했어. 이러면 장로회만 물을 먹는 거라.
어차피 베르가 공작은 장로회에게서 베르탈륨 광석을 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안 그래도 장로회의 힘이 강해 건드리기 힘든데.
거기에 대영토까지 줘버리면 앞으로가 피곤해질 테니.
대신 우리라는 대안을 찾은 거고.
곧장 화련이 베르가 공작과 독점 계약부터 맺었다.
솔직히 대영토를 공짜로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보급량과 일정이 너무 빡빡했다.
대영토를 주는 대신.
확실히 받겠다는 거려나.
“이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화련도 조건을 보더니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는지 난색을 표했다.
“조정이 필요할 것 같아요.”
“안 돼. 언제 고대 마룡이 올지 모르니 최대한 비축해야 한다.”
그때 화련에게 말했다.
<주호> 된다고 해요.
<화련> 뭐? 이거 절대 안 되는 조건이야. 무슨 수로 이 납기를 맞춰 줘? NPC들 풀로 돌려도 절대 못 해.
<주호> 안 되면 그냥 반납하고 말죠.
<화련> 하아. 너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그러더니 졌다는 듯 화련이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다.
“납기를 못 맞추면 대영토를 반납하기로 하죠.”
화련에게서 확답을 듣고서야 베르가 공작이 화련과의 계약을 체결했다.
“좋은 계약이었습니다.”
이건 진짜 돌멩이를 주워다 팔아서 대영토와 바꾼 셈이라.
딱 하나 걸리는 점은.
정말 베르가 공작이 원한 납기를 맞출 수 있느냐인데.
베르가 공작이 나간 뒤.
챠밍 역시 다소 걱정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리 봐도 물량을 못 맞출 것 같아요.”
그간 생산해오던 기간과 양을 봤을 때.
챠밍 조차도 무리라고 판단한 듯 했다.
화련이 곧장 내게 고개를 돌려서 물었다.
“너 대체 무슨 생각이야? 아무리 대영토가 탐난다고 해도 이건 불가능해.”
그러자 챠밍과 화련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뇨. 가능해요.”
“네?”
“뭐?”
“애초에 고대 마룡은 수도를 공격하지 않을 거니까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둘 다 나를 보자 다시 말을 이었다.
“제가 남겨둔 여분의 베르탈륨 광석을 황제파에 넘겨주고 방어 시스템을 쓸 수 있게 할 겁니다. 그리고 난 뒤 장로회에 알려야죠. 황제파는 장로회의 광석을 살 생각이 없다는 걸.”
그리고는 웃으면서 하나의 답을 꺼냈다.
“곧 장로회의 베르탈륨 광석이 휴지 조각이 될 거예요.”
이때 뭔가 눈치챈 챠밍이 눈빛을 반짝이면서 물었다.
“고대 마룡이 공격을 안 하니까요?”
“그렇지. 소모되는 물량이 없는 데다가. 사주지도 않으면….”
“쓸모가 없어요.”
우리의 말을 들은 화련 역시도 이제는 눈치챈 듯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너 지금 장로회의 광석을 다시 사오겠다는 거 아냐. 그것도 헐값에.”
“아마도… 그렇겠네요.”
“그걸 다시 황제파에 넘기고?”
“그런 거죠.”
“와. 미친놈.”
베르가 공작이 우릴 찾아온 순간부터.
이미 둘 다 물 먹는 건 예정되어 있었다.
“제가 말했죠? 둘 다 공평하게 털어줘야 한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