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8화 고대 마룡의 둥지 (5)
사실 굳이 여기서 마왕 헤르게니아의 정체를 밝힐 필요까지야 없었지만.
화련에게서 확실한 지원을 받으려면 우리 쪽의 패를 어느 정도 보여 주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다른 생각을 하면 곤란하기도 하고.
지금이야 한배를 탔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화련을 백 프로 믿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마왕 헤르게니아는.
일종의 저지선이라고 해야 할까.
마왕과 친구를 먹었다는 말에 화련이 황당하다는 듯이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말했다.
<화련> 야…… 지금 그게 말이…….
<주호> 뭐 이전에도 마왕 스티어하고 한편 먹었잖아요. 기억 안 나요? 그리고 그 전에는 마왕 벨라하고도 손 잡았었고요.
그런 내 말에 화련이 어이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화련> 하. 대체 어떻게…… 가는 곳마다 마왕들하고 엮일 수 있는 거야?
<주호> 음. 그건 영업 비밀요.
화련이 황당해하는 것도 이해는 갔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마왕들과 함께 움직이는 유저는 전 서버에서 거의 찾아볼 수가 없으니까.
마왕이 유저를 죽였으면 죽였지.
애초에 대화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게 일반적인 마왕과 유저의 관계였다.
<화련> 됐고. 네 자신감이 어디서 나온 건지 이제 좀 알겠어.
아마 화련은 고대 마룡 레이드를 우리가 확신하는 게 마왕 헤르게니아가 있기 때문이라 여긴 모양이었다.
그런데 사실 마왕 헤르게니아가 없다고 하더라도 힘들 뿐이지.
어떻게 불가능한 미션은 또 아니니까.
물론 있으면 훨씬 편하긴 하다.
<주호> 아. 혹시라도 우리 쪽 사람들하고 부딪히지 않게 조심하라고 해주세요. 마왕이 이름만 마왕은 아니니까요.
<화련>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쓸데없이 시비 거는 일은 없을 거야. 안 그래도 사냥한다고 정신없어서 그럴 일도 없을 테고.
그러다 시선을 돌려 재중이 형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화련> 그리고 쟤가 있는데 우리 쪽 애들이 삽질할 이유도 없잖아.
<주호> 아. 하긴 그렇네요.
재중이 형은 어떻게 보면 화련이 데리고 있는 프로 팀을 키운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막대한 보상이 걸려 있다면 또 모를까.
굳이 나서서 적대하는 일은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전부 다 그런 프로 유저들로만 있는 건 또 아니라서 조심할 필요는 있었다.
적당히 정리가 된 듯하자 화련에게 말했다.
<주호> 일단 4층까지 갔다고 했으니까 그 이하 층을 우리가 써도 되겠죠?
<화련> 사냥할 수 있으면. 어차피 당분간은 공략이 안 돼.
해볼 테면 해보라는 말투라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일부러 사냥터를 비어주지 않아도 되니까 마찰이 일어날 일도 없을 것이다.
귀찮은 일은 덜었네.
“자. 그럼 한번 들어가 보죠.”
내 말에 화련이 신호를 주자 대기 중이던 화련과 한 팀인 유저들이 먼저 베르탈륨 광산 안으로 앞장섰다.
그리고 화련 역시도 그들을 뒤따라 들어갔고.
《 타란 제국의 베르탈륨 광산에 입장하셨습니다. 》
광산에 들어서자 바로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고 주변 공기가 차갑게 식어 가는 게 느껴졌다.
그때 마왕 헤르게니아가 신난다는 듯이 높은 톤의 웃음을 보였다.
“흡~~! 여기 공기 좋다아…….”
“좋다고?”
몇 가지 상태 하락 디버프가 걸려서 그걸 우리 팀에게 주의하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오히려 마왕 헤르게니아는 더 좋은 모습이었다.
“베르탈륨 광석이 많아서 그런지 아주 쾌적하네. 여기라면 힘을 좀 더 써도 되겠어.”
“그래? 그럼 그동안은 힘을 다 못 쓴 거야?”
내 물음에 마왕 헤르게니아가 근처의 벽으로 가서 바로 주먹을 크게 질러넣었다.
쾅!
그러자 그녀의 주먹이 벽에 박혀 들었고 곧 벽 사이로 제법 큰 베르탈륨 광석이 떨어져 나왔다.
“좋아.”
그러더니 마왕 헤르게니아가 베르탈륨 광석을 손에 쥐고는 그대로 뭔가의 스킬을 시전하자 그녀의 주변으로 보랏빛 기운들이 줄기차게 쏟아 나와 베르탈륨의 힘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곧 모든 힘을 빨린 베르타륨 광석은 그대로 가루처럼 흩어져 사라져 버렸고.
마왕 헤르게니아의 눈빛이 한층 붉게 변한 것을 봐서는 아마 저런 식으로 힘을 늘릴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 이거지.”
“힘을 채운 거야?”
“응. 몇 백 년 동안 헤르마늄 광산에 박혀 있었더니 힘이 다 빠져 나가서. 이제 좀 살 것 같네.”
마치 물 만난 물고기처럼 주변의 헤르마늄 광석들을 캐내어 곧장 몸으로 흡수하는 모습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재중이 형도 마찬가지.
“여기가 그녀에게는 천국이겠네.”
“뭐 그런가 봐요.”
어차피 여기 베르탈륨을 우리가 다 캘 수 있을 리도 없고.
그녀가 흡수할 만큼 하게 해주는 건 절대 손해가 아니었다.
그만큼 떨어졌던 힘을 복구할 수 있을 테니까.
여기 베르탈륨 광산의 지분 4할은 카샤스 대공의 몫이었다.
그중 나머지 6할 중 다시 70프로는 내 몫이었고.
이건 대략 전체 지분의 4할 정도가 되는 거려나?
원래의 7할에서 상당히 떨어지기는 해도.
아예 하나도 못 먹는 거보다야 훨씬 나으니까.
결코 손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일단 절반 이상이 내 지분이 아니라는 걸 고려해 보면.
마왕 헤르게니아가 원하는 만큼 흡수하게 놔두는 것도 절대 손해는 아니지.
그리고 하나의 특약을 따로 넣었는데.
만약 카샤스 대공이 이 베르탈륨 광산을 지켜야 할 일이 생기지 않을 경우에는.
이 계약은 없는 계약이 된다.
그러니까 타란 제국 황제가 여기 베르탈륨 광산을 노릴 일이 없어질 경우는.
다시 원래의 지분으로 돌아간다는 뜻이 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카베스 황제가 확 죽어 버리는 게 제일 좋은 시나리오이긴 하지만.
그게 쉽게 될 리는 없으니까.
“여기에 많아. 천천히 흡수해.”
“너 역시 좋은 녀석이었구나?”
마왕 헤르게니아가 내 말에 만족한다는 듯 베르탈륨 광산을 계속 돌아다니며 광석을 캐서 흡수를 하자 지켜보던 화련이 말을 꺼냈다.
“정말 마왕이 맞네.”
감탄 아닌 감탄을 하는 화련의 시선을 따라 마왕 헤르게니아를 보는데 갑자기 화련의 팀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크리스탈 리자드 접근 중입니다.”
“이씨. 그게 벌써 떴어?”
크리스탈 리자드?
처음 듣는 몬스터 개체였다.
궁금증에 화련에게 물었다.
“크리스탈 리자드? 네임드인가요?”
“아, 보면 알아. 왜 우리가 칼도 안 박힌다고 했는지.”
화련의 말이 끝난 그때.
베르탈륨 광산 던전 1층의 골목을 돌아 뭔가가 성큼 성큼 기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쿵쿵.
그것도 다소 어두운 던전 내부에서도 그 모습이 확연히 구분이 되는 커다란 녀석이.
심지어 녀석의 몸은…….
크리스탈 리자드를 본 이쁜소녀가 신기하다는 듯이 외쳤다.
“보석이네요?”
“그러게.”
말 그대로 보석이었다.
아니.
신체가 반짝이는 뭔가의 비늘로 잔뜩 덮어져 있었는데 빤짝이는 그 비늘들이 주변의 베르탈륨의 색과 거의 유사하다고 해야 하나?
매끄럽게 갈린 흑요석을 몸에 주렁주렁 달고 등장한 녀석을 보면 정말 보석을 몸에 걸치고 잇는 듯한 착각을 주었다.
막내별도 한마디 하는 걸 잊지 않았다.
“정말 비싸 보이네요.”
그 말에 화련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비싸. 그것도 아주 많이. 저 비늘들이 전부 다 정제된 베르탈륨 광석이니까.”
보통의 베르탈륨 광산에 존재하는 일반적인 광석들은 모두 다 순도가 낮은 형태의 광석으로 묻혀 있었다.
그걸 일일이 캐내서 정제를 해야 이제 겨우 쓸 만한 순도를 가진 광석들이 나오는 것이다.
이건 헤르마늄 광석 역시도 마찬가지라.
그러니까 단순히 광산에서 캔다고 바로 쓸 수 있을 정도는 아니라는 거지.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지금 저 마왕 헤르게니아처럼 그냥 대놓고 광석을 흡수해 버리는 방법이 있긴 했다.
뭐 그 효율 자체는 그다지 좋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순도 자체가 낮으니까.
한 번에 너무 적은 마력이 흡수 된다고 해야 하나?
처음엔 신나하던 마왕 헤르게니아도 지금은 그냥 있으니까 먹는다 싶은 느낌으로 흡수를 하고 있었다.
들이는 시간 대비 너무 적은 마력이 흡수되면 결국 마왕 헤르게니아도 순도가 높은 물건을 찾게 되겠지.
그런데 지금.
그 순도가 높은 물건을 몸에 주렁주렁 달고 있는 녀석이 눈앞에 나타난 상황이었다.
물론 저 크리스탈 리자드를 처리해야겠지만.
바로 화련을 보면서 물었다.
“잡기 힘들어요?”
“말했잖아. 칼도 안 먹힌다고. 우리가 가진 무기는 죄다 저거보다 순도가 낮아서. 마법으로 겨우 몰아낸단 말이야.”
그러면서 크리스탈 리저드의 비늘을 가리켰다.
흐음.
고전하는 이유도 어느 정도 알 것 같기도 하네.
급소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한 비늘 사이로 공격을 넣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배 쪽은요? 그쪽은 비늘이 없어 보이는데.”
“바닥을 깔고 일어나는 일이 없어. 무리.”
유일한 약점으로 보이는 배 쪽은 아예 4족으로 낮게 포복하는 녀석이라 그런지 건들이기 힘들어 보였다.
그렇다고 뒤집을 수 있냐고 하면…….
덩치가 너무 크니까 애초에 무리지.
만약 전사 형이 힘에 올인을 했다고 하더라도 저런 걸 뒤집긴 힘들 것이다.
“몰아낸다는 건 무슨 뜻이죠?”
“말 그대로야. 몰아내기만 한다고. 사냥터 바깥으로 유인했다가 떨어뜨리고 오는 거야.”
“잡진 못해요?”
“그럴 거면 벌써 1층은 접수했지. 1층에서는 저게 제일 까다로운 개체야.”
“혹시 몇 마리쯤 있어요?”
“네임드가 아니니까. 꽤 많아. 그리고 쟤들만 조심하면 1층도 사냥할 만 해. 나머지는 적어도 칼은 들어가거든.”
네임드가 아닌데도 꽤 까다로운 녀석이었다.
그나마 이동 속도가 느린 게 유일한 단점이라고 할까.
화련네가 멀리 떨어뜨리고 올 수 있는 것도 저 느린 속도 덕분일 거다.
“아마 순도가 높은 헤르마늄 무기가 있으면 충분히 갉아낼 수 있을 거예요. 아니면 같은 등급의 베르탈륨 무기도 괜찮을 테고요.”
“있겠어?”
“안 팔아요?”
“그냥은 못 구해. 용 기사단 정도는 접할 수 있어야 구하는데. 이제 겨우 카샤스 대공하고 거래 트는 중이란 말이야.”
“음. 확실히 시간이 좀 걸리겠네요.”
용 기사단의 물품을 빼내는 게 바로 되는 일이 아닐 테니.
우리야 에센시아 기사단 중 거의 두 개 정도를 몰살시키면서 꽤 많은 무구를 얻긴 했다.
흐음.
이걸 좀 풀어줘야 하나?
그런데 이미 이쪽은 전사 형을 통해 사장님에게 정리를 부탁해 놓은 상태라.
그것도 걸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전부 녹여내서 말이지.
에센시아 기사단의 무구를 어디 가서 쓰다 걸리면 그것도 보통 일이 아니니까.
반대로 싹 분해해서 길드에서 쓸 수 있으면 그게 더 이득이었다.
그리고 아직 헤르마늄 광산에서 내 몫의 헤르마늄이 들어오려면 시간이 좀 걸리기도 하고.
“일단 제 쪽에서 처리할게요.”
“되겠어?”
“적어도 칼이 안 들어가는 일은 없어요.”
그러면서 인벤에서 하나의 아이템을 꺼내들었다.
용신검 아스카론.
범상치 않은 내 무기에 화련의 눈빛이 확연하게 바뀌었다.
그것도 반짝반짝 거리는 욕망에 가득 찬 눈빛으로.
“세상에. 무기 좋은 거 봐. 그새 또 무기 바꿨어?”
무기 수집가인 그녀가 보기에도 이건 보통 물건이 아님을 직감했을 것이다.
이름에 무려 신이 들어가는 무기라.
“뭐 그냥 좀 잘 박히는 검 정도죠.”
“하. 네가 고작 그런 검을 다른 검들보다 먼저 꺼낸다고?”
음.
너무 예리한데?
“물어봐도 안 팔겠지?”
“아. 팔았다가는 누구 목이 날아가서요. 딱히 좋은 건 아니지만.”
이건 정말이다.
화련이 이거 들고 돌아다니면 진짜 바로 목이 날아갈지도 모른다.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화련이 내게 물었다.
“난 또 어디서 용신검이라도 구해 온 줄 알았네.”
그 말에 순간 우리 팀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화련을 쳐다봤다.
물론 당황한 것을 숨기는 건 잊지 않았고.
“용신검이 누구 애 이름도 아니고. 이런 데 있을 리가 있나요.”
“역시 그렇지? 듣기로 황제가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
“그걸 알고 있었어요?”
화련의 정보력이 상상 이상인데?
“알긴 하는데 그렇다고 황제 걸 뺏어올 순 없잖아.”
화련도 용신검에는 딱히 미련이 없는 듯했다.
그건 곧 타란 제국에 전쟁하자는 말과 다름없어서.
그때 갑자기 크리스탈 리자드가 우리 쪽을 발견했는지 성큼성큼 바닥을 쓸며 뛰어들기 시작했다.
“칫. 너무 여유 부렸어.”
“일단 잡고 보죠.”
바로 전사 형 쪽을 쳐다보자 전사 형이 먼저 타이탄 라지 쉴드를 앞세워 정면으로 뛰어들었다.
“어그로만 제대로 끌어줘요. 빨리 끝낼게요.”
“오케이! 간다.”
그런데.
나와 전사 형 옆으로 누군가가 더 빠르게 확 튀어나오는 게 보였다.
“헤르게니아?”
그렇게 마왕 헤르게니아가 크리스탈 리자드 위로 몸을 날리고는 한 쪽 주먹을 크게 뻗어 올렸다가 그대로 섬광처럼 주먹을 찍어 내렸다.
콰아앙!!
털썩!
단 한 번의 주먹질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크리스탈 리자드의 거대한 몸이 그대로 풀썩 주저앉으면서 마치 개구리처럼 그 자리에서 대자로 뻗어 버렸다.
그리고는 경직되어 쓰러진 크리스탈 리자드 위에 올라탄 그녀가 내 쪽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이거 내가 먹어도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