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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억분의 1의 이레귤러-1174화 (1,162/1,404)

#1174화 타란 제국 (1)

예상했던 대로 정령신의 무구를 들고 있던 레오나 에센시아는 제국 황제와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무사히 돌아왔다.

이건 아직 르아 카르테가 제대로 활성화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특이한 점이 발견되었다면 제국 황제가 레오나 에센시아를 멀쩡히 돌려보냈을 리는 없을 테니.

그리고 당연하게도 레오나 에센시아 역시 실망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상태였다.

많은 투자를 했고 부푼 기대를 안고 겨우 얻어낸 물건이 깡통이니 더 말해 뭐할까.

그런데 지금.

내가 그 정령신의 무구를 쓸 수 있게 해준다고 하자 레오나 에센시아의 동공이 더 없이 커져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네?”

“그거요. 지금 허리에 차고 있는.”

그러자 카샤스 대공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레오나 에센시아의 허리춤에 가서 멈췄다.

그리고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고는 르아 카르테를 빤히 쳐다봤다.

뭔가를 계속 살피기라도 하듯이.

이건 꼭 물건 품평하는 딱 그런 모습인데?

“전에도 봤지만. 역시 아무런 능력도 느껴지지 않는데? 정말 정령신의 무구가 맞긴 한 건가?”

카샤스 대공은 위치가 위치이다 보니 당연히 무구에 대한 조예도 상당할 것이다.

아마 무구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만으로도 그 능력을 알 수 있을 정도가 아닐까.

유저가 아이템 스펙을 확인해서 알아내듯이.

그런 카샤스 대공이 어떤 힘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건.

역시나 이 물건이 깡통임을 증명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카샤스 대공의 품평이 끝나자 레오나 에센시아 역시 다소 답답한 표정으로 르아 카르테를 내려다봤고.

“어, 맞아. 지금은 저렇게 볼품없어 보여도. 분명히 정령신의 무구가 맞아.”

그렇게 단언하는 내 모습에 레오나 에센시아의 눈빛이 기대감으로 물드는 모습이 보였다.

본인조차 확신이 없는 상태였을 테니.

내 말은 가뭄의 단비와 같은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다.

“정말 이걸 쓸 수 있게 만들어 주실 수 있나요?”

그런 레오나 에센시아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여 줬다.

“일단 할 수는 있죠.”

“하…… 다행이다.”

그제야 레오나 에센시아가 실망감을 벗어던지고 조금은 편안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뭐 그렇다고 이게 공짜는 아니지.

나 역시 준비가 필요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걸 하려면 적어도 에센시아 제국은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내가 소유한 신의 파편 역시도.

이곳 에센시아 제국에서 작업을 했다가는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신의 기운을 느낀 제국 황제가 당장 칼 들고 날 쫓아올 수도 있고.

적어도 지금 여긴 내가 작업하기에 좋은 환경은 절대 아니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요?”

그리고는 슬쩍 카샤스 대공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카샤스 대공이 알겠다는 듯 내 대신 레오나 에센시아에게 말을 꺼냈다.

“5황녀께서는 우리와 함께 타란 제국으로 가셔야 합니다.”

“네?”

무슨 뜻인지 잠시 이해를 못한 레오나 에센시아가 나와 카샤스 대공을 번갈아 빤히 바라보았다.

하긴.

지금의 레오나 에센시아에게는 정말 뜬금없는 소리로 들릴 것이다.

갑자기 타란 제국으로.

그것도 한참 황위 경쟁에 뛰어들어야 하는 5황녀에게 타란 제국으로 가자고 하는 거니까.

“전혀 이해가 안 되는데…….”

아무리 레오나 에센시아가 머리가 좋다고 해도.

단서조차 주어지지 않은 상태로 무작정 가자고 하면 답이 안 나오는 건 매한가지다.

“그게 주호 왕자의 조건입니다. 황녀께서 타란 제국으로 가는 것 말이죠.”

잠시 뜸을 들였다가 카샤스 대공이 살짝 본심을 섞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 역시 가급적이면 동행하셨으면 좋겠군요.”

그런 카샤스 대공의 요구에 다소 복잡한 표정으로 레오나 에센시아가 물어보았다.

“이건 공식적인 타란 제국의 요청인가요?”

이건 레오나 에센시아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렇게 여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

제국의 황녀 위치에 있는 그녀가 다른 제국으로.

그것도 타 제국의 대공의 요청을 받아 간다는 건.

어쩌면 공식적인 행사가 될 수도 있는 문제라.

그리고 이건 잘못하면 외교적인 문제로까지 번질 수 있는 건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제국의 황녀가 볼모로 끌려가는 모양새가 날 테니까.

그런 레오나 에센시아의 물음에 카샤스 대공이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타란 제국 사절로서 요청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면…….”

“제 개인적인 요청이라고 여기셔도 괜찮겠군요.”

그러면서 카샤스 대공이 슬쩍 나를 바라보았다.

카샤스 대공은 분명히 의식하고 있을 것이다.

레오나 에센시아가 조만간 제국 황제에게 죽을 수도 있을 거라는 내 말을.

차마 그 말은 꺼내지 못할 테고.

자신조차 믿기 힘든 일이라.

그녀를 설득하기에는 다소 명분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대외적으로도 설명하기 힘들기도 할 테지.

그러니까 이건 대공 개인적인 요청으로 끝나야 한다.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어 제국 황제의 의심을 사는 순간.

레오나 에센시아는 절대 에센시아 제국을 떠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역시나 이 정도로는 레오나 에센시아를 설득하긴 무리였다.

잠시 생각에 잠긴 레오나 에센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비공식적인 일이라면 제가 에센시아 제국을 지금 떠날 수는 없어요.”

그러면서 나를 다시 쳐다보며 단호한 말투로 물었다.

“주호 왕자께서는 제가 타란 제국으로 가는 방법 외에 다른 제안을 해주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그러자 카샤스 대공은 조금은 곤란하다는 듯 나를 돌아봤다.

가급적이면 개인 요청 정도로 끝내고 싶었던 것 같은데.

황녀를 움직이는 일이 그렇게 쉽게 끝나진 않겠지.

잠시 생각을 해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을 꺼냈다.

그것도 황녀 입장에서는 꽤 충격적일 수도 있는 말을.

“에센시아 제국에 남아 있으면 황녀께서는 반드시 죽을 겁니다.”

그러자 오히려 각오했다는 듯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황위 싸움에서 제가 이기면 되는 일이에요.”

이거 참.

그녀도 카샤스 대공하고 똑같은 착각을 하고 있네.

고개를 돌려 카샤스 대공에게 말했다.

“답답하지? 너도 좀 전에 이랬다.”

“할 말이 없군.”

나와 카샤스 대공의 말에 레오나 에센시아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뭔가를 눈치챈 듯 내게 물었다.

“혹시 제가 모르는 일이 있는 건가요?”

“네. 황녀께서는 별로 알고 싶어하지 않겠지만요.”

“설명…… 부탁드릴게요.”

적어도 듣고자 하는 준비는 되어있네.

그렇다면야.

“음. 간단히 말하자면 황녀는 여기서 죽을 거예요.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요.”

“그 말은 좀 전에 들은…….”

자기가 죽는다는 말을 연달아 듣고 싶은 이는 별로 없을 터.

문제는 그다음이다.

“제국 황제가 직접 죽일 거예요. 황녀를요.”

“네……?”

이번에는 꽤 충격을 먹은 듯 그녀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는 그녀가 들고 있는 르아 카르테를 가리켰다.

“정령신의 무구. 그거 활성화시키고 나면. 높은 확률로 죽어요. 황제에게.”

그나마 내가 옆에 있으면 어떻게든 손을 써줄 수도 있겠지만.

곧 타란 제국으로 가고 나면 그녀는 이곳에 혼자 남게 된다.

거기다 카샤스 대공 역시도 없을 테고.

그럼 아무도 제국 황제를 막아줄 수가 없다.

“어째서…….”

“제국 황제는 신의 흔적을 찾는 중이라서요.”

그러자 그녀 역시도 르아 카르테를 내려다보더니 이제야 납득했다는 듯 말했다.

“정령신인가요…….”

“뭐 같은 거죠. 이 신이나 저 신이나. 어쨌든 같은 등급의 신위니까.”

제국 황제 입장에서는 원래 찾던 게 아니라 꿩 대신 닭일 수도 있겠지만.

둘 다 노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부인할 여지가 없다.

“황녀를 죽이고 뺐든지. 아니면 유폐시켜놓고 가지든지. 둘 중에 하나겠죠.”

“……어느 쪽도 제겐 좋진 않겠네요.”

황녀도 이제 알 것이다.

정령신의 무구를 가졌다는 사실이 어떤 의미로 돌아오는지.

“아니면 황녀가 정령신의 무구를 얌전히 황제에게 가져다 바치는 것도 한 방법이겠네요.”

“그건…….”

“어차피 그냥 무기일 뿐이잖아요. 목숨보다는 나을 텐데요.”

차라리 르아 카르테를 제국 황제에게 주고 황위 싸움을 하는 게 레오나 에센시아 입장에서는 훨씬 나은 선택일 수도 있었다.

아마 보통의 황자나 황녀였다면 한번쯤은 고려해 봤을 법한 선택 사항이기도 할 테고.

뭐 이렇게 되면.

내 입장에서는 좀 아쉽긴 하려나?

미래 역대 최강의 영웅이 사라지는 셈이라.

물론 레오나 에센시아가 혈통이 좋으니 기본은 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성마대전 역사 전체가 틀어지게 될 테고.

인간군의 전력 중 가장 큰 한 축을 담당하던 그녀가 사라지게 된다는 건.

그냥 단순히 나비 효과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가령 예를 들어 그녀가 직접 상대해서 저지해야 할 마왕들이 마음대로 활개치고 다니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거기서부터 이미 문제지.

추가로 곳곳에서 전혀 알 수 없는 이변이 생길 테고.

어쩌면 성마대전 판을 완전 다시 짜야 할지도 모르겠네.

그러니까 지금 그녀 입에서 나오는 선택이.

성마대전 전체 판도를 바꿀 선택이 될 것이다.

정작 본인은 전혀 모르겠지만 말이지.

그리고 한참을 고민을 하던 레오나 에센시아가 결국 어렵게 한 마디 말을 꺼냈다.

“저는…….”

* * * * *

북적북적.

“자자. 다들 준비 끝났으면 슬슬 움직이죠.”

카샤스 대공이 에센시아 제국 황제와 회담을 가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앞으로 배정된 거대한 비공정 한 대를 빌려 가지고 왔다.

아무래도 카샤스 대공의 용만으로는 다수가 장거리 이동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니까.

다들 좀 불편함을 감수하고 가면 되긴 하겠지만.

이쪽도 딸린 식구가 적진 않았다.

굳이 불편하게 가고 싶은 생각도 없었고.

지금 이곳에는 우리 팀뿐만 아니라.

다수의 인원들이 카샤스 대공이 대여한 비공정에 오르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옆에 서 있던 카샤스 대공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꽤 수완이 좋은데?”

“네가 얻어오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 뭐…… 그렇지. 제국 기사단의 전용 비공정이 상당히 좋아 보여서 말이야.”

지금 이 비공정은 전에 우리가 헤르마늄 광산에서 타고 오면서 눈독을 들였던 바로 그 비공정이었다.

제국 기사단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그걸 지금 카샤스 대공이 가져온 거고.

“나라고 해도 이걸 공짜로 가져올 수는 없지.”

그러면서 카샤스 대공이 시선을 돌려 주변을 보자 눈에 익은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에센시아 제국 기사단의 제복들.

그리고 몇몇은 예전에 봤던 인물들도 있었다.

그중 한 명이 빠르게 내게 달려오더니 내 옆의 어두운 기운을 풀풀 풍기는 카샤스 대공을 피해 내 옆으로 돌아섰다.

“혹시 너도 가냐?”

“아…… 왜! 그리고 나라고 좋아서 가는 줄 알아?”

“그래?”

“갑자기 기사단 재배치 당했는데 별수 없잖아.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지금 내 앞에서 양 허리에 손을 올려놓고 빤히 날 올려다보는 녀석은 바로.

원래 3기사단에 배치되어 있어야 할.

미래의 공작이자 절망의 기사.

라첼이었다.

“이런 식으로 막 옮기는 게 어딧어! 혹시 네가 뭐 한 거 아냐?”

“넌 타국의 왕자가 제국 기사단의 인사권에 간섭할 수 있다고 생각해?”

“휴. 하긴 그러네. 내가 널 너무 과대평가했나 봐.”

끙.

얘는 정말 미래의 공작이 되는 게 맞긴 한가.

한 대 쥐어박고 싶네.

하지만 속으로는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 녀석의 재배치는 내가 손을 쓴 게 맞으니까.

“에휴. 누가 이랬는지 몰라도 진짜 찾기만 해봐! 5기사단으로 가면 좌천이잖아.”

곧 한참 시끌시끌한 우리 사이로 누군가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녀를 보고는 웃음 지으면서 말했다.

“오셨네요. 레오나 에센시아 황녀.”

“네. 주호 왕자.”

“그럼…… 타란 제국으로 가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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