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0화 신의 파편 (14)
원 역사에서 타란 제국의 카샤스 대공과 에센시아 제국의 레오나 에센시아가 직접 만난 일은 내가 알기론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말이지.
물론 그런 자리가 아닌 누구도 알 수 없었던 비공식적인 자리가 있을 수도 있지만.
굳이 카샤스 대공 같은 거물이 끈 떨어진 에센시아의 황녀를 만날 일이라는 건 대체로 일어나기 힘든 일이 아닐까.
만약 중간에 나란 변수가 있지 않았더라면.
그 둘은 만날 확률 자체가 제로에 수렴한다.
그러니까 원 역사에서는 서로 얼굴 마주칠 일이 없었단 말이지.
반대로 지금은 어쨌거나 서로 만난 것도 모자라 카샤스 대공이 직접 도움을 주기도 했으니까.
이전의 완전히 인연이 없던 때와는 완전히 상황이 다른 셈이다.
내가 레오나 에센시아에 대한 언급을 하자 카샤스 대공의 동공이 살짝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흐음.
이거 정말 둘 사이에 뭐가 있는 건가?
곧 평정을 찾은 카샤스 대공이 별 것 아니라는 투로 내게 말을 했다.
“지금 내가 레오나 에센시아 황녀에게 관심이 있어서 그녀를 도와주었다고 물어보고 싶은 건가?”
“아냐?”
아니라고 반문하는 내 말에는 카샤스 대공이 잠시 침묵을 지켰다.
들을 가치도 없어서 딱히 대답을 하지 않겠다는 건지.
아니면 정말 그런 건지 모르겠네…….
그러더니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오히려 담담한 말투로.
“에센시아 제국의 황위 다툼을 고작 사사로운 감정으로 할 것이라 여긴 거냐?”
맞다.
듣는 입장에 따라 굉장히 모욕이 될 수도 있는 발언이기도 하다.
상대가 그런 마음이 전혀 없었다는 가정하에 말이지.
당장 카샤스 대공이 자신을 무시했다면서 칼을 들이밀어도 할 말이 없을 테고.
그런데 카샤스 대공은 말만 할뿐.
그 어떤 제스처도 취하진 않았다.
딱히 기분 나쁘다는 모습도 아닌데.
흐음.
여기서 딱 한 번만 더 떠볼까?
“나쁘진 않다는 거네?”
“……무슨 대답이 듣고 싶은 거냐?”
“아니. 그냥 그렇다고.”
아마 더 긁으면 재미없을 것 같은 느낌이라 적당히 여기서 끝내기로 했다.
그때 카샤스 대공이 내게 슬쩍 던지듯이 말해주었다.
“강하더군.”
“응?”
“레오나 에센시아.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하다.”
“그래?”
저 카샤스 대공 입에서 강하다는 말이 나오다니.
솔직히 인간군 내에서 강한 녀석들을 앞에서부터 줄 세우면 거의 선두에 설만큼 카샤스 대공은 강하다.
실제로 내가 본 모습이나 역사의 기록상으로도 그렇고.
어지간한 국가들을 대표하는 영웅들은 카샤스 대공에게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니.
그런 카샤스 대공이 직접 자기 입으로 강하다고 말한다라…….
이건 나도 좀 알아야겠는데.
전에 레오나 에센시아가 강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건 처음이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누구? 나와?”
“아니…… 타란 제국의 대공과 비교하면 너무한 거지. 나도 그 정도는 바라지도 않고.”
“흠.”
잠시 무엇인가 생각을 하더니 카샤스 대공이 내게 말했다.
“웬만한 최상위 마족보다는 확실히 강할 거다.”
“……뭐?”
순간 나도 놀라서 몸이 굳을 정도였다.
그 정도까지 레오나 에센시아가 강하다고?
물론 레오나 에센시아도 일단은 황녀이긴 하니까 그 피가 어디 가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변변찮은 지원 하나 받지 못한 황녀가 그렇게까지 강하다?
이건 건실한 외가를 통해 제대로 지원 받았다면 그보다 훨씬 강해질 수도 있단 말이 된다.
아니.
그런데 그렇게 강한 레오나 에센시아가 어떻게 역사서에는 한 줄도 적혀 있지 않은 거지?
만약 성마대전 도중에 사망했다고 하더라도.
그냥 맥없이 죽어 줬을 리는 없을 텐데.
제국 황제처럼 독에 당한 거라면 또 모를까.
하지만 레오나 에센이사가 독에 당했다는 언급 역시도 역사서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너무 중요도가 떨어져서 적지 않는다면 말이 되긴 하는데…….
카샤스 대공이 옆에서 지켜보고 대놓고 강하다고 평하는 황녀가 아무런 비중이 없다?
뭔가 이상해.
분명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다.
그때 카샤스 대공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아마 제대로 성장했으면 마왕만큼 강해졌을지도 모르겠군.”
“……그거 진짜냐.”
“내 안목은 정확하다.”
최상급 마족까지는 어떻게 될 수 있다 치자.
다수의 영웅들 사이에서 그 정도 급까지는 올라가는 이들이 상당수 있기도 하고.
하지만 마왕은 다르다.
마왕을 상대할 수 있는 급이라면 애초에 보통의 인간과는 완전 다른 개체로 봐도 무방하다.
굳이 비교하자면 절망의 기사 라첼 공작처럼.
라첼 역시도 왜 그렇게 강한가 궁금하긴 했는데.
마왕 헤르게니아가 라첼이 반은 마족이라는 말을 해주어서 어느 정도 납득했던 거고.
혈통 자체가 다르니까.
하지만 레오나 에센시아는 황족이라는 걸 빼버리면 그다지 혈통에 대한 이득이 없을 텐데?
제국 황제가 저렇게 강한 건.
에센시아 제국의 모든 자원을 들이부었으니까 가능한 거지.
그저 그런 황녀에게는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황제의 혈통이 상대적으로 더 좋은 건 맞긴 해도.
그렇게 치면 다른 모든 황자와 황녀들도 괴물 같은 녀석들이 되어야 말이 된다.
같은 황제의 혈통을 이어받았으니.
죄다 마왕을 상대할 괴물이 되어야겠지.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일부 황자와 황녀들 빼고는 그렇게 두각을 드러내는 녀석들도 없었다.
그 녀석들조차 단독으로 마왕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지.
나중에 시간 더 지나면 또 모를 일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뭔가 숨겨진 게 있다.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던 카샤스 대공이 짧게 알 듯 말 듯한 말을 했다.
“넌 모르는가 보군.”
“응?”
“황녀의 힘의 원천.”
아니.
내가 그걸 알면 이러고 있을까.
전혀 모르겠다는 듯 카샤스 대공을 쳐다보자 그가 마지못해 던지듯 말을 꺼냈다.
“일단은 너도 레오나 에센시아를 지원하는 입장이니 알긴 해야겠군.”
여기선 대답할 말이 없어서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레오나 에센시아에 대해서는 아는 것보다는 모르는 게 더 많다.
역사에 기록된 내용으로 다 알 수 없다면.
카샤스 대공에게 듣는 게 최선이다.
“너도 알다시피 타란 제국의 황족들은 용혈을 이어받는다.”
“그래. 그건 널리 알려진 유명한 일화니까.”
“개중에 용혈이 진한 녀석도 있고 옅은 녀석도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용혈이 가진 특성을 이어받아 강한 편이지.”
용의 피.
그것만으로도 이미 검증된 혈통이나 다름없었다.
전투력에서만큼은 최강이니까.
아무리 약하게 타고 나도 일반인 수준은 아득히 넘어서는데다가…….
슬쩍 카샤스 대공을 바라봤다.
제대로 진하게 용혈을 타고 태어난다면.
지금 저 카샤스 대공처럼 엄청난 괴물이 탄생하게 된다.
순간 뭔가가 떠올라서 카샤스 대공에게 물었다.
“굳이 용혈을 언급하는 이유…… 그건 레오나 에센시아 황녀의 혈통 때문인가?”
“그렇지.”
“에센시아 제국 황제의 혈통도 좋긴 해도 용혈 정도는 아닐 텐데?”
“맞아. 하지만 제국 황제 역시 역대 가장 강하다는 영웅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신의 가호를 받은 혈통이지.”
“그래. 그게 에센시아의 건국 신화니까.”
타란 제국이 용혈을 이어받은 것처럼.
에센시아 제국 역시도 우수한 혈통을 이어받은 집단이었다.
지금은 옅어져서 사라진 신의 가호.
아마 이게 제국 황제가 그렇게 신의 흔적에 매달리는 이유이기도 할 테고.
거기다 본인의 생명 줄도 걸려 있으니.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해.”
“그렇지. 신의 가호는 당대에 들어서 약해졌으니까. 우리 용혈이 대를 이어가며 점점 옅어지는 것처럼.”
하.
그렇게 옅어진 게 카샤스 대공이라는 소린가?
내가 어이없다는 듯 카샤스 대공을 바라보자 당당하게 녀석이 말했다.
“물론 난 예외지.”
“그래. 잘났다.”
뭐 일단은 녀석도 돌연변이라는 건데.
그럼 레오나 에센시아도 그런 거려나?
신의 가호가 진하게 돌아온?
“황녀도?”
“아니. 레오나 에센시아 황녀는 아니다.”
“그럼?”
“그녀는 전혀 다르지. 모계가.”
“응?”
“몰랐나? 그녀의 어머니는 정령족이다.”
“정령족?”
“정확하게는 대정령의 기운을 강하게 타고 난 혈통이지. 어떻게 제국 황제가 손에 넣었는진 모르겠지만. 강력함으로만 치면 용혈에 못지않은 우수한 혈통이다.”
《 정령족의 비밀 고대 기록에 접근하셨습니다. 》
《 관련 정보를 열람할 수 있게 됩니다. 》
시스템 창을 보자 몇 가지 추가 사항을 열어볼 수 있었다.
정령족의 탄생 기원이라던가.
종족 특성 같은.
그리고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정령의 가호……?”
“어떻게 알았나?”
“아니. 그냥 그럴 것 같아서.”
“흠. 정령의 가호는 정령족 특유의 능력이지.”
물론 금속의 정령이 쓰는 가호와는 특성이 다르긴 하겠지만.
어쨌든 인간이 정령의 가호를 쓸 수 있다는 건.
특히 레오나 에센시아가 그게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놀랄 일이었다.
“레오나 에센시아도 쓸 수 있단 말이겠군.”
“그렇지. 그녀는 정령족의 기운을 진하게 타고 났으니까.”
“거기다 신의 가호가 있는 에센시아 제국 황족이라는 거고?”
내 말에 카샤스 대공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
솔직히 라첼 공작의 혈통의 특이성만 특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특별함으로 치면.
레오나 에센시아 쪽이 오히려 한 수 위였다.
신의 가호와 더불어 정령족의 가호가 동시에 적용되는 존재니까.
당장 라첼 공작만 해도 후에 마왕들이 피해 다니는 판인데.
과연 레오나 에센시아는 어떨까 싶기도 하고.
정말 제대로 큰다면.
눈앞의 카샤스 대공만큼이나 괴물이 될 수 있는 혈통이었다.
순간 챠밍이 말한 카샤스 대공이 레오나 에센시아를 좋아할 수도 있다는 뜻이.
아마 전혀 다른 방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기도 하고.
보다 강한 이를 선호하는 카샤스 대공의 특징.
그게 만약 레오나 에센시아에게 호감으로 적용한 거라면?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그녀를 도와주었다고 생각해 보면…….
아주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원 역사에서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던 이들이 만나니까.
전혀 다른 식으로 일이 진행되어 버렸다.
그것도 레오나 에센시아의 손에 정령신의 무구가 들어가기도 했고.
아마 원 역사와는 이미 꽤나 일이 틀어졌을 지도 모르겠다.
그때 한 가지 가정이 머리를 확 스쳐갔다.
분명 그녀가 정령족의 혈통을 받아 정령의 가호를 쓸 수 있다고 했었지?
그런데 르아 카르테는 애초에 정령신의 무구였다.
에센시아 제국 내의 비밀 던전 역시도 정령석이 가득한…….
몇 가지 사실들이 연달아 머릿속을 마구잡이로 헤집어 뒤엉키는 순간.
바로 재중이 형에게 연락을 넣었다.
<주호> 형. 아무래도 우리가 뭔가를 착각한 것 같아요.
<불멸> 왜? 카샤스 대공이 칼 들고 싸우제?
<주호> 아뇨. 그게 아니라…….
그리고는 간략하게 카샤스 대공에게 들은 이야기를 우리 팀들에게 전달해 주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재중이 형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불멸> 하. 이거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주호> 네. 그런 것 같아요.
<불멸> 굳이 열심히 안 찾아도 됐던 거네.
재중이 형 말이 맞다.
그동안 줄기차게 찾으려고 노력했던 존재는 애초에 찾을 필요조차 없었던 거였다.
<주호> 전대 최강의 영웅. 그게 바로 레오나 에센시아에요.
내 르아 카르테의 전 주인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