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4화 신의 파편 (8)
성마대전 시대에 인간군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내던 몇몇 영웅 중에 하나를 딱 집어서 말하면.
반드시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에센시아 제국의 절망의 기사.
라첼 공작이 들어간다.
마왕군의 마왕들조차 싸우지 않고 피할 수 있다면 피해간다는 그 괴물.
최강이라고 불리는 마왕들에게 있어.
싸워봐야 본전.
지면 개 쪽이라고 해야 하나?
혹은 정말로 마왕을 죽일 수도 있는 존재 중에 하나이기도 했고.
솔직히 인간이 아무리 강해봐야 어떻게 마왕을 죽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긴 했었다.
굳이 뽑자면.
에센시아 제국의 황제 정도가 아마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제국의 지원을 몰빵해서 만들어낸 존재니까 조금 예외라 치고.
그리고 내가 아는 NPC 중에 가능성이 있는 녀석은.
용기사인 카샤스 대공.
타란 제국 황제의 동생이기도 한 카샤스 대공은 역시 마찬가지로 타락 제국을 대표하는 괴물이었다.
특히 타고 있는 용의 종류에 따라 전투력이 천차만별로 바뀌니까.
주변 상황에 따라 마왕을 압도하는 능력을 보여줄 수도 있지 않을까.
마왕 중에서 비교하면 예전의 마왕 벨라와 비슷한 포지션이라고 보면 된다.
당장 인간이 닿을 수 있는 정점에 닿아있는 녀석들이지.
그런데 이들과 달리.
라첼은 주어진 환경 자체가 전혀 달랐다.
애초에 황족도 아닐뿐더러.
지금도 그냥 에센시아 기사단의 말단 기사 중에 하나일뿐이었다.
이번 역시 제대로 된 활약이 없었기도 하고.
예상했던 라첼 공작의 그것과는 거리감이 어마어마하다고 해야 하려나?
물론 시간이 지나고 뭔가 계기가 있으면 분명히 강해지는 건 맞지만.
딱 이 시점에서만 보면 흔하디 흔한 기사 중 하나에 불과했다.
거기다 지하 사원에서 까딱 잘못했다면 죽을 수도 있었지.
내가 중간에 막아주지 않았다면 말이야.
이 녀석이 아무리 성장을 미친 듯이 한다고 해도.
마왕급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을 솔직히 나도 믿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마왕 헤르게니아가 라첼을 보더니 완전 의외의 말을 했다.
“마족이라고?”
“응? 모르겠어? 딱 보니까 티가 나는데.”
당연히 모르지.
유저인 내가 NPC의 상태창을 직접 보지 못하는 이상에야.
라첼이 반은 마족인지 그냥 마족인지 알 리가 있나.
만약 그런 편한 기능이 있었다면.
에센시아 제국에서 손쉽게 마족만 골라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굳이 애써 찾아다니는 수고까지 하지 않더라도 말이지.
혹시나 라첼이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싶어서 슬쩍 쳐다봤더니 녀석은 지금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는 모양이었다.
“쟤 안 들리나?”
그러자 마왕 헤르게니아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 주변만 소리가 안 나가게 막았어.”
“아. 그렇군.”
전에 분명히 다른 마왕이 결계를 펼쳐서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때와 다른 점은 이번에는 그냥 간단하게 소리 정도만 듣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정도였다.
내 대답에 마왕 헤르게니아가 의아한 듯 물어보았다.
“할 줄 몰라?”
“난 전투 특화라. 굳이 할 필요가 없어.”
“헤에…… 너 원래 광천사였구나?”
광천사?
그건 또 뭐지?
모르는 용어가 나오자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 마왕 헤르게니아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설명을 해주었다.
“아! 천사들은 모를 수도 있겠네. 마왕들끼리 부르는 말이야. 전투에 미친 또라이 대천사라고. 눈이 회까닥 돌아가서 같이 죽자고 뒤따라올 때면 얼마나 무서운데.”
“……그런 의미였나.”
마왕들에게 미친 또라이라고 불린다니.
얼마나 비정상적인지 모르겠네.
“음. 네가 그렇다는 건 아니고.”
“알아.”
만약 그랬다면 마왕 헤르게니아가 이렇게 순순히 나를 따라왔을 리는 없을 것이다.
“일단 넌 거부감이 들지 않아.”
“그래?”
“으음. 아마도 마신의 파편에서 나오는 기운 때문이려나? 이상하게 친숙하단 말이야.”
그건 아마 마신의 파편보다는 호감도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호감도가 올라감에 따라 자연스럽게 친근하게 느낄 테니.
뭐 어쨌든 마왕 헤르게니아가 친숙하게 느낀다면 그것도 괜찮다.
슬쩍 고개를 돌려 라첼을 보면서 물었다.
“쟤는 어때?”
“아. 반쪽짜리 마족? 뭐어…… 나쁘지는 않아.”
나쁘지 않다라.
마왕이 타인에게 줄 수 있는 평가로는 좋은 점수라고 봐야 하나.
“아니. 그보다는 저 녀석이 강해질 수 있을까?”
내 질문에 의외라는 듯 마왕 헤르게니아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해주었다.
“나도 몰라.”
“모른다고?”
“응. 하프는 보통은 태어나기 힘들어서. 태아 상태에서 죽던지. 출산하다가 죽던지. 그것도 아니면 자라나다가 빨리 죽어버려.”
“보통은 다 죽는다 이건가?”
“그래. 저렇게까지 다 자란 하프는 나도 정말 처음 보는 걸.”
그리고는 마왕 헤르게니아의 눈빛이 사뭇 달라졌다.
마치 재밌는 장난감을 본다는 딱 그런 눈빛으로 라첼을 바라보며 말했다.
“괜찮으면 내가 연구해 봐도 될까?”
“연구?”
“응. 신기하니까 하나, 하나 해체해서…….”
그 말을 듣자마자 바로 마왕 헤르게니아의 말을 끊었다.
“불가.”
“에…… 왜?”
아니.
얘가 지금 누굴 실험체로 쓰겠다고.
라첼이 강해지는가를 물어보는데 해체하는 걸로 답변이 나오면 내가 뭐라고 대답해줘야 해?
당연히 안 된다고 할 수밖에.
미래의 마왕도 두들겨 잡는 라첼 공작이 고작 이런 곳에서 실험체로 잡혀가게 둘 순 없었다.
타락 천사 실험체들만 봐도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눈에 선했다.
“아무튼 안 돼.”
“정말?”
“어, 쟤 건들면 앞으로 꽤 재미없을 거야.”
이건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주는 경고였다.
라첼을 함부로 실험체로 쓰지 말라는.
그러자 마왕 헤르게니아가 한껏 실망한 눈치로 말했다.
“하아. 아깝다. 진짜 엄청난 녀석이 나올 수도 있을 텐데.”
아니.
네가 굳이 안 그래도 앞으로 엄청난 녀석이 나올 거라고.
잘하면 마왕인 너도 두들겨 잡을 수 있는.
성마대전의 미래를 모르는 마왕 헤르게니아는 절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됐고. 그래서 성장 가능성은 있는 거지?”
내 물음에 마왕 헤르게니아가 확실한 답변보다는 가능한 예측만 내놓았다.
“아마 아주 강하더나. 아주 약하거나. 둘 중에 하나일 거야.”
“네 기준으로 아주 강하다는 건……?”
“잘하면 마왕만큼 강해질 수도 있겠지.”
“좋아.”
이 정도면 내게는 확답이나 마찬가지였다.
라첼이 아직 긁지 않은 복권이라는 걸 확인시켜 준 거니까.
혹여나 예상만큼 강해지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그때는 또 다른 방법을 쓰면 되는 일이라.
대화가 끝나자 마왕 헤르게니아와 내 주변의 공기가 일렁이는 게 느껴졌다.
이거였나.
차단하는 능력이.
아마 마왕에게서 얻을 스킬로도 재현이 가능할 듯 한데…….
라첼이 쪼르르 와서는 내게 물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한 거야?”
“아. 네 미래를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회의였지.”
“뭔 헛소리야?”
그런 게 있단다.
곧 라첼을 뒤로 하고 아이라 루벤과 타룬 벡스터에게 가서 말했다.
“그럼 철수하도록 하죠.”
살펴보니 내가 말하기도 전에 이미 그들은 철수를 위한 준비를 다 마친 상태였다.
아이라 루벤이 주변 기사들에게 외쳤다.
“모두 철수한다. 뒤처지는 녀석들 없도록.”
그러자 다들 환호를 했다.
“와! 집에 간다!”
“휴. 꼼짝 없이 여기서 죽는 줄 알았네.”
모두의 환호와 함께 이동을 시작하자 재중이 형과 우리 팀이 내 옆으로 붙었다.
다들 내 뒤에 있는 마왕 헤르게니아를 흘깃 쳐다보는 건 덤이었고.
“아, 이쪽은 내 동료들.”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우리 팀을 소개하자 잠시 우리 팀을 한 번씩 훑어보다가 꽤 흥미로운 눈빛을 보였다.
“얘는 마룡의 기운이 느껴지고. 쟤는…… 마왕이야? 왜 마왕에게서 나는 향기가 나지?”
처음에 본 건 재중이 형.
아마도 마룡의 창을 자주 꺼내들고 다녀서 그런지 뭔가 알 수 있는 게 있는 듯 했다.
그리고 뒤에 본 건 챠밍.
챠밍의 무기 역시도 마왕의 무기 중에 하나니까.
아마 쓰기만 해도 기운이나 향기 같은 것이 은연중에 베이는 듯 했다.
그러자 재중이 형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불멸> 쟤 무슨 개코냐?
<주호> 모르겠어요. 그냥 알 수 있나 봐요.
<불멸> 정말 특이한 녀석이네. 다른 마왕은 잘 모르는 듯한데.
솔직히 나도 마왕 헤르게니아가 보자마자 알 수 있을 지는 몰랐다.
아마 그녀가 보유한 특수한 고유 스킬이라던가 능력 중에 하나일 지도.
“와, 쟤도 약하지만 마왕의 기운이 느껴져.”
이번엔 전사 형이었다.
저건 발뭉 때문이겠지.
발뭉 역시도 마왕의 무기 중에 하나라서.
곧 마왕 헤르게니아가 날 빤히 바라보면서 물었다.
“쟤들 대체 뭐야? 다들 그냥 인간 같은데…….”
“나쁘지 않지?”
내 말에 마왕 헤르게니아가 다시 나머지 우리 팀을 훑어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부활의 첫발을 내딛는 부하들로는 그럭저럭?”
그런 그녀의 말에 바로 머리를 살짝 쥐어박았다.
“부하가 아니고. 동료.”
이거 마왕의 머리를 쥐어박아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왠지 이래도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도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리더니 대답했다.
“알았어. 부하 같은 동료.”
“하아. 말을 말자.”
아마 같은 마왕이라고 판단되는 나만 동등한 동료로 인식되는 듯 했다.
그래도 적대를 하지 않는다면 이것도 나쁘다고 할 순 없지.
그리고 딱히 재중이 형이나 우리 팀들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주호> 다들 괜찮죠?
<불멸> 어, 마왕이 제멋대로인거 어디 한 두 번 보나.
슬쩍 챠밍을 보자 역시 같은 의견이었다.
<챠밍> 마왕을 같은 편으로 두는 거라면. 괜찮아요.
조금 다른 의견도 있긴 했다.
<방패전사> 내가 빨리 강해져서 쟤 머리 한 대 쥐어박아 준다.
그 말에 모두가 웃음 지었고.
<주호> 가능하면 해주세요.
그렇게 무난하게 헤르마늄 광산을 빠져나오는 동안엔 그 어떤 공격도 받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마왕 헤르게니아가 알아서 치워버린 듯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광산을 나와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쐬자 숨이 확 틔였다.
아이라 루벤이 내 쪽을 보면서 말했다.
“기사단의 비공정으로 돌아갈 예정인데. 같이 갈 텐가?”
“음. 그럼 좀 신세지도록 하죠.”
아무래도 우리끼리 돌아가는 것보다야 기사단에 묻혀서 에센시아 제국으로 들어가는 편이 훨씬 돌아가기 수월할 것이다.
무엇보다 내 쪽은 몰래 빠져나와서 말이지.
그리고 드워프 장로 맥크라이가 내게 와서 말했다.
“우린 뒤를 수습하고 돌아가겠네. 누군가는 해야 하니까.”
이건 아마도 우리의 흔적이 남지 않게 조작한다는 뜻일 테다.
급하게 일을 진행한다고 여기저기 흔적을 남기고 왔으니까.
“그럼 부탁합니다.”
덕분에 뒤처리는 걱정 안 해도 되겠네.
다들 비공정에 올라 탄 다음 공중으로 떠오르자 전사 형을 따로 불렀다.
“형. 처리해줘야 할 물건들이 있어요.”
“응?”
“2기사단과 5기사단의 장비들요. 아무래도 에센시아 제국 내에서는 처리가 힘들 것 같아요.”
그들을 죽이고 가져온 장비가 절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걸 에센시아 제국에서 풀어놨다가 추적이라도 당하면 정말 귀찮은 일이 생길 터.
“그래. 알았다. 몰래 해보지.”
“부탁해요.”
모든 장비를 전사 형에게 넘겨주고는 곧장 대화 상대 중 한 명에게 귓속말을 넣었다.
<주호> 오랜만입니다.
<화련> 먼저 연락을 다 하고. 갑자기 무슨 일이야?
<주호> 전에 부탁한 일. 처리해 드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