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6화 성마대전 시대 마왕과의 조우 (16)
우리가 성마대전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진 않지만.
그래도 그 당시 기록되어 있는 사건들 중 굵직한 내용들 중 일부는 잘 알고 있었다.
규모가 크던 전투의 승패라던가.
흑은 특수한 존재가 나타나는 이벤트 같은.
그때 당시에는 전혀 알 수 없지만.
후에 가서야 알 수 있는 내용들도 꽤 있었고.
그중 하나가 지금 저 아크 드래곤의 행방이었다.
중간에 갑자기 툭 하고 튀어나와서 성마대전의 마왕군 쪽에 참전했던 네임드.
그리고 지금.
원 역사에서 아크 드래곤을 누가 등장시켰는지 어렴풋이 유추할 수가 있었다.
일단 마왕 헤르게니아가 만들었지만 봉인은 풀지 못해 이곳을 벗어나진 못 했을 거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서 저 마족 베인이 이곳 헤르마늄 광산에 도착했을 테고.
무슨 수를 쓴지 몰라도 결국 마왕 헤르게니아를 빼내었을 확률이 높아 보였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봉인을 깨려고 자기 상관인 마왕에게 도움을 받았을 수도 있겠지.
결과적으로 시간이 지나면 마왕 헤르게니아는 여기서 나가게 되고 역사는 원래대로 흘러갔을 터였다.
그런 내 예상을 뒷받침이나 하듯 베인 녀석이 말을 꺼냈다.
“원래 이 봉인지에 도달하려면 꽤 시간이 걸렸을 겁니다.”
봉인지?
역시 베인 녀석은 마왕 헤르게니아가 이곳에 봉인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처음부터 노리고 있었다는 말이 되겠지.
“하지만 누군가 아크 드래곤을 잡아준 덕분에 꽤 일이 쉬워졌죠.”
그러니까.
내 덕분에 원 역사보다도 훨씬 이른 시점에.
이 마족 베인 녀석이 이곳 지하 사원에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역사대로였으면 아직도 아크 드래곤은 건재할 테고.
누구도 접근하지 못했겠지.
그런 베인 녀석의 말에 내가 알고 있다는 듯 말을 보탰다.
“그 로가슈 왕국의 주호 왕자 말인가.”
내 입으로 직접 정체를 말하는 건 꽤 웃기는 일이긴 하지만.
아직 베인 녀석은 내가 누군지 전혀 모르니까.
“예. 정말 놀랍다는 말로도 부족하더군요. 대천사들과 마왕들조차 쉽게 손을 대지 못하는 아크 드래곤을…….”
그 말에 슬쩍 고개를 돌려 마왕 헤르게니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같은 마왕도 손을 못 댈 괴물이라…….
넌 대체 봉인 당해 있으면서 뭘 만들어 낸 거냐?
내가 빤히 자신을 바라보자 마왕 헤르게니아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물었다.
“왜?”
“아니. 그냥 대단하다 싶어서.”
“흥? 말이 중간에 많이 생략된 것 같은데?”
의심스럽다는 듯 나를 이리저리 돌아보는 마왕 헤르게니아를 쳐다보며 그냥 웃음만 보였다.
방금의 말을 들어 보면 내가 그 주호 왕자라는 것을 얼추 예상했을 텐데 말이지.
전혀 내색하지 않고 나를 쳐다보고만 있자 나 역시 김이 빠졌다.
보아하니 이 녀석도 딱히 내 정체를 밝힐 생각도 없는 듯 하고.
어쩌면 내가 왕자라는 것에 딱히 관심이 없는 것일 수도.
마왕에게 인간 나라의 왕자라는 건 뭐…….
크게 신경 쓸 만한 일이 아닌 것 맞다만.
그렇게 둘이 더 말을 잇지 않고 있자 마족 베인이 말을 이었다.
“그 로가슈 왕국의 왕자가 아크 드래곤을 눌러준 덕분에 에센시아 제국 황제가 이곳으로 저희를 파견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 녀석은 에센시아 제국의 5기사단장이었다.
아무 상황에서나 단독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위치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다 이번에 기회가 생긴 거고.
곧 이 녀석의 원래 위치가 떠올랐다.
그래.
한 번은 이야기해야 했다.
“그럼, 에센시아 제국 황제의 명령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아…… 그것 말이죠.”
그것이라.
에센시아 제국 황제가 이들에게 전달한 명령은 확고하다.
바로 이 헤르마늄 광산에서 신의 흔적을 찾아오는 임무.
기사단의 기사단장으로서 하달 받은.
다른 상황을 전부 무시해야 할 최대 임무이기도 하고.
의외로 녀석은 태연하게 내 말을 받았다.
“제가 에센시아 제국 황제의 명에 따라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너 일단은 기사단장 아냐?”
“아시다시피 위장이죠.”
맞다.
이 마족 베인에게 있어서 명령의 우선 순위는 제국 황제의 명이 아닌.
1군단장인 마왕 녀석의 명일 터다.
하지만 그렇다고 알고 있던 걸 무시할 정도는 아니겠지.
마침 이곳까지 들어온 좋은 기회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제국의 방해 없이 이곳을 둘러볼 수 있는 상황이니.
“그래도 분명히 욕심은 날 텐데?”
무려 신의 흔적이다.
녀석이 정확히 알고 있는지는 확신할 순 없지만.
그리고 지금 말하는 걸 들어보면 대략적으로 뭐가 있는지 제국 황제에게 들은 모양이었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마왕이 귀뜸해줬을 수도 있을 테고.
혹 마왕이 이 베인 녀석을 시켜서 마왕 헤르게니아와 함께 신의 흔적까지 회수해 오라고 명령했을 수도 있다.
그런 내 말에 마족 베인이 정말 아쉽다는 듯 말을 내뱉었다.
“흠. 최상급 마족 수준에 불과한 제가 신의 흔적을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그대로 소멸할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왕 헤르게니아를 쳐다보자 그녀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베인 녀석의 말을 증명이나 하듯 확고하게.
“응. 마왕 정도가 아니라면 손 댈 수가 없어.”
“아예 건들 수도 없다는 건가?”
“왜? 시켜 봐?”
시켜본다는 말에 마족 베인의 몸이 크게 움찔 거렸다.
그것도 얼굴에 긴장한 듯 식은땀이 흐르기도 했고.
아무래도 정말인가 보네.
만약 정말 마왕의 명령이 있었다고 해도 자기가 소멸할 것을 알면서도 손대는 간 큰 녀석은 없을 테니까.
“상성상 최악이라. 능력이 약한 녀석들은 잡는 순간 사라져 버릴 거야.”
졸지에 약한 녀석들이 되어버린 최상급 마족이 되어 버렸지만.
베인 녀석은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거려나.
“그럼 제국 황제의 명령은 어떻게 할 생각이었지? 네가 아니더라도 다른 기사단 녀석들이 신의 흔적을 찾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내 물음에 베인 녀석이 시선을 돌려 아까 죽어버린 2기사단장의 시체 방향을 쳐다보았다.
“이거면 증명이 되겠습니까.”
“미리 죽여 버리려고 했다?”
“네. 기회를 봐서 다른 기사단장들도 하나씩 제거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 베인의 말에 나 역시 납득해버렸다.
“확실히 좋은 기회이긴 하네.”
일단 마왕군 입장에서 보면 에센시아 제국의 기사단장들은 꽤 걸리적거리는 존재들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런 녀석들은 이런 외진 곳에서.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죽일 기회가 생긴다?
이보다 더 나은 상황이 과연 있을까.
여기서는 누가 죽어나가도 모르니 얼마든지 실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동안은 보는 눈이 많아서 함부로 나서지 못한 듯 했고.
그런 상황에 내가 나타나 2기사단과 5기사단을 싸그리 몰살 시켜버렸으니.
녀석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하늘에서 구세주가 나타난 것과 다름 없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아니었다면 본인이 직접 그 상황을 만들어야 했을 테니.
“그래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녀석이 내게 꽤 우호적으로 대답을 착실하게 해주는 것은.
이런 것들이 도움이 된 모양이었다.
뭐 옆에 마왕 헤르게니아가 있기도 하고.
나 역시도 마왕이라 생각하고 있을 테니 당연하긴 하겠지만.
속이고자 했으면 얼마든지 속였을 수도 있다.
베인 녀석과의 대화가 끝나자 잠시 생각에 잠겼다.
흐음.
일단 녀석과 내 목표가 겹치진 않는다 이거네.
간단하게 베인 녀석은 마왕 헤르게니아와 아크 드래곤.
그리고 제국 기사단의 몰살 정도가 주어진 미션이라고 보면 될 듯 했다.
반대로 내 쪽은 역시 마왕 헤르게니아와 신의 흔적이 주된 목적이었고.
뭐 중간에 우리를 우호적으로 대하는 3기사단과 7기사단을 살려 가면 좋긴 할 텐데…….
지금 보아하니 이 녀석은 그 녀석들을 살려줄 생각이 그다지 없어 보였다.
적당히 타협을 봐야 한다는 거려나.
흘리듯 베인 녀석에게 물어보았다.
“3기사단과 7기사단은 어떻게 할 생각이지?”
그런 내 물음에 베인 녀석이 내 의중을 파악하려는지 잠시 대답을 미루었다.
그리고는 한 마디 말을 꺼내놓았다.
“마왕님께서는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내게 공을 넘긴다 이건가?
이 녀석.
눈치가 빠르긴 하네.
그러니까 5기사단장으로 계속 숨을 수 있었겠지만.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을 이었다.
“살려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죽이시지 않는 겁니까?”
베인 녀석 입장에서는 마왕인 내가 그들을 살린다는 것에 꽤 반감이 있을 수도 있다.
마왕이라면 당연히 다 죽인다에 손을 들어주었을 테니.
녀석이 의심을 하기 전에 설명을 해 주었다.
“만약 기사단 녀석들을 전부 다 죽인다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네?”
“여기서 싹 몰살 시키는 건 어렵지 않아. 하지만 그렇게 되면 네 위치는 어떻게 될 것 같나.”
“흠. 당연히 2, 3기사단장이 죽었으니 제 위치가 올라가겠죠.”
얘가 아직도 상황 파악 못 하네.
내 뜻은 그게 아닌데.
“아니. 제국 황제가 그렇게 녹록한 놈은 아니라는 걸 알 텐데?”
“……절 의심할 거라는 뜻입니까?”
그래도 하나를 던져 주니 바로 이해해서 다행이다.
“그래. 아무리 제국 황제라고 해도 기사단을 마구잡이로 찍어낼 수는 없어. 거기다 그런 기사단이 지하 사원을 조사하러 들어갔다가 싹 죽어나간다? 생존자는 너 하나밖에 없고?”
“음. 확실히 의심 가능한 상황이 되겠군요.”
“어, 내가 만약 제국 황제라면. 제일 먼저 널 불러다가 고문한다.”
고문이라는 말에 마족 베인의 몸이 다시 움찔했다.
마족이라도 고문은 싫은 듯 했다.
뭐 변태가 아닌 이상 좋아할 놈이 있긴 할까 싶다만.
“황제는 의심이 많아. 그것도 네 상상 이상으로 아주.”
내가 잠시 살펴본 황제는 쉽게 남을 믿는 성격이 절대 아니었다.
베인 녀석이 전부 몰살했다고 보고 하는 순간 그렇냐면서 웃고 넘어갈 리가 전혀 없다는 소리다.
이곳 지하 사원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가를 생각하기 이전에.
베인 녀석부터 족치고 보겠지.
“알겠습니다. 그럼 3기사단과 7기사단은 일단 손대지 않겠습니다.”
“뭐 적당히 줄이는 것 정도는 괜찮지만 몰살은 안 돼.”
딱 이 정도에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주었다.
마왕이 돼서 아예 죽이지 말라고 하는 것도 이상한 그림이니까.
“그리고 너도 네 기사단이 전부 죽은 걸 해명하는 게 쉽지 않을 거다.”
기사단이 전부 죽었는데 혼자 살아가는 상황이라.
그러자 베인 녀석이 알고 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잘 처리하겠습니다.”
아마 생각해둔 게 있는 모양인데 알아서 잘 하겠지 싶었다.
그리고 이제 다른 기사단 녀석들과 마주쳐도 문제는 없을 듯 하고.
고개를 돌려 마왕 헤르게니아를 보자 그녀는 그다지 이쪽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하긴 제국 황제는 그녀의 관심사가 아닐 테니.
“슬슬 움직여야겠어.”
“응. 좋아.”
봉인을 풀러가자는 뜻으로 들었는지 마왕 헤르게니아의 표정이 좋아졌다.
얘도 마왕이 맞나 싶네.
겉으로 표정이 확 드러나니.
바로 재중이 형에게 연락을 넣었다.
<주호> 형. 여긴 상황 종료에요. 합류해야겠어요.
<재중> 그래? 알았다. 약속한 위치에서 보자.
곧장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물었다.
“가는 길에 문제없겠지?”
“응. 얘들 싹 치워놨어.”
“아주 좋아.”
원래라면 가는 길에 각종 몬스터들과 싸워야겠지만.
그녀가 걸리적거리는 것들을 싹 치워버린 듯 했다.
덕분에 아무 방해 없이 지하 사원의 지하로 점점 내려가자 어느 순간 공기가 확 바뀌는 게 느껴졌다.
이건…….
신성이려나?
지하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상쾌한 기운이 온몸에 흘려들자 신체가 가벼워지며 힘이 충만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반대로 마족 베인이 힘겨워하면서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마왕 헤르게니아 역시 짜증난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고.
그리고 바로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 신의 흔적 메인 퀘스트가 갱신됩니다. 》
그래.
확실하네.
신의 흔적이라는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