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5화 성마대전 시대 마왕과의 조우 (15)
이 녀석을 이곳으로 보낸 게 어떤 마왕인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히 에센시아 제국 황제의 명이나 따르라고 보내진 않았을 테고.
그런 예상은 녀석의 입을 통해 확인되었다.
원하는 물건이라는 베릭의 말에 갑자기 통로의 공기가 차갑게 식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마왕 헤르게니아가 허리에 손을 얹더니 베릭에게 물었다.
“너, 누가 보냈어?”
“네?”
“어떤 마왕 새끼가 보냈냐고.”
흠.
확실히 마왕 헤르게니아는 대천사들에게 꽤 봉인이 되어 있어서 그런지 지금의 상황을 잘 모르는 듯했다.
성마대전이 일어나서 마왕군과 천사군이 대치를 하고 인간군이 끼어 있는 지금 시대를.
어쩌면 알면서 물어보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러자 마족인 베릭이 조금은 당황스런 표정으로 대답했다.
“1군단의 마왕님이라고 말씀을…….”
“아. 그러니까 그게 누구냐고.”
마왕 헤르게니아가 여기서 막 나간다고 하더라도.
솔직히 마족인 베릭은 그녀에게 반항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지.
만약 1군단을 맡고 있는 마왕이라는 녀석과 마왕 헤르게니아가 사이가 좋지 않은 경우에는.
이야기가 좀 달라질 수 있었다.
내가 있던 시대에서도 마왕들끼리 파벌을 나눠서 서로 싸우지 않았던가.
뭐 중간에 우리가 끼어서 좀 상황이 많이 이상하긴 했지만.
어쨌든 서로가 기회가 되면 죽일 만한 충분한 이유 한두 가지 정도는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마왕들이 서로 단합이 잘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고.
지금은 성마대전을 치르면서 좀 수면 아래로 내려간 듯 하지만.
조금만 문제가 생기면 서로 치고 박을지 모르는 게 마왕들이라...
그러니까 지금 저 베릭의 입에서 나오는 마왕이 누구냐에 따라.
눈앞의 녀석과 싸워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가 결정될 것이다.
잠시 멈칫 하던 베릭의 의아한 눈빛으로 마왕 헤르게니아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정말 1군단장님을 모르십니까?”
이건 의심이다.
녀석의 눈가가 차갑게 가라앉으면서 등 뒤로 어둠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왕 헤르게니아가 짜증난다는 듯 베릭에게 외쳤다.
“아이씨. 내가 지금 딴 놈들 뭐하는지까지 알아야 해?”
“……흠.”
순간 마족 베릭의 뒤로 피어오르던 마기가 싹 줄어들었다.
그리고는 입가에 가벼운 웃음을 보이며 편안하게 말을 꺼냈다.
“역시 마왕 헤르게니아 님이 맞으시군요.”
속으로 조금 놀라는 눈빛으로 마왕 헤르게니아와 베릭을 바라봤다.
어……?
이게 돼?
좀 전까지 의심을 하는 듯했던 베릭에게서 그런 모습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그러자 마왕 헤르게니아가 슬쩍 내게 말해 주었다.
“마왕끼리는 원래 서로 하는 일에 그다지 관심 없어.”
이건 마왕 헤르게니아가 내게 주는 조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냥 단순히 겉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오히려 다른 마왕 하는 일에 더 파고들면 그게 더 수상한 짓이야.”
“그렇군.”
상황은 대충 알겠고.
그보단 저 마족 베릭이 우리를 잠시나마 의심을 했다는 거려나.
그리고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건 마왕 헤르게니아를 정확히 찍어서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미래의 원 역사를 알고 있었던 우리마저도 이곳에 와서야 마왕 헤르게니아의 존재를 알게 되었는데 말이지.
그렇다는 건 원래는 마왕 헤르게니아가 겉으로 전혀 알려지지 않았어야 정상일 텐데.
일개 마족이 그녀를 알고 있다라…….
방금 그녀가 했던 말도 신경이 쓰였다.
다른 마왕이 하는 일을 파고드는 게 더 수상한 일이라고.
1군단의 마왕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곳 헤르마늄 광산까지 자신의 부하를 보낸 데다가 마왕 헤르게니아를 알고 있다?
이건 오히려 우리 쪽에서 의심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마왕 헤르게니아가 베릭 녀석을 막 대하는 것도 지금 보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듯했고.
흐음.
문제는.
이 녀석이 마왕 헤르게니아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점인데.
그렇다는 건 나 역시도 계속 보고 있지 않았을까?
마왕 옆에서 같은 마왕 행세를 하고 있는 나를 말이지.
슬쩍 나를 한 번씩 보면서도 내 정체에 대해서는 전혀 물어보지 않았다.
분명히 궁금할 텐데 말이야.
사실 내 이름은 마왕 족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베릭 녀석의 기억 속에서 찾으려고 해도 절대 찾을 수 없을 테고.
이번에도 잠시 내게 시선을 주더니 미묘한 웃음과 함께 다시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말했다.
“사실 마왕 데칸 님께서 보내셨습니다.”
마왕 데칸?
순간 머릿속에 마왕 데칸에 대한 정보가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그다지 기억에 남아있는 게 없었다.
분명히 전사 형에게 듣기는 들었는데 말이지.
그렇다는 말은 성마대전 시대에 그다지 활약을 못 했거나.
혹은 중간에 죽어 버렸거나.
둘 중에 하나다.
아니면 정말 뒤에서만 움직여서 역사에 기록이 되어 있지 않은 경우도 있을 테고.
바로 전사 형에게 연락을 넣었다.
<주호> 전사 형. 혹시 마왕 데칸에 대해서 아는 것 있어요?
<방패전사> 그 마족 녀석을 마왕 데칸이 보냈데?
이미 저쪽에선 재중이 형이 상황을 모두 알려준 듯했다.
그러니 전사 형이 듣자마자 바로 유추한 거다.
<주호> 네. 1군단장 마왕이라는데. 전 기억에 없어서요.
있긴 있는데 흐릿한 거다.
<방패전사> 으음…… 그 녀석. 아마 중간에 죽을 건데?
<주호> 그래요?
<방패전사> 전사 시점은 정확하지 않은데. 성마대전 후반부에 나오질 않아. 죽었거나 혹은 그냥 잊혀졌거나.
역시 전사 형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중요도가 떨어지는 마왕이라 이거지…….
그런데 여기서 의아한 점이 있었다.
어떻게 그런 수준의 마왕이 제국에 자신의 첩자를 넣어두기까지 한 거지?
보통의 능력으로는 그게 전혀 불가능할 텐데.
어설프게 해서는 아예 조직 자체를 만들어낼 수 없다.
뭐 마왕 자체의 전투 능력이 낮아서 이런 일에 특화된 거라면 또 할 말이 없긴 한데.
지금 베릭 녀석의 말을 들어보면 무려 마왕군 1군단의 마왕이란다.
그렇다는 건.
전투 능력도 어지간히 뛰어나지 않고서야 절대 불가능한 자리라는 말이 된다.
잘 싸우는 데다가.
군단을 맡을 정도로 세력이 좋은데.
상대 적국의 기사단을 버젓이 손에 넣을 능력자가?
그냥 그렇게 사라진다?
뭔가 이상해.
앞뒤가 맞지 않아.
아니.
정확하게는.
원 역사를 대략 알고 있는 우리가 들어야 이상함을 알 수 있는.
그런 의심이었다.
다른 녀석들은 듣는다고 해봐야 전혀 이상함을 느낄 수 없는 말이라 이거지.
그러니까.
이 마족 녀석이.
지금 우리 앞에서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마왕들을 상대로 말이야.
보통의 마족 수준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그때 내가 아는 척을 했다.
“마왕 데릭이라…… 마왕군도 이번 성마대전에 꽤 신경을 썼군.”
“흠. 이쪽 마왕님께서는 잘 알고 계시는군요.”
알다마다.
모를 리가 있나.
애초에 성마대전의 원 역사 자체를 알고 있는데.
그 마왕에 대해 아주 세세히 파고들면 알 순 없겠지만.
그래도 겉으로 훑을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다른 마왕들의 반대가 심했을 텐데. 어떻게 된 거지?”
그런 내 물음에 마족 베릭의 눈에 이채가 띄였다.
“……그것까지 알고 계십니까?”
“다른 마왕 일에 관심이 없다고 아주 귀를 닫고 살진 않아서 말이지.”
방금의 말들은 내가 마왕이 아니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후에 가서야 알려지는 역사니까.
그러자 녀석도 내가 의심스럽다는 듯 바라보던 시선을 어느 정도 걷어 들이는 모양새였다.
“제가 실수할 뻔했군요. 요즘 문제가 많아서 잠시 착각했습니다.”
그런 마족 베릭에게 경고를 섞어 말했다.
“두 번은 없어.”
“주의하겠습니다.”
역시.
마왕들 사이에 내 이름이 없으니 의심하는 건 당연한 일일 테다.
그런데 그런 수상한 녀석이 마왕 헤르게니아와 같이 다니고 있으니.
더 떠 봤을 지도 모르고.
잠시 멈칫하던 마족 베릭이 내게 정중하게 다시 물어보았다.
“혹시…… 어느 세력에 속하신 마왕이신지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이건 마왕 헤르게니아의 말에 비추어봤을 때 굉장히 실례가 되는 물음일 것이다.
다른 마왕의 일에 관심을 저렇게 가지는 것 자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물어본다는 건.
이 정보를 반드시 얻고 싶다는 거겠지.
옆에서 마왕 헤르게니아가 약간의 짜증을 섞어서 말했다.
“왜? 알면 일러서 뒤통수 치게?”
“흠. 아닙니다.”
역시 예상한 게 맞았네.
소속 같은 건.
직접 보고 알아내야 하는 거지 마족 따위가 마왕에게 직접 물을 만한 내용은 아닌 듯했다.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마족 베릭이 말을 꺼냈다.
“소속을 미리 알고 있어야 실수를 하지 않겠죠.”
그때 마왕 헤르게니아가 묘한 미소와 함께 내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어?
가만있던 얘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슬쩍 마왕 헤르게니아를 바라보자 그녀가 입을 닫으라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며 눈치를 줬다.
‘가만히 있어.’
아마 말로 하면 딱 이 정도이려나?
그러자 나와 마왕 헤르게니아를 번갈아 바라보던 마족 베릭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습니다.”
“눈치 빨라서 좋네. 네 상관한테 가면 괜히 신규 마왕이라고 건들지 말라고 해. 나 마왕 헤르게니아를 알고 있다면 말이지.”
으음.
이거…….
곤란한데.
방금의 행동은 아예 대놓고 나를 자신의 세력이라고 다른 마왕들에게 소개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내 소개를 신규 마왕이라고 하면서 조기에 의심을 없애 버리는 발언을 해주었다.
이 정도면.
대놓고 자신이 나의 신분 보장을 해주겠다는 건데.
보통 다른 마왕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만한 행동을 그녀가 하고 있었다.
빤히 마왕 헤르게니아를 바라보자 그녀가 입가에 웃음기를 띄면서 신나는 듯 말했다.
“기브 앤 테이크 알지?”
“하아. 그런 말은 대체 어디서 배운 거냐…….”
“그래서 싫어?”
그런 그녀의 말에 굳이 대답을 하지 않고 넘겼다.
아마도 이게 좋다 싫다할 성격의 물음은 아닐 것 같아서 말이지.
마왕 헤르게니아도 딱히 대답을 원하고 물어본 건 아닐 것이다.
그 대답보다 중요한 건.
앞의 내용이었다.
주고받을 게 있다라.
흐음.
자신의 봉인을 풀어주는 대가라 이건가.
뭐 이건 내게도 나쁘지는 않았다.
정체가 확실한 마왕이 신분 보장을 해준다는 건.
앞으로 내가 어떠한 행동을 하더라도.
그들 눈에는 마왕으로 보인다는 뜻이 될 테니까.
내 스스로 마왕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것보다 말이지.
그러니까.
지금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마왕 신분을 공식적으로 얻어냈다는 뜻이 된다.
그런 거에 비하면 봉인 정도 풀어주는 건 그냥 공짜나 다름없는 일이 될 테다.
오히려 내가 뭔가 더 해줘야 하는 상황일 지도.
딱히 거기까지는 관심이 없는 듯 하지만.
마족 베릭을 보면서 아까 했던 말을 다시 물어보았다.
혹시 녀석의 상관인 마왕 녀석과 우리가 원하는 물건이 겹치게 된다면.
그때는 지금처럼 하하호호 하면서 대화로 쉽게 넘어가는 일따위는 없을 테니까.
“마왕 데칸이 원하는 물건이 정확히 뭐지?”
내 쪽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자 마족 데릭의 표정도 진지하게 변했다.
녀석도 알 것이다.
자신이 말하는 물건과 내가 원하는 물건이 겹치게 되면 일어날 일에 대해서.
그럼에도 녀석은 주저하지 않고 말을 꺼냈다.
그것도 내 옆의 마왕 헤르게니아를 바라보며.
“마왕 데칸 님께서는. 아크 드래곤을 원하고 계십니다.”
“아크 드래곤?”
“네. 정확하게는 1군단에 마왕 헤르게니아 님께서 보유하신 아크 드래곤을 들여오고 싶어 하십니다.”
호오.
이것 봐라?
원 역사가 여기서 나온단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