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9화 성마대전 시대 마왕과의 조우 (9)
『 합성된 드래곤 실험체 XI 』
목표했던 아크 드래곤이 아닌 그 하위인 실험체라고 해도 일단은 베이스가 드래곤이다.
거기다 마왕 헤르게니아의 특제 석상이라고 하는 걸 봐서는 절대 약하지도 않을 테지.
그리고 그 증거가 지금 눈앞의 이 광경이었다.
대부분의 2기사단과 5기사단 기사들이 합성된 실험체의 브레스에 직격당해 바닥에 형편없이 쓰러져 있었다.
피할 장소가 넉넉하지 않은 이런 좁은 통로에서의 브레스면 누가 되든 피하기는 쉽지 않을 테니까.
그나마 라지 쉴드를 앞에 세우고 버텨낸 녀석들도 제법 있었지만.
그들의 장비 역시 브레스에 녹아내려 원래의 형체를 구분하기 힘들어 보였다.
괜히 녀석들만 따로 분리한 게 아니다.
만약 지금 이 자리에 3기사단과 7기사단이 있었다면.
이런 식으로 브레스를 날리기 전에 한 번쯤은 고민해 봤을 테지.
같이 쓸어버리기에는 다른 기사단들이 좀 아까우니까.
그러면 그 잠시 멈칫하는 사이에 녀석들이 빠져나갈 확률도 높았다.
무엇보다 마왕 헤르게니아가 녀석들을 일일이 구분해 가면서 사정을 봐줄지도 의문이다.
아예 다 죽여 버리면 죽였지.
그 와중에 2기사단장과 5기사단장을 비롯한 그 주위의 몇몇 기사들은 브레스 속에서도 크게 피해를 입지 않은 듯 상태가 제법 양호해 보였다.
흐음.
일단 기사단장은 기사단장이라는 거려나.
에센시아 제국의 최정예 중에 최정예인 녀석들을 고작 이 한 방으로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긴 했지만.
예상 이상으로 멀쩡한 모습을 보자 속으로 혀를 찼다.
아크 드래곤의 브레스로 직격 당했으면 그냥 녹아 버렸을 텐데.
조금은 아쉽다는 생각과 함께 은신한 상태로 기사단 주변을 맴돌았다.
여기서 녀석들의 가장 큰 문제는.
이 전의 싸움에서 회복술사들을 모두 잃어버렸다는 점이었다.
피해를 받으면 바로 복구를 해줘야 하는 녀석들이 없으니 이런 광범위한 피해를 입은 경우는 답이 없게 된다.
지금처럼 체력이 급하게 깎여서 경직이 온 경우는 더 그렇고.
체력을 회복시켜 주거나 경직을 푸는 마법을 쓰거나.
혹은 뭔가의 아이템을 써야 할 텐데.
기사들이 자체적으로 거기까지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괜히 이런 던전 공략에서 회복술사를 데리고 다니는 게 아니다.
원래라면 회복술사가 다 죽은 상황에서는 더 이상의 공략을 하지 않는 게 원칙이지만.
2기사단장의 오만과 과도한 욕심이 지금의 화를 불렀다.
솔직히 녀석도 어느 정도 피해를 보면 기사들이 한꺼번에 다 쓰러지지 않는 이상 적당히 로테이션이라도 돌려서 버티면 된다는 생각이었을 텐데.
딱 지금이 그 예상을 벗어나는 상황이었다.
이런 좁은 통로에 저렇게 큰 드래곤을 풀어버릴 줄 누가 알겠는가 싶기도 하고.
애초에 드래곤 같은 녀석이 여기에 있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라.
그걸 잘 아는지 2기사단장이 쓰디쓴 표정과 함께 말했다.
“여기에 드래곤이 왜 있는 거냐.”
하지만 그 물음에는 누구도 대답해주지 못했다.
쟤들이 마왕 헤르게니아의 변덕을 어떻게 맞추겠는가.
아니.
마왕이 지금 여기 있는 것 자체도 모르는 상황이니.
당연한 거려나?
만약 마왕이 이 지하 사원에 있는 걸 알았다면.
절대 저 전력으로는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다 죽어 나갈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지.
오히려 현재의 제국 상황이라면.
아크 드래곤과 싸우고 남아 있는 전력을 다 털어 와야 겨우 싸움이 될 텐데.
뭐 덕분에 내 쪽은 일이 편해졌다.
그때 옆에서 마왕 헤르게니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다 죽일 거야?”
마치 자신이 죽이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안달이 난 것처럼 물어보는 그녀에게 당연하다는 듯 대답해 주었다.
“내 먹이니까. 건들지 마.”
“흐응…… 어쩔까나.”
아쉽다는 듯 말을 흐리는 그녀에게 확실히 다시 못 박았다.
“나중에 더 좋은 것들 죽이게 해줄게.”
“그래?”
“뭐. 대천사라던가…….”
“진짜?”
대천사를 죽일 수 있게 해준다는 소리에 마왕 헤르게니아의 목소리가 한껏 고양되는 느낌이었다.
어지간히 대천사가 싫은 모양이네.
하긴.
녀석들이 아니었으면 제 스스로 봉인 속으로 뛰어들어 이 고생을 하고 있지 않았을 터.
그것도 몇 백 년이나 그러고 있었으면.
대천사의 대자만 들어도 화가 치밀어 오를 만도 했다.
그런데 마왕 헤르게니아가 마냥 내 말을 믿을 만큼 멍청하거나 하진 않았다.
약간의 의심을 담아서 그녀가 내게 물었다.
“과연 네 말을 내가 믿을 수 있을까?”
마치 그녀 자신에게 하는 물음인 양 내게 묻자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여기서 선택지가 갈린다.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확신을 주던가.
아니면 적당히 말로 얼버무리면서 이 상황을 넘기던가.
그렇게 고민을 하다가 짧게 한숨을 쉬고는 인벤에서 하나의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여기서는.
확실하게 녀석의 신용을 얻고 간다.
어설프게 끌고 가기에는 일단 이 녀석은 나보다 강하니까.
적어도 내가 제어할 수 있는 상황이 되기 전에는.
이 녀석 스스로 내가 강하다는 걸 느끼게 인식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인벤에서 하나의 아이템을 꺼내드는 순간.
마왕 헤르게니아의 목소리가 더 없이 커졌다.
마치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란 눈빛이랄까.
“어…… 어? 이걸 네가 어떻게 가지고 있는 거야?”
내가 꺼내든 아이템은 다름 아닌.
대천사의 검.
라페르나.
마왕과는 극상성의 속성을 가진 대천사의 검이 내 손에 들리자 마왕 헤르게니아가 바로 뒷걸음질하면서 물러났다.
그런 그녀에게 라페르나를 흔들면서 느긋하게 말했다.
“대천사들은 자기 무기를 흘리지 않는 거 잘 알지?”
“그래. 만약 대천사가 죽더라도 바로 회수해 가니까.”
그런데 그때.
마왕 헤르게니아가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그런데 마왕이 어떻게 대천사의 검을 잡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어?”
아.
그런 문제가 있었던가?
솔직히 난 마왕이 아니라서 잘 모르는 일인 데다가.
그동안 어떤 마왕도 대천사의 검을 들고 다니는 걸 본 적이 없어서 아예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얼떨결에 확실한 정보 하나를 얻었다.
마왕이나 대천사나 서로의 무기는 잡지 못한다는 것.
그렇다는 건.
서로가 죽이더라도 상대의 무기를 가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말인데.
이 와중에 마왕인 내가 대천사의 검을 들고 있으니 마왕 헤르게니아가 놀랄 법도 했다.
순간 머릿속으로 하나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내 특성.”
“응?”
“난 마왕과 천사의 무구를 다 쓸 수 있어.”
내 말에 잠시 눈을 깜빡거리던 마왕 헤르게니아가 깜짝 놀랄 눈빛으로 말했다.
“세상에! 너…… 그거였어?”
“아아. 그래.”
딱 하나.
속성이 다른 무기를 모두 들 수 있는 존재가 있긴 했다.
뭐 유저들이야 어떻게든 가질 수야 있긴 하겠지만.
애초에 둘 다 가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니.
마왕이나 대천사를 죽여야 가질 수 있는데.
지금 그런 유저가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
한마디로 지금은 전 서버에서 대천사의 무기를 가진 이는 내가 유일하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마신의 파편 역시도 마찬가지.
아, 마왕 올펠의 무기를 전신이 가져갔으니 후에 어디선가 마왕인 양 모습을 드러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장은 인간 진영 쪽에 속해 있는데 녀석이 쉽게 마왕의 무기를 들고 설칠 수 있을 리는 없을 테고.
거기다 마왕 올펠의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을 대천사나 천사들 눈에 보이기라도 하면?
그때부터는 무한 추격전이 벌어질 것이다.
전신을 잡기 위한 천사들의 추격 말이지.
성마대전에서 천사들 앞에서 마왕의 무기를 꺼내 드는 건 그야말로 죽여 달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전신은 머리가 잘 돌아가는 녀석이라 그런 실수를 하진 않겠지만.
반대로 내가 대천사의 무기를 꺼내 들고 마왕 앞에 서는 일도 미친 짓인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난 이 녀석에게 상당한 호감을 쌓은 상태에다가.
녀석은 날 마왕이라고 착각하고 있지.
그러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지게 된다.
그리고 아예 아무것도 모른 상태에서 말을 꺼낸 것도 아니었다.
마계에 봉인되어 있던 대천사 루스.
그 녀석은 분명히 대천사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부하들은 어둠의 힘을 마구잡이로 끌어 쓰고 있었다.
하얀빛의 천사 갑옷을 입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둠의 힘을 섞어 쓰던 천사병들.
부하들이 그게 가능한데 과연 그들을 데리고 있던 대천사가 그게 불가능했을까 하는 의심.
그때는 단순히 의심으로 넘겼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런 존재가 있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는 판단을 했다.
이미 하나가 있는 이상에야.
둘 이상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아.
이 정도까지 밑밥을 깔아줬으면 충분하다.
굳이 내가 입으로 관련 이야기를 꺼내들지 않더라도.
녀석에게서 관련된 정보가 나올 것이다.
마왕 헤르게니아가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확실히 타락 천사라면……!”
그래.
넌 알 줄 알았다.
그리고 바로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 타락 천사에 대한 정보를 습득했습니다. 》
《 봉인된 대천사 루스가 타락 천사로 기록됩니다. 》
《 마왕 헤르게니아가 유저 주호를 타락 천사로 인식합니다. 》
《 마왕 헤르게니아와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
《 마왕 헤르게니아와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
《 마왕 헤르게니아와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
.
.
혹여나 이게 안 통했을 경우.
처음의 특성.
마왕 고유의 특성 중에 그런 게 있다고 하고 넘어갈 생각이었다.
그 대천사의 무기는 대천사를 죽이고 얻은 무기라고 할 생각이었고.
하지만 지금은 아예 다른 방향으로 마왕 헤르게니아가 날 인식하게 되었다.
타락 천사라 이거지…….
그때의 대천사 루스 역시도 타락 천사일 테고.
거기다 그냥 천사도 아니고 무려 대천사다.
그런 녀석이 어둠 계열로 전향했다라…….
얼마나 강할지 상상도 안 되네.
그리고 그때 녀석에게 사기쳐서 대천사의 검을 빼온 걸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미친 짓도 그런 미친 짓이 없었다.
아.
그리고 보니 분명히 금속의 정령이 그때 말해 주었지.
마신에 근접한 괴물 녀석이라고.
그 말이 단순히 은유하는 말이라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정말 마신에 가까워진 녀석일지도 모르겠다.
당장 눈앞에 저 마왕 헤르게니아가 이렇게나 친근하게 붙는 걸 보면 말이지.
“헤에. 그래서 마신의 파편도 들고 있는 거구나?”
이젠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녀 혼자 알아서 다 오해를 해버리는 모습이었다.
“그럼 원래 대천사였겠네?”
“뭐. 그렇지.”
“이상하다? 내가 아는 대천사 중에는 없는 것 같은데…….”
“대천사를 네가 전부 다 아는 것도 아니지. 마왕을 전부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긴 그렇네.”
약간의 의심이 남은 듯한 마왕 헤르게니아에게 말해 주었다.
“내 목적은 너와 다르지 않다.”
“응. 이해했어.”
뭘 이해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타락 천사라는 것 자체가 일단은 어둠 계열이기도 하고.
슬쩍 넘기듯이 그녀에게 말을 꺼냈다.
“대천사. 나라면 죽일 수 있다.”
“응. 정말 그럴 것 같아.”
“그리고 천사라면 정말 귀찮을 정도로 많이 죽이게 해줄게.”
“약속했다?”
“아아.”
아마 지금의 이 말만으로도 녀석에게는 충분히 동기 부여가 될 것이다.
천사들을 정말 싫어하니까.
뭐 꼭 이 녀석이 아니더라도 마왕들 대부분이 싫어하긴 할 테지만.
봉인 당해 있던 녀석이라면 더 할 것이다.
《 마왕 헤르게니아와의 호감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
분명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는 건가.
하지만 반대로 나중에 녀석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한다면 문제가 생기겠지만.
뭐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하고.
바로 마왕 헤르게니아를 보면서 말했다.
“저기 서 있는 녀석들 보이지?”
“응? 아…… 쟤들?”
“어. 쟤들.”
그리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쓰러져 있는 애들 정리하는 동안 쟤들 반쯤 죽여 놔줘.”
바로 기사단장들과 그 측근들.
저 녀석들은 크게 피해를 보지 않아서 당장 건드리기 힘들 었다.
하지만.
마왕 헤르게니아라면 또 이야기가 다르지.
“네 먹이를 건드려도 돼?”
“어. 그래야 빨리 네 봉인 풀러 갈 거 아냐.”
“핫! 그렇다면……!”
바로 마왕 헤르게니아가 또 다른 녀석들을 옆에 소환시키기 시작했다.
동시에 마법진 다섯 개가 열리면서 그 위로 몬스터들이 소환되어 갔다.
하.
얘 대체 뭘 얼마나 가지고 있는 거야?
마왕 헤르게니아가 날 보면서 기분 좋은 듯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빨리 죽이고 가자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