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7화 헤르게니아 (14)
로메로와 7기사단의 도움을 받아 천사 석상으로 변한 기사단의 블록을 뛰어넘어 녀석들의 진영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사방에서 우리를 주시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천사 석상들에게 둘러싸여 아군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상황.
지금 이 포위망 바깥에서는 로메로가 7기사단과 함께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투쟁을 한참 벌이고 있을 것이다.
무작정 깊숙이 들어온 만큼이나.
다시 빠져나가는 일은 몇 배는 더 힘이 들겠지.
뭐 이젠 그쪽은 그쪽이 알아서 할 일이고.
이제부터 우린 여기를 처리해야 한다.
“형, 뒤를 부탁해요.”
“그래.”
재중이 형이 바로 로메로에게서 새로 얻은 기사단 창을 꺼내 들었다.
보급형 창과는 확연히 태가 다른.
창날 자체에서 뿜어내는 기운이 하얗게 빛이 났다.
“꽤 헤르마늄을 많이 섞어놨나 보네.”
재중이 형도 약간의 감탄과 함께 오러를 뿜어내자 그에 반응하면서 창이 역시 울음을 토해냈다.
키이잉!!
“마룡창보다는 못해도. 이 정도면 쓸 만하겠어.”
그리고 우리를 포위한 상태로 달려드는 제일 앞의 천사 석상의 변형된 팔을 빠르게 쳐올렸다.
카가강!
치이익!
재중이 형의 창날과 녀석의 변형된 날이 부딪히면서 하얀빛과 함께 거센 스파크를 일으켰다.
이전의 보급형 창은 부딪히자마자 바로 이가 나갔는데.
지금의 저 상급 기사단 창은 아직까지는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재중이 형의 컨트롤이라면…….
충격으로 인한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을 터.
내구를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래도 너무 오래는 못 버틴다.”
“네, 알고 있어요.”
그 말과 함께 사방에서 쇄도하는 타락 천사들의 변형된 날들을 한꺼번에 쳐내며 외쳤다.
“최대한 빨리 끝내!”
확실히 재중이 형이 커버를 해주자 따로 뒤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오직 앞만 보고 가면 돼.
그리고는 손에 든 하나의 무기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오랜만에 세상 빛을 보는 녀석이 거칠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
이건 오히려 그런 것보다는 뭔가를 발견해서 더 기뻐한다는 느낌이 더 강해 보였다.
부르르 떨리는 마검의 검신을 꽉 쥐고는 웃음 지었다.
지금 이 순간에 마검을 꺼내든 건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이상할 정도로 피에 집착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 라첼.
그런 라첼의 시선에 타락 천사 석상들이 들어오자마자 위험하다고 계속 경고한 것도 역시 이상했다.
석상들 역시 죽은 기사단이나 회복술사들에게서 피를 흡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었고.
마지막으로 피에 환장한 이 마검.
우연이라면 우연일 수도 있는 조합이랄까.
그래서 아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잠시 마검을 꺼내놓은 적이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 녀석이 그때도 지금과 같은 반응을 보였었다.
그리곤 그 모습을 보고는 확신했다.
마검이 지금의 상황을 해결할 하나의 카드가 될 거라고.
『 +0 봉인된 마검 (전설)
/ 출혈 ? 타격 ?
- ?
- ?
- ?
- ?
- ?
.
.
.
- ? 』
《 오랜 세월 피를 흡수하지 못해 상태가 약화되어 있습니다. 》
《 피를 흡수시킬수록 점차 봉인이 풀립니다. 》
마신의 파편인 테르타로스와 함께 이 녀석도 일단은 전설 등급이었다.
아직 긁지 못한 복권이기는 해도.
그래도 희망적인 건.
다른 녀석들에 비해 다소 봉인을 푸는 방법이 간단하다고 해야 하나?
테르타로스를 얻을 때를 생각해 보면 이 녀석의 습득 방식이나 봉인 해제 방법은 그야말로 선녀나 마찬가지다.
우우웅!!
아주 손이 저릴 정도로 떨어대는 녀석 때문에 하마터면 손에서 마검을 놓칠 뻔했다.
안다.
지금 이 상황이 네 녀석이 흥분할 만한 상황인 것을.
그것도 침을 질질 흘릴 만한 고급 메뉴들이 눈앞에 저렇게 즐비한데 말이야.
참을 수가 없겠지.
“어때? 마음에 드냐?”
우우웅!!
아주 좋다는 걸 온몸으로 비명을 지르는 녀석을 보고는 웃음 지었다.
이젠 확실하다.
마검이.
현재 이 개판인 상황에 대한 확실한 해결책이다.
부르르 떠는 마검을 보고는 말했다.
“최대한 빨리 먹어치워야 해. 다른 녀석들이 보면 아주 귀찮아지거든.”
블록 바깥에는 현재 7기사단이 한참 힘겨운 탈출을 하고 있지만.
만약 그중 누구라도 이 마검을 보면 귀찮아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뭐 적당히 둘러댈 수 있긴 해도.
이런 무기는 아무래도 눈에 뛴다.
이 녀석도 일단은 마신의 파편 중에 하나니까.
그것도 피를 매개로 한 상급 마신 계열의 파편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평범하다고 하긴 힘들다.
우우웅!!
의사 표현은 확실하네.
뭐 지금은 좀 변질되어 있는 것 같긴 해도.
기능 자체가 약해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럼 갈까?”
검붉은 기운을 잔득 줄기줄기 뿜어내는 마검을 들어 올리자 마검의 검신 전체가 붉게 물들면서 가운데 위치한 눈이 번쩍 떠졌다.
그동안은 가만히 구경만 하던 녀석이 이번엔 진짜 진지해졌다는 뜻이기도 하고.
일단 만찬이다 이거지?
《 봉인된 마검이 소유자의 체력을 흡수합니다. 》
《 마검을 유지하는 동안 체력이 소모됩니다. 》
《 경고! 마검이 체력을 강탈합니다. 잔여 체력 99/100% 》
《 경고! 마검이 체력을 강탈합니다. 잔여 체력 98/100% 》
.
.
전에도 생각했지만 체력이 빠져나가는 속도가 아주 기가 찬다.
체력 물약이 바로 소모되며 빠져나간 체력을 메워 주었지만.
애초에 퍼센트 단위로 체력을 갉아먹는 속도를 물약이 따라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게 필요하지 않다면 절대 마검을 꺼내 쓰지 않은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하지.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었다면.
【 대쉬! 】
빠르게 앞으로 전진해서 제일 앞에 있던 회복술사에게 달려들었다.
당연히 이 녀석들 역시도 타락 천사이기 때문에 순식간에 양손을 변형시켜 검날을 만들어내었다.
애초에 회복술사라는 개념도 녀석들이 힐을 쓸 수 있으니까 붙인 거지.
이 녀석들은 근접전이 오히려 더 강하다.
쉬이익!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빠르게 휘두르는 녀석의 공격을 스치듯이 피해내며 좀 더 앞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다른 한 손으로 내가 피한 방향을 쓸어 올리듯 휘두르자 곧장 마검을 옆으로 기울여 녀석의 검을 위로 쳐냈다.
캬가각!!
사실 마검을 제대로 꺼내서 전투에 사용해 본 건 이번이 거의 처음이라고 볼 수 있었다.
옵션만 뽑아서 사용한 적은 있긴 해도.
약화되어 있는 마검을 그다지 신용할 순 없었으니까.
거기다 체력을 갉아먹는 문제도 한몫했고.
성능은 나쁠 것 같은데 피만 많이 소모할 것 같은 느낌이려나.
하지만 그런 우려와 달리 마검의 날에는 전혀 손상이 오지 않았다.
오히려 마검의 날에 스치고 지나간 회복술사의 검날이 하얗게 타오르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일단은 네 녀석도 마신의 파편이라 이거지?
그런데 놀라운 건.
회복술사의 녹아내린 손 부분에서 붉은 기운이 줄줄 뽑혀 나와 물 흐르듯 마검에게로 흡수되는 것이 보였다.
단순히 부딪힌 것만으로도 피를 흡수할 수 있다니…….
이 정도면 완전 상극 아냐?
뒤쪽에서 다른 타락 천사들을 상대하느라 바쁜 재중이 형이 이 모습을 봤다면 꽤 놀라워했으리라.
“카하학!!”
회복술사 녀석도 자신의 손이 녹아내리면서 피가 뽑혀나가자 화들짝 놀랐는지 빠르게 뒤로 내뺐다.
동시에 자신에게 힐을 걸어대었고.
【 메가 힐! 】
덕분에 출혈은 줄어들었지만.
그만큼 핏기가 사라진 것 같은 모습은 어쩔 수 없었다.
동시에 내게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 봉인된 마검이 높은 등급의 피를 흡수했습니다. 》
《 소유자의 체력 대신 흡수한 피를 소모합니다. 》
더 놀라운 일은 그 뒤에 일어났다.
《 마검이 소유자에게 피의 고유 버프를 시전합니다. 》
응?
버프를 준다고?
그 순간 마검의 눈이 번쩍 떠지면서 마검의 검신에서부터 피가 뽑혀 나와 내게 흘러들기 시작했다.
그리곤 흘러든 피들이 내 몸을 감돌더니 이내 심장으로 몰려들었고 곧 온몸에 활기가 넘치며 마치 각성이라도 된 것처럼 감각들이 일깨워졌다.
이건 소유자를 각성 상태로 일부러 끌어올린다고 해야 하나?
아마 처음 접하는 유저라면.
감각이 널뛰기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정확한 원리는 모르겠지만…….
이건 내가 스스로 감각을 끌어올릴 때의 그 느낌과 아주 유사했다.
강제로 된다는 것만 빼면 말이지.
굳이 힘들게 노력하지 않아도 일정 이상의 집중도를 가지게 해주는 상태라는 건.
감각의 평균치를 상당히 높여주는 효과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런 상태라면.
기존의 상태보다 몇 배는 기민하게 반응할 수 있게 된다.
초보자도 바로 중급자로 만들어줄 정도로.
“적어도 피를 흡수할 수 있을 때는 주인을 죽이진 않겠다는 거네?”
우우웅!!
맞다는 듯 다시 울려대는 녀석의 반응에 웃음 지었다.
뭐 좋다.
이번에는 그 장단에 놀아줄 수밖에.
녀석이 알진 모르겠다만.
사실 내게는 그다지 필요한 기능은 아니긴 했다.
굳이 이 버프가 아니더라도 이미 감각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으니까.
그보다는 신체 능력이 전반적으로 다 올라간 점에 더 점수를 주고 싶었다.
피의 고유 버프라는 게 단순히 감각만 끌어올리는 게 아니라서.
아마 이 정도 스탯 상승은 거의 몇 십 레벨 정도는 뛰어넘는 버프가 걸려야 가능할 것이다.
“그래. 내 피만 빼고 다 먹어치워라.”
그리고는 바로 회복술사에게 다시 달라붙어서 녀석이 채 손을 뻗기도 전에 녀석의 옆구리를 베고 옆으로 빠져나갔다.
촤아악!
그와 함께 회복술사의 허리가 터져나가며 동시에 마검이 흘러나오는 그 모든 피를 쭉쭉 빨아들였다.
《 봉인된 마검이 높은 등급의 피를 대량으로 흡수했습니다. 》
이건 피해에 따라서 흡수되는 양도 달라지는 거려나?
심지어 이번엔 또 다른 시스템 메시지도 울렸다.
《 마검이 소유자에게 피의 회복을 시전합니다. 》
그러자 마검을 들고 있으면서 빠졌던 체력이 급격하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 마검이 체력을 회복시킵니다. 잔여 체력 68/100% 》
.
.
《 마검이 체력을 회복시킵니다. 잔여 체력 75/100% 》
아까 빠졌던 체력이 무색하게 지금은 도로 그만큼의 체력을 다시 채워주었다.
무려 퍼센트 단위로.
마치 내 공격이 성공하면 그만큼 보상이라도 해준다는 듯이.
그리고 이전과 달리.
이번 공격은 크리티컬로 들어갔다는 점이 달랐다.
그런 마검을 보고는 어이없다는 듯 웃어버렸다.
“이 녀석 봐라? 네가 내 공격 수준을 평가하겠다는 거냐?”
우우웅!!
그냥 평범한 공격은 체력을 돌려주지 않았지만.
크리티컬로 피해를 주면 상당한 수준의 체력을 강탈해 소유자에게 돌려주었다.
아마 옵션이 보이지 않아 확신하진 못해도.
분명히 이런 종류의 옵션이 숨겨져 있을 것 같았다.
그것도 상당히 높은 수치의.
솔직히 체력 회복 정도가 이전의 옵션들하고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효율이 좋아 보였다.
한마디로.
이 마검을 들고.
적에게 제대로 타격을 주고 잘 싸울 수만 있다면.
이 녀석은 그 무엇보다 소유자에게 확실한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조력자가 되어 줄 것이다.
반대로 제대로 써내지 못한다면.
마검에게 체력을 빼앗겨 먼저 죽어 버릴 테고.
“생각보다 재밌는 녀석이었네.”
우우웅!!
그동안 쓰지 않았던 게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로 쓰임이 확실한 녀석이었다.
그리고 지금 같으면…….
“최고의 조력자다 이거지?”
높아진 감각과 스탯 상승으로 가벼워진 몸을 날려 회복술사의 빠른 공격들을 무난하게 쳐내며 그대로 마검의 날을 녀석의 목에 박아 넣었다.
“으어어!!”
그러자 아주 신난다는 듯 마검의 검신 전체가 울리며 회복술사 석상으로부터 피를 흡수해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회복술사는 점점 그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완전히 까만 석상 상태가 되어 굳어 버렸다.
이건 타락 천사 석상을 움직이던 동력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해야 하나?
《 봉인된 마검이 높은 등급의 피를 대량으로 흡수했습니다. 》
《 마검이 소유자에게 피의 회복을 시전합니다. 》
.
.
《 마검이 체력을 회복시킵니다. 잔여 체력 100/100% 》
완전히 돌이 되어버린 천사 석상에서 마검을 뽑아들자 이내 석상이 무너지며 가루로 변해 흩어지더니 곧 죽음의 빛과 함께 사라졌다.
“자. 그럼 다음 타자?”